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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영서 Nov 04. 2021

개량한복과 전투력의 상관관계

지름의 열 두 방향 4.

20210610.



사시사철 개량 한복을 즐겨 입던 선생님들은 왜인지 모르겠으나 주로 한문, 윤리, 문학, 사회탐구 영역의 남자 선생님들이다.

그들은 복도를 걷기만 해도 남달랐으며 실제 폭력을 휘두르는 종류의 선생이 아님에도 범접하기 어려운 무언가가 항시 도사리고 있었다.

그래 기(氣)다.

그것이 바로 기(氣). 댓츠 디 에네르기.


간혹 언어영역이나 문학 교과의 여자 선생님이 개량한복을 즐겨 입으실 때의 파괴력은 또 남달랐다.

본인의 결혼식에 스스로 지으신 개량한복 치마저고리를 입으셨던 한 선생님은 그 옷을 입고 수업에 임하셨다. 지금도 잊히지 않는 성교육을 십 대의 심장에 화인처럼 지져 주셨으며 그중 태반은 더 크고 나서 이해했다. 


개량한복과 언어, 사회탐구 영역이 어우러져 내뿜는 시너지는 인문학 그 학문의 자체는 '돈이 안 되는' 학문이라며 도외시해도 인문학스러움이 묻은 모든 것은 눈먼 돈 날아가듯 매상이 올라가고 가격을 네고하는 것이 천박한 행위인 양 넙죽넙죽 지갑을 여는 2021년을 내다본 자들이 미리 설계해둔 섬세한 안배인가.

마치 필립 K. 딕의 소설처럼


실은 선생님들의 그 개량한복 행색이 싫지 않았다.

넉넉하게 흘러내린 바지의 품. 짧게 축소된 각반과 앙징맞은 단추. 바로 그 단추.

얇은 끈을 꼬아 동글게 만든 단추와 그 딴딴한 단추 대가리가 빠듯하게 통과하는 고리는 그저 옷을 꿰어 입기 위해 단추를 채우는 행위가 아니라 좀 더, 맺어짐 보다는 엮임, 어우러짐이라는 단어가 더 어울리는 어떤 그런 끈끈함이 있는 좀 더, 동글한 대가리가 달랑달랑 가느다란 모가지 끈에 매달려 근근이 연명하고 있는데 그 포도청 목구멍을 휙 잡아채어 올가미로 모가지를 팽팽히 당기는 것 같은 숨 막힘 같은 컥컥 좀 더


앞섶을 여미어 몸을 감싸주어 포근이 덮어 주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툭툭 불거진 손마디 쐐기처럼 맞물려, 두 사람의 손목을 붉은 밧줄로 묶지 않아도 파도에 휩쓸려 떨어지지 않아 걸작을 잉태할 동반자살에 아니 그만 성공해버리고 말아 의도된 결말이 비틀려버리는 시작이 바로 그 단추인 것 같은 그런 좀 더


그러나 섬섬옥수가 아닌 마디가 불거진 손의 주인에게는 걸작을 남기며 같이 죽자는 유혹이 통하지 않을 것이며 애초에 그러한 유혹을 받을 대상이 되지도 않을 테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실은, 여고생은 다자이 오사무를 읽으면 안 된다.


마치  나 자신이 그분들의 문학적 뮤즈가 된 상상을 하며 그분들의 개량한복 행색을 겉으로는 혐오하며 남몰래 속으로는 흠모했다.

그리고 다자이 오사무가 정말 미남인 줄 알고 그의 연인을 꿈꾸던 등신 같은 시절이 있었다.


바로 그런 매듭단추가 달린 옷을 나도 입고 싶었다.

그리고 이제 와서 입어보았다.

바로 이 말입니다.


지름의 열 두 방향.

4. 개량한복과 전투력의 상관관계


굿윌스토어라는 리사이클 스토어에서 중고 새재품 개량한복 세트를 샀다. 6,500원

소 사이즈라 할머니들이 안 사고 남아있었나 보다.

 

넓은 고무줄과 넉넉한 밑위. 갑자기 명치까지 쑥 올라오는 바지 밑단, 저기 우리 조금 빠른 것 아닌가요. 조금 있으면  턱끝까지 올라오시겠어요.

법복이라 부르는 절 바지를 입은 듯한 편안함과 어떤 관절도 속박당하지 않는 이 자유로움

동일한 천으로 제작된 조끼는 가슴. 배 옆구리를 넉넉히 감싸주었다. 속옷을 입든 안 입든 상관이 없었다. 가슴의 유무에 관심조차 없을 듯한 두툼한 천이다.

조끼에 달린 넉넉한 사이즈의 두 호주머니는 갖은 물건을 모두 수납하기에 적절하여 이에 두 손은 마냥 해방되었다. 가방을 챙기지 않아도 내 몸 가까이 필수 물건이 들어 있으니 든든했다. 가방을 챙기지 않아도 되는 심리적인 압박에서 탈출하니 이는 흡사 근두운을 탄 것인가. 이래서 아저씨들이 가방은 안들어도 주머니가 주렁주렁 달린 등산조끼를 입으시는 것인가.

 

튼튼한 천이 몸을 보호해준다. 야외에서 타의로 뛰어놀 일이 많은데 이제 몸 어딘가에 긁힌 상처가 남지 않는다.

그리고 실제 개량한복을 입으면 신체보호 강화와 함께 전투력이 상승함을 느꼈다.

고관절이 자유로우며 자유로운 단전에 기가 모여 그 내공이 나를 감싸서가 아니다.

사람들이 나를 건드리지 않을 것 같았다.

무서워서 건드리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관심의 대상이 되지 않 것 같았다. 오히려 저런 애랑 엮이면 피곤할 것 같으니 눈앞에 있어도 사각으로 밀려나 관심에서 배제받는 듯도 했다. 타인의 시선에서 역으로 벗어나는 것 같았다.


아니 왜 지하철에서 정말 괴상한 행색의 사람을 보면 애써 모른 척하지 않는가. 만만해 보여야 빤히 쳐다보는 법이라 오히려 한껏 꾸민 젊은 여성을 빤히 쳐다보면서도 무례한 줄 모르는 것이다. 위협적이거나 해로워 보이지 않으니까. 모가지가 부엉이처럼 돌아가듯 무례한 시선에 거침이 없으니까(재수의  연습장 @jessoosketch)


렇다면 개량한복을 입은 나는 해로워 보이는 사람이 된 것인가. 흠모하던 그 선생님들의 아우라는 해로움이었을까?


인문학의 화신 같아 보이는 개량한복 행색만으로는 이제 21세기 사람들의 경계심을 풀 수는 없나 보다. 인문학을 고명처럼 곁들인 자기 계발 코스일 뿐이에요. 이 인문학은 해롭지 않습니다. 가벼운 터치이지만 당신의 자아 쇼핑 리스트는 더욱 있어 보이고 깨우쳐 보이고 잘나 보일 거예요.

런 어필을 하기에는 이제 개량한복은 부족한가 보다.


하지만 지성을 어필하기 위해 반지성을 선택하는 전략은 아직도 유효하듯 편안하고 튼튼한 개량한복 한 벌 쯤은 장만하여 보자.  자연인세포 하나쯤은 다들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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