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한 소녀와 부산에서
어느 날 금요일 저녁, 나는 부산 서면 역 2번 출구 앞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행동호회 카페에서 부산 저녁식사 동행 모집 글이 올라와서 신청했고 동행하기로 약속을 잡아서 처음 보는 분과 함께 부산에서 유명한 피자집에 가서 식사를 하기로 했다. 원래는 거래처 클레임 발생 건으로 점심도 못 먹고 급히 내려온 건데 부산에 거의 다 도착할 때 즈음 문제는 해결됐다고 함과 동시에 담당자는 연락을 받지 않았다. 문제가 해결되면 광안리에서 회 한 접시 사달라고 했는데 사주기 싫었나 보다.
출장지에 내려와서 맛집에 가고 싶을 때 가끔 여행카페의 동행 모집 게시판을 이용한다. 사람들이 붐비는 맛집에 혼자 간다는 것은 민폐이기 때문이고 서비스도 불 만족스럽다. 그래서 동행 모집 글을 올리기도 하고 다른 회원이 올린 모집 글에 지원해서 성사가 되면 이렇게 오프라인으로 약속하고 같이 맛집에 가는 것이다.
근데 동행하기로 한 사람이 약속장소에 오지를 않는다. 6시에 만나기로 했는데 20분이 지나도 소식이 없다. 나의 인상착의를 말해줬는데 나를 멀리서 보고 나서 그대로 도망갔는지 아무튼 저녁동행은 진행이 힘들 것 같은 느낌이라 서면에서 역시 유명한 돼지국밥 집으로 갈 마음의 준비를 하는 순간, 나만 알아들을 수 있을 거 같은 아주 작고 가녀린 목소리가 내 뒤에서 들린다.
동행 : 저….. 혹시 동행….
피부가 하얗고 살짝 구부정한 자세의 학생으로 보이는 여자가 보통의 캐주얼 스타일과 함께 백팩을 메고 내 앞에 서 있다. 고개를 들었는지 숙였는지 모를 기묘한 각도로 나를 보는 건지 아니면 서면역의 길바닥을 보는 건지 모를 아무튼 어딘가를 바라보는데 다시 한번 확인하고자 동행에게 물어봤다.
나 : 피자 가시는 거 맞으시죠?
동행 : 네… 맞아요. 늦어서 죄송합니다. 채팅으로 알려드리려고 했는데 …
나 : 괜찮습니다. 가시죠.
지도 어플을 켜려고 하는 동행에게 내가 길을 잘 알고 있으니까 나를 따라오라고 말하고 걸음을 재촉하였다. 거래처와 약속 시간을 지키느라 점심도 못 먹고 휴게소도 전부 지나쳐서 배가 심하게 고팠다. 근데 나의 동행은 걸음도 다소 느린 편이었다. 그렇다고 초면에 뛰어가자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나의 초조함이 보였는지 동행도 동요하기 시작했다.
동행 : 죄송해요… 제가 좀 느려요....
아직도 고개를 들을 듯 말 듯 오묘한 시선과 함께 쭈뼛쭈뼛 걷는 것을 보면서 나도 속히 가는 것을 포기했다. 나야 바람맞은 거지만 이분은 여행자다. 이런 사람에게 나의 욕심을 강요하는 것은 실례라고 생각했다. 나도 편하게 여행 왔다는 느낌으로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숨을 몇 번 고르자 배고팠던 기분이 조금은 사라졌다.
나 : 괜찮아요. 좀 기다리면 먹을 수 있겠죠. 근데 성함이 어떻게 되시나요?
동행 : 고… 윤희 요 (가명표기)
나 : 좋은 이름이네요.
영혼 없는 답변과 함께 한창 붐비는 서면길을 걷는다. 카페거리 쪽이라 젊은 인파가 더욱 붐비는데 나도 정신없어서 고개를 떨구고 피자집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그때 마침 동행이 물었다.
동행 : 저 위에 빛나는 거 뭔지 아세요?
나 : 뭐요? 저거요?
고개를 들어 보니 부산 거의 한가운데에 있는 황령산 통신탑이다. 저녁이 되면 탑에 조명을 쏴서 존재감이 돋보이는데 그것을 물어본 것이다. 저 빛나는 탑에 대해서 설명해 주고 바로 근처에 전망대도 있다고 하니까 동행이 살짝 관심을 보인다. 아까 처음 봤을 때의 서로 굳은 표정에서 조금은 나아진 느낌이다. 피자집에 다 와서 대기를 걸고 주변에서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또 한 번 동행이 사과를 하였다.
동행 : 정말 죄송해요. 저 때문에 식사도 늦게 하시게 됐네요. 정말 죄송합니다.
나 : 괜찮습니다. 부산에 처음 오셨나요? 서면역 오거리가 복잡해서 길을 잃기 쉬워요.
동행 : 네 부산 처음이고 제가 출구를 잘 못 봐서 롯데백화점 쪽으로 나왔어요.
피자집 앞에서 대기하는 동안 대충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본가는 대구 근방이고 대학교와 직장이 수도권이라 서울에서 자취하였는데 최근에 회사를 그만두고 집으로 와서 쉬던 중에 혼자 여행을 온 것이었다. 원래는 3일 정도 첫 부산여행을 계획했는데 내일 나주에 있는 친구가 놀러 오라고 해서 내일 바로 전라도로 떠난다고 하였다. 경상도가 고향인 20살 넘은 성인이 부산여행이 처음이라고 해서 내심 놀랐지만 어릴 적부터 서울에서 살았으니 그렇겠다고 생각하였다 어느덧 순번이 되어 피자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굽고 있는 피자와 스파게티 소스 냄새가 너무 환상적이었다. 나도 모르게 코를 벌름거렸다. 다른 테이블로 가는 피자를 빼앗아서 먹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의 절박한 표정을 보고 갑자기 그녀가 웃참에 실패하고 터져버렸다.
동행 : 진짜 배고프신가 보다
나 : 돌아버리겠어요…
자리 잡기 전 뭐 먹을지 미리 상의한 상태라 나는 광속 클릭으로 키오스크 메뉴판을 거침없이 찍었다. 그리고 피자가 나오자마자 말없이 먹기 시작했다. 동행은 피자 한 두 조각과 스파게티를 조금 담아서 먹더니 배부르다고 하였다. 표정을 보니 진짜로 식사를 잘 마친 만족한 미소를 띠었다. 나도 이성이 돌아와서 잡다한 이야기도 하던 중 동행이 다시 한번 황령산 전망대에 대해서 물어봤다.
동행 : 저기 한번 가보고 싶은데 어떻게 가면 되는지 알 수 있을까요?
나 : 저기 걸어가거나 대중교통으로 가는 건 좀 힘들고 차로 가야 편하기는 한데 제 차로 같이 가보실래요?
동행 : 네 좋아요. 감사표시로 제가 디저트 사드릴게요.
이렇게 가끔 동행하다가 이야기가 잘 통하게 되면 목적지 외 다른 곳도 가기도 한다. 그녀의 첫 부산 여행을 좋은 기억이 남게 해 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바로 황령산으로 올라가지 않고 금련산 중턱에서 광안대교를 본 뒤 황령산까지 올라가는 코스를 정했다. 예상대로 그녀는 금련산 중턱에서 바라보는 광안대교의 야경에 감탄하며 사진을 찍었다. 황령산 주차장에 주차하고 정상까지 걸어 올라가면서 그녀는 동행을 모집했을 때 어떤 사람이 올 지 많이 걱정이 되었다고 말했다. 동행 모집 글을 부산 여행 오기 직전에 한번 올렸었는데 남자 회원들한테 술 먹자는 쪽지가 너무 많이 와서 글을 내리고 마지막으로 올린 맛집 동행 글에 내가 지원해서 선정된 것이었다. 열심히 걸어서 올라갔는데 통신탑의 조명은 꺼져 있었다. 아까 전 광안대교 전망할 때 시간을 너무 뺏긴 것 같다. 그래도 그녀는 내가 아니었음 여기까지 못 왔을 거라고 괜찮다고 하였다. 서면을 내려다보는 전망대 위에서 그녀는 한참을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아까 피자 먹은 곳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괜히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의자에 앉아서 휴대폰도 하고 있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났을까 갑자기 그녀가 나에게 다가와서 물었다.
동행 : 저 궁금한 게 있는데 물어봐도 돼요?
나 : 뭐요? 부산 다른데 좋은데 뭐 있는지 알려드릴까요?
동행 : 아뇨. 사회생활 잘하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전혀 생각하지도 못한 질문에 나는 잠깐 몸이 굳어버렸다. 어두워진 전망대에서 이런 질문을 받을 줄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잠깐 눈을 깜빡거리다가 그래도 물어본 것에 대해서 최대한 성심성의껏 답변은 하였다.
나 : 글쎄요. 갑자기 말하려고 하니 생각이 잘 안 나네요. 그리고 내가 사회생활에 잘 안다고도 생각은 안 하지만,, 근데 특히 말 조심하는 게 중요한 거 같아요. 불필요한 말이 많아지면 꼭 실수하게 하더라고요.
동행 : 그렇구나….. 근데 저는 회사 생활했을 때 정말 조용히 다녔는데도 부당한 대우도 받고 저를 미워하는 사람도 생겼어요. 그럴 때는 어떻게 해요?
그녀는 정말 조용히 회사 생활을 했을 것 같았다. 그런데도 첫 회사생활이 좋지 않게 끝나게 된 것이 이해가 잘 안 가서 좀 더 이야기해 보니 회사에서 직장 내 괴롭힘을 당한 것이었다. 그 사건이 해결도 잘 안 되고 스트레스가 너무 심해서 회사를 그만둔 것이었다. 한동안 집 밖으로 나오지도 못하고 겨우 용기 내서 여행을 왔다고도 하였다. 처음 그녀를 보았을 때 유독 분위기가 어색했던 이유를 알 거 같았다. 퇴사 이후 가족 제외 다른 사람과 식사한 것도 내가 처음이라고도 하였다. 내가 더 이상 조언해 줄 수 있는 것도 없고 해 줄 수 있는 건 그녀를 괴롭혔던 그 못된 선임을 대신 욕해주는 것이었다. 그녀가 한번 더 물어봤다.
동행 : 혼자 오래 사셨다고 했는데 계속 혼자서 살면 외롭지 않아요?
나 : 인생은 원래 혼자 사는 거예요. 물론 히키처럼 살라는 건 아니지만……
꽤 긴 시간에 걸친 대화가 끝나고 돌아가는 길, 나도 그렇고 그녀도 지쳤는지 말이 없다. 숙소 주변으로 가기까지 아무 말도 없이 밖에만 바라봤다. 부산의 번화가에도 불이 점점 꺼져가고 시간은 깊은 밤을 향해 가고 있었다. 그녀의 숙소 근처까지 도착했고 그녀가 말했다.
동행 : 원우 씨 너무 고마워요. 덕분에 좋은 구경도 하고 재미있었어요. 잘 쉬시고 내일 서울로 잘 올라가세요.
나 : 저도 좋았어요 윤희 씨. 잘 들어가요. 근데 저 부탁이 있는데 들어줄 수 있나요?
동행 : 네? 어떤 부탁이요?
나 : 내일 부산 떠나기 전에 돼지국밥 먹고 갈래요?
그녀가 아까 피자 집에서 웃을 때 보다 더 크게 웃었다. 국밥 먹자는 데 그렇게 진지한 표정으로 물어보는 사람은 처음이라고 한다. 난 국밥에 있어서는 진지하다고 말하고 내일 서면에서 다시 보기로 약속을 한 뒤 그녀를 바래다주었다. 다음날 점심 즈음 약속장소에서 그녀를 만났다. 이번에는 늦지도 않았고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자꾸 웃고 있었다.
나 : 어제만 해도 고개도 잘 못 드시더니 오늘은 왜 이렇게 웃어요?
동행 : 어젯밤에 자려고 누웠는데 자꾸 원우님이 돼지국밥 이야기 하던 게 계속 생각났어요. 어제 돼지국밥 안 먹는다고 하면 안 보내줄 줄 알았어요.
나 : 그럴 리가요. 근데 그만큼 맛있다는 걸 강조한 거죠.
생각해 보니 어제 윤희 씨에게 돼지국밥 이야기를 좀 많이 하긴 했다. 잠깐 대기하고서 식사를 시작했고 그녀는 본인 공깃밥에 반을 덜어서 내 밥공기 위에 올려줬다. 이렇게 기특할 수가….
식사하고 커피를 마신 뒤 이제 헤어질 시간이다. 지난 시간으로 치면 하루가 채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처음 봤을 때의 그녀와 헤어지기 직전의 그녀의 모습은 전혀 다른 모습이다. 처음 그녀를 봤을 때 폭망을 예상했는데 이렇게 서로 웃으며 헤어지게 되어 정말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녀는 떠나기 전 나에게 고개 숙여 인사하고 독고다이 인생일지라도 한번 잘 살아보겠다고 하고 길을 떠났다. 떠나는 그녀의 뒷모습이 이제는 제법 자신감이 있어 보이기도 한다. 윤희 씨의 앞날에 꽃길이 함께하길 기원하며 나도 부산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