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시절 테헤란로를 걸어갈 때 일이었다. 평소 못 보던 기이한 글자와 함께 '테헤란로'라는 표지석이 있어서 다가갔더니 이란의 수도 이름인 '테헤란'을 강남개발 당시에 도로 이름으로 쓴 것이라는 표석이었다. 어림잡아도 수천 km 떨어진 외국 도시가 왜 서울의 도로이름이 됐을까 하고 잠시 생각하다가 지나친 기억이 난다.
그리고 어느 날 강남역에서 볼일을 마치고 올라가는데 예전 삼성동에서 봤던 비석과 똑같은 모양의 표석을 발견하였다. 그때는 스마트폰이 있어서 검색을 해보니 이란의 1979년 이슬람 혁명이전 왕조 국가 시절 우리나라와 체결했던 도로명 교환식과 함께 세운 비석이었다. 마찬가지로 이란의 테헤란에도 서울로 (خیابان سئول[히야트 시울]) 가 있다고 한다. 그 후에 직장을 다니면서 이란에 사업목적으로 갔다 오신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란에 가면 한 번쯤은 테헤란에 있는 '서울로'를 방문해본다고 한다. 당시에도 미국과의 관계 마찰로 국제 뉴스에 많이 오르내리던 이란이었는데 그 수도의 이름이 한국을 대표하는 주요 도로의 이름이 되었다니 곱씹어볼수록 매우 신기한 사실이라 생각하였다. 그리고 이렇게 협정이 체결되었던 당시 이란은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서구화된 국가로 오늘날의 이슬람 신정체제 국가하고는 거리가 멀었다는 사실 또한 알게 되었다.
그때 이후로 수년이 지난 2025년. 뉴스에서는 연일 테헤란의 상황이 보도되고 있다. 석유 부국이자. 페르시아 문명의 유산을 받은 이란과 테헤란은 연일 폭격과 핵시설과 관련한 뉴스로 뒤덮여 있다. 어느 날 테헤란로를 지나서 가던 중 그 표석이 생각나서 다시 가보게 되었다. 그리고 예전에는 지나쳤던 하단의 문구까지 같이 관찰해 보았다.
서울, 테헤란 양시와 양시민의 영원한 우의를 다짐하면서
서울시에 테헤란로, 테헤란시에 서울로를 명명한다.
1977.6.27
서울특별시장 구자춘 / 테헤란시장 고람레자 닉페이
시국이 시국인지라 좀 더 자세히 관찰을 해보니 서울시장이었던 구자춘 시장은 오늘날 지하철 2호선 순환선을 만들어낸 장본인이고 오늘날의 서울을 구성하는 데 있어서 큰 역할을 한 사람이었다. 2호선 순환선을 따라서 강남개발이 본격화되었으니 강남의 한복판 도로를 테헤란로라 명명한 것도 당시 구 시장이 가지고 있던 추진력을 발휘하여 진행한 것이라 생각해 봤다.
그 옆에 테헤란 시장의 이름을 보며 검색을 해보니 이분의 이력이 심상치가 않다. '고람레자 닉페이', 이란의 행정 명문가 출신이고 이란 건설부 장관까지 하신 분이다. 1977년 서울에 방문하여 당시 서울시장이던 구자춘 시장에게 각각 테헤란과 서울의 도로 이름을 교환하자고 제안하신 분이다. 그런데 그로부터 불과 2년후, 1979년 루홀라 호메이니의 이슬람 혁명이 성공하고 혁명세력에 의해서 사법살인을 당한 불운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분이기도 하다.
테헤란로와 서울로의 이름을 교환하던 1977년 당시 이란은 당시 집권 세력인 팔레비 왕조의 친 서방 정책으로 서구의 어느 도시 못지않은 근대화를 이루고 요즘 흔히 생각하는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억압적 정책과는 거리가 먼 국가였다. 그러나 팔레비 왕조의 부패와 무능에 이슬람 원리주의 세력이 등장하며 이란은 지금과 같은 신정정치 국가의 대표 격으로 수십 년간 자리 잡게 되었다. 이 표석은 이란의 서방과의 우호적 관계 기조를 대변하는 얼마 남지 않은 역사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테헤란에서 멀리 떨어진 고층빌딩이 즐비한 이곳 서울에서 이란의 과거와 함께 오늘날의 현실을 짐작할 수 있었던 작은 기념물을 다시 찾아와 보았다. 역사의 흐름 속 거대한 풍랑 속에서 작은 돌판에 새겨진 표지가 말해주는 사실, 그리고 함께 연결되어 온 이야기들은 결코 가볍지 않음을 느끼게 해 본다. 70년대에 정말 세련되고 현대화되었던 이란의 테헤란 시는 폭격으로 폐허가 되었으나 지금의 서울 테헤란로는 번쩍이는 커튼월 빌딩들과 세련된 차들로 가득하다. 역사의 아이러니는 오늘도 반복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