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5일 근무제의 도입과 가족중심 소비 확산 - 04년

제05장: 2004년

by 수연

가자 코엑스로

동아일보 2004년 1월 12일 보도
겨울방학이면 서울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에 간다. 산업전이 뜸해진 틈을 타 어린이를 겨냥한 문화행사가 줄줄이 열리고 있기 때문이다. 1층과 3층, 5층 전시공간에 지하 코엑스몰 3만6000평까지 보고 즐길 만한 것은 무궁무진하다. 그러나 관람료가 한결같이 비싸 학부모로서는 부담이 되는 것이 사실. 더구나 사전정보 없이 갔다가는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인파에 밀려 고생하기 쉽다.

2003~2005년에 걸쳐 방학에 코엑스를 상당히 자주 갔다. 언론보도에서도 언급하듯 이 시기에 어린이를 겨냥한 문화행사가 자주 개최되었기 때문이다. 입소문을 굉장히 많이 타서 당시 굉장히 많은 어린이들이 코엑스를 방문하였다. 코엑스 전시관 자체는 1980년대에 개관하였으나 이 시기의 핵심은 바로 2000년 5월에 개관한,지하의 대형쇼핑몰이었던 코엑스몰이었다. 이 시기의 전시도 전시가 핵심이라기보다는, 이 전시를 보고 지하의 코엑스몰로 이들을 유도하는게 목적이었던 듯 싶다. 이 시기 전시회 관련 1차 사료를 서치하다보니 아래와 같은 기사도 하나 나온다.

초등학교 3학년인 큰아이는 곤충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만큼 관심이 많기에, 새해 첫날 꿈에 부풀어 코엑스에서 열리는 로봇곤충 대탐험전 전시회에 다녀왔다. (중략) 결과는 한마디로 돈벌기에 혈안이 된 어른들의 모습을 아이들에게 들킨 것 같아 내 얼굴이 벌개질 뿐이었다. 곤충에 관련된 것은 커다란 곤충 모형 몇 가지와 나비 박제한 것들 외에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것도 얼마나 성의가 없는지 옆의 설명은 부실하기 짝이 없고 그나마 글자도 몇 개 찾기 힘들었다. 코너를 돌아가니 나머지 대부분은 그야말로 ‘시장판’이었다. 돈 받고 코끼리 모형 위에 한번 올라타기, 무슨 새 한번 손에 걸치게 하고 사진 찍기(자기 사진기로 찍어도 물론 유료), 인도 쪽인지 몇몇 외국인이 열심히 장신구를 팔고 있었고, 한쪽에는 공주풍의 장난감이 화려하게 전시되어 있었다. 곰돌이 인형들이 넓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고, 한 코너에는 먹자판 공간이 주욱 펼쳐졌다.

큰아이는 몹시 실망한 모습으로 괜히 부모인 우리들에게 신경질을 부리고, “괜히 왔다”며 빨리 나가자고 했다. 모든 것을 관람하는 데 채 30분이 걸리지 않았다. 둘째아이는 6살이라 곤충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데, 오히려 그 아이는 나가기를 싫어했다. 큰아이 먼저 아빠 따라 나가고 작은 아이는 엄마와 함께 다시 한바퀴를 돌았는데, 그 아이의 관심은 온통 분홍공주 침대, 목걸이, 반지 이런 것들이었다.

돈도 아깝지만, 시간이 더 아까웠고, 가장 큰 손실은 뭐니뭐니해도 어른들의 상혼에 상처받은 동심이었다. 정말 알차고 내용이 충실한 ‘곤충’ 전시회를 원하는 어린이나 부모님들이, 앞으로 우리들과 똑같은 경험을 하고 상처받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무엇보다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전시회는 적어도 동심에 상처를 주지 않도록 최소한의 배려가 있었으면 좋겠다. 또한 문화관광부와 같은 정부기관이나 시민단체도 이와 같은 어린이 대상 전시회에 대해서는 모니터링 제도를 통해 바람직한 전시회의 정착에 관심을 기울여 주었으면 좋겠다.

김OO/서울 노원구 공릉2동
한겨레 2004.01.06.「상술 넘치는 로봇곤충 전시회」


처음에 인용한 동아일보 기사에서도 '관람료가 한결같이 비싸 학부모로서는 부담이 되는 것이 사실' 이라는 표현과, '지하 코엑스몰 3만6000평까지 보고 즐길 것이 무궁무진하다'라는 멘트가 함께 있는 것이 걸린다. 결국 전시회를 갔다가 자연스럽게 지하 코엑스몰도 구경하게 되는건 당연지사였고, 아직도 코엑스를 상상해보라 하면 지금과는 완전 딴판인 이 2000년대 중반의 코엑스몰이 우선적으로 떠오르게 된다.

출처

게다가, 이 시기 코엑스몰은 여섯개의 구역을 특유의 색깔과 테마로 위의 사진처럼 '열대길' '바다길' 등으로 명명해놓고 꾸며 놨었다. 색감도 확실히 대비되도록 하여 새로운 세계에 탐험을 온 느낌이 물씬 났는데 2010년대 이후의 코엑스는 그런 느낌이 다 사라져서 참 안타깝다. 요즘은 2000년대 초중반에서 한번 리뉴얼을 한 상태였던 2010년대 초반 코엑스몰 시절도 '추억' 소리 듣는 세상이다.



주5일 근무제의 도입과 가족중심 소비문화의 등장

현재, 우리 근로자들의 오락문화는 직장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고 음주 등 소비성 활동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가족단위의 여가활동은 휴일에는 가능하지만 휴식∙수면∙TV보기 등으로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이따금씩 외식을 한다거나 여행을 가는 것이 가족끼리 보낼 수 있는 가장 큰 가족 행사다. 이러한 현상은 앞서 살펴본 바에 의하면 경제적 여유가 없다는 데 가장 큰 원인이 있고, 다음으로 장시간의 근로로 인해 시간이 없거나 심신이 피로한 경우가 주원인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직장을 중심으로 소비하는 금액을 가족과 함께 사용하는 것으로 대체하고, 비용이 필요한 외식이나 여행으로 가족의 여가생활을 구성하지 않고 정기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취미생활을 개발해 낸다면 이를 위한 경제적 부담은 감소할 수 있다.

주5일 근무제는 가족단위로 할 수 있는 여가활동의 영역을 확대해 주며 시간적으로 불가능하던 정기적인 가족단위의 활동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김승택 「주5일 근무제가 사회경제적으로 미치는 영향」 2002, KCI


이 시기에 주5일근무제가 도입된다. 2002년부터 공무원, 증권사를 중심으로 주5일 근무가 도입되기 시작하였으며, 2003년부터는 대기업에서도 주5일 근무제가 시행되기 시작했다. 2004년 7월부터 본격적으로 주5일제가 전국적으로 도입되었으며, 이와 함께 일선 학교에서도 2004년부터 주1회 토요자율학습일을 거쳐 2005년 주1회 토요휴업일, 2006년부터는 주2회 토요휴업일 체제가 정착하게 된다. KCI에서 2002년에 밝힌 것과 같이 주5일 근무제의 도입은 '직장 중심 소비문화'를 '가족 중심 소비문화'로 전환하는 것에도 그 목적이 있었다. 조주은에 따르면, 이 시기 주5일제 실시와 함께 강조되는 '가족여가화 담론'이 있었고 우리 가족은 이를 충실히 이행했다. 이 가족여가화 담론의 두 가지 축이 '외식 문화'와 '숙박여가 문화' 였다.

2004년 7월 1일부터 시행된 주5일제는 한국 사회에 가족 단위의 여가문화를 본격적으로 확산시키는 계기를 마련하고 있다. 여가공동체로서의 가족은 새롭게 의미를 부여받고 있고, 외식산업을 포함한 여가사업이 성장하고 있다.

조주은, 『기획된 가족』



외식 문화의 발달


이 시절 386세대와 그 가족들을 겨냥한 여러 상술들은 효과가 참 좋았다. 예를 들어 우리 가족이 자주 외식을 하던 지역의 요식업집 중 하나였던 '낙지한마리수제비 상도'는 2004년 이 해 매일경제 이코노미 커버 스토리에 기사가 났는데, 이 부분이 의미심장하다.

총 투자 비용은 보증금 1억원(월세 800만원)과 인테리어, 초도물건 비용을 포함해 3억원. 그는 상도동에 90평 대 대형 음식점을 열었다. 상권이 썩 좋은 곳은 아니라 투자비용 3억원은 넓은 평수에 비하면 적은 금액이었다. 그러나 박 사장은 가족 단위 고객을 확보하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다. 또 열이면 열 모두 맛이 좋다고 평가했기 때문에 단골 확보가 가능할 것으로 예상했다. 이런 박 사장의 예상은 결과적으로 적중했다. 평일, 주말을 가리지 않고 가족 단위 외식 행렬이 줄을 이었고 맛있다는 소문이 나면서 단체 손님이 크게 늘었다.

매일경제 2004.07.29. 「Cover Story- 낙지한마리수제비 - 박운룡 상도점 사장」

이 시기는 노량진1동-상도2동 경계 지역(만양고개)과 본동 서부지역(노들고개)에 신축 아파트촌이, 그리고 내가 자란 봉천동 북부 지역(봉천고개)에 아파트촌이 발달해 있었다. 전부 구릉지대였다는 특징이 있는데, 1970~1980년대 달동네가 구릉지대에 발달했고 1990~2000년대에 이 달동네를 철거하고 들어선 지역들이 젠트리피케이션으로 신중산층 주거지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 당시 사장의 목표는 '가족 단위 고객'이었고 실제로 '가족 단위 고객' 유치에 성공하며 크게 성공할 수 있었다. 이 수제비집은 현재까지 영업을 하고 있고, 나도 굉장히 좋아하던 집이라 유독 기억에 남는데, 결국 당시 차로 움직이던 '신축 아파트촌 입주민들'의 입소문을 타면서 성공한 케이스라고 할 수 있겠다.

동아타운21 (2008).png 우리 아파트 앞에 있던 오피스텔 '동아타운21'의 2000년대 중후반 모습

가볍게 걸어서 외식을 즐기는 경우도 많았는데, 특히 당시의 아파트 바로 앞 오피스텔에 입주했던 '알미골 해물 칼국수'와 '숏다리 감자탕'은 우리 가족의 단골 방문 장소였다. 동아타운21은 우리가 막 아파트 입주할 즈음에는 공사중이었고 2003년에 준공되었는데, 이 때 칼국수집과 감자탕집이 각각 1층과 지하1층에 넓게 자리를 잡았다. 이 두 식당을 우리 가족끼리 가기도 하고, 다른 가족들도 모여서 외식을 이 곳에서 하기도 했다. 숏다리 감자탕집은 요즘 말로 '키즈존' 비슷한 공간까지 갖추고 있었다. 칼국수집 왼쪽에 보면 노래방과 PC방도 보이는데, 외식을 하고 다 같이 노래방에 가서 노래를 즐기기도 했다.


비슷한 대형 감자탕집이었던 '이바돔감자탕'의 사례에도 비슷한 내용이 나온다. 똑같은 메뉴에, 어린이놀이방 설치 등의 행보 등. 그리고 동아타운21의 이 칼국수집과 감자탕집처럼 정확히 이 시기인 2000년대에 전성기를 맞았다가 2010년대에 슬슬 쇠락하기 시작하고 2020년즈음 소멸한다. 사실 코로나19는 마지막 트리거였을 뿐이고, 소위 '중산층 정상가족'이라고 불리던 4인 가족 전성시대가 끝나면서 외식 프랜차이즈 전성시대도 끝난 것이라고 보면 된다.

이바돔은 이바돔감자탕 등 200여개 대형평수 매장을 운영해온 건실한 프랜차이즈 기업으로 코로나19로 인해 외식시장 침체와 고객방문율이 떨어지면서 그동안 기업운영 상황을 극복하지 못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바돔은 1999년 이바돔감자탕으로 외식업에 진출한 이후 2001년에 출시된 등뼈찜이 크게 성공하였고 이후 매장 안에 어린이놀이방을 포함하는 등 대규모 매장 개설을 통해 기존 감자탕이 서민적이었던 것을 가족 단위의 외식문화로 변화시키는 등 관련 업계를 선도해 왔다.

머니S 2021.02.07. [단독] 이바돔감자탕, 기업회생절차 신청


저 시절 칼국수집, 감자탕집, 지하1층 감자탕집에서 노래방으로 이어지는 복도 등은 항상 바글바글하고 활기가 넘쳤던 기억이 난다. 2000년대 이 동네의 그 활발함을 기억하고 있는 나는 지금 동아 본상가도 지금의 을씨년스러운 모습을 보면 기분이 착잡해지지만, 대형 식당 2개에 PC방, 노래방까지 있던 이 상가의 적막함을 볼 때마다 생각이 참 많아진다고 해야 하나, 동아 본상가는 동아태권도와 관악해성교회 두 군데가 그나마 1999년 입주 이래의 역사를 25년 넘게 그나마 지탱해주고 있지만, 이쪽 동아타운21 상가는 초기 역사를 지탱해주던 대형 식당들과 PC방, 노래방이 모두 사라져서 더 그럴지도 모르겠다.

침체된 외식시장은 2000년대 들어서면서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 2004년 도입된 ‘주 5일 근무제’ 역시 가족 외식 트렌드에 변화를 불러왔다. 금요일이면 동료들과 술을 마시는 대신 일찍 퇴근해 가족들과 외식을 하고 대형마트 등에서 야간 쇼핑을 하는 이들이 늘어난 것.

동아일보 2015.05.18. [가정의 달 특집 커버스토리]한국 외식문화 변천사



콘도 전성시대와 신중산층의 여가생활


아빠 차의 기억이 많다. 당시 우리 집에 있던 차는 르노삼성의 SM5로, 그 당시 중산층의 상징과도 같은 자동차였는데, 명절이나 휴가철 외에도 이 차를 타고 여기저기 많이 다녔다. 목적지는 다양해도 결국 그 목적지 방향으로 가는 몇몇 간선도로를 타기 위해서 거치는 동네 도로는 정해져 있었는데, 대표적인 3가지 루트가 기억에 남는다.


경기 동부 방향으로 나갈 때는 집에서 숭실대입구역으로 내려가서 숭실대 옆쪽으로 해서 흑석동을 거쳐 동작대교에서 올림픽대로를 타는 루트.

경기 서북부 방향으로 나갈때는 집에서 상도터널, 한강대교를 지나 한강대교 북단에서 강변북로를 타는 루트.

기타 남부지방으로 내려갈 때는 서울대입구역으로 내려가서 남부순환로를 쭉 타다 서초IC에서 경부고속도로를 타는 루트.


이 루트가 많이 기억나는 이유는 그만큼 '가족들과의 마이카 여가생활'을 많이 했기 때문일 것이다.


서울 안에서의 여러 문화생활은 평일에 엄마와 함께 하거나 했는데, 주말에 아빠 차를 타고 가족끼리 다 같이 교외 여가생활도 꽤 많이 했다. 특히 이유를 모르겠는데 하남의 미사리조정경기장(미사경정공원)을 꽤 자주 갔다. 지금은 미사경정공원 앞까지 다 신도시이던데 천지개벽할 노릇. 지금 생각해보면 아빠 직장이 직주근접이였기에 가능했지 않을까 싶다. 아빠 회사는 용산에 있었다. 내가 자란 봉천 신도시에서 아빠 회사로 출발-도착을 찍어보면 차로 9분, 버스로 15분이 찍힌다. 출퇴근시간에 한강대교와 상도터널 정체가 있긴 하지만 이정도면 거의 옆에 있는 거나 마찬가지다.


주말을 활용한 소위 '당일치기 여가'가 끝이 아니었다. 주5일 근무제 도입과 함께 가족중심의 주말 숙박관광 수요가 증가하기 시작했다. '콘도' 문화가 유행하면서, 우리 가족 역시 이 시기부터 콘도를 꽤 자주 가기 시작했다. 이 해(2004년)부터 2000년대 내내 1년에 세네번 정도 가족휴가는 항상 콘도에서 보냈다. 골프장과 연계된, 강원도 원주에 있던 한솔오크밸리와 경기 광주시 곤지암에 위치한 곤지암리조트를 주기적으로 방문하였으며, 그 외에 온천과 연계된 백암한화리조트 등을 방문한 기억이 난다. 실제 이 시기 보도되는 기사들을 보면 '콘도회원권'이 신중산층에게 상당히 대중화되어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고, 개인이 구매하는 경우 외에도 법인이 콘도회원권을 소유하고 임직원들에게 사내 복지로 제공하는 경우도 많았다. 예를 들어 우리 가족이 주기적으로 방문하던 곤지암리조트의 경우 아버지 회사에서 소유하고 있는 콘도여서 임직원 할인이 됐다.


2004년 1월에는 처음으로 스키를 타러 갔다. 목적지는 경기도 용인 양지면에 있던 양지파인리조트였다. 그 해 시작해서 2013년 1월까지 거의 10년간을 매년 1회씩 양지파인에서 스키를 탔는데, 그 매년 1회 갔는데도 실력이 꽤 붙어서 열여섯 열일곱쯤 됐을 땐 중상급 코스를 무리없이 수행하기도 했다.


왜 이 시기에 이런 가족중심 여가가 발달할 수 있었는가? 내가 1~3장에서 밝힌 것처럼 이 시기에 서울 내부 젠트리피케이션이 가장 활성화되어 이런 여가 문화를 즐길 수 있는 신중산층이 서울 내부에 많이 자리잡아 직주근접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가족과의 여가, 휴양생활은 2010년대 이후 경인지역에 거주하며 서울로 출퇴근하는 많은 직장인들에게는 이룰 수 없는 꿈이다. 이들은 평일에 출퇴근하며 이미 많은 체력을 소모해 주말에 아이들과 놀아줄 체력이 부족하다. 퇴근 시간에 한 번 사당역 4번출구로 나가보라. 엄청나게 긴 줄이 형성되어 있다. 광역버스가 아무리 빗자루 배차로 온다고 해도 입석금지 정책 때문에 많이 태우지도 못한다. 하염없이 그 줄에서 30분씩 대기한다. 철도가 있어도 크게 도움이 되진 않는다. 요즘 30~40대가 주로 모여사는 2010~2020년대식 신도시는 역세권인 경우가 많지 않다. 역에 도착해도 시내버스로 환승해야 하는데 시내버스의 배차간격이 좋지 않다. 악순환이다. 직장 생활 자체도 사회생활로 전쟁인데, 통근 스트레스도 이전 세대와 견줄수 없을 만큼 크다. KCI가 주5일 근무제 도입 직전인 2002년에 언급한, '여가를 충분히 즐길 수 없는 이유는 장시간의 근로로 인해 시간이 없거나 심신이 피로한 경우가 주원인이라 할 수 있다'가 '장시간의 통근 시간으로 인해 시간이 없거나 심신이 피로한 경우'로 바뀌었을 뿐이다.


이 시기의 중산층 담론이 1기 신도시에만 함몰되어 '직주근접'이라는 키워드를 놓쳤기 때문에 현재 계속해서 관련 정책 실패가 이어지고 있다고 보면 된다.



문화 소양 키우기

동아일보 2001년 7월 11일 보도

코엑스 전시회 외에도 여러가지 문화활동 체험을 한 기억이 있다. 혜화에 있던 국립서울과학관, 여의도에 있던 LG사이언스홀, 서대문구에 그 당시에 개관했던 서대문자연사박물관(2003년 개관), 우리 지역에 있던 호림미술관(1999년 신림동으로 이전)과 남서울미술관(2004년 개관) 등등.

어린 시절에 예술작품을 자주 접하는 것이 성인이 된 뒤에도 품위있는 문화생활을 할 수 있는 토양이 마련된다는 점에서 온가족이 함께 찾아보는 것도 뜻 깊을 것 같다.

기자의 마지막 멘트가 핵심을 찌르고 있다. 우리는 이미 이 어린 시기부터 '아비투스'를 쌓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또 2003년 ~ 2004년에 폭발적 인기를 끈 공간이 있다. 부천의 아인스월드와 야인시대 촬영장이었다.

동아일보 2003년 11월 17일 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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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까지 정확히 기억나는 2004년 5월 1일, 토요일.

내가 신문에서 보고 가자고 했다. 어릴때부터 뭐 해달라고 조르면 더 혼나고 안 해주시는 집안 환경이였어서 내가 부모님께 뭘 하자고 제안하는 건 저때쯤 되면 많이 없어졌는데, 저거는 신기하게도 또렷하게 기억난다.


아인스월드는 '소인국 컨셉'으로 빠르게 언론을 타며 유명세를 얻었고, 당시 '야인시대' 열풍을 등에 업고 먼저 인기를 끌었던 '야인시대 세트장'과 시너지 효과로 2003~2004년 부천 영상단지는 최대 전성기를 맞았다.


그러나 전성기는 너무나도 짧았다. 나 역시 04년 5월 1일, 이날 기억은 정말 좋게 남아 있으나 문제는 재방문, 재재방문할 유인이 너무나도 부족한게 문제였다. 결국 우리 가족에게도 이 날은 처음이자 마지막 부천 영상문화단지 방문이 되었고, 불과 2년 뒤인 2006년부터 이러한 보도들이 나오기 시작한다.

영상문화단지에 입주한 시설이 운영난으로 관리를 소홀히 해 곳곳에 쓰레기와 오물이 쌓여 관람객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있다.
영상단지에 입주한 시설은 건립비용을 빠른 시간에 충당하기 위해 지속적인 시설투자를 하지 않았다. 개장 당시 전시물을 수년째 계속 보여주고 일회성 축제와 이벤트 등 획일적인 프로그램에 의존하다보니 시민이 등을 돌렸다.

동아일보 2006.03.16. 「이슈 점검/애물단지로 변한 부천영상문화단지
관람객들은 참신하고 활기찬 프로그램 부족, 일회성 축제와 이벤트 남발, 편의시설 부족, 시설 관리 소홀로 인한 노후화 등에 대해 큰 불만을 표시하고 있다. 지난 주말 이곳을 찾은 김영숙(35·주부·인천 부평구 청천동)씨는 “2년만에 가족들과 다시 찾아왔는데 새로운 볼거리가 거의 없고 옛날 전시물들만 그대로 있어 실망스럽다”고 말했다.

문화일보 2006.05.23. 「부천영상문화단지 애물단지 전락」


이 기사들은 2003~2004년 전성기 시절 이곳을 방문한 관광객의 수와 입장료 수입의 규모까지 공개하고 있는데, 역설적으로 전성기가 얼마나 대단했는지도 파악할 수 있다. 야인시대 세트장과 아인스월드는 전성기라도 있었지 그 후에 들어온 애견테마파크나 동춘서커스 등은 전성기도 없이 조용히 사라졌으며, 야인시대 세트장과 아인스월드조차도 1~2년의 전성기 이후 10~15년간 어찌저찌 연명하다 모두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부천영상단지의 짧은 전성기와 몰락은 한국 사회를 너무나도 잘 나타내주고 있다. 건립비용을 빠른 시간에 충당하기 위해 지속적인 시설투자를 하지 않는다던가, 일회성 축제와 이벤트를 남발한다던가 하는 지적들은 단순히 이 지역의 몰락만이 아니라 대한민국 전체의 문제로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고질적인 문제들이다.



예술 소양 기르기

이때부터 공장형 피아노학원이었던 '숲속음악학원'을 그만두었지만, 아예 음악 강습 자체를 그만둔건 아니었다. 우리 집 안방에는 외가집에서 가져온 피아노 한 대가 있었는데, 피아노 강사가 우리 집으로 방문해서 강습을 하는 1대1 과외를 진행하게 된다. 나랑 동생이 딱히 예술쪽으로 재능이 있거나 진학을 목적으로 한 것도 아니였지만, 그 시기의 '교양' 같은 거였다.


피아노는 여섯살때 예원 피아노 시절부터 해서 저때쯤 되면 체르니 40을 하고 있었다. 그다음에 서브 악기로 나는 플룻 동생은 바이올린을 했는데, 이것은 2003년 9월부터 학교에서 방과 후에 특기적성 수업으로 들었다. 장소는 학교였지만 외부강사가 초빙되어 플룻 수업을 진행했다. 그래도 나름 플룻을 3년 해서 초등학교 6학년때 학예회에서 플룻연주를 하기도 했다. 그다음 미술은 아파트 상가에 있던 3층 해성교회(2장에서 묘사한 바 있는, 지역개척교회) 교육관에서 토요일마다 했다. 그 교회는 설립 때부터 지역봉사에 굉장히 적극적이었던 곳으로 당시에 대학생 2~3명이 미술봉사를 했었다. 내가 기억하는 3층 교육관이 지금 교회 본관 자리다. 당시의 해성교회 본관은 4층에 있었는데 축소된 것.

김택수 목사는 관악해성교회를 담임하고 있다. 관악해성교회는 경기도 안양시 평촌에서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교회로 소문난 해성교회가 지난 99년 11월 서울 봉천동에 개척한 교회다. 해성교회의 지역사랑운동은 관악해성교회에도 그대로 적용됐다. 관악해성교회는 교회 인근의 임대아파트에 거주하는 노인과 장애인, 소년소녀가장들에게 이어졌다.

서울시 관악구 봉천동에 위치한 해성 지역아동센터는 2000년 2월 20일 공부방을 설립했고, 지난 2008년 3월 28일 정식으로 아동복지시설로 등록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표는 관악해성교회 김택수 목사이고, 지역아동센터 시설장은 김성숙 사모가 맡고 있다. 기사 전문

사실 서치해서 몇 개 나오는 기사들은 4장에서도 언급했듯 임대 아파트 아이들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지지만 내가 겪었던 2000년대 중반은 막 그렇게 임대 아파트 친구들만 있었다던가 그런 기억은 없고 그냥 친구들의 배경에 전혀 관심 없이 다 같이 어울렸던 기억으로 남아 있다. 묘사가 되지 않을 뿐이지 나같은 1단지 분양 아파트 출신도 많았다. 지역 아동 관련 프로그램이 풍부한 건 그때도 맞긴 했다. 어쩌면 내가 '어린이-청소년 시절'을 보낸 2000년대는 소셜 믹스 정책이 취지대로 잘 흘러간 시대였을지도 모른다. 반작용으로 지금 분명히 기득권인 자들이 '서민 코스프레'를 하는 원인이 되기도 하지만 말이다. 어쨌든, 이 교회는 '1999년 이후 봉천2동 아파트촌'의 산증인이나 다름없는 지역 자원이기 때문에 의미가 큰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가족이 '당시 초신축 아파트'에 입주했던 1999년 11월과 정확히 같은 시기에 들어왔으니.


다시 예술 소양 이야기로 돌아가면, 아래 기사에서 2000년대 중반 당시 학부모들의 자녀 교육 과정을 묘사하고 있는데 공감되는 것이 상당히 많다. 그리고 굉장히 자연스럽게 초등학생들에게 예술소양을 길러주고 있었다는 부분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유통가의 한 광고 기사에서는 당시 초등학생들에게 유행하던 캐릭터들, 그리고 이 당시 초등학생들의 '예술소양 길러주기'의 일환으로 플룻과 바이올린이 일반적인 흐름이 되던 시기를 스무스하게 표현하고 있다.

》서OO씨 딸 방학계획
※각각의 공부시간은 되도록 30분을 넘지 않도록 끊어준다. 공부 외에 피아노와 플룻교습을 받고 주말엔 바람을 쐰다.

》김OO씨 아들 방학계획
-전부터 하던 바이올린과 미술은 방학 중에도 계속할 생각.

경향신문 2004.12.16. 「[女스토리]학부모에게 듣는 겨울방학지도 경험담 및 요령」
LG이숍은 오는 24일까지 `2005 초등학생 가방 페스티벌`을 펼친다. 헬로키티, 바비, 메이플스토리 등 어린이용 학생 가방, 보조 가방 세트를 1만?7만원에 내놓는다. 아톰 가방 세트는 1만4800원, 유희왕 가방 세트는 1만6800원에 저렴하게 판매한다. 행사 기간 구매 고객 중 추첨을 통해 총 8명에게 구입 비용 100%를 돌려준다. 나머지 45명에겐 야마하 플룻, 유니버셜 바이올린 등 여러 가지 경품을 선물한다.

헤럴드경제 2005.02.21. 「기획특집 - 졸업ㆍ입학선물 I」


2007년에 방영된 SBS 드라마 '강남엄마 따라잡기'에 나오는 학생들이 정확히 나의 또래들인데, 바이올린이나 플룻 등을 다재다능하게 연주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 시기 신중산층 이상 어린이들에겐 이미 초등학생때부터 체화하고 있는 문화였고, 이게 당시의 드라마에도 그대로 반영된 것이다. 이 장면은 재밌게도 13년 뒤인 2020년, 당시 학생 역을 맡았던 박은빈 배우가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드라마에 주연으로 출연하며 재조명되기도 했다.


이 시기에 문화예술교육에 대한 정책적 지원이 본격적으로 논의(2003년)되고, 문화예술교육 진흥법이 공포(2005년)된건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아테네 올림픽과 핸드볼

1896년부터 지금 현재까지 매 4년마다 올림픽이 꾸준히 열리고 있다. 나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올림픽은 2004년 아테네 올림픽이다. 이 이후로는 아테네 올림픽만큼 열정적으로 올림픽을 보지 않는다. 아무래도 지금처럼 스마트폰 등이 발달한 세상도 아니었기 때문에 TV 말고는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요소가 많지 않기도 했다. 컴퓨터는 집에서만 할 수 있었고 그것마저 부모님께서는 주말 1시간 등 엄격한 제한을 두곤 했다.


말리에게 3대 0으로 지다가 3대 3으로 따라붙었던 축구,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었던 탁구의 유승민, 한국 선수와 한국 선수가 맞붙은 여자 양궁 개인전 결승전 등등 기억에 남는 장면이 많은데, 그 해 올림픽에서 가장 손바닥에 땀을 쥐고 본 경기는 바로 여자핸드볼 결승전 대한민국 대 덴마크 전이었다. 그 때 여자핸드볼 경기를 예선부터 몇경기씩 계속 봤었는데, 결승전은 그 정점이었다. 그 경기에 대한 설명은 이곳에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그 경기 이후 '핸드볼'이란걸 알게 된 나는 동생이랑 집에서 핸드볼을 했다. 아니 아파트에서 그게 가능하다고? 말도 안된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가능했다. 아래의 평면도를 보자.


출처


동생 방의 문이 하나의 골대였고, 발코니 미닫이문을 하나 열면 그게 반대편 골대였다. 정확히 일직선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집 안에 경기장이 완성되었다. 경기에 사용할 공은 탱탱볼로 지정했다. 무거운 공은 위험하기도 했고 행여나 집의 다른 물건을 깨면 문제가 될 수 있었으니 말이다. 나비가 그려진 초록빛 탱탱볼이었다. 아무리 탱탱볼이어도 공이 거실을 날아다니는데 엄마가 좋아할리 만무하긴 했으나 그래도 컴퓨터를 주말에 1시간씩 제한하는것마냥 엄하게 금지하진 않아서 꽤 자주 동생과 '탱탱볼을 사용하는 핸드볼'을 했다.



그 시절 32평, 우리 집 내부 이야기

저 평면도를 보면 화장실에 욕조가 있고 침실마다 발코니가 연결되어 있다. 현관 옆에 있는 침실은 내가 아주 어릴 때는 3장에서 언급했던 오디오방이었고, 곧 동생 방이 되었던 곳인데 그곳과 연결된 발코니는 방의 발코니가 아니었고 주방에서 연결되는 발코니로 세탁기와 분리수거 쓰레기통이 자리하고 있던 창고 비슷한 곳이었다.


주방과 연결된 방은 내 방이었다. 저 방과 연결된 발코니는 진짜 발코니가 맞으나 2001년에 들어온 '내 집 마련' 집(사실상 '집'하면 생각나는 곳인, 10년 거주 16년 부모님께서 소유한 그 곳)에선 그 발코니가 없었다. 그곳까지 방을 확장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거의 기본적으로 저 면적까지 방을 확장하는 추세인걸 생각해보면 원래 발코니가 있는 방이었던 곳을 개인적으로 확장하던 그 2000년대 초반의 분위기가 결국 기본값을 발코니 없는 방 확장으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겠다. 1999년에 처음 들어갔던 집은 저 자리의 발코니가 있었고 그 발코니에 아동용 매트도 까는 등 나름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던 기억이 어렴풋하게 있다.


그런데 황당한 것은 이때까지 발코니 확장은 불법이었다. 그런데도 그 당시 2000년 이후 신규입주 아파트의 60% 정도인 203만 가구가 발코니를 개조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었다. 불법화가 사실상 유명무실해지자 결국 2005년 발코니 확장이 전면 합법화되었다.


'유명무실 불법' 시대엔 적어도 거실과 연결된 발코니 확장은 생각도 하지 않았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탱탱볼을 이용한 핸드볼 때 골대로 쓰기도 했고 저 발코니 안은 전형적인 한국 아파트의 발코니처럼 쓰였는데, 박인석 교수의 『아파트 한국사회』에서 그 전형적인 한국 아파트의 발코니를 잘 묘사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아파트에 살면서 수납공간 부족 문제를 그리 심각하게 느끼지 않는다. 수납공간이 부족하다면서 무슨 얘기냐고? 이 의문은 한국 아파트가 수납공간 없이도 버틸 수 있게 해준 요인들을 이해해야 비로소 풀린다. 첫째 요인은 안방 장롱으로 대표되는 수납가구 전통이다. 웬만한 집은 모두 장롱을 갖고 있다. 안방 한쪽 벽면을 채우는 장롱은 아직도 가장 중요한 혼수품 중 하나다. 장롱 말고도 작은 옷장이나 서랍장 하나쯤은 다들 갖고 있기 마련이니 상당량의 수납공간을 입주자들이 직접 갖고 다니는 셈이다.

이보다 더 결정적인 둘째 요인은 발코니다. 새시로 내부 공간화된 발코니는 풍성한 수납공간을 제공한다. 한국 아파트의 발코니는 그야말로 종합 서비스 공간이다. 후면 발코니에는 세탁기, 전면 발코니에는 빨래 건조대가 자리 잡지만 그 못지않은 것이 수납공간이다. 발코니 마구리는 창고나 선반 달린 수납공간으로 사용되기 마련이고 나머지 공간도 온갖 물품 보관 장소로 사용된다.

박인석,『아파트 한국사회』

박인석 교수는 이 문단 뒤로 2005년 발코니 확장이 합법화되면서 사정이 달라졌다고 서술한다. 하지만 이 '직전 세대' - 는 방의 발코니는 확장했어도 거실의 발코니를 싹 없애고 거실을 확장하는 경우는 드물었기에 박인석 교수가 묘사한 그대로 후면 발코니에는 세탁기, 전면 발코니에 빨래 건조대가 있었고 전면 발코니 양쪽에 창고가 있었다. 그리고 정확히 당연하리만큼 안방 한쪽에 장롱이 있었다.


우리 엄마는 집이 어지러운 것을 결코 두고보지 못하는 성격이였다. 나는 청소기 소리에 약한 PTSD가 있는데 엄마가 청소기를 돌리기 시작하면 100% 잔소리가 이어졌기 때문이다. 공간을 모두 각 맞춰 정리해야했기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기도 했다. 여하튼 그래서 '나머지 공간도 온갖 물품 보관 장소로 사용되지'는 않았고 발코니 중앙 부분은 나름대로 발코니처럼 썼다. 가끔 기분 전환 하고 싶을땐 저 발코니에 멀리 외가에서부터 들고 왔던 역사적인 나무 원탁 펴놓고 거기서 공부를 하기도 했으니. 발코니가 있는 아파트에서 자란 사람으로서, 발코니는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그리고 욕조. 예전 아파트들은 반드시 욕조가 있었지만 지금은 30평대 아파트에서도 관리의 어려움, 수도비 부담을 이유로 욕조를 철거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아졌고 1~2인 가구가 거주하는 소형 주택에서는 아예 보기 힘들다. 지금 독립하여 살고 있는 곳은 물론 본가에도 욕조를 철거해버렸다. 아직도 집안 욕조에서 반신욕을 하던 시절이 그립다.



슬슬 떠나는 초기 입주자들

요즘 거기 팔고 나가는 추세 아닌가요~?
제 친구도 방배동으로 이사갔는데... 2년이 지나갔으니 이제 슬슬 새집 메리트도 사라져 가고 교통이나 교육면에서 별로 안좋으니까 돈있는 사람들은 좀 떠나가는 추세인거 같던데요...
- 2003.07.17. 부동산뱅크 관악드림타운 게시판
봉천동에 사시는 분들 중에는 초등학교나 중학교까지 사시다가 자녀들이 고등학교에 진학할 나이가 되면 봉천동을 떠나시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실제로 많이 보았습니다. 보낼만한 고등학교가 없다고 하시더군요. 바로 이것이 문제입니다. 관악구를 내집마련의 장소가 아닌 거쳐가는 곳으로 여기는 것이 우리가 바꾸어야 할 현실인 셈이지요.
- 2004.01.10. 부동산뱅크 관악푸르지오 게시판

이 시기는 유독 신축 갈아타기의 텀이 굉장히 빠른 시기기도 했다. 슬슬 벽산블루밍, 동부센트레빌, 관악푸르지오 등 마지막 봉천 신도시 매물들이 입주를 시작하던 시기가 2003년~2004년 이 즈음이었다. 내 친구들 중에서도 이 아파트들로 이사가는 친구들이 생겼다. 1999년에 처음 입주한 봉천동에서 처음으로 친해진, 당시 제일 친했던 피아노학원 베프도 이맘때쯤에 벽산블루밍으로 이사를 갔다. 현대시장 가까운 동으로 이사를 가서 학교랑 많이 멀어졌는데, 2번 버스에서 막 관악01번 버스로 바뀐 마을버스를 타고 우리 학교에 계속 다녔다. 이 벽산블루밍아파트 기억이 또 있는데, 친구가 이사갔던 곳이 꼭대기층이었다. 벽산블루밍 꼭대기층은 신기하게 복층 구조로 되어 있었는데, 이전의 다락 구조를 현대 아파트식으로 재구성하였고 더 올라가면 옥상을 테라스처럼 이용할 수 있었다. 같은 벽산블루밍 브랜드아파트의 꼭대기 복층 구조를 묘사해놓은 블로그가 있으니 참고하면 좋다. 이 친구네 집에서 1박2일 지내면서 저 테라스에서도 놀고 수다떨고 했던 기억이 난다. 이 구조가 사실상 '펜트하우스'의 원조다.


이렇게 봉천동 안의 신축 아파트로 이사간 경우는 어쨌든 계속해서 만날 수 있었지만, 아예 봉천동을 떠나는 초기 입주자들과, 그들의 자녀들이었던 친구들이 상당히 많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크게 두 부류로 나뉘었다. 첫째 강남, 서초 지역으로 이주하는 사례, 또는 둘째 이 시기 한창 열풍이 불었던 용인 등 분당 아래 만들어지던 으로의 이주.


강남, 서초 지역으로 이주하는 사례도 역시 두 가지로 나뉘는데, 첫 번째로 봉천신도시 조성 초기 부동산의 증언("여기는 재개발 전부터 돈 있는 사람들이 딱지를 사려고 판잣집을 여러 채 확보했던 사람도 많았고 지금은 강남에 돈 있는 사람들이 재건축 기간 동안 잠깐 옮겨오거나 투자하려는 문의가 많아요") 처럼 강남 재건축아파트를 분양받고 입주 전까지 대체주거지로 사용한 경우(아래 예시)

서울 봉천동에 사는 정모씨(42)는 지난 2003년 강남구 도곡주공 재건축 아파트 33평형을 분양받아 내년 2월 입주를 기다리고 있다.

한국경제 2005.09.01. 「부동산 8.31 대책 이후」


두 번째로 아이들이 크면서 교육 이슈로 인해 집은 그대로 두고 강남으로 '임시 이주' 하는 경우. 이 경우도 여력이 되는 경우 매매로 넘어가는 경우가 있었다. 우리 집의 경우도 결국엔 몇 년 뒤지만 이 루트를 따르게 된다.

유주택 전월세 거주 가구는 2005년~2010년 사이 급격히 증가했으나 2010년 이후에는 하향 안정하는 추세임. 이들은 사교육비 지출이 많고, 가구주 연령은 작으며 서울에 거주하는 특성이 있음.

김민철, 「유주택 전월세 가주 가구의 실태 및 정책적 시사점」


조장훈 『대치동』에서 발췌.

강남, 서초로 이주하는 두 사례 중 첫 번째 사례가 바로 '연어족', 두 번째 사례가 바로 '대전족'이다. 즉 이 사람들은 온전히 '강남 주민들' '대치동 주민들'로만 연구적으로 소비되어 왔으나 사실 강남 인근지역의 합동재개발아파트 지역들과도 면밀한 연관이 있는 것이다. 소위 '연어족 존'에 있는 아파트들의 준공일은 대부분 2005~2006년에 집중되어 있다. 이들이 이 '강남 재건축 아파트 1세대' 완공 전인 90년대 후반부터 00년대 전반까지 사당 우극신, 행당 대림한진, 봉천신도시 등에서 거주하다 이 시기에 되돌아갔다.


한편 경기도 용인의 경우 당시에 버블세븐이라고 불리며 엄청난 이슈가 됐었다. 보통 어딜 가나 근방의 아파트들과 자신들의 아파트를 비교하기 마련이고 우리 동네 역시 같은 양상을 보이고 있었지만, 이 2000년대 중반에 "우리 아파트가 용인보다 못 할 이유가 뭡니까!" 라는 글까지 올라올 정도였으니, 그 광기를 짐작할 수 있다.


내 친한 친구 중 한명도 이 시기에 용인 죽전으로 이사를 갔다. 이제 초등학교 4~5학년, 고학년이 되었기 때문인지 부모님께서는 친구들끼리 이 죽전 집으로 놀러가는 걸 허락해주셨다. 서울대입구역에서 2호선을 타고, 당시 분당선이 연장 개통된지 얼마 되지 않았던 선릉역에서 환승, 종착역인 보정역까지 갔다. 보정역에는 친구 어머니가 마중나와 계셨다. 작년에 경험했던 미국 집만큼은 아니지만, 이 때의 용인 친구 집 역시 상당히 넓고 으리으리한 것으로 기억한다.


안 그래도 용인 열풍인 와중에 친구가 실제로 용인으로 이사를 가기까지 했고, 그리고 위에 언급한 "용인보다 못 할 이유가 뭡니까!" 글에서도 나타나듯 이 시기로부터 봉천동은 크게 오르지 못했고, 용인은 크게 올랐기에 우리도 가느냐 마느냐 얘기가 잠깐은 있었던것 같다. 그때 아버지께서 이랬단다.


"서울 절대 안 뜬다."


결과적으로 아빠의 혜안은 적중했다.


2004년(입주 6년차) 봉천동아아파트 전경. 출처: 부동산뱅크 (cho*o*i*) 님. 숲속음악학원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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