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모노그램

9. 어화둥둥 내 빨래건조기

<모노그램> 글 하국주/ 그림 서울비

by 미혜 Seoul B

아파트 1층이라 소음과 관련된 비난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편이다. 그래서 늦게 들어온 날 빨래를 해야 하는 경우엔 그냥 해도 된다. 하지만 늘 자제하게 되는 이유가 있었으니 기약 없는 빨래 건조에 대한 염려가 그것이다. 대체 언제 빨아 언제 말리냔 말이다.

낮이라 해도 뭐 크게 다를 건 없지만.


세탁기를 돌려 빨래가 끝나면 세탁물을 꺼내 거실로 옮긴다. 보통 빨래를 몰아서 하니까 양이 많은데 옷들도 대부분 크고 무거워서 (겨울 옷이나 침구류, 수건은 더욱) 건조기 대자 1개와 소자 1개는 펴 줘야 한다.

베란다 빨래건조대가 있긴 해도 바닥 곳곳에 짐들이 많아 보통 소량의 빨래, 특히 물 떨어지는 손빨래 용으로 쓰고 있다.

아무튼 어찌어찌 다 널고 나면 그리 넓지 않은 거실이 꽉 차서 오갈 때 요령껏 피해 다녀야 한다. 심지어 며칠을 말려도 눅눅한 게 가시지 않으면 계속 널어놓는데, 그럴 땐 집이 여간 습하고 어수선한 게 아니다. 게다가 빨래는 매일 쌓이니까 의자 등받이나 선풍기, 전기밥통, 심지어 거실 바닥에까지 2차, 3차 빨래를 널어야 하는 경우도 생긴다. 그래서 저녁엔 진짜 급한 것 한 두 개만 재빨리 손으로 빨아 난로, 선풍기, 드라이기 앞에 두고 용을 써서 말리거나, 엄두가 안 나면 아예 포기하거나 해 왔다. 최근엔 장마를 대비해 구입한 제습기로 다소의 효과를 보기도 했지만 미세먼지 때문에 늘 문 닫고 사니 건조에 도움을 줄 바람 한점 만나기 힘든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제 사정이 달라졌다.

위풍당당 거실 한 편을 차지한 은빛 찬란 빨래건조기 덕분에.


저녁 늦게 오자마자 빨랫감을 모아 세탁기를 돌린다. 빨래가 끝나면 가져다가 건조기에 넣는다. 취급 주의가 붙은 고급 옷이나 니트류가 거의 없어서 별 고민 없이 다 털어 넣으면 된다. 다양한 건조 버튼(표준, 살균, 급속, 울 섬세...) 중 필요한 걸 골라 누르면 끝. 여유롭게 샤워하고, 식사하고, 설거지한 뒤 차 한 잔 들고 TV 앞에서 웃노라면 삐리 릴리 명랑한 알림이 들려온다. 슬렁슬렁 걸어가 건조기 문을 열면 뜨끈 뽀송한 옷들이 기다리고 있다. 문가에 자리 잡고 앉아 즉석에서 하나씩 갠다. 그리고 곧장 각각의 서랍으로 투하.

1909018_tea time__900.jpg Tea Time_illustration by Seoul B (c) 2019 서울비

오늘 입은 두툼한 패딩을 내일 다시 뽀송하게 입게 되는 이 기적. 사실 그냥 두면 어차피 마를 빨래인데 구태여 목돈 써가며 장만해야 하는 게 맞는 일인지 오래 고심했었다. 하지만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생활의 질이 달라진다는 주변의 평가는 사실이었으니까. 가전제품의 발전을 외면한 채 계속 망설였다면 이 놀라운 즐거움을 영영 몰랐을 테지. 날씨와 미세먼지, 시간의 구속으로부터 해방된 빨래라니...

어화둥둥 내 빨래건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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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거진 <모노그램>은 하국주 님의 글과 서울비의 그림이 함께한 컬래버레이션 작품입니다. 2019년 하반기 (9월~12월) 서울비의 브런치에서 한시적으로 매주 월요일에 발행합니다.


• 매거진 <모노그램>과 <B급여행기>를 발행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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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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