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년대 초반 봉천동 중산층의 생활 - 03년

제04장: 2003년 '새 학교'

by 수연
"지난해를 돌이켜 보면 유난히 다사다난했던 한 해였던 것 같습니다. 국가적으로 아주 큰 행사인 월드컵을 성공적으로 마쳤고, 우리나라를 이끌어 갈 새 대통령을 선출하였으며, 교내적으로도 시범학교 발표나 대운동회 같은 커다란 행사를 무난히 치루었습니다. (중략) 신학기를 맞아 우리 학교는 다시 한 번 큰 변화를 맞게 됩니다. 본교 학구이던 봉천 2동에 새로 봉현초등학교가 신설됨에 따라 많은 어린이가 새 학교로 가게 될 것입니다. '원당초등학교'라는 울타리 안에서 한 식구로 살던 우리들이 각자 새로운 세계를 찾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각자 자기가 소속된 새로운 사회에서 최선을 다해 생활해 가야 합니다. 누구나 일생을 살아가면서 많은 변화를 겪게 됩니다. 변화를 두려워하기보다 그 변화를 새로운 도전으로 생각하고 개척하는 사람만이 미래의 주인공이 됩니다."
2003년 새해, 서울원당초등학교 교장 신현주 선생님 인사말 중. 원당동산 2002-10호(2003.2.13.)


학교도 새 학교

이 해는 이제 '신학교로의 전학'까지 마무리되었다. 지난 원당초등학교 때만 해도 서울대입구역 인근의 여러 빌라촌 친구들과 함께 학교 생활을 했다면(2장에서 언급했듯 학원차를 타고 다녔기 때문에 기억은 없지만 말이다), 이젠 정말 새 아파트촌 친구들과만 교우 관계를 맺게 되는 것이다. 우리 아파트 말고도 큰길 건너편 아파트 아이들도(관악현대, 상도삼호) 이쪽으로 통학하도록 학군이 조정되었고, 보행육교가 새로 신설되었다.


이 전학은 일반적인 전학이 아닌 단체 전학이었다. 우리 반만 해도 최소 절반은 봉현초등학교로의 전학이 예정되어 있었다. 하루는 단체전학 예정 학생 전부가 선생님 인솔하에 원당초등학교부터 봉현초등학교까지 단체로 올라가 보는 날도 있었다. 이제 이 학교에 다니게 될 거라는 말과 함께. 아직 공사가 완료되지 않아 3년 전 이 봉천동으로 이사 올 때 느꼈던 시멘트 냄새 등이 다시 느껴졌다.


신학교로의 전학을 앞두고, 집과 워낙 가까워서 나와 동생은 그 학교로 직접 올라가 보기도 했는데, 전국을 강타했던 2002년 월드컵 직후가 아니었던가. 축구공을 본뜬 작은 공 모양의 장난감이 있었는데 그걸 들고 갔다. 그런데 그걸 가지고 놀면서 올라가다가, 동그란 공 모양이었던 그 장난감을 놓치고 말았다. 평지라면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겠지만, 여기는 봉천고개 꼭대기였다. 그 공 장난감은 장차 봉현초등학교의 통학로가 될 긴 경사로를 떼굴떼굴 빠르게 내려가, 멈추기는커녕 더 가속도를 붙으면서 아파트 길을 따라 쭉쭉 내려갔다. 결국 그 공은 찾지 못했다.


한편 동생은 2003년 입학이었기에 1학년부터 이 학교에서 다니게 되었다. 동생은 유치원도 드림타운 입주가 시작되고 나서 다녔기 때문에 나와 같은 부모 밑에서 자랐음에도 유치원 통학을 공사판 흙길로 한다거나, 저 멀리 서울대입구역까지 학원차를 타고 통학한다거나 하는 경험을 전혀 하지 못했다. 같은 가족 안에서 자랐어도 첫째냐 둘째냐에 따라 경험이 달라진다.


이렇게 어린 시절 완공 직후의 고층 아파트, 완공 직후의 학교 등을 계속해서 접해서 그런지 어린 시절 아토피로 고생을 많이 했다. 용산 숙대입구역 인근에 '우태하 피부과'라는 유명한 피부과가 있다. 엄마와 함께 150번 버스를 타고 다녔다. 아토피가 빠르게 치유가 되지 않아서 어린 시절 고생을 많이 했다.


151번 버스의 기억도 있다. 현 506번 버스의 전신으로 난곡 가는 버스다. 아버지의 고등학교 동창 친구께서 운영하시던 병원이 난곡에 있어서 어릴 때부터 중학교때까지 꽤 자주 갔다. 내 생각에 아버지께서 봉천고개를 정착지로 결정한 이유 중에 하나가 아버지 친구분의 병원 및 거처(같은 살피재권역에 거주했다.)가 같은 동네였기 때문도 있지 않을까 싶다. 그 친구분과 아버지는 꽤 친하셔서 자주 만나셨고 가족끼리 같이 보는 경우도 많았다.


지금은 세상을 떠나신 최철호 작가가 서술한 '도련님, 아프시면 수프라도 좀 드세요'라는 소설은 재개발 이전 봉천동 아이들의 삶을 다루고 있다. 산동네라는 것을 제외하면 모든 에피소드가 내가 겪은 것과 달랐지만 25년터울의 우리가 딱 하나 겹치는 기억이 있었다. 바로 150번 버스를 타고 도심으로 나가는 장면이었다. 이 장면만큼은 10대의 나와, 10대의 최철호가 완전히 똑같은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이 150번 버스는 70~80년대 판자촌 시절 봉천동을 떠올리는 선배 세대의 기억과 우리가 간신히 겹쳐지는 유일한 장면일 듯 싶다.


이후 20년 뒤 똑같이 완공 직후의 신축 오피스텔에 들어갔을 때 다시 피부질환이 발생했었는데, 어릴 때 아토피로 고생했던 게 역시 새 건물만 지속적으로 접한 게 영향을 미쳤구나 하는 생각이 다시 들었다. 다행히도 이때는 이제 나이를 먹어서 그런지 오래가진 않아 다행이었다.

작사 이재중은 초대 교장선생님, 작곡 조순자는 초대 교감선생님이다. 모두 기억난다.



봉천동 중산층의 생활 반경과 여가 구조

한편 옆동네 드림타운은 무려 45개 동이 넘는, 그 단지 하나만으로도 이미 미니 신도시였다. 이젠 단순 놀이터 원정만을 하러 가는 곳이 아니게 되었다. 이때만 해도 그 아파트는 분명 타 아파트였지만, 그렇게 출입을 막거나 하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래도 우리는 바로 옆의 같은 분양아파트 단지 주민이라 그런지, 시대가 2000년대 초반이라 그런 건지, 우리가 그곳으로 가서 드림타운의 조경을 즐기기도 했고, 야시장 구경도 했다.


특히 단지의 남쪽 끝에 위치한 드림타운 상가는 우리 동아아파트 상가와는 규모가 다른 곳이었다. 3층에는 '삼아스포츠센터'라는 대형 수영장이 들어섰고, 4층에는 역시 대규모 헬스장과 사우나가 들어왔다.

마이카 시대 아니랄까 봐, 그 거리를 가는데 차를 타고 갔다. 드림타운 117동 남측에 지상주차장 부지가 하나 있는데, 그 주차장에서 바로 상가로 넘어가는 돌계단이 있었다. 그 주차장은 아무 제약 없이 사용할 수 있었다. 마이카 시대라곤 하지만 아직 4인 가족 당 1대가 주류이던 2000년대 초중반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파트 상가의 수영장이라고는 상상하기도 힘들만큼 규모도 컸고, 사람들도 정말 바글바글했다. 2010년으로 연대가 넘어가자마자 바로 사라진 걸 생각해보면 다른 곳도 아니고 아파트 상가의 수영장은 유지비용이 정말 많이 나가는 장소인데도, 2000년대에는 그걸 커버할만큼의 수요가 나왔기에 유지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수영이나 사우나를 마치면, 1층에 입점해 있는 대형마트인 드림마트에서 쇼핑을 하고 다시 돌아오는 것이 그 시절 우리의 삶이었다.


아파트 상가의 스포츠 센터 외에 관악구민종합체육센터도 이용했다. 최근에 서치 하다가 그 시절 구민체육센터 셔틀버스를 찍은 사진을 발견했는데 깜짝 놀랐다. 완전히 잊고 있었는데 내 기억 속 그대로였다. 특히 저 호차번호를 보자마자 느낌이 확 왔다.

<출처: 황화수소님 봉천천 답사기(4/6) (2006년)>

요즘은 '라이딩'을 해준다고 하더라. 2015년 정아은 작가의 소설 '잠실동 사람들'에도 해성엄마가 아이들 라이딩하는 장면이 묘사되기도 했고 2024년 드라마 '굿파트너'에도 차은경이 딸 재희를 라이딩해 주는 장면이 나온다. 하지만 2000년대는 아직까지 라이딩이 발달한 시절은 아니었고 거의 셔틀버스를 이용했다. 학원 갈 때도 셔틀버스, 구민체육센터 갈 때도 셔틀버스. 엄마는 내가 어릴 때 운전면허를 따시긴 하셨지만 거의 장롱면허였고 운전을 자주 하지 않으셨다.


나도 이 구민체육센터에서 수영 등 여러 체육프로그램을 경험한 적이 있고, 어릴 때 엄마가 여기서 스쿼시를 하셨던 적이 있다. 그 시절 스쿼시가 유행했던 시기가 있었다. 구민체육센터 맞은편에는 낙성대골프연습장이라는 곳이 (지금까지도) 있는데 이 시절 아빠는 여기를 자주 와서 연습을 하고 주말에 라운딩을 나가고 하곤 했다. 2000년대 그렇게 골프를 치시다가 2010년대부터는 테니스를 치시는데 지금은 반포주공아파트 재건축사업으로 철거된 동작역 인근 세화여고 옆에 테니스장을 자주 이용하셨다.


구민체육센터든 골프연습장이든 간에 우리 가족이 레저스포츠를 이용하는 장소가 이곳이었는데, 여기 나온 김에 아빠는 차 기름도 넣고 함께 가족 식사도 했다. 그런데 기름 넣는 장소도 식사하는 장소도 항상 똑같았다. 기름 넣는 주유소는 낙성대역 4번 출구 앞에 있는 '락성 주유소'이고 식사를 하는 장소는 낙성대로 14 1층에 위치하던 '설악추어탕'이었다. 아빠는 주유를 반드시 이곳에서만 했다. 다른 주유소의 기억이 없을 정도로. 급하게 기름을 넣어야 할 때도 낙성대까지 꼭 내려오셔서 락성 주유소로 왔다. 그리고 추어탕. 어릴 때 여기서 추어탕을 하도 먹어서 크고 나서는 추어탕을 안 먹는다. 어릴 때 추어탕의 기억은 많은데 모두 낙성대 설악추어탕인 것도 참 재밌는 부분이다.


한편 위에 첨부한 내용은 2000년 말에 게시된 아파트 광고 기사인데(현재의 분당현대아이파크이다. 이 시기가 아파트 브랜드가 막 태동하기 직전이라 가브랜드와 실제 지금 쓰이고 있는 브랜드가 다른 경우가 상당히 많은 편.) 부대시설로 수영장, 골프연습장, 스쿼시장, 헬스클럽이 명시되어 있다. 이 시기 중상층~상류층의 문화생활 추구미가 어땠는지 알 수 있는 부분으로 우리는 저런 문화를 옆 아파트의 상가나 지방자치단체에서 운영하는 스포츠센터에서 체화했지만 어찌 됐든 그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임대 아파트의 존재

한편 원당초등학교 시절에는 피아노학원 차를 타고 통학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 통학차를 같이 타던, 즉 '학원을 다니던' 분양아파트 친구들과만 교류를 했었다. 그러나 이제 학교가 바로 앞에 생겼으니 자연스럽게 통학차는 사라지고 모두 걸어서 등하교를 하게 되었다.


봉천동 재개발아파트의 특징인데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 있다. 세입자의 경우는 80년대 상계동, 목동 등에서 기 일어났던 세입자 투쟁의 결과로 임대아파트 입주권을 받아 입주했다. 그렇다고 재개발 전 '판자촌 집주인'들이 입주한 것도 아니었다. 원래 이 지역에 살던 원주민들은 보상비에 비해 아파트분양가가 턱없이 높기 때문에 분양아파트로 진입하는 경우는 없다시피 했으며 결국 대부분 외지인에 전매를 선택했다(우리아파트인 봉천2-2구역의 경우 조합원 입주율이 10%에 불과했다). 결론적으로 분양아파트 외지인 - 임대아파트 원주민 구도가 되어버렸다. 봉현초등학교 입교 직전 이로 인해 신경전이 있었던 듯 하다. 원래 봉천2동 지역의 모든 학생들이 봉현초등학교에 입학할 예정이 아니었다. 오히려 관악로 건너편의 관악현대아파트, 상도삼호아파트 등 학생들을 더 수용하고자 했다. 초기 계획에선 봉천2동 일부 학생들의 입교를 제한했다. 그러나 당시 구의원의 강력한 항의로 봉천2동 전역의 학생들이 봉현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그러면서 이 '새 학교' 시절 소셜믹스의 기억이 나에게 남게 된다. 나중에 서술하겠지만, 중학교는 확실하게 학군분리를 해버린다.


이 시절은 인터넷 게임으론 크레이지 아케이드나 큐플레이, 일반 컴퓨터 게임으로는 프린세스 메이커나 짱구는 못 말려 게임 등등이 유행하던 시절이었는데, 방과 후 우리 집에 친구들을 부르거나 아니면 친구네 집에 놀라가서 게임을 하는 게 일반적이었다(오죽하면 이 시기에 이 풍경을 묘사한 언론보도까지 있다!)

“요즘 ‘비엔비’는 한물갔어요. ‘캔디바’나 ‘큐플레이’를 더 많이 해요.”
서울 문래초등학교 4학년 석모양(11)은 주말이면 점심도 먹는 둥 마는 둥 한다. 친구집에 모여 온라인게임을 즐기기 위해서다. 최근 김해에서 서울로 전학온 그는 게임 때문에 금새 친구들과 친해졌다고 말한다.
“이제 ‘바람의 나라’를 해보고 싶어요. 우리 짝은 물론 친한 친구들이 모두 ‘바람의 나라’ 팬이거든요.”

초등학생 사이에 온라인게임 열풍이 불고 있다. 수업이 끝나면 인터넷이 깔린 친구집으로 몰려가는가 하면 학원에서 돌아와 온라인게임 속에서 친구들과 다시 만나기도 한다. 게임 속 레벨이 높거나 화려한 아바타를 가진 친구는 선망의 대상이다. 때때로 게임 속 레벨을 올리기 위해 학부모나 삼촌의 도움을 받기도 한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게임을 못하면 ‘왕따’가 되는 건 시간 문제다.

요즘엔 게임도 하고 공부도 할 수 있는 일석이조형 게임이 단연 인기다. 학부모와 연일 게임 때문에 실랑이를 벌여야 하는 아이들 입장에선 공부도 된다면 ‘명분’도 서기 때문이다. 끝말잇기 게임 ‘쿵쿵따’와 퀴즈게임 ‘큐플레이’ 등이 대표적. 끝말잇기를 통해 어휘실력을, 퀴즈풀이를 통해 풍부한 상식을 얻을 수 있다며 ‘게임 예찬론’을 펴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실제 이같은 인기를 반영하듯 어린이들이 주로 이용하는 ‘캔디바(꿍꿍따)’와 ‘큐플레이’는 한달 매출이 10억원을 넘어설 정도다. 지난해 초등학생들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끈 온라인게임 ‘비엔비’는 필통이나 공책의 캐릭터로도 등장했다.

전자신문 2003.03.28. 「아동용 온라인게임 '열풍'」


아직도 잊지 못하는 그 풍경이 있다. 어느때처럼 같이 게임을 하러 어떤 친구네 집에 방문을 했는데, 집 구조가 너무 이상했다. 복도식인 거야 쌍문동 유아 시절에 경험해 봤으니 별 생각이 없었으나, 친구네 집의 문을 딱 열고 들어갔을 때 내가 본 광경은 문과 거실과 발코니가 직선으로 아주 짧게 이어져 있고, 바로 옆에 작은 방 하나가 전부였다. 그런데 어린 나는 그때 별 생각이 없었다.

'우리 집이랑 집 구조가 좀 다르구나'

생각만 하고 작은 방에 들어가 같이 게임을 하고 귀가했다. 지금 다시 곱씹어 보면 그 친구네 집에는 부모님이 안 계시고, 할머니만 계셨던 것 같다.


이때는 아직 애들이 순수해서 그랬을까? 허구한 날 이슈 되는 분양 주민과 임대 주민의 갈등이 적어도 이 시절 아이들에겐 없었다. 올 9월에 개봉한 영화 '마지막 숙제'는 너무 과장되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저 소셜믹스 환경 자체는 내가 자라며 겪은 환경과 너무 유사했기 때문에 눈물을 많이 흘리기는 했지만.


나 같은 경우 이 기억 이후로 임대아파트 친구에 대한 기억은 없다. 결국엔 별다른 트리거 없이도 자연스럽게, 환경이 비슷한 친구들끼리 어울리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 기억 하나가, 내가 겪어 왔던 경험들이 "당연한"게 아니었구나 느끼게 됐던 시작점이었다.


작년(24년) 10월부터 네이버에 연재되고 있는 웹툰 '나의 구원이'가 딱 우리 세대의 그 시절, 2000년대를 다루고 있는데 위의 내용이 거의 똑같이 나온다. 친구네 집에서 둘이 게임하며 놀던 씬이라던가, 소셜믹스로 인해 같은 동네 같은 학교에서 경제적 환경이 다른 친구들이 묘하게 차이를 알게 되었던 과정 등.. 그래서 더 몰입해서 보고 있다.



EBS 애니메이션과 지하철의 기억

<한국경제 20030218>

'내 기억 속 마지막 지상파 애니메이션' MBC 도라에몽이 2002년 12월에 종영한 후, 나는 EBS 애니메이션으로 넘어갔다. EBS 애니메이션도 기억에 남고 재미있었던 것들이 많다. 신나는 사이버 수학세상, 내 친구 아서, 꿈을 찍는 이안, 말썽꾸러기 띠떼프, 네모네모 스펀지송, 조지가 줄었어요 등등. 스펀지송 말고는 인지도가 그렇게 높진 않지만 말이다.


그중에서 내가 제일 좋아했던 EBS 애니메이션은 '우리는 쌍둥이'였는데 서칭 하기도 힘들다. (방영한다는 언론보도가 있긴 하다) 하나 서치 걸린 글이 너무 공감되어 공유해 본다.

우리는 쌍둥이라고 아는 톨 있니...? 릴이랑 넬리라는 쌍둥이 나오는 만화인데 릴은 꾸미는 거 좋아하고 넬리는 더러운 거 좋아하는데 달팽이 키움. 쌍둥이네 옆집에는 성격 나쁜 여자애도 하나 살았어. 기억나는 에피 중 하나가 둘이서 신발 샀는데 릴이 예쁜 신발 사 달라고 하니까 엄마가 "그런 건 금방 망가져!" 라고 함. 결국 옆집 여자애가 가져감. 근데 이날 마침 비가 왔고, 릴이랑 넬리는 튼튼한 신발 신고 물장구 신나게 치는데 옆집 여자애는 밖에 나가자 마자 신발 다 망가져서 엉엉 욺. 진짜 재밌었는데 아무리 뒤져도 안 나오더라ㅠㅠㅠㅠ

이 애니메이션을 내가 얼마나 좋아했냐면, 106-107동 뒤에 있던 아파트 내 작은 띠형의 공원 이름을 내맘대로 '릴숲'이라고 이름붙이기도 했고, 당시 유행하던 온라인게임 크레이지 아케이드에서 내 ID가 '릴앤우니'였다.(크레이지 아케이드 캐릭터 중에는 우니를 가장 좋아했다.)


그날도 루틴처럼 매일 아침 11시에 하던 '우리는 쌍둥이'를 봤다. 그리고 그날이 동생 유치원 졸업식이었나 그랬다. 우리는 쌍둥이가 끝나고 엄마랑 외출준비를 하면서 채널이 일반 지상파 채널로 옮겨졌는데 그 순간 내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너무 충격적이었다.


2003년 2월 18일 아침. 대구 지하철 참사가 있던 날이었던 것이다.


그 끔찍하고 참혹스러운 광경이 TV 브라운관을 통해 이제 막 열 살이던 내 눈앞에 펼쳐졌고, 그 당시 나는 상당히 큰 충격을 받았다. 사실 이전까지 나는 지하철을 정말 좋아했다. 기탄수학에 흥미를 붙였던 것도 단계가 올라가는 맛이 재밌었어서 그런 것도 있었는데, 지하철도 역마다 번호가 1씩 올라가고 내려가는 게 재밌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때의 충격으로 이 해는 지하철을 약간 기피했던 기억이 난다.


사실 이때의 일시적 지하철 기피현상은 나의 직접 경험도 한몫했다. 2000년 8월 7호선 숭실대입구역이 개통했는데, 이 7호선이라는 곳은 지하철을 타려면 2호선처럼 삼발이로 밀고 나가는 형식이 아니었다. 일명 '플랩식 자동개집표기'라는 것이 도입되었는데, 이 게이트는 표를 내면 문이 열리는 구조가 아니라 부정승차를 하면 문이 닫히는 구조였다. 즉, 게이트가 항시 열려 있다가 표를 넣고 들어가면 아무 일도 없는 것이고, 표를 넣지 않고 들어가면 부정승차 방지로 옆구리에서 플랩이 튀어나와 게이트를 막는 형태로 이루어져 있었다. (사진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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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나는 그 신형 자동개집표기가 너무 무서웠다. 심지어 그 시절은 카드를 찍고 들어가는 시절도 아니고 종이 표를 개찰구에 넣어야 했었는데, 조금이라도 늦게 나가면 그 개찰구에서 플랩이 튀어나와 나를 아프게 때릴까 무서웠던 것이다. 그리고 결국 어느 날, 내가 개찰구를 지나가려고 하는데 개찰구에서 튀어나온 플랩에 정통으로 맞아 버리며 차단문이 닫혔다. 그 두렵던 차단문에 결국 맞아버린 거다. 원래 무서워하던 거였어서 더욱 아팠던 기억이 난다. 그때 왜 그걸 맞았나 나중에 알고 보니 너무 무서워서 표를 빨리 넣고 뛰어가려다 표가 안 들어갔던 거였다. 그런데 안 그래도 무서워하던 그 게이트에 실제로 맞아버리기까지 했으니, 7호선은 바로 기피 대상이 되었다. 이 게이트 트라우마가 해소되기까진 2년이나 걸렸다. 해소 사유는 2005년에 티머니를 구매하고 나서였기 때문에 결국 종이 표+7호선 게이트 트라우마 해소는 실패한 셈. 지금은 지하철 종이 표가 완전히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지금도 종이 표로 그 게이트를 통과하라고 하면 머뭇거리게 될 듯하다.



한 달 미국살이(2003년 7~8월)

2003년 여름방학 내내 텍사스의 한 대학도시에 머물렀다. 방학이 시작되자마자 출국해, 끝자락에 입국하는 일정이었다. 7월 21일부터 8월 14일까지, 딱 스물다섯의 밤. 길지 않은 체류였지만, Angels Llanes, Carmen Muñoz의 2009년 연구(스페인)에 따르면 3~4주 정도의 단기 해외 체류만으로도 구어 능력에서 유의미한 향상이 관찰되고(효과 크기는 개인차가 크지만), 귀국 뒤에도 부분적으로 유지된다고 한다. 즉, ‘한 달’이라도 실제로 변화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스크린샷 2025-10-24 183011.png 정확히 어느 집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대략 이런 느낌일 것이다

평생 한국식 아파트에만 살다가 미국의 집에 처음 발을 딛던 순간을 기억한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해리포터가 플루 가루를 쓸 때 묘사되는 그러한 벽난로가 중앙에 위치하고 있는 널찍한 거실, 2층으로 올라가면 나오는 복도와 맨 끝에 있던 사촌의 방까지. 그리고 그곳에선 한국에선 당시까지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연어요리'를 거의 매일 먹었던 기억도 난다. 아마 저정도 규모의 집이 아니었나 싶은데, 10살 어린이로 그 집을 처음 방문했던 내 기억 속엔 그 집이 거의 궁궐급으로 기억된다.


이때 의사소통이 어려웠다거나 하는 기억은 없었다. 더욱 신기한 것은 이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자연스럽게 영어나 영미식 사고를 하게 되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는 점. 예를 들어 OO로나 OO길에 익숙해져 있다가 자연스럽게 OO Rd. OO Dr. OO Ave. 에 익숙해지고, 한국에서 한국지리에 재미를 붙였던 것처럼 너무 자연스럽게 미국 지도를 펴고 미국의 지리를 탐구했던 것 등이다. 한 달이 아니라 더 있었으면 어떻게 또 자랐을까 생각을 많이 해본다. 지금 열 살 때의 딱 한 달 미국살이도 나에게 꽤 큰 영향력을 남겼으니 말이다. 첫날부터 나와 사촌은 모노폴리라는 보드게임을 했는데, 이때 '보드게임'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때 경험 덕에 나중에 귀국해서도 보드게임을 즐겨하게 된다.


나의 미국 경험은 여름방학을 통해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국내 교육기관에서의 단절이나 이런 것은 없었다. 2025년 현재까지도 이 2003년 여름방학이 서구에 직접 방문한 유일한 경험인데, 내 인생에 영향을 꽤 크게 끼치고 있다.


그 이후에도 내 주변에서는 6학년 1학기 반년을 캐나다로 어학연수를 간 친구의 사례, 고등학교 1학년 이후 아예 미국으로 이민을 간 사례 3명 이상 등 해외로 단기든 장기든 떠난 경우가 많은 편이었다. 역시 이 기억도 정확히 이 시기에 사회현상으로 보도한 사례가 있다. 함께 살펴보자.

지난 여름방학에 초등학교 5학년인 막내아들을 7주간 호주로 연수 보낸 주부 김현희(48·서울강남구대치동)는 겨울방학을 앞두고 고민에 빠져 있다. 영어만 배우는 연수보다는 여행이나 스포츠도 함께 할 수 있는 연수가 좋다는 주위 사람들의 말에 600만원이 넘는 비싼 연수를 보냈지만 아이가 지칠대로 지쳐 돌아왔기 때문이다. 아침 7시에 일어나 오전에 영어공부를 한 뒤 오후 내내 골프와 스쿼시, 수영, 래프팅, 관광 등 벅찬 일정을 소화하고 밤 11시에 잠자리에 드는 생활을 반복한 아들은 연수 후반에는 집에 오고 싶다며 울기만 했다. 정씨는 이번 방학에는 국내 영어캠프를 보낼까 생각 중이다.

겨울방학을 앞두고 어김없이 초등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해외연수 프로그램이 봇물을 이루고 있다. 나라와 기간에 따라 연수비용은 200만∼800만원선까지 천차만별이지만 자녀에게만큼은 돈을 아끼지 않는 부모들의 심리 탓에 비쌀수록 인기다.
그러나 고액연수 경쟁이 심해지면서 영어 이외에 각종 스포츠와 홈스테이, 현지문화 체험 같은 프로그램들이 마구 추가됨에 따라 녹초가 되거나 따돌림으로 고통받는 아이들도 늘고 있다.

지난 여름 뉴질랜드에서 한달간 홈스테이를 하고 돌아온 박모(10·서울성동구옥수동)군은 연수를 다녀온 뒤 한동안 우울증에 빠졌다. 한국학생 4명과 뉴질랜드 학생 6명이 그룹활동을 하는데 그곳 아이들이 박군에게 ‘스터터러(stutterer·말더듬이)’라고 부르며 내내 따돌렸기 때문이다.
박군의 어머니는 “현지 문화를 빨리 익힌다길래 비싼 그룹 홈스테이를 보냈더니 왕따 스트레스만 얻어 왔다”며 “다들 가는데 안 보낼 수도 없고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고 말했다.

이런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많은 부모들이 무작정 화려한 프로그램으로 무장한 고가 연수를 선호하다 보니 유학원들의 연수상품은 갈수록 빡빡해지고 있다.
호주와 뉴질랜드 상품을 취급하는 F연수원 관계자는 “프로그램이 많고 소수정예일수록 신청이 쇄도하다 보니 자연히 비용이 많이 든다”면서 “그러나 일부 유학원은 비쌀수록 잘 팔린다는 점을 악용해 값을 터무니없이 부풀리기도 한다”고 귀띔했다.
동남아 어학연수 업체인 N사 관계자도 “태국이나 필리핀은 상대적으로 싸다 보니 골프나 승마 같은 귀족 스포츠로 단가를 올려야 학부모들이 관심을 갖는다”며 “그런 부가 프로그램들은 한국에서 배우는 게 더 나은데도 부모들의 욕심에 어학연수의 본말이 전도되는 추세”라고 우려했다.

세계일보 2004.11.14. 「애 잡는 高價 해외연수
그때부터 이 학원가가 시작이 아닌가 싶은데요. 그때부터 해서 2000년대로 넘어가면서 영어 붐이 확 불었으니까. 그래서 애들 4학년때 캐나다나 외국 1년 갔다 오고 그런거 많이 했거든요.

서울역사박물관, 『2017 서울생활문화자료조사 - 대치동 사교육 1번가』6장 이지연 가족

방학을 이용해 초등학교 3~5학년 정도의 아이를 1~2달 해외를 보내는 경우가 이 시기(2000년대 중반)에 상당히 흔했고 나 역시 정확히 이 시기, 방학기간이었다. 다만 나의 경우 삼촌이 교수로 있는 대학도시로 갔고 삼촌 집에서 지내며 동갑인 사촌까지 있었기 때문에 부정적인 기억보다는 긍정적인 기억이 컸고 효과를 꽤 본 편이었다.


이러한 일화는 대치동에서만 일어나고 있었던 이야기가 아니라 봉천동 신도시에서도 똑같이 일어나고 있었다. 동작-관악 재개발아파트 지역은 그야말로 '확장 강남' 이었다.



동아문구의 추억

아직 동네 마트와 문구점이 남아 있던 시절이다. 나는 이 '봉천 신도시'에 2000년대 내내 살면서 패밀리마트, LG25 같은 편의점을 한번도 본 적이 없었다. 나중에 2010년대 이후에 다시 고향에 돌아가보니 여러 동네 마트들이 편의점으로 많이 바뀌어 있는걸 볼 수 있었다.


우리 아파트 상가 1층 맨 왼편에는 아직 남아 있던 '동아마트'와 문구완구점이 있었다. 사실 동아마트는 지하 1층에 더 큰 월드마트가 있었기 때문에 거의 이용하지 않았지만, 문구완구점은 대호황이었다. 결국 동아마트의 1/2 정도 크기밖에 되지 않던 문구완구점이 동아마트를 거꾸로 인수해서 슈퍼마켓과 문구점을 동시에 운영하는 현상이 발생하기도 했다. 학교가 언덕 꼭대기에 있어 학교 앞에 상권이 들어설 수가 없다보니 자연스럽게 아파트 상가 문구점이 그 자리를 대체한 것. 그 문구점에서 초등학교 6년간 거의 모든 준비물들을 전부 조달했었다. 그러다보니 문구점 주인 아주머니도 아파트 내 초등학생들의 얼굴과 이름을 다 기억할 정도였다.


그리고 그 문구점에서는 각종 해적판(?) 보드게임을 정말 많이 팔았다. 호텔왕 게임 3천원! 무슨 기업왕 게임이니 부루마불 트레이드 게임이니 진짜 별의별 보드게임을 3천원에 팔아서 거의 모든 해적판 보드게임들을 전부 섭렵했다.


내 학창시절인 2000년대가 마지막 동네 문구점 시절이었다. 딱 그 뒤인 2010년부터 '학습준비물 지원' 정책 도입으로 각 학교에서 모든 준비물을 조달하는 시스템으로 바뀌었는데, '동네 문구점'의 마지막 추억이 있는 세대 입장에서 이게 옳았는지는 아직도 의문이다. 내 추억 속 동아문구도 결국 2010년대 중반에 소리소문없이 폐업했다. 전성기 시절 마트도 인수하던 그 문구점이.. 2000년대 초반에 아주 작은 점포로 시작했다가, 2000년대 중반 옆의 마트를 인수해 커졌다가, 2010년대 초반 원래 점포 크기로 돌아간다음 결국 사라졌던 그 문구점의 기억은 아직도 마음 한 켠에 크게 남아있다.

국토정보플랫폼 2003년 11월, 동아상가 풍경.

국토정보플랫폼은 과거 사진을 상당히 고화질로 제공하는데 상가를 클로즈업 해보다 깜짝 놀랐다. 이게 이렇게까지 식별될 정도로 보인다고? '황비홍' 중국집은 정말 완전히 잊고 있었다. 저기는 직접 가본적은 없지만 배달은 많이 시켜 먹었다. 현재의 스마일 공인중개사가 있는 곳은 '빵굼터'라는 빵집이 있었다. 내 생각보다 꽤 오래 버텼구나. 1층 제일 왼쪽에 보이는 곳이 동아문구고, 그 옆이 동아마트였다.



동작13번과 상도동 이야기


이 당시 우리 집에서 가장 가기 편한 도서관은 동작구 상도동, 장승배기에 있는 동작도서관이었다. 관악드림타운 115동 앞까지 가면 3-2번 마을버스를 탈 수 있었는데, 그 마을버스를 타면 봉천9동(현 은천동)과 상도4동을 잇는 능고개를 넘어 상도4동 약수아파트 동네 지역과 상도2동 밤골을 지나 동작도서관에 닿았다. 이 3-2번 마을버스는 현재의 동작13번 마을버스다.


이 버스는 지금도 비슷한 구간을 운행하지만 약간의 차이가 있는데, 2000년대에는 먼저 기점이 지금처럼 봉현초등학교가 아니라 드림타운 115동 앞에서 우회전해서 현 은천로33길을 따라 드림타운 108동 쪽이 기점이었고(그래서 집에서 드림타운 115동 앞까지 걸어와야 했다), 지금은 능고개를 넘자마자 국사봉터널 입구에서 바로 양녕로로 진입하지만 그당시에는 양녕로26길을 달렸다.

일호프라자 앞을 지나고 있는 동작13번 마을버스(2009년 다음로드뷰)


이 양녕로26길이 지나는 지역은 소위 '약수터'라고 불리는 지역으로 상도4동에 속해 있다. 이 지역은 훗날 내가 처음으로 '철거 직전의 아파트'를 봤던 지역이기도 했다. 2008년 생일날 친구들과 국사봉을 갔다가 상도4동 쪽으로 내려왔는데, 그 당시 약수아파트가 철거를 앞두고 있었다.

약수맨숀.png 1978년 10월 약수맨숀 공개분양 광고
약수아파트.png 1980년 12월 약수아파트 2차분양 광고

그동안 약수아파트는 상도4동(양녕로 연선)의 '랜드마크'였다. 한강대교 쪽에서 상도터널을 타고 내려오면 상도역 사거리 직진 방향 표지판에는 '약수아파트'밖에 적혀 있지 않았다. 국사봉터널이 없던 시절이기에 이 지역을 표기하기 위한 대표적 랜드마크가 약수아파트 뿐이었던 것. 약수아파트는 '대형평수(37~54평형)의 A~C동 약수맨션'과 '20평형대 1~8동 약수아파트'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지역에서 5선을 한 서청원 전 국회의원이 이 약수맨션에 30년 이상 거주하며 아파트의 역사를 함께 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1980년대 초반 '도심의 전원타운'을 표방하며 건설된 이 지역의 랜드마크 약수아파트는, 2000년대 들어서 이미 노후화되어 재건축 이야기가 나왔고, 2002년 롯데건설을 재건축 시공사로 선정하며 2003년 9월까지 철거를 완료하겠다는 계획을 세웠으나, 바로 앞 문화재(양녕대군 이제묘역) 문제로 인해 서울시에서 재건축을 반려하면서 철거가 지연되었다.

지금 안개속입니다.
동작구 도시계획심의는 통과한 상태구요, 서울시에서 설계변경을 요구하면서 반려되어 있습니다.
약수아파트 앞에 양녕대군묘가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관계로 지방문화재 심의도 따로 받으라고 하는데, 이로 인한 논란도 꽤 시끄러운것 같구요.
지금으로선 완공은 고사하고 언제나 이주를 할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 2004.11.10. 부동산뱅크 약수아파트 게시판


결국 약수아파트는 기존 계획에서 4년 반이 지난 2008년 봄이 되어서야 철거 작업에 들어간다. 그리고 바로 그때쯤에 우리가 방문을 했다. '아파트'에 익숙한 우리는 퇴거가 진행된 집 자체에는 들어갈 생각도 못했던 어린 시절 봉천11구역 등과 달리 이 퇴거 후 썰렁한 약수아파트 몇몇 동을 직접 들어가서 살펴보기도 했다. 벌써 17년이 지난 일이라 그 때의 기억을 완전히 복원하기는 어렵지만, 당시 상당히 큰 감정의 변화를 느꼈던 기억이 있다. '아파트의 마지막'을 본 게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리고 그 방문을 마지막으로 곧 약수아파트는 철거되었고, 2010년 '상도동 롯데캐슬 비엔아파트'로 재탄생한다. 그러면서 동작13번의 상도4동 구간도 변경되었다.


약수아파트와 한때 '고급 주택가'였던 상도4동을 지나 상도2동으로 들어서면 '밤골마을'이 나왔다. 당시 3-2번 마을버스가 다니던 이 구간은 재개발 진행 전이었고 무허가 주택들이 아직 많이 남아 있던 시절이라, 지금 그곳을 지나가보면 기분이 정말 이상하다. 그리고 현재의 동작13번 부강탕 버스정류장은 그 시절에도 동작13번 부강탕 버스정류장이었으며 실제로 부강탕 목욕탕이 영업을 했었다. 지금은 카페베이커리로 바뀌어 꽤 유명세를 타고 있으며 목욕탕 시절 인테리어를 많이 남겨 두고 있다. 이 때 목욕탕은 아파트 상가 목욕탕이나 여러 유명 온천들을 다녔지 부강탕은 가본적이 없는데 부강탕의 목욕탕 시절 기억이 있었다면 참 만감이 교차하지 않았을까.


그렇게 약수아파트와 밤골마을을 지나면 동작도서관이 나온다. 항상 '도서관'은 나의 아지트와도 같았다. 원당초등학교 시절부터 학교 도서관에 남아서 책을 읽다가 귀가하곤 했는데, 봉현초등학교 개교하면서 단체전학 왔더니 학교 도서관이 아직 지어지지 않아서(봉현초등학교의 학교 도서관은 2004년 10월에야 개관하게 된다.) 이때부터 3-2번 마을버스를 타고 동작도서관을 다니게 되었다.

2004년까지는 도서관에 직접 와서 읽기만 하다가, 2005년부터 대출해서 읽었다. 그 시절 어린이실 대출 기록은 현재까지도 남아서 확인할수가 있는데, 동작도서관 어린이실의 대출 기록이 찍혀 있는 걸 보면 그래 내가 여기서 자랐지 싶다.


그렇게 내 어린 시절 추억이 쌓여 있는 동작도서관은 2023년 12월부터 2024년 6월까지 반년간 대규모 리모델링 공사로 휴관했다가 2024년 7월에 재개관하면서 내 기억 속 1층 어린이실 자리가 이제 완전히 사라졌다.



학습만화가 국민만화가 되다

학습만화.png

이 시절 '만화로 보는 그리스 로마 신화'라는 책이 있었다. 단시간에 1000만부가 팔린 어마어마한 만화로 이 만화 덕에 우리 세대는 그리스 로마 신화를 대충이라도 안다고 해도 무방할 지경. '나오지 않는 19권' '역변한 19권'을 아는가?


위의 표는 한국의 2천만부 이상 돌파 만화 5권이다. 'Why?' '살아남기 시리즈' '만화로 보는 그리스 로마 신화' '보물찾기 시리즈' '마법천자문'. 이 5권의 공통점이 있다. 모두 2000년대 초반에 출간되기 시작했으며, 학습만화이고, '만화로 보는 그리스 로마 신화' 하나를 제외한 나머지는 2010~2020년대까지 아직까지도 계속 연재, 발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https://youtu.be/0vayXpmZ7jI?si=qBX889T4cxKHQ8aE

이 시리즈를 연재하면서 시기가 좋게도 왜 저런 현상이 발생할 수 있었는지 자세하게 설명한 영상이 올라왔다. 1997년 제정된 청소년 보호법의 무차별적인 검열이 출판만화계를 완전히 난도질하며 출판만화 시장이 붕괴된 상황에서, 2000년대 초반 386세대의 자녀들, 그러니까 우리들이 어린이로 접어드는 시점에 '학습만화'라는 장르가 새로 개척되고 여기서 하나 둘 씩 히트를 치는 작품들이 나오게 되고, 이를 목격한 다른 만화가들도 앞다투어 '학습만화 시장'으로 뛰어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 유튜버에 따르면, 이 시절 유독 높은 퀄리티의 아동 만화들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인재들이 거의 전부 학습만화로 쏠렸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이전부터 계속 느껴왔으며, 지금 이 시리즈를 연재하면서도 계속 느끼는 것이지만 386세대 부모들의 교육과 양육 방식, 그런 그들의 자녀였던 우리들의 생활 양식들은 우리 때 처음 만들어져서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2003년의 마무리는 이상하게도 너무나 강렬히 남아있다. 초등학교 저학년을 마무리하고 초등학교 고학년으로 올라가는 시기여서 그런 걸까?

그렇게 2003년, 초등학교 저학년의 마지막 해가 마무리되고 새로운 해가 오게 된다. 시멘트 냄새가 아직 남아있던 초신축 24층 아파트단지에 입주한지도 벌써 6년차에 접어들고 있었다.


2003년(입주 5년차), 출처: 국토정보플랫폼

2003년의 지역 지도. 당시에는 상도동의 상도래미안3차, 힐스테이트상도프레스티지&센트럴파크, 상도동더샵, 상도역롯데캐슬파크엘, 사당롯데캐슬골든포레 등이 모두 건설되기 전으로 봉천신도시 지역이 최대 신축아파트촌이었다. 위에 묘사한 약수아파트도 표기되어있으며, 국사봉터널이 없는 것도 포인트. 국사봉터널은 2004년 개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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