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영서 Oct 07. 2021

실연도 병이라면, 병든 독서 세 번째

아주 오래된 농담

스무 해 전에 나는 스무 살이었다.

공부를 제외한 나머지 무궁무진한 여집합에 매진하는 것이야말로 대학생의 본분이라 벼르고 벼르다 드디어 대학생이 되었다. 소심하지 않고 사소한 일에 예민하게 구는 사람이고 싶지 않았고 그 간절한 바람을 지금 이 순간부터 이루리라 결심했다. 실전 연애는 안 해봤지만 괜찮아 나에겐 로이와 레이첼이 있으니까. 난 이제 맨해튼의 연애를 할 준비가 된 것 같은데. 자 여러분들 어서 빨리 나를 좋아해라.


저절로 남자가 굴러 들어올 리가 없으니 열심히 발발거리고 돌아다녔다. 그러다 선배 언니들 따라간 학회 동아리에서 몇 번 같이 어울리던 사람들 중 우람하고 지적으로 잘생긴 남자애 하나가 갑자기 넌 내 마음을 가지고 놀았다며 오전까지 그렇게 살갑다가 오후에는 악의를 보였다. 맡겨 놓았는가. 네가 날 좋아하는지 내가 어떻게 알 수 있나.

그래도 그 남자애가 다른 과 여자애한테 꽃다발을 들고 강의실 안까지 들어가 고백을 했다는(그리고 차였다) 말을 들기 전까지 슬슬 피해 다닐 정도로 그 애가 무서웠다. 내가 분명 뭐라도 잘못한 부분 있을 거라 없는 죄를 뉘우쳐 보기도 했 같다. 방금까지 젠틀하던 애가 갑자기 저 혼자 씩씩거리며 적대적으로 돌변하는 것이 충격적이었지만 연애를 시작함이나 호감을 느낀 이성을 대함에 있어 그런 태도를 가진 남자가 매번 충격씩이나 받아야 할 정도로 드물지 않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작은 캠퍼스 안 선택권이 몇 되지 않던 동아리 중에서 한 살 연상의 만화 주인공 같은 미남 A에게 반하기 전에 일어난 일일 뿐이니 곧 잊었다. 세상에 저렇게 청초하고 다른 남자들과는 달라 보이는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 빛이 나는 것 같았다. 눈웃음에 심장이 녹는 것 같았다. 내가 만난 남자의 정의를 부수는 사람이었다

그 무엇보다 A는 독서 모임을 했는데 나중에 그게 그 사람의 수법이었을까 생각해본 적이 있다. 언제든 발 뺄 수 있는 이유를 깔아 두는 거지. 여하튼 그 A오빠는 나(나대는 통에 이미 동아리 1학년 대표)와 동기 B를 챙겨준답시고 같이 책을 읽고 C대학교 앞에서 모이자고 했다. 우리 셋만.


잘 보이고 싶은 나머지 남들과 다른 지성적인 나를 가장 어필할 책을 찾아 엄마 아빠의 책장을 뒤졌고 다독하시던 부모님 덕분에 아주 적절해 보이는 책을 고를 수 있었다.

[박완서. 아주 오래된 농담, 너무도 쓸쓸한 당신]

고전은 너무 고루해 보일 것 같고 너무 가벼워 보이는 소설을 고를 수는 없고, 인문학 책은 정말 매력적이지 않으니 예외로 하고.. 그렇지 박완서라면.


동아리 모임은 주 2회였고 항상 그 끝에는 하얗게 동이 트는 새벽이 있었다. 얼마나 가열하게 술을 퍼마셨던가. 갓 성인이 된 간덩이는 한계가 없었다. 그러다가 내 지성의 어택이 통했는지 아님 그의 눈에 다 빤히 보였던 것인지 모르겠으나 마찬가지로 술을 퍼마시던 날 중 하루. A는 나를 술집 밖으로 불러내고는 말했다. 정확한 워딩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술집 앞 도로가에서 나를 내려다보며 나 널 좋아하는 것 같아 라고.


-그것 역시 이 사람이 너무나 특별하게 느껴졌다.

주중 단 하루 신청곡 가요를 틀어주는 고등학교의 점심시간. 3학년 10반의 서새오에게 보내는 노래라며 신화의 발라드를 신청해서 점심시간 내내 쟤야? 구경거리가 되게 하거나 부정하거나 매점에서 산 과자 던져주는 게 아닌 정확하게 말로 전하는 고백을 태어나서 처음 들어보았고. 바로 그것이 나만큼이나 이 사람도 진심이라는 증거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안 그럴 리가 없잖은가. 어떻게 나를 안 좋아할 수가 있겠는가?


  


요양원에 고목처럼 앉아있던 90살 치매 발레리나가 불현듯 들려오는 백조의 호수 선율에 영상기록으로 남아있는 그녀의 춤과 똑같은 빈사의 백조 날갯짓 안무를 추었다던가. 무엇이 차이코프스키 선율이 되었기에 이렇게 기억들이 쏟아지는 것일까. 사진 같은 장면들이 있기도 하고, 웃음소리도 있고 지금 이곳과는 분명히 다른 날씨의 기온과 습도까지도 있다. 친한 친구들에게 1호 씨씨냐?라는 소리를 들으며 그 오빠와 나는 박신양이 나오는 인디언 썸머를 봤고. 춘희 라 트라비아라 오페라를 봤다.

영화를 보러 가기 전에 부모님이 구독하던 신문에서 박신양의 멜로 연기를 칭찬하는 연 문화면 기사를 읽어두었고 나를 데려다주려고 같이 탔던 버스 안에서 '정말 박신양의 멜로 연기는 뭔가 다른 게 있는 것 같아요.' 따위의 말을 했다. 물론 박신양이 나오는 영화를 처음 봤고 전도연과 박신양 주연의 영화 '약속'도 안 봤지만 본 척하며 아주 씨네필 같은 소리를 했다.

오페라 시작 시간에 늦었더니. 1막이 끝날 때까지 들어가지 못하고 로비에서 기다렸다. 아니 더 늦어서 2막 까지도 못 봤던가. 겨우 입장해서 자리에 앉으니 노래 몇 곡 후에 비올레타가 풀썩 죽어버렸다. 처음 본 오페라지만 노래 단 한 소절도 무대의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날 내가 좀 가슴에 달라붙는 상의를 입고 있었고 오페라가 끝난 뒤 정종을 마신 것 말고는.


두어 달 몇 번의 데이트를 했었나. 짧은 기간에 비해 손이 빠른 남자였지만(잤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것 역시 진심의 증거라 믿었기에 난 나쁘지 않았다. 그러다 뜬금없이 ‘아.. 많이 생각해 봤는데. 너랑 더 이상 연애는 힘들 것 같아’를 시전했고 나는 차였다. 1학년 여름방학이 되기도 전에. 가만 생각해보니 나만 진심이었지 A에게는 연애도 뭣도 아니었을 것 같아. 미안해 로이와 레이철. 내 첫 연애는 망했어.


비록 연애는 망했지만 A에게 잘 보이싶어 읽은 박완서의 어떤 구절 들은 스무 해가 흘러도 잊히지 않았다. C대학교역까지 전철을 타고 와서 맥주를 마시며 와.. 이런 말을 하면 나 진짜 책 많이 읽는 지적인 여자처럼 보이겠지 머리 굴리며 읊어주던 문장과 소설 속 장면들이 떠오른다. 너무도 쓸쓸한 당신을 이야기하며

'사랑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한 늙은 남편을 보며. 저 사람이 과거 젊은 날 사방으로 물을 튕기며 세수할 때, 그때는 저 사람을 사랑했었나. 떠올리던 장면이 있었어요. A오빠. 나이 들면 사랑도 그렇게 덤덤해지는 걸까요?'

‘아무리 미물이라도 이렇게 가여운 사람의 다리를 모질게도 뜯어먹었구나 애처로워하며 모기 물린 남편의 앙상한 다리를 닦아 주면서 끝나는대요 그 장면을 오래된 고가구를 닦듯이 가만가만 닦아주었다’라는 묘사 해요. 저는 그 마지막 문장이 너무 좋더라고요.'

'40~50대 정도 되는 나이 든 주인공이요. 햇살이 비치는 마당에 옹기종기 앉은 할머니들 사이에서 플레어스커트를 입고 자기가 걸을 때마다 나부끼는 스커트와 그 스커트가 감기는 자기 두 다리에 본인의 젊음을 느끼며. 사는 것은 나이 들어도 재미있다고 하더라고요?'


나이 든 여자도 젊은 기분이 나기는 하나보다. 이런 심드렁한 속마음은 숨기고 짐짓 세상사 통달한 듯 저런 말을 했으나  지금 내가 누군가에게 호감을 살 목적으로 완서를 언급한다면 아마 다른 문장일 것이다. 박완서 님 당신은 어떻게 이런 모든 감정을 아우르는 문장을 쓰셨나요. 리고 A오빠. 저는 오늘 남편이 좋아하는 15 데니아 검정 스타킹을 신었는데요 걸을 때마다 제 다리가 좋더라고요. 그때는 통달한 척 이야기했는데 지금은 그때보다는 조금 더 통달한 사람처럼 얘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정말로 박완서의 글처럼 나이 먹을 만큼 먹은 여자도 여전히 젊은 기분이 계속 나고요. 게다가 그게 기분 만이 아니라 실제로도 그냥 내가 젊은것 같기도 해요. 또 사는 것도 여전히 재미있어요. 날 보며 생글생글 웃던 잘생긴 오빠 얼굴이 선명한 문장처럼 지금도 빛나고 있어요.




힘들고 상처 받았다며 대학교 1학년 내내 해대던 바보짓들이 사실은 재미있었지. 다소 편집은 되었겠지만 이렇게 기억날 정도로. 조금 지나간 유행어이나 걸핏하면 안 본 눈을 산다는 말이 있는데 아니 안 본 눈을 살 수 없으며 만일 산다고 해도 그 눈을 어찌하랴. 나는 눈알 두 쪽으로 이루어진 사람이 아닌데 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외모에 눈이 멀어 비록 미남일지언정 스무 살의 연애에서는 만나지 않아도 좋았을 사람을 골랐지만 20년 후에도 잘생겼을 남자를 고르는 것에는 성공했으며 지금도 청초함을 간직한 그 얼굴을 보면 역시 내 눈이야. 잘 골랐구나 하고 갸륵해지는 것이다. 그래 굳이 안 본 눈을 어디선가 사는 것에 성공한다 하더라도 그 눈은 계속 섬세하게 미남을 감별하고 외모를 밝힐 것이라는 사소한 확신럼 때때로 지나간 세월을 농담처럼 만들어주는 한 문장의 글. 한 장면의 기억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이야기와 지나간 시간들이 때로 '너무나' 쓸쓸하지만 그 쓸쓸함이 이제 비극적이지만은 않다. 그 많던 시간이 다 어디 흘러가 버렸을까. 세월을 잊게 해주는 책, 그림, 흠모한 작가들의 한 줄과 한 장면의 사진처럼 시간을 농담처럼 만들어 버리는 모든 이야기들은 또 어디로 가고 있는가.


스무 해 전에 나는 스무 살이었는데, 안경 쓴 얼굴이 지적이던 남자애에게 악담을 뒤집어쓴 그 날 보다 막 저문 오늘 하루가 더 까마득히 지나간 농담처럼 느껴진다. 박신양이 나오는 인디언 썸머를 보고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타고 방금 내렸더니 지금 이곳인 것 같고 오늘따라 가슴에 달라붙는 상의를 계속 신경 쓰며 잠시 한눈을 팔았더니 또다시 20년이 훌쩍, 지나 있을 것 같다. 실은 스무 해가 스무 번쯤 이미 지나버렸는데 지금이 현재이고 내가 이곳에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도 같다. 농담이 아주 오래되어 지금 내가 이곳에 이른 것 같다. 방금 내 다리를 스쳐플레어스커트의 매끈함과 그의 땀이 묻은 손수건과 스무 살에 잡고 있던 따끈한 버스 손잡이와. 내 손길로 고가구처럼 가만가만 어루만져지길 기다리고 있는 나의 소중한 것들. 멀지만 가까운 미래도 오늘처럼 주워섬길 농담 같은 시간처럼. 오늘 하루도 20년 전도 그저 아주 오래된 농담 같이 마냥 사랑스럽기만 하다.




병든 독서 세 번째

너무도 그리운 당신의 이름. 박완서

매거진의 이전글 병든 독서모임 '오늘내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