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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영서 Oct 27. 2021

마블은 배상하라

내 추억상자 다시 내놔라.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2021)


천년 동안 힘과 권력을 가졌으나 만족을 못했다는 남자가 단정하게 흰 셔츠를 차려입고 안성기 머리를 하고 나올 때부터 너무 좋다. 맥심, 테이스터스 초이스 나의 선택. 우리 이모들이 안성기를 보며 근사하다고 할 때 어린 나는 이해 못했지. 엄마 뱃속에서 날 때부터 까만 목티 입고 태어나셨을 것 같은 저 맥심 아저씨를 왜? 그러나 지금 늙은 조카가 이제야 이모들의 마음을 이해합니다.

다시 영화로 돌아와서 텐 링즈의 소유자 양조위는 어딘가 수상한 숲 속 동네를 찾아갔다가 또렷한 맨 정신에 취권 쓰는 여자를 만난다. 날 개울물에 처박은 여자는 네가 처음이야. 그녀와 함께 개통령 강형욱과 샾 이지혜를 낳고 가정을 꾸려 양조위는 천년만에 행복을 누리는 듯 보인다.



이후 줄거리는 생략하겠습니다. 영화 제목은 샹치이지만 주인공은 샹치가 아닌걸요.

양조위는 와이프가 죽고 나서 애들을 학대하고 또 막살다가.. 다 큰 애들 앞에서 밥상머리 꼰대 짓 하고 나이 가지고 꼰대 짓 하고 죽은 와이프 타령하며 구슬픈 눈알로 나쁜 짓 하다가 아주 잠깐 아들이랑 골육상쟁을 하고 신선같이 곱게곱게 돌아가신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나오는 은갈치가 나와서 서양 쥬뢔권과 싸운다.

중년들 향수가 자극될 만큼 옛 홍콩영화 같은 액션이 너무 좋았다. 첫 버스 안 롱테이크 액션 신부터 옛날 영화들의 한 장면 한 장면이 엄청 떠올라 아주 즐거웠다.  

버스 짐칸, 버스 손잡이 등을 잡고 요리조리 날다람쥐처럼 숑숑 날아다니거나, 우와기. 아니.. 가다마이.. 아니 상의를 벗어 적의 손목을 감싸 그 손으로 적을 제압하고 다시 휘둘러 입거나, 여러 관절로 튕겨낸 무기를 공중에서 낚아채어 그대로 공격에 사용하는 그 익숙한 액션들.  만약 조금 더 성룡 영화의 유들유들한 성인 개그를 넣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싶었다. 그렇지만 샹치 캐릭터에 안 맞았을 수도 있겠다. 버스 안에서 논문 쓰던 여자가 그런 역할의 액스트라가 되지 않을까 생각했으나 맥북만 두 동강 나고 더 이상 등장하지 않았다. 꼭 보험 되시길.. 그리고 싸움의 링 안에서 상의를 탈의하고 까만 하의를 입은 동양 남자. 그 화면만 봐도 떠오르는 영화들이 있어 좋았다. 하지만 이 영화 전체를 통틀어 가장 좋았단 단 한 장면을 뽑으라면(양조위 뻬고)

2량으로 연결된 버스의 아코디언 같은 연결부위가 반쯤 찢어져 덜렁거린다. 그때 주인공 샹치가 승객들을 모두 앞 량으로 피신시킨 후 아주 정갈한 '날라차기' 자세로 슝-하고 뒷칸으로 날아가는 장면이다. 화면 가득히 곧두박질 칠 듯한 버스와 손상된 버스 내부에서 날아오르는 '날라차기!'. 오래된 오락의 한 장면 같았다.  1초도 안 되는 장면이었지만 많은 추억이 겹쳐 보였어. 고마워 마블. 그것만.  


딱 이 자세


원래 마블 영화가 이렇게 스토리가 이상했나. 양조위의 울망울망한 안구에서 흐르지 못한 눈물 대신 스토리가 줄줄 새고 있다. 아니면 이 영화가 유독 그렇게 느껴지는 것인가. 차려입은 단정한 재킷과 흰 셔츠가 적당히 막아주지만 그래도 동아시아 무협영화 보며 자란 동아시아 중년 여성으로서 실망스러운 부분이 많았다.


1. 양자경 이모는 왜 샹치에게 내공을 물려주지 않나?

- 엄마의 고향에 무사히 도착했다. 제법 노력은 했으나 심사숙고는 안 한 듯한 신수들을 거쳐 양자경이 포스 넘치게 등장하고 '난 너희 이모란다'라고 했을 때부터 그래! 이제 이모가 천년 내공을 물려주고 샹치는 각성하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래야 천년 동안 내공을 다진 아빠랑 붙어볼 만 해지지 그래그래.

그런데 그냥 몇 번 호흡하고 물에 한번 빠지고 각성하고 말았다. 어이없다.

양자경 이모가 샹치의 얼굴을 보며 '엄마를 닮았구나' 할 때도 어이없긴 마찬가지였으나. 비록 외모는 엄마도 아빠와도 남남처럼 생겼지만 이모의 눈에는 그의 내공이나 어떤 기가 보여서 하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너의 몸속에는 이미 엄마가 물려주신 기가 있기 때문이야. 그 기는 내가 전수하는 기와 합치될 것이야' 이런 그림이 나올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양자경 그는 한창때 자주 망한 사랑을 하며 짝사랑하는 남자에게 자기의 내공을 모두 넘겨주고 정작 연인도 되지 못하는 배역을 하곤 했다. 그런 플로우로 조카에게 조력하는 이모가 될 줄 알았는데 말이다.

신수들이 그렇게 키우는 가축처럼 나오는 것도 미스였다고 본다. 반은 실체 반은 허공처럼 나왔더라면 훨씬 나았을 것이다.  

2. 양조위는 텐 링즈를 장착 안 하면 그냥 일반인인가?

- 타노스 건틀릿이 꼭 타노스가 아니더라도 손에 착용한 놈이 '딱' 하면 이루어져라 얍. 할 때부터 알아봤다. 무기는 그 자체만으로 완성되는 아이템이 아니야. 이 야만인 같은 마블것들아. 천년 살았으면 아무리 상자에 넣어두었어도 부인이 위험에 처한 것 정도는 알 수 있을 정도로 다져진 내공이 있어야지. 늦은 밤 야근하고 귀가하는 아빠가 통닭 사 가지고 우리 새끼들 닭고기 좀 먹여야지 흐흥~하는 모양새로 집에 들어오는 것이 말이 되나. 동양 무협의 기와 내공을 뭐라고 생각하는 것이지? 아. 마블 세계관에는 내공이란 것이 없구나. 그러니까 내상도 없고 울컥하고 피도 안 토하는구나. 만인들.

추억을 자극해줘서 아주 좋았으나 갈수록 이상하게 흘러가 방금 언박싱한 장난감 뺏긴 울적한 기분으로 영화관을 나섰다. 물론 영화 자체는 재미있었나. 중국자본이 어쩌고 이런 것 까지 갈 것 없이 동아시아 무협영화의 많은 장점을 차용하면서도 실제 그 문화와 주요 콘셉트에 대한 이해도는 깊지 않아 보여 실망스러웠다. 얕디 얕게 취급당한 것 같아서 영 못마땅하다.

 

엄마 위패가 모셔진 사당에서 향도 하나 안 올리는 후레자식을 만들면 어떡하냐. 떼잉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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