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노그램> 글 하국주/ 그림 서울비
아파트 1층이라 소음과 관련된 비난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편이다. 그래서 늦게 들어온 날 빨래를 해야 하는 경우엔 그냥 해도 된다. 하지만 늘 자제하게 되는 이유가 있었으니 기약 없는 빨래 건조에 대한 염려가 그것이다. 대체 언제 빨아 언제 말리냔 말이다.
낮이라 해도 뭐 크게 다를 건 없지만.
세탁기를 돌려 빨래가 끝나면 세탁물을 꺼내 거실로 옮긴다. 보통 빨래를 몰아서 하니까 양이 많은데 옷들도 대부분 크고 무거워서 (겨울 옷이나 침구류, 수건은 더욱) 건조기 대자 1개와 소자 1개는 펴 줘야 한다.
베란다 빨래건조대가 있긴 해도 바닥 곳곳에 짐들이 많아 보통 소량의 빨래, 특히 물 떨어지는 손빨래 용으로 쓰고 있다.
아무튼 어찌어찌 다 널고 나면 그리 넓지 않은 거실이 꽉 차서 오갈 때 요령껏 피해 다녀야 한다. 심지어 며칠을 말려도 눅눅한 게 가시지 않으면 계속 널어놓는데, 그럴 땐 집이 여간 습하고 어수선한 게 아니다. 게다가 빨래는 매일 쌓이니까 의자 등받이나 선풍기, 전기밥통, 심지어 거실 바닥에까지 2차, 3차 빨래를 널어야 하는 경우도 생긴다. 그래서 저녁엔 진짜 급한 것 한 두 개만 재빨리 손으로 빨아 난로, 선풍기, 드라이기 앞에 두고 용을 써서 말리거나, 엄두가 안 나면 아예 포기하거나 해 왔다. 최근엔 장마를 대비해 구입한 제습기로 다소의 효과를 보기도 했지만 미세먼지 때문에 늘 문 닫고 사니 건조에 도움을 줄 바람 한점 만나기 힘든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제 사정이 달라졌다.
위풍당당 거실 한 편을 차지한 은빛 찬란 빨래건조기 덕분에.
저녁 늦게 오자마자 빨랫감을 모아 세탁기를 돌린다. 빨래가 끝나면 가져다가 건조기에 넣는다. 취급 주의가 붙은 고급 옷이나 니트류가 거의 없어서 별 고민 없이 다 털어 넣으면 된다. 다양한 건조 버튼(표준, 살균, 급속, 울 섬세...) 중 필요한 걸 골라 누르면 끝. 여유롭게 샤워하고, 식사하고, 설거지한 뒤 차 한 잔 들고 TV 앞에서 웃노라면 삐리 릴리 명랑한 알림이 들려온다. 슬렁슬렁 걸어가 건조기 문을 열면 뜨끈 뽀송한 옷들이 기다리고 있다. 문가에 자리 잡고 앉아 즉석에서 하나씩 갠다. 그리고 곧장 각각의 서랍으로 투하.
오늘 입은 두툼한 패딩을 내일 다시 뽀송하게 입게 되는 이 기적. 사실 그냥 두면 어차피 마를 빨래인데 구태여 목돈 써가며 장만해야 하는 게 맞는 일인지 오래 고심했었다. 하지만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생활의 질이 달라진다는 주변의 평가는 사실이었으니까. 가전제품의 발전을 외면한 채 계속 망설였다면 이 놀라운 즐거움을 영영 몰랐을 테지. 날씨와 미세먼지, 시간의 구속으로부터 해방된 빨래라니...
어화둥둥 내 빨래건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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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거진 <모노그램>은 하국주 님의 글과 서울비의 그림이 함께한 컬래버레이션 작품입니다. 2019년 하반기 (9월~12월) 서울비의 브런치에서 한시적으로 매주 월요일에 발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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