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날 지었던 문(文) 수백 편을 다 불사르고 『논어』와 『맹자』 한자(韓子, 한유) 및 기타 성현의 글을 취하여 바른 마음으로 단정히 앉아 종일토록 그것을 읽은 것이 7, 8년이 되었습니다 … 시간이 좀 더 지남에 흉중의 말들이 날로 더욱 많아져 도저히 자제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여 때로 시험 삼아 흉중의 말을 내어 글로 써본 뒤 시간을 두고 그것을 재삼 읽어보니 막힘없이 유창하게 써내는 것이 어렵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소순의 「상구양내한서(上歐陽內翰書)」일부분. 「상구양내한서」는 당시 문단의 영수였던 구양수에게 올렸던 편지로, 구양수의 문장에 대한 상찬과 함께 자신의 문장 수련 이력을 피력하면서 발탁을 청원했던 글이다. 인용문은 소순 자신의 문장 수련 이력을 언급한 대목이다. 과거에 지었던 문장과의 결연한 이별 그리고 독서 이후 변화한 자신의 문장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흉중의 말들이 날로 더욱 많아져 도저히 자제할 수가 없”어 “시험 삼아 흉중의 말을 내어 글로 써”보니 “막힘없이 유창하게 써내는 것이 어렵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은 그 자신의 수련 효과를 말하는 것과 동시에 자신의 문장에 대한 강한 자부심을 표현했다고 할 것이다. 소순과 소식 소철 세 부자는 구양수의 지우(知遇)를 입어 출사 했다.
매일 잡문을 끄적거린다. 재미삼아 하는 심심파적이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재미가 시들하다. 심삼파적도 업그레이드를 해야 하나, 란 생각이 든다. 근본 원인은 글쓰기 기술의 부족보다는 생각의 연원이 짧기 때문이란 생각이 든다. 길가 패인 웅덩이에 고인 물 같다고나 할까? 어쩌면 소순도 지난날 자신의 문장에 불만을 가졌던 것은 그 자신 내면에 고인 생각의 연원이 얕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을런지도 모르겠다. 이후 자신의 문장에 자부심을 갖게 된 것은 그와 반대 상황이 되었기 때문은 아닐런지? 그렇다면 내게도 소순 비스무레한 독서 체험이 있어야 생각의 연원이 깊어지고 글쓰기 재미도 업그레이드될 거라는 것인데….
어제 유시민 씨의 글쓰기 관련 책을 읽던 중, 그가 추천한 책 세 권이 인상 깊었다.『코스모스』,『토지』,『자유론 』. 유시민 씨는 글쓰기 요령을 읽히기 전에 마음에 풍부한 소양을 쌓는 것이 중요하다며 우선적으로 위 세 책을 권했다. 그 이유를 뭐라고 설명했는데 잘 옮겨지지가 않는다. 허허. 그런데 그가 든 세 책은 왠지 ‘천 · 지 · 인’을 바라보는 관점을 대변한 책 같다는 생각이 든다. 『코스모스』는 우주에 관한 책이니 ‘천’을,『토지』는 땅과 역사에 깃든 삶을 그린 것이니 ‘지’를,『자유론』은 인간의 자유에 대해 논한 것이니 ‘인’을 바라보는 관점을 대변한다고 보이는 것이다.
천 · 지 · 인에 대한 관점이 확고히 서면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흔들리지 않고 다른 사상(事象)에 대해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을 것 같다. 여기 사상(事象)에는 글쓰기도 포함될 터. 중요한 것은 한두 번 읽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반복 숙독하는 것 같다. 소순이 7, 8년 독서를 했다고 했는데, 이 말속에는 같은 책을 되풀이 읽으며 깊이 음미했다는 의미가 내포돼 있다고 봐야 한다. 위 세 책을 권한 유시민 씨도 반복 숙독을 권하고 있다(자신도 그렇게 했다며). 소순처럼 7, 8년을 할 수는 없고 최소한 1년 만이라도 위 세 책을 반복 숙독해 볼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재밌는 것은 위 세 책을 내가 과거에 사놓았다는 사실이다. 필시 그럴듯한 광고에 현혹되어 사놓았을 것이다. 그리고는 한 두 페이지 읽다 처박아 놓았을 것이다. 어쩌면 소순도 새로운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던 책들을 과거에 이미 읽지 않았을까?『논어』와 『맹자』등은 사대부의 필수 교과가 아니던가. 그러나 그것을 읽을 때 뭔가 절실한 마음이 있어 읽었다기보다는 으레 익혀야 하는 교과이니 의무적으로 읽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 후 심경의 변화를 겪고 그 책들을 다시 읽으며 전과 달리 무언가를 얻게 된 것일 게다. 나도 저 세 책을 새로운 마음으로 반복 숙독하면 전과는 다른 무언가를 얻게 되어 소순처럼 “흉중의 말들이 날로 더욱 많아져 도저히 자제할 수가 없”어 “시험 삼아 흉중의 말을 내어 글로 써”보니 “막힘없이 유창하게 써내는 것이 어렵지 않겠다는 생각이” 드는 체험을 할 수 있을까? 그랬으면 좋겠다. 만약 그리 된다면 남은 생이 한결 더 재미있고 의미 있을 것 같다.
오늘, 새로운 출발의 다짐 겸 기념으로 세 책의 증명사진을 찍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