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애, 시는 그렇게 짓는 게 아니다.”
첫눈이 내리던 날, 왠지 가슴이 뭉클하여 아버지께 한시 한 수를 지어 보냈다. 당시 아버지는 외지에서 홀로 기숙하고 계셨다. 80이 가까운 노구셨는데 ‘사람은 늙도록 활동해야 한다’란 지론 때문에 월급쟁이 한의사 생활을 하고 계셨다. 평소 자식들과 별로 말을 나누지 않는 무뚝뚝한 분이셨기에 편지를 보내기가 좀 멋쩍었지만 그래도 용기를 내서 보냈다. 첫눈이 용기를 준 것 같다.
그런데 주말에 집에 오셔서 내게 해주신 아버지의 답은 형식을 지키지 않은 시에 대한 타박뿐이었다. 미숙한 솜씨로나마 시를 지어 보냈으니 그래도 칭찬 한 마디쯤은 해주실 줄 알았는데….
사진은 다산 정약용(1762-1836)의 편지로 추정되는 글이다. 추정되는 이유는, 비록 '다산(茶山)'이란 낙관이 있긴 하지만, 아직 확실한 감정 결과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국고전번역원에서 일반인을 대상으로 고문서 번역 서비스를 해주는데, 문의가 들어오는 문서 중에 생각지 않은 유명인의 작품도 꽤 있다고 한다. 이 작품도 그중의 하나이다. (관련기사 및 사진 출처: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70510024008&wlog_tag3=naver)
다산의 편지로 짐작되는 이 글은 어떤 내용을 담고 있을까?
見汝書又得汝師手筆 具知春來無恙 欣慰難量 吾病一樣亦不具(견여서우득여사수필 구지춘래무양 흔위난량 오병일양역불구)
너의 편지를 보고 또 네 스승의 글을 받아 보니/ 이 봄날에 모두 별고 없다는 것을 알겠다/ 기쁘고 위로하는 마음 헤아리기 어렵다/ 내 병은 늘 그렇다. 역시 갖추지 못한다. (번역: 위 관련 기사 및 사진 출처에서 인용)
다산은 유배지에서 자식들에게 많은 편지를 보냈다. 귀양 가있는 처지이기에 자식들과 소통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수단이 편지였으니 많은 편지를 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런 다산의 편지들을 모아 박석무 선생은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란 제목으로 책을 펴낸 적이 있다. 오래전에 읽어 그 내용이 세세하게 기억나진 않는다. 대체로 자식들에게 공부를 게을리하지 말라는 내용과 독서하는 방법 및 글 쓰는 방법 등을 안내하는 내용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다산이 자식들에게 각별한 당부를 했던 이유는 자신의 집안을 폐족으로 생각했고, 폐족의 처지에서 자식들이 공부를 안 하고 몸가짐을 바로 하지 않으면 집안을 일으킬 기회를 영원히 상실할 거란 위기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진의 편지는 안부를 확인하는 단순한 내용이지만 왠지 행간에서 자신의 위기감을 불식시켜준 자식에게 고마워하는 다산의 마음이 느껴진다. 견강부회한 느낌일까?
아버지께 보냈던 어설픈 시에 아버지께서 격려를 곁들인 편지를 보내주셨거나 말을 해주셨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아무래도 아버지께서는 내게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으셨던 것 같다. 하긴, 대학 4년 동안 한문을 배웠다는 애가 한시 하나 형식을 지키지 못하고 지었으니 무슨 기대를 하실 수 있었을까. 그래도 아쉬운 마음이 드는 건 왜일까?
낯선 한자를 몇 자 자세히 살펴보자.
汝는 氵(물 수)와 女(여자 녀)의 합자이다. 하남성 노씨현에서 발원하여 회수로 들어가는 물 이름이다. 氵로 뜻을 표현했다. 女는 음을 담당한다. 물 이름 녀. 지금은 물 이름보다 '너'라는 2인칭 대명사로 주로 사용한다. 동음을 빌미로 뜻을 차용해 쓴 것이다. 너 여. 汝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汝等(여등, 너희들), 吾與汝(오여여, 나와 너) 등을 들 수 있겠다.
恙은 心(마음 심)과 羊(痒의 약자, 병 양)의 합자이다. 근심이 있다란 뜻이다. 心으로 뜻을 표현했다. 羊은 음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한다. 병이 있으면 근심스럽다란 의미로 본뜻을 보충한다. 근심 양. 恙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無恙(무양, 근심이 없음), 恙病(양병, 병) 등을 들 수 있겠다.
欣은 欠(하품 흠)과 斤(도끼 근)의 합자이다. 웃으며 좋아한다란 의미이다. 웃으며 좋아하면 입을 벌리고 소리를 내기에 欠으로 의미를 표현했다. 斤은 음(근→흔)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한다. 도끼질을 할 때는 계속 소리를 내는데 웃으며 좋아할 때도 그같이 계속 소리를 낸다는 의미로 본뜻을 보충한다. 기뻐할 흔. 欣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欣欣(흔흔, 기뻐하는 모습), 欣快(흔쾌) 등을 들 수 있겠다.
慰는 心(마음 심)과 尉(熨의 약자, 다리미 위)의 합자이다. 마음이 편안하다란 뜻이다. 心으로 뜻을 표현했다. 尉는 음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한다. 다림질로 옷 주름을 펴듯 마음의 주름을 펴 마음이 편안하다란 뜻으로 본뜻을 보충한다. 위로할 위. 慰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慰安(위안), 慰問(위문) 등을 들 수 있겠다.
難은 隹(새 추)와 暵(말릴 한)의 약자가 합쳐진 것이다. 전설의 새인 '난새(일명 금시조)'란 뜻이다. 隹로 뜻을 표현했다. 暵의 약자는 음(한→난)을 담당한다. 난새 난. 지금은 난새보다 '어렵다'란 뜻으로 더 많이 사용한다. 전설상의 새이다 보니 보기가 쉽지 않아, '어렵다'란 뜻으로 사용하게 됐다. 어려울 난. 難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困難(곤란), 難易度(난이도) 등을 들 수 있겠다.
量은 重(무거울 중)의 약자와 曏(접때 향)의 약자가 합쳐진 것이다. 경중을 헤아린다는 의미이다. 重으로 의미를 표현했다. 曏의 약자[日]는 음(향→량)만 당당한다. 헤아릴 량. 量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測量(측량), 數量(수량) 등을 들 수 있겠다.
樣은 木(나무 목)과 羕(강이 길 양)의 합자이다. 상수리 열매란 뜻이다. 木으로 뜻을 표현했다. 羕은 음(양→상)을 담당한다. 상수리나무 상. 지금은 '모양'이란 뜻으로 주로 사용하는데, 본뜻에서 연역된 것이다. 상수리 열매의 모양이란 뜻으로 사용된 것. 이 때는 음도 달리해 사용한다. 모양 양. 樣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模樣(모양), 樣態(양태) 등을 들 수 있겠다.
초로의 늙은이가 돌아가신 지 근 30년이 되신 아버지를 원망하는(?) 말을 했는데 생각해보니 나도 자식들에게 아버지와 똑같은 행동을 한 것 같다. 아이들에게 따뜻한 격려의 편지를 보내거나 말을 해본 기억이 별로 없다. 이것 참, 부전자전은 이런 때를 위해서 만들어 낸 말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