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02장: 2001년 '내 집 마련'
사립초등학교의 문을 두들기다
2001년,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해가 밝았다.
처음에는 근처의 사립초등학교인 중대부속초등학교에 나를 보내려고 했다. 어느 겨울날 엄마 손을 잡고 중대부초를 한 번 갔던 기억이 난다. 우리 봉천동 신축 아파트 주민들은 사립 초등학교에 아이들을 보낼 능력이 충분히 되는 사람들이었다. 사립초등학교는 1997년 IMF 외환위기 직후 인기가 잠시 주춤했지만, 2000년대에 접어들며 다시금 인기를 회복하고 있었다. 특히 영어 조기교육, 특화된 예체능 수업 등 국공립 학교에서 제공하지 못하던 다양한 프로그램이 사립학교의 경쟁력으로 부각되었다.
그러나 추첨에서 당첨되지 못하고 공립초등학교를 가게 된다. 다만, 위에 언급된 '영어 조기교육'이나 '특화된 예체능 수업' 등은 이 지역에 새로 정착한 계층을 겨냥하여 지역에 건립된 어학원이나, 신축 공립학교에서도 제공하게 된다.
이 시기 놓친 학생들이 정말 아까웠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다음 해엔 서울시내 사립 초등학교들이 추첨이 아닌 독자적인 입학전형을 통해 학생들을 선발할 수 있게 해달라고 시교육청에 건의하기도 했다.
미완의 초등학교, 상가 학원이 통학을 책임지던 시대
우리 아파트 바로 위에는 초등학교가 한창 공사 중이었다. 우리 아파트 분양이나 입주 광고를 할 때, 7호선 역세권 예정지라는 말과 함께 바로 앞에 초등학교가 들어설 예정이라는 점이 가장 큰 장점으로 내세워졌었다. 그러나 막상 입학 시기가 되어도 그 학교는 완공되지 않았고, 아파트 아이들은 집에서 1.5km나 떨어진 서울원당초등학교로 배정되었다. 유치원 시절엔 사설 유치원에서 아파트 단지로 통학버스를 보내주었지만, 공립 초등학교에서는 그럴 수 없었다. 이 때 아이들의 통학을 책임진 자들이 바로 상가에 들어와 있던 학원들이었다.
내가 다니던 상가 4층의 예원피아노는 이 무렵 ‘숲속음악학원’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옆에는 지역개척교회였던 관악해성교회가 있었다. 건너편 절반은 태권도학원인 '동아태권도'가 위치하고 있었다. 이 세 곳은 아침마다 아파트 단지에 봉고차를 한 대씩 대기시켜 아이들을 학교에 실어 날랐다. 우리는 이 차량들을 ‘숲속차’, ‘태권도차’, ‘교회차’로 불렀다. 그리고 상가에 있는 점포들의 스티커를 잔뜩 붙이고 다니던 차량 하나는 '연합차'로 불렸다.
지금 생각해보면, 학원이나 교회를 다니지 않는 아이들은 그 1.5km를 걸어 다녀야 했던 건데, 당시 아무도 문제 제기를 하지 않았다. 학원과 아파트는 이미 한 몸처럼 공생하는 관계였고, 아이들이 방과 후 상가에 있는 학원에 가는 건 당연한 시대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숲속차는 아파트 단지에서 아이들을 태우고 큰 길로 나선다. 우리 지역의 랜드마크 중 하나였던 강남고려병원을 지나 시장통으로 들어간다. 마치 똥파리길을 탐사할 때마냥 미로를 탐사하는 기분이 또 들기 시작한다. 그 시장통을 다 넘어가면, 우리 학교 원당초등학교가 나온다. 숲속차는 여기서 아이들을 내려 준다. 지금 보면 굉장히 짧은 거리지만, 여덟 살 어린이에겐 꽤 긴 길이었다.
숲속차 안에서 우리는 3,6,9 게임을 주로 하곤 했다. 3,6,9 게임은 그 당시에 한참 인기를 끌던 프로그램인 '출발 드림팀' 에서 유래한 게임이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짧지만 여덟 살 아이에겐 길었던 그 통학 시간에 은근히 재미있는 놀이였다. 이 시기에는 이렇게 지상파의 예능 프로그램의 영향으로 유행한 놀이가 아이들에게 많이 퍼졌는데, 다음 해의 '쿵쿵따'가 이 유행의 정점을 찍었다. 아직도 우리 세대라면 이상해-해질녘을 잊지 못할 것이다.
원당초등학교 앞에는 '아저씨 문구'라는 문구점이 하나 있었다. 우리 아파트 어린이들에게 문구점의 기능은 '우리 상가'였던 행복상가의 동아문구가 담당하고 있었지만, 이 '아저씨 문구'가 유명했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바로 '아폴로'라는 100원짜리 과자를 파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아저씨 문구'는 이 아폴로를 사기 위한 아이들이 모여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절대로 돈을 함부로 주지 않았던 우리 부모님 덕에 아폴로를 사 먹을 돈이 없었던 나는 그 문전성시를 보며 그저 부러워만 했을 뿐이었다.
원당초등학교는 서울대입구역 인근에 위치해 있었지만, 우리들의 놀이 바운더리는 그쪽이 아니었다. 수업이 끝나면 다시 숲속차나 태권도차, 연합차, 교회차를 타고 아파트 단지로 돌아왔다. 우리 친구들은 모두 아파트 단지 주민들이었고, 비슷한 경제적 수준을 공유하고 있었다.
이로부터 24년이나 지났지만, 현재도 이 문화의 흔적이 남아 있다. 봉현초등학교 개교 전 최초 입주민들의 초등학생 자녀들이 그 통학차량을 타던 곳이 바로 이 자리였다. 입주 25년이 지난 2024년 공식적으로 이 자리에 학원차량 정차구역과 정류장이 설치된 것을 보고 많이 놀랐다. 시간이 지나도 암묵적인 룰은 변하지 않았다.
강남 이주민들의 입주
이 아파트로 이사올 때 옆에 크게 공사중이었던 그 대형 아파트가 이 해에 완공되고 입주를 시작하게 되었다. 당시 단일 재개발사업 진행지역으로는 우리나라 최대규모였다. 꽤 이른 시기부터 '관악드림타운'이라는 이름이 정착하긴 했는데, 막 완공되던 당시에는 모두가 '삼성 동아 아파트'라고 불렀다.
분명 우리랑 2년 차이밖에 나지 않는 아파트였는데, 뭔가 많이 달랐다. 일단 아파트 입구마다 보안문이 설치되어 있었다. 우리까지만 해도 없었던 장치였다. 그걸 보며 괜히 부러워했던 기억이 난다.
이곳은 2006년도에 이 아파트를 타깃설정하여 분석한 학위논문 자료가 존재하여 당시의 생생한 기록들 일부를 찾아볼 수 있다. 해당 자료를 확인해보면 거의 모든 이주민이 서울 지역에서 전입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강남-서초 지역에서 이주한 이주민들도 많았다. 강남지역 초기 재건축이 이때 진행되면서 임시 거주지로 이 곳을 택하는 경우, 부모님이 강남3구에 살면서 신혼집 등을 이곳에 마련하는 자식세대들의 경우들이 있었다.
*인터뷰 시점은 2005년이다. (출처: 김희정, 「주택재개발이후 주민의 정당지지성향의 변화 - 봉천5동을 사례지역으로」, 2006, 서울대학교 교육학석사학위논문)
봉천5동 주민A씨 인터뷰(33세, 남)
연구자: 그럼 이지역이 재개발 된 이후에 이사를 하신거군요. 그럼 이사하시기 전에는 어디에 사셨나요?
주민A: 오금동에서 부모님과 함께 살았죠.
연구자: 특별히 이곳에 신혼집을 마련하게 된 이유가 있습니까?
주민A: 직장이 강남인데 이 지역이 강남지역에 비하여 집값이 적당하면서도 교통이 편리해서였죠.
부동산 중개업자 C씨 인터뷰(53세, 여)
연구자: 재개발 이전과 이후 봉천5동이 달라진 모습을 좀 설명해 주실수 있나요?
중개업자C: 여기 진짜 많이 변했죠. 여기(관악드림타운)도 그렇고 저기 푸르지오나 우성도 그렇고 아파트 하나도 없었어요. 모두 빨간 벽돌로 지은 다세대 주택이 주였고 그나마 그것도 좋은 집이지. 봉천5동은 진짜 허름한 집도 많았어요. (중략) 지금은 관악구에서 제일 살기 좋은 데가 여기죠. 아파트 값도 제일 비싸고
연구자: 재개발 이후에 봉천5동의 주민들은 그 이전 주민들에 비하여 경제적 지위가 높아졌다고도 볼 수 있을까요?
중개업자C: 그건 당연하죠. 여기 이사 들어오는 사람들이야 분양권을 프리미엄 주고 산 사람들이니깐 당연히 부자들이 많죠. 여기 프리미엄이 몇천만원씩 하는데, 그리고 원래 살던 사람들 중에 세 들어 살거나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은 다 떠나고 여기서 분양 받은 사람들은 그나마 다 집채는 가지고 살 던 사람들이니깐 좀 괜찮았던 사람들만 남은 셈이지. 요새 어느 동네를 막론하고 서울시내에 내 집 갖고 산다하면 다 왠만한 거죠 뭐.
부동산 중개업자 D씨 인터뷰(52세, 남)
연구자: 2001년 입주 당시부터 계셨겠군요. 실제 거주지도 이쪽이신가요?
중개업자D: 집은 목동입니다.
연구자: 재개발 이전과 이후 봉천5동이 달라진 모습을 좀 설명해주실 수 있나요?
중개업자D: 이전 모습은 나는 잘 몰라요. 그 전에는 판자촌 무허가 건물이 있었고 아주 빈민촌이었다고 알고 있어요. 새로 아파트 생기면서 사람들이 아주 싹 바뀌었죠.
연구자: 많은 분들이 새로 이주해 오셨다는 말씀이신 것 같은데 새로 오신 분들은 주로 어떤 분들이신가요? 연령대나 경제적 지위에 있어서 말이죠.
중개업자D: 연령대야 평수에 따라 다르겠죠. 2,30평대는 젊은 사람들이 많고 40평대는 나이 드신 분들이 많고. 경제적 지위는 뭘 물어보시는 건지?
연구자: 재개발 이후 주민의 경제적 지위는 향상되었다고 보시나요?
중개업자D: 그렇죠. 예전에 있던 사람들 대부분 다 딴 데로 갔죠. 여기는 재개발 전부터 돈 있는 사람들이 딱지를 사려고 판잣집을 여러 채 확보했던 사람도 많았고 지금은 강남에 돈 있는 사람들이 재건축 기간 동안 잠깐 옮겨오거나 투자하려는 문의가 많아요.
기존 원주민과는 전혀 다른 이주민이 이 지역에 새롭게 정착하였으며, 이들은 기존의 주민과는 다른 경제적 지위를 보유하고 있다.
강남 1세대의 봉천신도시 이동은 다른 문헌이나 자료에서도 뒷받침되고 있다. 예를 들어『대치동』을 쓴 조장훈은 대치동 1세대가 1996년부터 2000년대 초반 사이에 대체로 대치동을 떠났다고 서술하고 있다. 그 역시 '분당과 일산에 신도시가 조성되던 시기'라고 표현을 했으나 이 시기는 분당, 일산 신도시가 조성되던 시기가 아니라 서울 각지의 합동재개발 신도시가 조성되던 시기였다. '강남 1세대의 합동재개발사업지 이동'은 2000년대의 부동산 커뮤니티였던 '부동산뱅크 게시판'에서도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저는 현재 관악드림타운에 살고 있으며 이전에는 잠원동, 방배동, 사당동, 행당동의 아파트에 살아 본적이 있습니다. 거의 30년 정도 아파트에서만 살아왔습니다. 2001년도에 이곳으로 와서 2년간 전세 살다가 지금은 동네가 너무 좋아 그냥 사버렸습니다. ^^
(중략)
우리 가족 이곳에서 너무나 쾌적하고 편리한 생활을 하고 있어 더 이상의 욕심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울 집사람이나 저나 강남 8학군 출신입니다.
2003.07.16. 부동산뱅크 관악드림타운 게시판
2003년에 '30년 정도 아파트에서만 살았다'는 것은 1970년대부터 아파트에 살았다는 것으로 이들이 바로 강남 1세대다. 보면 잠원동, 방배동을 거쳐 사당동, 행당동으로 이동했다고 하는데 동명만 적혀있는데도 이 두 곳이 어디를 의미하는지 알수 있다. 사당 우극신(우성, 극동, 신동아)과 행당 대림한진 지역이다. 이들의 그 다음 목적지가 바로 이곳 봉천. 모두 서울 내부 합동재개발지역이다. 강남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자녀'들이 커서 분가할 때 성동, 동작의 신축 아파트에서 신혼을 시작하는 경우는 지금도 현재진행형으로, 흑석동, 사당2동, 사당3동, 옥수동을 중심으로 2010년~2020년대식 신축 아파트들이 올라가고 있고 이곳에서 이제 2대를 넘어 3대 대물림이 발생하고 있다.
386 화이트칼라들의 입주
원래 1999년 11월 이 아파트로 들어올땐 107동의 19층에 살았다. 초신축 아파트의 고층에서 피아노 배우던 아이.. 그때 나는 그런 포지션이었다.
그러다 2년 뒤인 2001년이 되어서, 이사를 다시 가는데 저번처럼 멀리 가는 이사는 아니고, 우리 아파트 안에서 다른 집으로 이사를 간다고 했다. 그리고 그 집에서 남은 8년 3개월을 보내게 된다.
즉, 이 집은 그전까지의 세입자로서의 집이 아니라, 부모님께서 첫 '내 집 마련'을 한 장소였다.
김정훈, 신나리의 『386 세대유감』을 보면 1960년대생, 86세대의 '서울시 아파트를 사는 데 걸리는 시간'을 분석한 데이터가 수록되어 있다. 연평균 가계소득 데이터는 통계청 가계동향조사 마이크로데이터를, 서울시 아파트 평균가격은 KB국민은행 주택가격 통계와 한국감정원 자료를 활용한 것인데, 이 세대의 경우는 '10.1년'으로 나온다.
2001년은, 1990년에 입사한 아버지께서 직장 생활을 시작하신 지 12년차, 1992년에 결혼하신 부모님께서 연차로 10년을 맞는 해였다.
처음에 우리 아파트의 기원을 알게 되었을 때, 그렇다면 우리 집도 재개발조합원이었을까? 하고 여러 서칭을 해봤었다. 그런데 아무리 파악을 해봐도 그건 아닌것 같았다.
찬찬히 알아보니 '일반적인 전세 계약기간 2년'과 '양도세 비과세 기한'이 키였다.
당장 포털사이트에 '입주 2~3년차 아파트 노려라'라는 키워드로 검색을 해보면,
2000년대 초반부터 현재까지도 계속해서 해당 문구의 보도들이 쏟아져 나와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양도세 면제 매물이 대거 풀리는 시점이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 가족이 내 집 마련을 한 2001년에는 이러한 조세특례제한법 특례가 시행된 바 있다.
이에따라 올해(2001년) 연말까지 3년이상 보유하지 않았더라도 1년이상 주택을 보유하다 매각하고 신축 분양주택을 새로 사면 양도 차익중 10%만 양도소득세로 부과한다.
이는 이 전해(2000년)까지도 90년대 호황기에 대규모로 재개발에 들어간 지역들이, 국민의 상당수가 가계소득 감소 등을 겪은 IMF 이후에 대거 풀리면서 부동산 침체가 지속되고 있었기 때문에 전격적으로 시행된 정책이었다. 우리 단지의 경우 이 정책이 시행된 시점이 1999년 하반기에 입주를 시작하여 첫 전세 시기(2년)이 끝나는 시점과 맞물렸고, 옆 아파트(관악드림타운)은 물론 '갈아탈' 다른 신축 아파트단지도 아직 풀리던 시점이었기 때문에 매도자, 매수자 모두에게 완벽한 타이밍이었다. 이러한 흐름은 2000년대 전반 내내 지속되었으며, 2년 텀으로 완공된 관악드림타운 역시 비슷한 흐름을 보였다.
그러나 지금은 관악드림타운의 가격이 가장 약세에 있는 시기입니다.
입주 꼭 2년되는 시점입니다. 전세주고 보유하고 있던 사람들이 전세 만기가 되고 전세값이 떨어지자 대거 매도로 전환한 것입니다. 지금 부동산에 가면 매물이 엄청 많습니다. 신문에서 가끔 '내집마련 실수요자 입주 2년 아파트 노려라!' 그런 기사도 나오지요.
대우 푸르지오와 벽산도 입주가 얼마남지 않아 공급이 소나기처럼 쏟아지고 있습니다. 이 때 급한 사람은 가격을 많이 내려 팔 수밖에 없고 조망권이라든가 동 위치라든가 어떤 점이 조금이라도 약세에 있으면 가격을 내려 부를 수밖에 없지요. 지금이 그렇습니다.
2003.07.16. 부동산뱅크 관악드림타운 게시판
1999년 분양가 상한제가 폐지되면서 고급 아파트 건설이 본격화된 시대적 흐름도 영향을 끼쳤다. 이는 1990년대 초반 재개발에 참여한 외지 가옥주들에게 '갈아탈 다음 타자'를 열어주었고, '이 지역에서의 수익 실현 마무리’의 기회를 제공했다. 이들은 철거와 착공을 주도한 뒤, 아파트가 완공되자 대부분 입주보다는 전매를 선택했다. 그들이 목표한 것은 실거주가 아닌, 단기적인 시세차익이었기 때문이다.
이 곳이 재개발된다는 소문이 나돈 것은 1990년 1월.
외지인들이 10여명씩 갑자기 몰려와 당시 평당 150만~170만원씩 하던 택지를 평당 25만~40만원씩 더 얹어줄테니 팔라고 한 것. 이때만 하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좋은값이다' 싶어 땅을 마구 팔았고 외지인들 손에 이지역 땅이 상당 부분 넘어갈 무렵 갑자기 '재개발조합설립추진위를 구성한다'느니, '조합정관을 만든다'느니 하는 재개발관련 소문이 무성해졌다.
그러다 1990년 4월경 땅을 소유한 한 외지인이 다른 외지인에게 평당 300여만원에 땅을 팔았고 이 소문이 온 동네에 퍼지면서 동네 땅 시세가 일제히 300만원선까지 올라갔다. 물론 땅을 평당 300만원에 사고 판 몇몇 사람은 재개발붐을 일으켜 매매차익을 취하려고 들어온 부동산투기꾼들이다.
이때부터는 '봉천동이 재개발된다'는 소문이 온 서울시내 부동산업계에 떠돌게되고 집 한칸 마련해보고자 하는 실수요자들이 모여들어 이미 오른만큼 올라버린 땅을 산다. 물론 종전보다 훨씬 비싸지만 이들은 몇평만 사둬도 아파트분양을 보장받을 수 있다는 기대때문에 그리 꺼려하지 않는다. 이때쯤이면 이지역 땅주인 중 외부인의 비중이 종전 50~60%에서 90%까지 올라간다. 조합설립위의 구성, 사업계획 결정, 조합설립 및 사업인가 등 절차를 밟아나가면서 땅값은 조금씩 더 오르게 되지만 실수요자끼리의 거래인만큼 오르는 폭이 그리 크지는 않다.
1991년 5월 27일 동아일보 「투기꾼 활개치는 재개발 지역」
외지 가옥주가 증가하면 할수록 철거는 순조롭게 진행된다. 거주 가옥주에게는 이 지역이 생존을 위한 주거지이지만 외지인들은 그와 달리 단기간의 전매차익을 노리고 투기적 투자를 한 것이므로 가능한 한 철거 및 아파트 건설이 신속하게 진행될수록 그들의 이해를 보다 쉽사리 관철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부동산 투기를 통해 주택을 구입한 외지인은 주택 그 자체보다는 토지에 대해서 권리를 행사함으로 재개발사업에 따른 개발이익을 얻는 데 목적이 있기 때문에 오래 전부터 주택을 구입한 외지 가옥주들은 이주비가 지급되자, 조속한 아파트 착공을 위한 여건조성을 위해 이주비 500만원을 받고 곧 철거에 들어갔다. 철거가 진행된다는 것은 가시적으로 착공이 임박함을 뜻하는 것이어서, 다시 부동산 투기붐이 조성되기 시작하여 부동산 소개소에 외지인들이 붐비기 시작했으며 이들은 주택을 구입할 때 철거를 조건으로 하기 때문에 외지인의 주택구입은 바로 가옥철거로 이어졌다.
1988년 1월경에는 주택전매율이 90% 정도가 되면서 철거율은 70%를 상회하게 된다.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현행 재개발방식하에서 도시저소득층인 가옥주가 철거 후 아파트에 입주하기까지는 상당한 시일이 필요하고 아파트 입주시 추가로 자금을 부담해야 하기 때문에, 이 지역 가옥주의 90% 이상이 가옥을 전매하고 이 지역을 떠났다. 재개발조합원은 부동산 투기로 개발이익을 획득하려는 외지인으로 대체되었다. 현행 합동재개발은 조합원의 가옥 전매를 1회에 한해 허용하고 있으며 이는 사실상 조합원이 외지인이 될 수 있는 길을 터 놓고 있고 어떤 의미에서는 권장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조은 조옥라, 『사당동 재개발지역 현장연구』 2장 지역형성과 해체
결과적으로, 90년대 초반 철거와 투기를 주도했던 1세대 외지 가옥주들은 이 때 실수요층에 재개발아파트를 매각한 이후 강남 재건축아파트나 이후 '버블 세븐'으로 등장하게 될 용인, 이 시기즈음부터 슬슬 이야기가 나오던 판교 등으로 자산을 이동시켰고, 그 자리를 실거주 기반의 신중산층이 채우게 되었다.
생애 주기상 내 집 마련의 요구가 가장 높은 시기는 30대 중반이다. 전 세대를 거쳐 30대 중반 이후 자가(自家) 점유율 상승 현상이 관찰된다. 386세대가 그러한 단계를 지나던 1990년대 초중반은 한국 부동산 역사상 전무후무한 가격 안정기였다. 1993년에서 2003년까지 10년간의 가격 안정기에 386세대는 본격적으로 자산을 매입한다. 1993년 22%에 불과하던 386세대의 자가점유율은 2003년 51%까지 2배 이상 상승했다.
김정훈 심나리, 『386 세대유감』 3부 헬조선과 386 전성시대
아파트 생활수준도 높습니다. 대기업 회사원, 서울대학교 교수님들도 많고요
2004.03.30 부동산뱅크 성현동아아파트 게시판
여러 자료를 종합해볼 때 이 시기 주요 비강남지역 출신 초기입주민들은 '386 화이트칼라층'과 '지식인층'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다만 '386 세대유감 자료'에는 마찬가지로 한 가지 잘못 짚은 지점이 있다. 386세대가 30대 중반을 지나던 시기는 1990년대 초중반이 아니라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이다. 당장 그들이 '대학생'으로서 참여했다고 알려지는 6월 항쟁이 1987년 아닌가. '1기 신도시'에 끼워 맞추다 보니 저런 문장이 나왔던 것으로 보인다. 1기 신도시에 입주했던 주류는 우리 부모님 세대보다 약간 앞선 베이비붐 세대였고, 386 세대들이 주류로 들어왔던 곳은 서울도심 합동재개발지역이었다.
우리 집은 2001년에 '내 집 마련'을 함으로써, 저 10년 시기 '386세대 자가점유율' 29%p 상승에 기여했다. 이 집을 매각하기까지는 이로부터 16년이 걸리게 되는데, 이 기간동안 "이 때 봉천동을 산 게 가장 후회된다"고 자주 말씀하시곤 했다. 소위 '자유로운 상승 이동'의 마지막 시기였다.
최종적으로 정리하자면, 봉천신도시의 초기입주민 구성은 386세대 화이트칼라+지식인층+자녀 입시 마무리로 대치동 등에 계속 거주할 필요가 없는 강남 1세대 또는 그들의 자녀(분가) 등으로 이루어졌다.
그렇게 놀이터뷰 집에 왔다
이 기억이 이 아파트에 처음 완공과 함께 입주하던 1999년인지, '내 집 마련'으로 이 집에 들어오던 2001년인지 헷갈리긴 하나 둘 중 하나인건 확실하다. 이삿짐 정리를 마치고 밖으로 나가니 아파트 내부(99년이면 우리 아파트고 01년이면 옆 아파트였던 드림타운일 것이다)에서 야시장 비슷한 걸 하고 있었다. 산이 그려진 기다란 풍경화가 하나 있었는데, 우리는 그 때 그 그림을 사서 거실 소파 뒤에 걸어놨었다. 창밖으로 관악산이 보이고, 소파 뒤로는 그림 속 산이 보이는, 그런 새 집으로 왔다.
새로 이사갈 집은 3층이었다. 큰 거실이 남향으로 나 있는 전형적인 한국식 아파트인 만큼, 거실에 서면 세 동에 감싸여 있는 놀이터가 한 눈에 들어왔다. 놀이터뷰로는 정말 로얄뷰였다. 놀이터에 누가 와 있는지 집 안에서 파악이 가능했다.
우리 아파트 아이들이 모이는 메인 놀이장은 우리 집에서 훤히 내려다보이는, 그 106동 놀이터였고, 특히 나중에 다루겠지만, 2005년도에 메이플 딱지가 유행할때는 아랫동 친구들까지 전부 106동 놀이터로 올라왔다.
이러한 '아파트 놀이터'의 추억은 우리보다 앞 세대들에서도, 같은 아파트 단지 출신이였다면 똑같이 찾아볼 수 있는 장소기억이었다. 1970-1980년대 일부 지역에서만 나타나던 이러한 '아파트 단지 문화'가 1990년대와 2000년대를 거치면서 서울 전역으로, 전국(대전 둔산, 부산 해운대 등)으로 확대되고 있었던 것이다.
일상생활에서의 반복되는 놀이의 경험, 동네친구들을 만나 사귀었던 최초의 사회적 경험에 대한 기억들이 켜켜이 얹혀있는 장소가 놀이터였다. 놀이터는 참가자들이 언급한 옥외공간 중에서도 빈도수가 가장 높게 나타났으며, 자신들의 지역적 정체성과도 연결되는 뚜렷한 장소성을 가지고 있다.
임준하, 「아파트 키즈의 아파트 단지에 대한 장소애착과 기억 - 둔촌주공아파트 사례를 중심으로」, 2017, 서울대학교 도시계획학 석사학위논문
놀이터 원정을 가기위해 길을 창조하던 우리들
우리 아파트 안에서 좀 질린 우리는 마침 입주가 시작됐던 관악드림타운(당시엔 삼성동아아파트로 불렸다) 놀이터로 원정을 떠났다. 103동 놀이터에 있는 긴 빨간 드럼통 같은게 최대 명물이었던 우리에 비해 그 아파트 놀이터는 해적선을 모티브로 한 놀이터도 있고, 거대한 U자형 기구를 형성해 놓은 놀이터도 있었다. 그렇게 '삼성동아아파트 놀이터 원정'이 시작됐다.
이러한 '놀이터 원정' 사례 역시 1980년대 아파트 단지들에서도 나타나는 현상 중 하나였다.
집 근처가 아닌, 멀리에 있는 다른 놀이터를 찾아가는 '원정'이 시작되었다. 어린 아이들에게 둔촌주공아파트는 광활한 곳이었고, 끝없는 미지의 땅이었다. 그리고 이 '원정'은 설레임 가득한 어드벤쳐였다. 내가 아는 세계는 늘 내가 가본 곳까지만이었고 몇 걸음 더 나아가 새롭게 만나는 공간은 늘 내가 가본 곳까지만이었고 몇 걸음 더 나아가 새롭게 만나는 공간은 늘 내가 상상하던 것을 뛰어넘는 놀라운 것을 보여주었다. 각각의 놀이터는 크기나 배치에 따라 그 나름의 고유한 분위기가 있었다. 놀이기구도 조금씩 달라서 새로운 놀이터에 가면 그 곳에 맞는 놀이 노하우를 터득하고 적응해야 했다. 사람을 만나고 함께 어울리는 법을 배울 수 있었던 곳, 그리고 그런 삶의 무대가 한 곳이 아니라 다 다른 모습으로 이 세상 곳곳에 숨어 있다는 사실을 배울 수 있었던 '우리들의 놀이터.'
이인규, 『안녕, 둔촌주공아파트 3 - 어린시절 우리들의 놀이터』
그런데 바로 앞 세대 아이들과 달리 하나 이상한 점이 있었다.
우리 집에서 그 아파트는 우리 아파트 공원 바로 뒤에 있었는데, 그렇게 넘어갈 수가 없었다. 공원 끝에 경사면이 있고, 그 위에는 작은 담이 세워져 있었던 것이다.
'아니, 이 담만 넘으면 저기로 훨씬 빠르게 갈 수 있잖아! 왜 저 입구까지 빙 돌아서 나가야 되는거야?'
여덟 살 나는, 아파트 단지가 게이티드 커뮤니티(gated community)를 지향하며, 주변 지역과 '격리'되기 위해 지어진 공간임을 인지하지 못했다. 그저 '왜 가까운 길이 있는데 돌아가야 하는가?' 라는 질문만 던졌을 뿐이었다. 우리는 107동 뒤 공원에서 삼성동아아파트 놀이터로 가기 위해 공원에 설치된 담을 넘어서 다녔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아이들이 저 담을 넘어 드림타운 방향으로 다닌다는걸 알아챈 어른들은, 그 담들에 철조망을 덧붙이고 나무를 추가로 심었다. 그렇게 25년이 흐른 현재 그 담은 뾰족한 철조망과 풍성해진 나무로 덮여 있다. 은천로39길에서 우리 아파트를 바라보는 담이다. 원래는 저렇게 나무가 풍성하지 않았고 철조망도 없었다.
우리의 원정 장소는 그곳뿐이 아니었다. 뉴 밀레니엄 시기 봉천동 산동네는 온 동네가 다 공사판이었고, 그 공사판 중 1992년에 완공된 큰길 건너편의 현대아파트 하나를 제외하곤 제일 첫번째로 완공, 입주한 동아아파트 어린이에겐 동네 곳곳이 탐험지였다. 봉천 2-2구역은 원래 봉천 2구역이 모종의 사유로 1985년에 일두아파트로 일찌감치 재개발된 봉천 2-1구역과, 14년 뒤 재개발 된 봉천 2-2구역으로 나눠지는 과정에서 묘하게 빈 공간들이 남게 되었고 그 공간들은 수풀들로 방치된 채 막혀 있었다.
그런 공간들 탐험을 했다. 소위 개구멍을 지나서. 지도만 보면 일두아파트가 동아아파트에 폭 감싸안아진 모양을 하고 있는데 실제로 그 지역을 가보면 깜짝 놀라게 될 것이다. 고도부터가 다르고 절대 왕래를 할 수 없도록 공간구조가 짜여져 있다. 나중에 언급할 임대아파트와도 고도를 의도적으로 다르게 설계를 해두어서, 분양아파트와 임대아파트 간의 경계가 의도적으로 구축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취학 이전~초등학교 저학년의 굉장히 어린 나이였고, 또 초기 입주민이였기에 가질 수 있는 기억이었다. 지금은 저 공간에도 빽빽한 밀도로 나무들이 자라 있다.
분명 초신축아파트의 어린이였지만, 그때의 난 참 와일드하게 놀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