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티태스킹말고, 멀티 롤을 수행한다는 것의 진짜 의미
회사에서 담당하고 계신 역할이 혹시 여러 개이신가요?
문득, 조직 내에서 내가 담당하는 역할이 제법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은 사실 새삼스러운 생각이다. 스타트업이라면 으레 일당백 하는 인원들이 모여 멀티 롤을 수행하는 인원들이 더러 존재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또한 돌아보면 내가 거쳐온 M사와 B사에서도 나는 늘 2-3개 이상의 역할들을 동시에 수행하곤 했다. 그럼에도 왜 이제와서야 이러한 멀티 롤의 현실에 대해 고찰하게 되었을까. 그 때보다 나이가 들어 체력이 저조해졌기 때문일 수도 있고, 현실을 더 폭넓고 입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통찰력이 생겼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멀티 롤을 수행하는 나의 하루하루를 돌아보니, '멀티 롤' 이라는 단어 구성이 그 실질적인 의미의 무게보다 훨씬 가볍게 느껴졌다. 하여 나는 근래의 나의 멀티 롤에 대해 '멀티 롤'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고, '멀티 스레딩'라는 표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또한 나는 '멀티 롤'을 수행하면서 겪게 되는 여러 어려움들의 근본적인 원인들을 짚어보고, 적절한 해결책들을 적용해보기 시작했다. 해당 내용들을 나의 경험에 기반하여 두 편에 걸쳐 정리해보려 한다. 스타트업 내지는 작은 조직들에서 멀티 스레드를 수행하며 일당백을 하고 계신 분들께 공감과 위로가 될 수 있을 내용이길 바란다.
본 편에서는 멀티 스레딩이 왜 생각보다 더 어려운 건지 풀어서 설명 해보았다.
다음 편에서는 멀티 스레딩으로 인해 겪게 될 흔한 문제 현상들과 적절한 해결책들을 다룬다.
'멀티 롤'이라 함은 '롤이 여러 개'라는 1차적인 인지에서 사고가 그치게 된다. 하지만 역할이 여러 개라는 것은, 짊어지게 되는 책임감의 무게를 생각하면 그리 가볍게 다뤄져서는 안된다고 생각되었다. 이 때 '멀티 스레딩(Threading)'이라 표현을 해보면, 그 단어의 사전적 의미에서 내포하듯 '실타래가 여러개'라는 의미가 와닿게 된다. 단발적이고 독립적인 여러 일들을 처리한다는 느낌이 아니라, 유기적이면서도 연속적인 기나긴 실타래들을 여러 개 담당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멀티 스레딩이 훨씬 더 그 책임감의 무게를 잘 담아낸다고 생각했다.
Q. OO 님, 현재 A 역할을 하고 계신데 B 업무까지 가능하실까요?
라는 질문을 받으면 스타트업의 혈기 왕성한 젊은이들은 (이 질문을 던진 스타트업이 건강하고 합리적인 조직이라는 전제 하에) 쉬이 긍정의 대답을 내놓게 된다. 허나 이는 결코 만만히 여겨서는 안될 질문이다. 오늘 하루 n시간을 추가로 써서 끝날 업무가 아니라면, 앞으로 연속적이고 유기적인 실타래를 추가로 담당할 수 있겠냐는 질문인 것이다. 기존 업무 시간에 매주 n시간 정도를 더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기존 업무 시간에 n을 곱해야 하는 것일 수도 있다.
구체적으로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일반화하여 정리해보면 ...
1. 멀티 스레딩은 유기적인 협업 프로세스가 증식하는 것
해당 업무를 함께 하는 {팀, 파트, 그룹, 프로젝트, 스쿼드 등 조직내 용어} 동료들과의 협업 프로세스가 늘어나게 된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매 스프린트마다 플래닝을 n회 해야 하며, 중간 싱크도 n회 해야 하고, 스프린트 말미에 리뷰와 레트로도 n회 해야 한다. 에자일 이벤트들이 전부 늘어나는 셈이다. 분기 플래닝 및 리뷰도 마찬가지. 매 스프린트 초/말, 매 분기 초/말에 얼마나 바쁠지 미리 가늠해보면 감이 올 것이다. 물론 협업이 불필요한 역할이 추가되는 경우에는 이 어려움이 덜할 수 있다.
2. 멀티 스레딩은 책임감이 배가 되는 것
역할이 주어진다는 것은 그 역할로 인해 얻게 되는 권한과 더불어 책임이 붙게 된다. 운영 업무는 고객의 사용성을 책임져야 하고, 마케팅 업무는 마케팅 비용 대비 효용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고, 영업 업무는 매출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러한 '책임'을 대변하는 '목표 지표'를 매 분기마다 설정하고 이를 달성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운영 업무를 하다가 마케팅 역할까지 맡게 된다면 유저 리텐션에 더해 마케팅 ROAS 까지 책임져야 하는 것이다.
3. 멀티 스레딩은 나 자신이 교통의 결절지가 되는 것 (= 교통 체증 다발 지역)
서로 다른 유기체들이 나를 동시에 찾기 시작한다. 여기서 우선 순위 조율을 잘못하면, 나 자신이 병목이 되어 함께 일하는 동료들의 업무 속도가 더뎌지고 플래닝이 어그러지기 쉽다.
만약 멀티 스레딩에 '매니징 역할'이 섞여 있다면, 난이도는 보다 상승한다.
1. 멀티 스레딩은 임팩트 있는 목표/방향성/전략 설정을 여러 개 해야 하는 것
전략과 방향성을 제시하기 위해서는 무수히 많은 시간과 노력이 요구된다. 현재 제품 내의 데이터와 유저들의 목소리, 시장 내 경쟁자들의 움직임과 타겟 유저군에 대한 리서치 및 분석 등 제대로 된 (유의미한) 전략을 수립하기 위해서는 깊은 고민의 시간이 필요할 수 밖에. 그런데 그것을 2-3개 팀에 대해 수행해야 한다면?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구색 맞추기 위한 보고자료 제작은 10개도 할 수 있지만 제대로 된 전략 수립은 1개 하기도 쉽지 않다. 유의미한 전략이 결여된 팀은 제 아무리 열심히 노를 젓는다 해도 목표 지표를 제대로 달성할리 만무하다.
2. 멀티 스레딩은 흔들림 없는 편안함이 여러 개여야 하는 것
팀을 하나의 탄탄한 팀으로 만들기 위한 제반 작업들까지도 책임져야 한다. 꾸역꾸역 협업을 마무리 짓고, 목표 지표를 달성한다 해도, 그 목표 지점까지 얼마나 안정적으로 항해하였는가, 더 나아가 얼마나 즐겁게 항해하였는가는 '지속적인 목표 지표 달성'에 영향을 끼치는 변수라는 점에서 중요한 부분이 된다. 이번 분기 무탈히 마쳤는데, 분기 끝나자마자 팀이 와르르 무너지면..? 이는 성공적인 멀티 스레딩이라 보기 어렵다. 협업 문화 및 원활한 협업 바이브의 형성, 이를 위한 여러 커뮤니케이션 기제들 (피드백, 교육, 내부 워크샵, 팀런치 등), 나아가 추가 충원을 위한 채용 프로세스까지... 매 스프린트 마다 대략 3-4 시간은 이를 위해 스레드별로 투자된다고 생각해야 한다.
위 멀티 스레딩의 속성들을 종합해보면 사실 이는 극강의 난이도이다.
"여러 협업 프로세스를 유기적으로 병행하면서 나 자신이 병목이 되지 않게끔 우선 순위 조율을 잘 하고, 또 그 과정에서 각 스레드의 팀원들을 동기부여하고 교육하며 팀 퍼포먼스를 증대시킨다. 각 스레드별 적절한 방향성 및 전략을 수립해내어 임팩트 있는 협업 결과물을 내고, 어깨에 짊어지고 있던 막중한 책임감에 눌리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극강의 난이도를 자랑하는 멀티 스레딩을 수행하면 필연적으로 겪게 될 문제 현상들과 적절한 해결책들에 대해서는 다음 글을 통해서 알아보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