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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쓰는 주례사

by 찔레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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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뜨거운 육체의 시간이 지나면, 콩깍지가 벗겨지며 상대의 단점이 보이기 시작할 겁니다. 그때부터가 진짜 결혼 생활이 시작되는 겁니다.”


지난 겨울 한 지인의 자녀 결혼식에 갔는데, 주례하는 분이 따로 없고 양가의 혼주가 나와 덕담하는 것으로 주례사를 대신했다. 지인은 상처 후 자녀를 여의는 것이라 그런지 감개무량해 자녀의 어릴 적 이야기로 주례사를 시작했는데, 이상하게 그 이후는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이 희미했다. 피로연에서 같이 참석했던 지인에게 그 얘기를 했더니 자신도 그렇다고 공감을 표했다.


비단 지인의 축사뿐만 아니라 그간 들어본 결혼 축사 중 기억에 남는 축사가 없다. 심지어 내 결혼 축사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물에 물탄 듯 술에 술탄 듯 뻔한 축사였기에 그럴 것이다.


이후 막연히 ‘만약 내가 주례를 담당한다면 무슨 말을 해줄까? ’하는 생각을 했는데, 어제 오늘 문득 이런 말을 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미래의 주례사를 한 번 써 본다. (하지만 내게 결혼 축사의 기회는 올 것 같지 않다. 특별한 인연을 이어간 제자들이나 지인이 없으니 말이다. 하하.)


“단점이 보이기 시작할 때, 그 단점이 상대가 안 하는 것인지 못하는 것인지를 잘 판별해 보세요. 아마도 그 단점은 그가 안 하는 것이기보다는 못하는 것일 가능성이 훨씬 클 겁니다. 자신은 쉽게 해내는 것이 상대에게는 어려운 경우가 있기 마련이죠. 그럴 때는 그것을 과감히 인정하고 받아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불화가 생깁니다. 못하는 것을 자꾸 하라고 하니 불화가 생기는 것은 당연하지요. 상대의 단점이 못하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리면 과감히 인정하고 받아줘야 원만한 결혼 생활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살다 보면 상대에게 실망할 경우가 있을 겁니다. 애초 자신이 기대했던 모습과 다른 면모를 보일 때 실망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죠. 어떻게 대처하는 게 좋을까요? 존댓말을 사용하는 겁니다. 실망하면 낮춤말을 하기 쉽고, 그것은 불화를 일으키는 십상입니다. 싸움은 대개 반말로 하지 존댓말로는 하지 않잖아요? 존댓말을 사용하면 상대를 무시하는 생각이 들더라도 그것을 줄일 수 있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말씀드리고 싶은 건 상대에게 저축을 하라는 것입니다. 노후를 위해 미리 연금을 준비하듯 상대의 마음에 자신에 대한 신뢰를 쌓아두라는 것입니다. 요즘 황혼이혼이 대세인 것은 평소 상대에게 신뢰라는 저축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노후를 대비해 젊을 때부터 재물을 모아놓는 저축은 하면서, 상대의 마음에 신뢰라는 저축을 하지 않는 것은 어찌 보면 본말이 전도된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자,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상대의 단점을 바꾸려고 애쓰지 말고 그대로 수용하라. 둘째, 존댓말을 사용하라. 셋째, 상대의 마음에 신뢰라는 저축을 쌓아라.


새롭게 출발하는 두 분의 앞길에 축복이 가득하길 빕니다. 감사합니다.”


발령 전 초임 연수를 충무교육원에서 받을 때 들었던 내용 중 유독 지금까지 기억에 남는 말이 있다. “수업 시간을 지키세요. 하루에 한 가지씩 새로운 것을 배우세요. 졸리면 자고 한 번 깨면 다시 자지 말고 공부하세요.” 좋다고 생각했지만 제대로 실천하지는 못했다. 그건 아마도 내 게으름 탓이 크겠지만 혈기왕성하고 잠 많은 젊은 교사가 실천하기에는 생리적으로 맞지 않는 교훈 탓이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게다가 과연 그런 교훈을 말하는 당사자는 그것을 성실히 실행했는지도 의문스럽고.


교훈과 생리 그리고 말하는 당사자의 실천 여부라는 관점에서 보면 어떤 결혼 축사도 신혼부부에게는 골동품과 같은 것이 아닐까 싶다. 일상의 식기(食器)처럼 실감 나게 와닿지도 않고, 간수하기도 쉽지 않을 것 같기 때문. 하지만 집 안에 골동품 한 점 있으면 집안의 분위기가 남달라 보이듯, 간직하기 쉽지 않고 실감 나게 와닿지 않는 교훈이라도 마음속에 담아두려 애쓰면 그 나름의 의미는 있을 것 같다. 마치 제대로 실천은 못했지만 그래도 교직 생활의 좌표 노릇을 했던 연수원에서의 저 말처럼 말이다. 문제는 골동품도 가짜가 있고 진짜가 있다는 거지만, 아무렴 주례하는 이가 가짜 골동품이야 주겠는가.


그런데, 이렇게 보면 나의 특별한(?) 주례사도 내가 투덜 댔던 무덤덤한 주례사와 다를 바 없는 셈이다. 어허, 이 무슨 아이러니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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