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8세 영어교육과 이마트 시대 - 02년

제03장: 2002년

by 수연
동아일보 2003년 9월 29일 보도. 이마트 용산점이 그때도 있었다면 용산점을 갔을 텐데 구로점을 갔던 이유. 2000년대 초반엔 용산점이 없었다.

도심 신중산층이 만들어낸 이마트의 대중화

이 시절 우리의 주말 풍경을 상징하는 공간이 있었다. 바로 이마트였다. 월마트나 까르푸가 있긴 했지만 이마트만큼 대중화되지 못했고, 제일 대중화된 대형마트는 이마트였다. 이 당시에는 용산점이 개점하기 전이었기 때문에, 우리 동네에서 가장 가까운 이마트는 구로공단역 인근에 있는 이마트 구로점이었다.


지하주차장 시대가 열렸지만 아직 2010년대 이후처럼 집에서 바로 주차장으로 내려갈 수 있는 구조는 아니었던 시절. 그래도 집에서 나오면 바로 몇 걸음 안가서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가는 입구가 있었고, 그렇게 자연스럽게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가 아빠 차를 타고 아파트 단지를 떠났다.

국토종합플랫폼(2002). 여기가 지하주차장 입구이다.

은천길과 봉천로를 지나 도림천 고가도로를 넘어 구로1교 사거리에 도달하면 "이제 다 왔구나" 싶었다. 복개도로와 도림천 고가도로를 쌩쌩 달리는 구간이 얼마나 재미있었는지 모른다. 그땐 다들 봉천로를 ‘복개도로’라고 불렀다. 봉천천을 덮고 만든 도로였기 때문이다. 이마트 구로점 주차장은 지하가 아니라 지상에 있다. 주차장 타워로 올라갈 때의 그 느낌을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함께 가요 이마트 행복해요 이마트 해피해피해피 이마트♬
한국에 대형 할인마트가 생긴 것은 1996년 유통시장 개방 이후이다. 서울과 수도권 중심으로 증가하기 시작해서 1996년 이전 28개에 불과하던 대형마트는 11년 동안 무려 10배 가까이 증가했다. 이것이 도시인들의 삶을 바꾸어놓고 있다. 대형마트는 의류, 일용잡화, 내구소비재 등 실용적인 생활용품뿐 아니라 식품 매장과 식당을 겸비하고 있고, 낱개보다 박스나 번들로 판매한다. 따라서 대형마트는 시장 보기와 아이 돌보기를 겸할 수 있는 큰 카트를 구비하고 있다. 그리고 대부분 서점이 입점해 있기 때문에 초등학교 연령의 자녀들은 어른들이 장을 보는 동안 책을 볼 수도 있다.

조주은, 『기획된 가족』


어릴 때부터 책을 좋아했던 나는 부모님께서 장을 보고 계실 때 서적 코너에 남아서 책을 읽곤 했다. 당시 좋아하던 책 중 아직도 제목이 기억나는 건 정영애 작가님의 동화 '내 친구 엄지'가 있고, '수민이의 일기'도 좋아했다. 또한 이원복 교수의 '먼나라 이웃나라' 시리즈가 '새 먼나라 이웃나라'로 리뉴얼을 했던 시기였는데, 하나하나씩 모아가는 재미가 있었다.


이마트 쇼핑을 마치면 꼭 계산대 뒤에 무더기로 쌓여있는 폐종이상자 더미에서 한두개씩 종이상자를 가져와 쇼핑한 물건들을 포장하고, 커다란 박스테이프로 묶어서 자동차 트렁크에 넣는게 '국룰'이었다. 이것도 언제부턴가 법률로 막혔다고 들었다. 내 경험들보다 약간 앞이었던 '대형마트 셔틀버스 운행 금지'도 그렇고, 이상할정도로 대형마트에 대한 규제만을 늘려오던 시절이었다.


대형마트는 이 시기부터 태동한 신중산층의 상징으로 여러 연구자들이 증언하고 있다. 조주은의 『기획된 가족』에서 묘사된 대형마트와 관련된 내용들을 살펴보자.

많은 양을 한꺼번에 구입할 만한 경제적 자원이 있어야 쇼핑이 가능한 대형 할인마트는 자동차로 이동해야 해서 시간이 드는 단점도 있다. 하지만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중간계급 여성들에게 대형마트는 장을 보는 가사노동의 의미를 덜 드러내면서 소비의 가족화를 가능하게 할 뿐만 아니라 문화생활, 외식을 제공하는 장으로 기능한다.
주요 참여자들의 가족행사로 여겨지는 주말 마트 나들이는 경제적 자원뿐 아니라 노동의 주기가 일정하고 노동력 마모가 크지 않은 화이트칼라의 특성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중간계급인 이 책의 참여자들은 주말에 한 번 마트에 가서 장을 보는 데 20만원 정도의 비용이 지출된다고 말한다. 그러한 비용은 남편은 증권회사에 다니고 본인은 중앙부처 5급 사무관으로 일하는 여성한테까지도 "과소비"로 느껴지기도 한다. 따라서 가끔은 집 근처 재래시장이나 슈퍼마켓을 이용하지만 한 달에 두 번 정도는 가족들과 대형마트에서 쇼핑을 하고 있다.


한편, 이러한 '신중산층'은 1기 신도시 등에도 물론 많았지만 서울 내부, 특히 재개발 완료지에 존재하는 경우도 상당하였으나 이들은 지금까지 철저히 중산층 담론에서 배제되어 왔다. 이는 단순히 이 시기의 중산층 거주지에 대한 분석을 '동심원 이론'으로만 적용했기 때문이다. 물론 1970~80년대에는 도심 인근(성동구, 동작구, 관악구 등)에 저소득층 거주지가 다수 분포했으니 꼭 틀리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문제는 이 지역들이 1990년대~2000년대 초에 대규모로 재개발이 되었음에도 이 이론을 계속 적용했다는 점에 있다.


이 동심원 이론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도시사회학에서 어니스트 버제스(Ernest W. Burgess)가 제시한 ‘동심원이론(Concentric Zone Theory)’은 20세기 초 미국 시카고의 도시 구조를 분석한 대표적 모델이다. 이 이론은 도시가 중심업무지구(CBD)를 기점으로, 산업지대·저소득층 거주지·중산층 주거지·교외지역 등 서로 다른 기능과 계층 특성을 가진 구역이 동심원 형태로 배열된다고 본다. 버제스에 따르면, 경제력이 높고 안정적인 중산층은 점차 도심을 떠나 외곽의 쾌적한 주거지로 이주하고, 이들의 소비를 겨냥한 대형 상업시설 역시 외곽에 발달하게 된다.


서구의 경우 실제로 이러한 패턴이 뚜렷했다. 중산층이 교외나 도시 외곽으로 이동하면서, 대형할인점과 쇼핑몰 같은 대규모 상업시설은 자가용 접근성이 좋은 외곽지에 자리잡았다. 즉, 소비 거점이 중산층 주거지와 함께 도시 바깥으로 확산된 것이다.


그러나 한국은 1990년대 이후 2000년대까지 전혀 다른 궤적을 보였다. 서울에서는 대규모 재개발과 주거 젠트리피케이션이 연쇄적으로 진행되면서, 중산층이 외곽으로 빠져나가기보다 오히려 도심과 내부 지역으로 재유입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특히 IMF 외환위기 이후에도 재개발 입주 물량과 각종 세제 혜택, 금융 여건을 활용한 중산층의 ‘내부 정착’이 본격화되었고, 이로 인해 서울 내부의 중산층 밀집지역이 빠르게 확대되었다. 이런 환경에서 대형할인점 역시 서구처럼 외곽으로 나가는 대신, 서울 시내 입점에 사활을 걸게 되었다. 단순한 유통 전략이 아니라, 소비 주체인 중산층이 서울 내부에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로소 본격적으로 경인지역 등 외곽으로 도시가 팽창한것은 이 재개발과 젠트리피케이션으로도 부족했던 2010년대 이후다. 86세대 이후 세대들이 서울, 특히 아파트단지로 신규진입하기가 매우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도시·계층 분석에서는 이 시기 한국 특유의 발달 과정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했다. 오히려 서구의 도시 성장 모델에 맞춰 해석하려 하면서, 1990~2000년대 중산층의 주거지 변화를 1기 신도시 사례에 한정해 조명하는 한계가 반복되었다. 결과적으로, 서울 내부 재개발 지역을 통해 형성된 ‘도심형 중산층’의 존재와 그 소비 패턴은 연구와 담론 속에서 충분히 부각되지 못했다.

신세계 유통산업연구소 노은정 과장은 “구매력으로만 보면 서울지역에 할인점 79곳이 더 들어설 수 있지만 부지 확보 등의 문제가 걸림돌”이라고 말했다. 기사 보기


이마트 구로점 서적코너 말고도 한 군데 더 가는 서점이 있었다. 이마트 가는 길에 있는 곳이기도 했는데, 바로 보라매타운 보라매아카데미타워 지하에 1,300평 규모로 입점해있던 '골드북'이라는 서점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보라매공원은 동작-관악 지역 최대의 공원 중 하나로 가족 단위 시민들이 여가를 즐기는 곳이었고, 보라매공원에 갔다가 골드북에 들러 책을 읽고 사곤 했던 그런 기억이 있다.



재래시장과 국민은행

참 과도기스러운것이, 한달에 한두번 정도 아빠 차를 타고 다 함께 이마트를 가면서도, 또 평일에는 현재의 관악중부시장에 엄마랑 함께 내려가서 장을 보곤 했다. 당시에는 건너편의 중앙시장과 달리 이 시장은 공식 명칭이 없었다. 시장의 분위기는 있었기 때문에 나는 내 맘대로 그 곳을 궁터시장이라고 불렀다. 물론 나만 부른 이름이다. 당시 궁터시장으로 부른 이유는 그 시장을 가로지르는 관악로24길의 그 때 이름이 '궁터길'이었기 때문이다. 김대중 정부 시절에 지금은 'OO로XX길'로 따로 지선명만 붙이는 골목길에도 전부 도로명을 부여하던 시절 도로명이다. 나는 유래도 모른 채로 그냥 궁터길에 있는 시장이니 궁터시장이라고 붙였다. 당시의 나는 내 맘대로 여기저기 나만 아는 이름을 붙이고 다녔다. 예를 들어 봉현초와 구암중 사이 상도근린공원은 '동아산'이라는 식으로. 그런데 나중에 알고보니 서초구에는 실제로 처음에는 비공식적인 명칭이던 반포미도아파트 뒷편 '미도산'이 지금은 네이버 지도에까지 등록될 정도로 대중화되어버린 사례가 있었다. 사람 생각하는건 다 비슷하구나.


이 브런치북을 연재하던 중 이 중부시장 관련하여 증언과 정보를 추가로 접하게 되었다.

"저 건너편 시장은 등록된 시장도 아니고 원래 가판대놓고 그냥 물건 팔던 데야. 봉천시장하고 여기 중앙시장하고만 시장이었지." @seoul_soozip님, 중앙시장 상인과의 대화 중

"관악중부시장? 거긴 시장 아니에요. 2천년대 초반에 싱싱야채라는 야채&과일가게 생겼는데, 가격을 싸게 팔아 장사가 잘되어서 물건 사러 사람들이 몰리고, 그러다보니 상점들이 생기고, 사람들이 더 늘어나고, 선순환 그런식으로 만들어진 상권이에요. 관악중부시장이라는 근본없는 이름을 어거지로 명칭삼아 한 것은 관악구청 공무원들의 작품이고요, 지금도 이 동네 사람들은 낯 간지럽고 어색해서 쓰지도 않는 명칭입니다. 정 이 일대를 부를때는 관악프라자 옆, 근처 이런식으로 많이 부르죠. @new_eraa님, 50년 봉천동 토박이

"2천년대 초반이면 제 기억하고도 맞네요. 엄마가 항상 건너편 중앙시장 말고 여길 와서 찬거리 구매하셨는데 그런 이유가 있었군요.. 항상 바로 위에 국민은행 들렀다가 내려왔어요. 그리고 그시절엔 지금 든솔신협 신축공사하는 자리에 아울렛DC마트라는 곳이 있었잖아요. 거기도 정말 많이 갔거든요. 저는 시장 기억 가장 강한게 거기인데 저도 중부시장 이름은 잘 입에 안붙긴 하네요" @나

"아울렛DC마트.. 오랜만이네요. 다이소 없던 그 시절, 그때의 다이소 역할을 해주던 그런 가게였죠. 겨울이면, 학교에서 쓸 방석사러, 실내화사러, 전구사러 가곤 했는데 그 시절 그립네요. @new_eraa님

왜 엄마가 당시에 중앙시장이 아니라 이 곳으로만 왔는지 단번에 이해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그전까지는 단순히 국민은행과 인접해서인줄 알고 있었다.) 어릴 때 정말 많이 갔던 이곳의 아울렛DC마트를 '다이소 없던 그 시절 그 때의 다이소 역할을 해주던 그런 가게"라고 표현을 해주시는 것을 보고 순간 감정이 요동치는 것을 느꼈다. 당장 이번 주말에도 나는 다이소를 다녀 왔었다. 다이소 문화를 내가 내 생각보다 훨씬 예전부터 체화하고 있었구나.


또한 그 때의 궁터길이 왜 궁터길이었는지도 이제야 알게 되었다. 원당초등학교 근처의 현 남부순환로233길이 왜 덕적길이었는지도. 2천년대 초반의 도로명 정책 덕에 관악의 옛 지명까지도 추억이 생겨버렸다.

박재궁은 지금의 중앙동 봉천중앙시장 부근에 있던 마을이다. 재궁이 있었다 하며 박지궁 또는 박자궁이라고도 한다.
‘재궁(齎宮)’은 지방의 분묘나 무덤을 지키려고 그 옆에 지은 집을 가리킨다. 이곳 마을에는 24호의 주민들이 살았으며, 밀양 박씨들의 묘가 수십기 있었다.
또한 봉천동 47번지 1호에는 여흥민씨 민충식 대감의 묘가 자리잡고 있었다. 지금은 이를 관리하던 김기덕씨가 살고 있다.

관악저널 2021.06.25. 아름다운 관악 그 역사를 찾아서 (3) 봉천동 박재궁, 독적골, 산막골


원래 "왜 중앙시장이 아니라 이 시장을 왔을까?"에 대한 내 나름대로의 추리였던 국민은행 이야기도 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부모님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 중에 국민은행도 있다. 나는 웃기게도 그래서인지 아직도 국민은행 계좌가 없다. 부모님께서 내게 경제적으로 통제를 오래 하셨기 때문인지 같은 은행을 쓰기 싫었다. 그런데 부모님은 왜 국민은행을 주거래은행으로 쓰셨을까? 찾아보면 아버지 회사 주거래은행도 아니었던 것 같다. 게다가 우리아파트 정문 쪽엔 다른은행의 ATM기는 없는데 국민은행 ATM기만 입주때부터 지금까지 25년 넘게 하나 있다. 그리고 엄마는 시장에 갈 때마다 루틴이 있었다. 이 ATM기에서 현금을 좀 인출하고, 언덕을 내려가면 중부시장 입구에 국민은행 봉천동지점이 있는데 그곳에서 업무를 본 다음에, 그 앞에 펼쳐진 중부시장에서 찬거리 쇼핑 등을 하고 다시 올라오는 식이다. 나는 이 루틴이 왜 필요한지 어린 시절엔 몰랐지만, 나중에 국민은행의 전신이 ‘주택은행’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야 이해하게 되었다. 우리 부모 세대에게 ‘주택은행’은 단순한 금융기관이 아니라, 주거정책과 주택자산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1996년에는 주택은행법이 개정돼 최장 20년, 최대 1억 한도의 대출상품이 출시되었다*. 동시에 1990년대 초반 연 20% 가까이 되던 금리는 10% 초반대로 낮아졌다. 돈을 빌려서 집을 살 때의 이자 부담이 훨씬 줄어든 것이다. 이자 부담과 향후 집값 상승의 프리미엄을 계산해본 이들은 곧바로 돈을 빌려 아파트에 투자하거나 분양권을 획득하는 데 혈안이 되었다. 시중에 넘쳐나는 자금은 은행을 거쳐 개인에게, 그리고 아파트 시장에 차례로 흘러 들어갔다.

김정훈 심나리, 『386 세대유감』, 3부 헬조선과 386 전성시대 *첫 문장은 교차검증 후 수정하였다.

다만 이 시대의 주택 구매는, 주택담보대출이라는 개념이 조금씩 들어오던 시점이긴 했지만 지금처럼 대출 비중이 극단적으로 높지 않았다. 최대 1억 원, 20년 한도의 주택담보대출 사업 정도가 진행 중이었으며, 결정적으로 이 시대의 전세는 전세대출로 이뤄진 개념이 아니었다. 높은 예금이자, 90년대까지 일반화되어있던 직장조합 아파트의 존재, 대출 거품이 끼어 있지 않던 전세 등 지금 시대에는 상상할 수 없는 여러 요소들이 있었다. 이 시절 최대 1억 원, 20년 한도 주택담보대출을 들어갔어도 이미 이들은 이를 다 갚고도 남았다. 하지만 지금 시대에 겁 없이 수 억을 대출하는 사람들은 정말 그 돈을 다 갚을 수 있다고 자신하는가? 그 시절은 마지막 고성장 시대였고, 경제인구가 빠르게 증가하던 시대였다. 지금 시대가 그 시대와 같은가?


2025년 10월 16일 김병기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의 '알뜰살뜰 모은 돈으로 송파구 잠실의 장미아파트를 구입했다'라는 해명이 논란이 되었다. 이 해명을 가지고 비아냥거리는 정치인들을 보았다. 그런데 그 시대에는 정말로 알뜰살뜰하게 모아서 서울의 아파트를 살 수 있었다. 이게 막힌 것은 노무현 정권의 부동산 폭등 이후였다. 막차를 탄 386 화이트칼라들의 경우, 그들이 노무현 정권 직전에 들어간 동네가 결국 그들의 동네를 결정했다. 바로 앞 세대만 해도 수많은 이사를 겪었던 경험담이 쏟아져 나온다. 빠르게 '갈아타기'를 여러 번 시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의 경우 교육을 위한 임시 이주 외에는 자란 동네의 기억이 강한 경우가 많다. 노무현 정권때 부동산 폭등이 있고 무려 10년간 집값은 요지부동이었으며, 결과적으로 이들은 노무현 정권 부동산 폭등 직전에 선택한 동네에 묶인 것이다. 그리고 이들이 가용 잉여현금이 다량으로 생기던 시점에 '울분을 토하듯이' 상급지 이동을 시작한 것이 문재인 정권 부동산 폭등의 본질이다. 이것이 이 '봉천동 재개발아파트 성장기' 브런치북의 핵심 주제기도 하다.


중부시장 맨 끝에는 대민문고라는 동네서점이 있다. 이 어린 시절에는 멀리 교보문고, 영풍문고는 물론 보라매타운에 있는 골드북도 혼자 갈 수 있는 거리가 아니었기 때문에 어느날 혼자 책을 사러 대민문고까지 간 적이 있다. 아마 학교에서 상을 받고 문화상품권을 부상으로 받은 날이 아닐까 싶다. 어릴때라 정치인에 대한 호오가 없을 때였고, 막연하게 김대중 대통령이 노벨상을 탔다 정도는 알고 있었던 나는 '세계 평화의 지도자 김대중 대통령'이라는 책을 사서 집으로 갔었다. 집에 그걸 들고 가니 엄마가 기함을 하시면서 "그런 책은 아빠가 싫어하니 빨리 바꿔와라"고 하는게 아닌가? 영문도 모른채 저 책을 다시 들고 대민문고까지 다시 가서 '청소년이 읽는 백범일지' 책으로 바꿔왔던 기억이 있다.


지금 보면 그 책은 초등학교 1학년생이 읽는다기에는 좀 어울리지 않아보이기도 하는데, 어릴때부터 아빠방에 있던 시오노 나나미 작 '로마인 이야기'도 즐겨 읽는 등 나는 그런 류의 책도 줄곧 읽곤 했다. 당시 그 어린 시절부터 로마인 이야기를 읽는 나를 보던 아버지는 크면 유럽 한 번 가봐야겠네 하며 한 번 보내주겠다는 식으로 얘기를 했었는데, 결국 가보지 못했다. 그 이후로도 계속 나에게 유럽 여행보다 우선순위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디오와 비디오 시대

나와 동생이 어리던 이 시기까지만 해도 작은 방이 오디오방 비슷하게 꾸며져 있었다. 꽤 고풍스러운 오디오 기기 하나가 있었고, 거기에 아버지께서는 'New Kids On the Block'의 앨범이나, 당시 MBC 라디오 골든디스크에서 선정했던 '한국인이 좋아하는 팝송 200선', 각종 클래식 모음집 CD, 서양 뉴에이지, 2000년대 초반 유행했던 현대 가요 등 많은 음악 CD들을 구비해 두었다.


추후에 내가 정식으로 독립한 후인 2019년부터 본가에 다시 아빠의 오디오방이 반쯤 부활했는데, 어린 시절 어딘가에 넣어두었던 LP판 등등이 전시되어 있는걸 볼 수 있었다.


이러한 환경을 통해 지금 나도 그때 듣던 음악들이 익숙해 계속 듣곤 한다. 특히 MBC 골든디스크 '한국인이 좋아하는 팝송 200선'과 'Sunday Morning Coffee'라는 13트랙짜리 서양 뉴에이지 앨범이 특히 그런데, 수능 당일에도 그 뉴에이지 앨범을 듣고 갔고, 지금도 내 휴대기기에 항상 저장해두고 다닌다.


비디오도 빼놓을 수 없는 기억이다. 특히 이 시기는 일본 대중문화 개방 시기와 겹치면서 각종 일본 유명 애니메이션들이 지상파에 송출되던 시기로 많은 우리 또래들이 기억하고 있는 '포켓몬스터'와 '디지몬 어드벤처' 시절이 바로 이 시절이다. 이 때는 인터넷이 있긴 있었지만 지금처럼 발달한 시절은 아니었기에 본방 사수를 반드시 해야 했고, 본방 사수를 하더라도 다시보기를 하려면 반드시 녹화를 해야 했다. 그래서 공테이프에 디지몬을 녹화해서 돌려보는 등의 일들이 있었다.


일본 유명 애니메이션들이 시대를 강타해서 그렇지, 서양 아동 애니메이션도 히트하던 시절이다. 핑구, 패트와 매트 등등. 모두 비디오로 나와 있었고 많은 아동을 둔 가정에서 이 핑구 비디오, 패트와 매트 비디오를 소장하고 있었다. 이렇게 우리는 자연스럽게 '세계화' 되어 갔다.


패트와 매트를 복원해둔 한 유튜브 채널에 남겨진 댓글들이 흥미롭다.

그 시절 우리나라에 유통되던 패트와매트 비디오가 다 똑같아서 그런가 유튜브에 패트와매트 치면 제일 익숙하고 제일 좋아하던 에피소드만 상위 조회수로 줄 세우기 돼있네 ㅋㅋㅋㅋ 진짜 사람 사는 거 다 똑같구나.. @rudenddl
추억이 새록새록 초딩 때 비디오로 맨날 봤는데 ㅠㅠ 그립다 @정징이정
어렸을때 패트와 메트 비디오로 자주 봤는데 이 편이 맨 마지막에 나오는 편이라서 이거 나올때마다 곧 끝난다고 생각하니 너무 슬펐음 @나쁜훈타



지상파 애니메이션 전성기

2000년 초반엔 지금은 절판되어 구하기조차 힘든 별별 희한한 책들이 많았다. 그중에서도 이승영 작가의 『포켓몬스터 스티커 사건』은 컬트적인 인기를 누리며 지금도 종종 회자된다. 이 책이 동시대의 수많은 아동·청소년 소설 중에서도 유독 오래 기억되는 이유는, 세기말 당시 아동들의 '포켓몬 열풍'을 가감 없이 묘사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20여 년이 지나, 2022년 봄에 갑자기 포켓몬빵과 띠부띠부씰 열풍이 다시 불었다. 1999년 초등학생들을 중심으로 절정에 달했던 원조 포켓몬 스티커 열풍이 기이할 정도로 20년 뒤에 똑같이 일어난 것이다. 그 때의 초등학생들이 이 때 30대 초중반이 되어 다시 주도했던 이 열풍은 내 또래보다는 조금 앞선 세대의 이야기였지만, 나는 비슷한 시기에 ‘애니메이션 붐’이라는 더 큰 시대적 흐름을 똑같이 공유하고 있었다.


2001년, ‘디지몬 어드벤처’는 말 그대로 전국의 어린이들을 휩쓰는 '돌풍' 그 자체였다. 월, 화요일 저녁 6시만 되면 아이들이 전부 TV 7번에서 하는 디지몬을 보러 집으로 돌아가서 놀이터가 썰렁해졌다는 '전설'들이 내려온다. 수많은 에피소드 중에서도 나는 에테몬을 물리친 후 잠시 선택받은 아이들이 서로 흩어졌던 22화에서 25화까지를 가장 선명하게 기억한다.

월요일 화요일 6시는 놀이터가 썰렁했다. <출처: 20010129 동아일보>


이 시절 TV 프로그램은 본방사수를 하지 못하면 다시보기가 정말 힘들었다. 심지어 디지몬의 경우 나는 1화부터 본방송을 본게 아니었고 16화 언저리부터 봤기 때문에 앞 부분이 항상 궁금했었다. 언젠가 한 번은 이마트에서 디지몬 1~4화가 담긴 비디오테이프를 팔았다. 1·2화가 한 테이프, 3·4화가 한 테이프에 들어 있었는데, 동생과 함께 그 네 화를 몇 번이고 돌려보았다. 4화가 끝나고 나오던 다음 화 예고 속 5화 ‘캅테리몬’ 편을 보면서, 다음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될지 상상만 할 수밖에 없었다. 동생은 이후 '판도라TV'라는 사이트에서 디지몬을 볼 수 있게 되자 가장 먼저 그 5화를 찾아봤을 정도. 나 역시 커서 나중에 유튜브 등에 디지몬 어드벤처 전 화가 풀렸을 때, 그 어릴 때 끝내 보지 못했던 5화부터 다시 정주행하곤 했다.


마지막 지상파 애니메이션의 기억. 2002년 도라에몽 <출처: 20020514 동아일보>

디지몬 어드벤처와 그 뒤를 이은 파워디지몬이 2001년에 종영하고, 마지막으로 기억에 남아있는 '지상파 오후 애니메이션'의 기억은 2002년 11번, 화요일 오후 4시 반 도라에몽이었다. (실제로는 도라에몽 후속작인 '꼬마마법사 레미(2003~2004)'가 마지막 오후시간대 지상파 아동 애니메이션이었지만, 이때부터는 포켓몬, 디지몬, 도라에몽 급 '국민애니메이션'은 되지 못했다.) 한참 월드컵이 진행되던 시기와도 겹쳐 있었기 때문에, 어린 나는 '혹시 곧 월드컵을 주제로 한 에피소드도 나오려나?'하는 순수한 생각을 하던 시절이었다. 내가 보는 이 2002년에 제작을 해서 방영하던 프로그램이 아니라 일본에서 1980년대에 방영했던 에피소드들이었다는건 그 땐 몰랐다. 그리고 그 해 말 MBC 도라에몽은 종영했다. 마지막 화 때 정말 슬퍼하며 일기를 썼던 기억도 난다.


성상민 문화평론가는 "왜 그 시절 언젠가부터 오후시간대 아동 애니메이션 방영이 없어졌는지"에 대해 이렇게 진단한다.

평일 오후 6시 시간대는 한동안 모두가 약속한 듯 애니메이션이 방송되었던 시기지만, KBS 'VJ특공대' 같이 VJ를 활용한 8mm 카메라 촬영 프로그램이 서서히 인기를 얻자 방송사들은 일본 애니메이션 수입 비용보다 더 값싼 제작비로, 정규직 노동자보다 더욱 싼 인건비로 후려 칠 수 있는 VJ를 기용한 프로그램의 '가성비'에 주목을 하게 된다. 2000년대 초반 이후 지상파 방송 3사는 경쟁적으로 해당 시간대를 KBS '무한지대 큐'나 MBC '화제집중', SBS '생방송 투데이' 등의 VJ 촬영 프로그램으로 대체하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이 시기를 전후하여 초등학생들의 방과후 학원 활동이 더욱 보편화되었던 상황까지 등장하며 주 시청자들마저 TV 앞에서 사라졌다. 한동안 애니메이션을 비롯해 어린이 프로그램이 주로 편성되던 오후 6시 시간대는 빠르게 어른들을 위한 프로그램으로 대체되었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애니메이션을 보지 못하는건 아니었다. 2000년대 중반 이후로 애니메이션은 투니버스와 챔프가 전담하게 되었고, 동생은 명절에 케이블TV 지원이 되던 큰집만 가면 투니버스와 챔프만 종일 시청하곤 했다. 반면 우리집에는 지상파밖에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나와 동생은 MBC 도라에몽 이후 자연스럽게 EBS 애니메이션으로 옮겨갔다. EBS는 계속해서 서양 아동 애니메이션을 수입해와서 더빙으로 방영을 이어갔는데, 이와 관련해서는 4장에서 서술한다.



학습지와 영어 동화책

2001년 하반기, 우리 집이 드디어 ‘내 집 마련’을 마치고, 집이 안정되자 부모님의 관심은 곧장 다음 과제로 옮겨갔다. 교육 투자였다. 학원에 보내기 전, 가장 먼저 시작한 건 학습지였다. 그 중 엄마가 고른 건 기탄수학으로 주로 이마트 구로점이나 보라매타운 골드북에서 구매해 왔었다.

한국경제 2002년 09월 03일 보도

기사보기

2002년 9월 3일자 '기탄 학습지'를 다룬 한국경제는 “열린 교육에 관심이 높은 고학력 주부층을 중심으로 기탄이 인기를 끌고 있다.”라고 보도했다. 여기서 말하는 ‘고학력 주부층’은 바로 386세대 여성들이었다. 한국 사회에서 처음으로 대규모 고등교육을 받은 세대였던 그들은, 대학 졸업 후 결혼과 출산을 거치면서 ‘내 아이만큼은 최고의 교육을 받게 하겠다’는 강한 신념을 가졌다. 교육은 단순한 관심사가 아니라 집안의 최우선 과제였다. 기탄수학은 단계별·누적식 학습으로 아이의 학습량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고, ‘기초부터 차근차근’이라는 이미지가 이런 부모들의 집념과 잘 맞아떨어졌다. 우리 집도 그 범주 안에 있었다. 엄마에게 교육은 집안 살림과 같은 생활의 일부이자, 절대 소홀히 할 수 없는 투자였다.


한편 영어교육은 훨씬 본격적이었다.

기억이 나지 않던 훨씬 이전부터 집에는 영어 동화책이 있었고, 무광 카세트테이프도 함께 있었다. 카세트 플레이어에 넣으면 또박또박한 발음이 흘러나왔다.

동아일보 2001년 7월 11일자 광고.

그 시절의 영어 교육은 그냥 들려주고, 보여주고, 아이가 익히길 바라는 ‘노출’에 가까운 방식이었다. 우리 집도 그랬다. 카세트에서 흘러나오던 느릿한 영어 문장과, 그에 맞춰 책장을 넘기던 내 손의 감각은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다. 그것은 집 안에서 자연스럽게 반복되던 하나의 일상이었다.


동아일보 2002년 1월 9일 보도.

이 동아일보 2002년 1월 9일 D1면은 전형적인 '2000년대 초반 신중산층 가정'의 집안 풍경을 정확히 묘사하고 있다. 지금까지 언급했던 조기 영어교육, 비디오 등등 정확히 그 시대를 대변하는 배경들로 가득하다. 저 TV 배치와 아래 비디오가 꽂혀 있던 구도까지 너무 친숙하다. 위에서 언급했던 '패트와 매트 인형'이 나와 있는 건 덤.


같은 세대의 같은 시기 공감대 형성

애니메이션이라고는 일본 애니메이션과 서양 애니메이션의 기억밖에 없는 이 시기 유일하게 기억에 남아있는 국내 애니메이션은 바로 '둘리'인데, 이 '둘리'마저 오리지널 둘리를 본 게 아니였다. 유독 우리 세대에게 남아있는 기억이 있으니 바로 '둘리의 배낭여행' 비디오였다. 말이 애니메이션이지 유아 영어교육을 위해 개발된 교육교재에 가까웠는데, 이게 또 마냥 재미가 없었던 것도 아니라 말 그대로 '익숙해졌다'.


한편 이 해 '신비한 TV 서프라이즈' 방영을 시작하기도 했다. 재연 장면이 많은 이 프로그램에서 서양 에피소드는 서양 출신 배우들이 나와서 영어로 열연을 하는데, 엄마는 그런 프로그램을 보면서도 영어와 친숙해지길 주문하곤 했다.



초등학생 대상 영어 전문학원

그렇게 집안에서 학습지 교육을 하다가, 2002년이 되자마자 엄마는 나를 데리고 서울대입구역 앞에 있던 SLP로 데려간다. SLP는 Sogang Language Program의 약자로 서강대학교에서 1994년에 설립한 유아, 아동 영어교육 전문 브랜드 학원이다. 이 당시 SLP, ECC 등 전문영어학원이 한창 열풍이었는데, 이런 '전문영어학원'들은 사실상 현재 '영어유치원'의 전신이나 다름없다. 실제로 내가 2002년 새해부터 2005년 가을까지 다니던 서울대입구역 앞 SLP는 2024년 '프랜시스파커 관악캠퍼스'로 바뀌었는데, 훨씬 고급화된 영어유치원을 지향한다. 나때까지만 해도 취학도 전인 유치원생때부터 이런 곳을 보내는 분위기까진 아니었지만, 그래도 초등학교 2학년쯤 되었으면 이런 곳을 보내야한다고 봤던 것 같다. 내가 다니기 시작한 SLP 서울대입구역 캠퍼스는 2001년에 개원한 신설 학원이었다. 기존 봉천동 달동네 아이들이 아니라, 1999년부터 입주하기 시작한 20층 신축 아파트 단지의 아이들이 타깃이었다.


그렇게 2학년때부터 매주 화요일, 목요일마다 이 SLP라는 곳을 다니게 되는데,

이때부터 영어로만 실제로 회화하는 일상이 주기적으로 생기게 된다. 특히 생각나는 건 바로 할로윈 데이 때인데, 할로윈 때는 SLP 전역을 할로윈 느낌을 나게 꾸며놓고 할로윈 체험을 하기도 했다.


20년이 지난 뒤, 2022년 ‘이태원 할로윈 참사’가 벌어졌을 때, 깜짝 놀랐다. 한국에서도 할로윈이 이렇게 대중화됐고, 심지어 참사가 일어날 만큼 많은 사람이 모인다는 사실이 실감나지 않았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2000년대 초반의 우리 신중산층 아이들은 이미 영어와 영미 문화에 자연스럽게 길들여지고 있었던 것이다.


2005년에 발표된 박명희의 석사논문 '초등학교 영어교육에 대한 학부모의 인식과 요구 분석'은 내 세대 부모들의 영어교육 실태를 다루고 있는데, 결과 자료를 보면 내 기억과 완전히 일치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학부모들이 선호하는 영어교육방법' 1,2위를 차지한 역할놀이, 노래, 챈트 등은 집안에서 가정교육으로 진행하기에는 한계가 컸기 때문에 이 SLP에서 경험하게 된다.

학부모들이 선호하는 영어교육방법은 역할놀이가 29.6%로 가장 높게 나타났고, 노래와 챈트가 21.3%로 그 뒤를 이었다. 이외에도 영어 동화책 읽기(16.0%), 시청각교육(9.4%), 테이프듣기(7.8%)를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영어교육방법에 대한 선호도 자녀들의 의사소통능력의 향상에 주안점을 두고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영어교육을 시작한 자녀들의 연령을 보면, "8세"가 15.5%로 가장 많았고, "6세"가 14.0%로 그 뒤를 이었다. 이러한 결과 다수의 학생들이 유치원 입학이나 초등학교 입학과 함께 영어교육을 받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학부모들이 처음 시작한 영어교육 방법을 보면, 학습지가 35.0%로 가장 많았고, 사설학원이 23.1%로 그 다음을 차지하였다.


정작 학교에서 영어교육을 받게 되는건 다음 해인 3학년(2003년)때부터인데, 이미 영어 동화책 - 테이프 - SLP로 이어지는 영어교육으로 단련되어 버렸기에 나는 정작 3학년부터 학교에서 영어 수업이 시작됐을 때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지금까지도 초등학교 시절 공교육 영어시간에 대해선 지토라는 캐릭터와 CD 안에 들어있던 주사위 게임을 제외하고는 기억나는 순간이 하나도 없다. 이미 나에게 '영어'는 '자연스러움'의 일부였다.



1.5km 통학 2년차, 그리고 마지막 대운동회

한편, 2002년에도 아직 집 바로 앞의 초등학교가 준공되지 않았으므로 2학년때도 '숲속차'나 '연합차'를 타고 원당초등학교로 통학했다. 그리고 이 해에 전 국민이 잊지 못할 대규모 이벤트가 열리게 되는데, 바로 2002년 한-일 월드컵이다. 그 당시 다같이 집에서 가족들과 보던 저녁 폴란드전과 포르투갈전, 일찍 하교하고 집 안으로 쏟아지던 햇살과 함께 보던 미국전, 학교에서 일찍 하교하여 8강전이 열리던 6월의 토요일 오후, 아파트 단지 내 경로당에서 장구를 배우고 있었는데 그날 스페인전을 다같이 보던 기억 등이 난다. 학교로 가는 길 주변에 있는 포차골목 비슷한 곳엔 '월드컵 문화시민의 거리'라는 팻말이 붙었다. 현재의 행운동 먹자골목인데 월드컵이 끝나고도 5년 넘게 그렇게 붙어있었으니 그때의 열기를 실감할 수 있으리라.


심지어 이 월드컵 이후 우리 놀이터에도 축구장이 생겼다. 앞서 언급했듯 우리 집에서는 놀이터가 한 눈에 내려다보였기 때문에 놀이터 문화를 바로바로 알 수 있었다.

국토정보연구원(2003) 성현동아아파트 106~108동 놀이터

주차장 쪽에 정체불명의 박스가 하나 있고, 반대편에는 벤치 두 개가 있다. 아이들은 저 박스를 한 쪽 골대로, 벤치 사이 공간을 반대편 골대로 두고 축구 시합을 했다. 나도 이 풍경을 집에서나, 놀이터에서 놀 때 자주 봤기 때문에 기억을 한다. 국토정보연구원의 2003년도 사진을 확대해보다 그 때 그 정체불명의 박스가 찍혀 있는걸 보고 얼마나 놀랐던지! 2002년 상반기까지의 항공사진에선 이 박스가 식별이 안 되고 2003년부터 등장하는 것을 보면 한국에서 2002년 월드컵의 영향은 정말, 너무나도 컸다.


한편 2002년 하반기에 접어들면서 드디어 집 앞 학교의 개교가 가시화되기 시작했다. 다음 해인 2003년에 개교가 확정되었다. 3년간 1.5km를 학원차들로 통학하던 우리 아파트 초등학생들이 이제 바로 아파트단지에서 횡단보도만 건너면 되는 초등학교로 통학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게 우리들이 '단체 전학'을 준비하던 2002년 가을, 원당초등학교는 대운동회를 개최한다. 하루를 꼬박 쓰고, 학부모들도 부르고, 청군과 백군으로 나누어 성대하게 치뤄졌던 그 대운동회. 그 때 이미 모두가 실감했던 것 같다. 이렇게 '동네 축제'처럼 대운동회를 즐길 수 있는 건 그 해가 마지막일 것이라는 걸.


2002년 마지막 호 서울원당초등학교 교지.
2002년(입주 4년차), 출처: 국토정보플랫폼






keyword
이전 02화서울 32평 아파트, 자가 소유 가정이 되다 - 0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