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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무야, 언제나 푸른

김굉필(金宏弼)의 「노방송(路傍松)」

by 찔레꽃
pimg_7232191432193432.png 김굉필(金宏弼, 1454-1504)의 「노방송(路傍松, 길가의 소나무).


“‘이 도’라는 것이 무슨 도이겠는가? 이것이 내가 말하는 도이며, 앞서 말한 바의 도가나 불가의 도는 아니다. 요는 이를 순에게 전하였고, 순은 이를 우에게 전하였으며, 우는 이를 탕에게 전하였고, 탕은 이를 문왕과 무왕, 주공에게 전하였으며, 문왕과 무왕, 주공은 공자에게 전하였고, 공자는 맹가에게 전하였다. 그런데 맹가가 죽자 이것이 전해지지 않게 된 것이며, 순자와 양웅은 잘 선택하기는 하였으나 정밀하지 못하였고, 말을 하였으나 상세하지 못하였다.”(임동석 역주, 『고문진보』(동서문화사: 2017), 1484쪽)


한유의 「원도(原道, 도의 근원을 탐색함)」 후반부로, 성리학 도통 의식의 선하(先河)를 이루는 내용이자 한유의 도(道) 담지(擔持) 의식을 강하게 보여주는 대목이다. 불교가 극성을 이루었던 당대(唐代) 유가의 위기의식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송 대에 만개한 성리학, 이른바 신유학은 이런 한유와 그 일군의 사대부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비록 송 대의 성리학자들은 한유와 그 일군의 사대부들을 순정(醇正)하지 못한 유학자라고 폄하하지만 말이다.


고려 말에 수입된 성리학은 조선 중기에 들어와 이른바 사단칠정의 심성 이기론으로 찬연한 꽃을 피운다. 이 꽃을 피우는 과정에서 조선에서도 조선 성리학의 도통 계보가 마련된다. 김숙자 – 김종직 – 김굉필 – 조광조 – 이언적 – 이황 등으로 이어지는 도통 계보가 바로 그것으로, 이 도통 계보는 불교를 대체한 새로운 통치 이데올로기로 받아들였던 성리학의 심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사진은 조선 성리학 도통 계보의 초장을 장식했던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1454-1504)의 「노방송(路傍松, 길가의 소나무)」이란 시이다.


一老蒼髥任路塵 일로창염임로진 먼지 이는 길가 푸른 노송 하나 서있어

勞勞迎送往來賓 노로영송왕래빈 오가는 길손들 분주히 맞고 보내네

歲寒與汝同心事 세한여여동심사 그대 같은 세한의 굳은 마음 가진 이

經過人中見幾人 경과인중견기인 길손 중에 몇이나 보았는가


김굉필은 조선 성리학의 도통 계보 초장을 장식하는 인물이지만 관념에 치우치지 않고 실천궁행을 강조했다. 자신을 ‘소학(小學) 동자’라 자칭하며 제자들에게 『소학』을 강조했는데,『소학』은 사서(四書)나 육경(六經)과 달리 철저히 실천윤리를 강조한 책이다. 김굉필은 이 『소학』을 사서와 육경으로 들어가는 관문으로 파악했다.


이 시는 이런 김굉필의 학문적 자세 일단을 보여주는 시로, 지조를 지키고자 하는 실천의지와 노력을 길가의 소나무를 통해 표현했다. ‘먼지 이는 길가’나 ‘오가는 길손’은 세상 풍파와 지조 없는 이들을 상징하는 말이고, ‘분주히 맞고 보내는’ 것이나 ‘푸른 노송’은 이런 풍파와 사람들을 대하는 힘든 모습과 그런 가운데서도 지조를 잃지 않고 유지하는 실천력을 보여주는 말이다. 셋째 구와 넷째 구의 물음 형식을 취한 내용은 그런 실천력을 보인 자신에 대한 자부심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사진은 달성의 김굉필을 배향한 도동서원(道東書院) 가는 길에 있는 다람재란 곳에 있는 시비를 찍은 것이다.


낯선 한자를 몇 자 자세히 살펴보자.


蒼은 艹(풀 초)와 倉(곳집 창)의 합자이다. 풀빛과 같이 푸른색이란 뜻이다. 艹로 뜻을 표현했다. 倉은 음을 담당한다. 푸를 창. 蒼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蒼空(창공), 蒼蒼(창창) 등을 들 수 있겠다.


髥은 鬚(수염 수)의 약자와 冉(나아갈 염)의 합자이다. 구렛나루란 뜻이다. 鬚의 약자로 뜻을 표현했다. 冉은 음을 담당한다. 구렛나루 염. 髥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髥主簿(염주부, 양의 별칭), 美髥(미염, 멋있게 난 구렛나루) 등을 들 수 있겠다.


塵은 鹿(사슴 록)과 土(흙 토)의 합자이다. 사슴들이 떼를 지어 달려가면서 일으킨 흙먼지란 뜻이다. 티끌 진. 塵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塵土(진토), 塵埃(진애, 티끌과 먼지. 세상의 속된 것) 등을 들 수 있겠다.


幾는 幽(그윽할 유)의 약자와 戍(지킬 수) 약자의 합자이다. 무기를 갖고 으슥하고 위태로운 곳을 지킨다는 뜻이다. 살필(위태로울) 기. 얼마(몇)란 뜻으로도 사용하는데, 본뜻에서 연역된 뜻이다. 으슥하고 위태로운 곳은 다수가 아니라 소수라는 의미로 사용한 것. 얼마(몇) 기. 幾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幾察(기찰, 譏察과 통용. 행동을 넌지시 살핌) 幾月(기월, 몇 달) 등을 들 수 있겠다.


여담. 자연철학으로 출발한 서양철학과 정치철학으로 출발한 동양철학은 사물을 다르게 인식한다. 서양 철학자에게 소나무는 그저 나무의 한 종류지만 동양 철학자에게 소나무는 인간의 윤리 의식을 대변하는 나무 이상의 존재이다. 이런 사물에 대한 인식 차이는 산림의 조성에도 큰 영향을 준 듯싶다. 우리 주변에 유실수나 경제적인 수종(樹種)보다 소나무가 유독 많은 것은 이런 영향 탓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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