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이면서 하나

지재고산유수(志在高山流水)

by 찔레꽃

Apr 18. 2020

지재고산유수(志在高山流水). 신석정 글씨.

…

한 시인이 있어

<딱터 李>의 肖像畵로 밑씻개를 하라 외쳤다 하여

그렇게 자랑일 순 없다.

어찌 그 치사한 휴지가 우리들의 성한

육체에까지 범하는 것을 참고 견디겠느냐!

…

『주역』은 음양의 대대(待對) 논리를 바탕으로 한 철학서이다. 대대란 직역하면 상대를 기다려 대한다란 뜻인데, 의역하면 상대가 있을 때 당사자가 온전한 가치를 지닐 수 있다는 의미이다. 음은 양이, 양은 음이 있을 때 온전한 가치를 지닐 수 있다고 보는 것이 『주역』의 정신인 것이다. 흔히 극과 극은 통한다는 말을 하는데, 얼핏 들으면 이해하기 힘든 말이지만, 주역의 대대 논리를 갖다 대면 쉽게 이해될 수 있는 말이다. 한 극은 또 다른 극과 함께 있을 때 그 의미가 온전히 드러나기에 둘은 통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달리 표현한다면, 극과 극은 둘이면서 하나라고나 할까?

인용 시는 흔히 한국 현대시사에서 목가시인 혹은 전원시인으로 불리는 신석정 선생의 「쥐구멍에 햇볕을 보내는 민주주의의 노래」의 한 부분이다. ‘4.19 혁명’ 즈음하여 지은 시로 보인다. 이승만의 초상화로 밑씻개를 하는 것조차 참을 수 없다는 추상같은 일갈은 이 분이 과연 목가시인 혹은 전원시인이 맞나 싶을 정도의 강한 어조이다. 그러나 앞에서 말했듯이, 주역의 대대 논리를 빈다면, 목가시인(전원시인)이었기에 이런 추상같은 어조의 시를 지을 수 있었다고도 볼 수 있다. 순수했기에 불의를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사진은 ‘지재고산유수(志在高山流水)’라고 읽는다. ‘뜻이 높은 산과 흐르는 물에 있다’란 뜻이다. 신석정 선생이 즐겨 썼던 문구로, 그의 정신적 지향점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이 문구엔 위에서 언급한 선생의 양면성이 담겨 있다. 목가(전원) 지향적이면서도 지사적인 견결함을 함께 보지(保持)한 문구이기 때문. 왜 선생이 저같이 추상같은 시를 지을 수 있었는지를 잘 설명해주는 문구라고 볼 수 있다. 사진은 전북 부안의 ‘석정문학관’에서 찍었는데, 선생은 의외로 현실 참여적인 시를 많이 지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우리에게 알려진 목가(전원) 시인이란 인식은 선생의 면모를 왜곡되게 전달한 문학사가 들의 잘못이 크지 않나 싶다.

志와 流 두 자만 자세히 살펴보자.

志는 之(갈 지)와 心(마음 심)의 합자이다. 마음이 가는 바, 곧 뜻이란 의미이다. 뜻 지. 志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意志(의지), 志士(지사) 등을 들 수 있겠다.

流는 氵(물 수)와 旒(깃발 류) 약자의 합자이다. 깃발이 펄럭이듯 물이 흘러간다는 의미이다. 흐를 류. 流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流行(유행), 流言蜚語(유언비어) 등을 들 수 있겠다.

여담. 오래전 800원을 주고 산 신석정 선생이 번역한 문고판 『당시 선집』이 있다. 선생은 어렸을 적에 할아버지에게 당시를 배웠는데, 한시에 대한 소양이 있어서 그런지 번역이 상당히 유려하다. 이런 유려한 번역은 앞으로는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선생처럼 한시 혹은 한학에 대한 소양과 현대시작 능력을 겸비해야 그런 번역이 가능한데, 지금은 현대시작 능력을 기를 수 있는 환경은 가능하지만 한시 혹은 한학에 대한 소양을 키우기는 거의 불가능한 환경이기 때문. 아쉬운 일이다. 선생의 번역시 한 편을 읽어보자. 가도(賈島, 779~843)의 「삼월회일증유평사(三月晦日贈劉平事, 3월 그믐날 유평사에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