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01장: 1999년 ~ 2000년 '입주'
서울의 대표적 달동네로 꼽히는 봉천동 일대가 초고층 아파트 숲으로 변하고 있다. 17일 오전 서울 관악구 봉천2동 봉천2-2 재개발구역. 판자촌이 있던 자리엔 24층 높이의 동아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지난 8월 완공된 아파트 곳곳에서 입주를 위한 이삿짐 차량이 눈에 띈다.
인근 대신부동산 김용채 사장은 "전체 2090가구 중 43, 33평 아파트는 대부분 방배, 서초, 강남, 분당에서 온 중산층 사람들로 입주가 거의 끝났다"고 말했다.
1999년 12월
그 이삿짐 차량 중 하나엔, 여섯 살 내가 있었다.
봉천 2-2(동아, 1999), 3(관악드림타운, 2001), 4-2(벽산블루밍, 2003), 7-1(우성, 1999), 7-2(관악푸르지오, 2003), 8(두산, 2000), 9(동부센트레빌, 2004), 11(브라운스톤관악, 2005)구역이 1999년 말부터 2005년 초까지 순차적으로 입주하였으며 총 가구수는 약 2만 7천 가구에 이른다.
영구임대를 제외하더라도 약 1만 9천 가구가 입주하는 대규모 신도시 프로젝트로, 목동 신시가지와 규모가 비슷하였다.
들어가며
서울특별시 관악구 봉천동 지역은 1970년대와 1980년대를 거치며 대표적인 '달동네'로 유명했던 지역이었다. 그러나, 1990년대에 접어들며 이 지역의 판자촌, 무허가 주택들은 모두 철거되고, 그 자리는 철거 및 신축 아파트 공사기간을 거쳐 21세기가 시작될 즈음, 20층이 넘는 고층 아파트로 채워졌다.
우리는 흔히 이 시기 철거된 무허가 주택에 거주하던 '철거민'의 이야기는 많이 접할 수 있지만, 이러한 재개발 지역에 새로 들어온 '중산층'이라고 불리던 사람들에 대해선 무관심하다. '중산층'하면 서울 강남이나 경기 1기 신도시 지역만 생각하기 일쑤다. 그러나 분명 기존 도심의 재개발지역에도 대규모의 '중산층'이 들어왔고, 그들이 새로운 지역 문화를 만들어 갔다. 봉천동, 신림동의 행정동 이름이 모두 바뀐 것도 이들의 주도로 이뤄졌던 일이었다.
중산층의 성장 신화는 20세기 후반기의 한국 사회를 지탱하는 데 중요한 버팀목 중 하나였다. 번듯한 직장과 30평대 아파트, 중형차를 배경으로 삼아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는 4인 가족의 사진은 고도성장이 가져다준 물질적 풍요의 실체를 가감 없이 보여주는 KS 마크 같은 이미지였다.
박해천, 『아파트 게임』
2020년대에 접어들며 우리 부모님과 같은 '신중산층 586세대'들에 대한 분석과 고찰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하지만 그 부모들이 만들어 준 환경 아래에서 자란 우리들, 즉 이들의 자녀들을 제대로 분석한 경우는 조귀동의 『세습 중산층 사회』 외에는 거의 없으며, 그마저도 당사자의 시선이 아닌 외부인의 관찰에 머물렀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이 기록은, 그 봉천동 달동네를 철거하고 들어선 고층 아파트 밀집지에 입주한 당시의 전형적인 '중산층 4인 핵가족'의 일원으로서 완공 직후 입주한 한 90년대생의 기록이다.
나의 부모님은 봉천 신도시의 한 아파트 32평형대 집에서, 완공되던 해부터 임차 2년, 소유 16년, 총 18년 인연을 맺었고, 전세 임차인부터 자가 거주, 전세 임대인, 집 매수와 매도까지 모두 겪었다. 그리고 그 기간이 여섯 살때부터 스물네 살까지였던 나는 이 동네, 이 아파트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로 성장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스물네 살 때 부모님께서 이 집을 매도하면서 그 아파트와의 인연 자체는 막을 내렸지만, 같은 중생활권 안에서 이동했기 때문에 이 지역은 지금 이 순간도 내 인생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이 지역은 내 인생 그 자체다.
이 브런치북을 연재하게 된 계기
이 브런치북을 쓰기로 마음먹은 계기는 브런치에 발행된 한 게시글을 보면서부터였는데, 결국 나도 브런치에서 이 책을 연재하게 됐으니 참 기분이 묘하다. 그날도 벌써 4년이나 지났다. 내 고향인 '봉천고개'를 서치 하다가 나온 어떤 게시글을 발견한 날.
그 게시글을 읽어보니,
"도대체 이 동네에 왜 이렇게 많은 아파트가 생겼을까?"
"동명을 바꾼 것이 과연 적절한 조치였을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흩어져 어느 동네로 이주를 했을까?"
라는 질문만이 존재했다.
"어떤 사람들이 들어왔을까?"라는 질문은 없었다.
내 고향을 다루면서 내 고향과 나의 기억을 철저하게 타자화하고 있었다. 그 자리를 '채운' 사람들도 분명 어떠한 '사람들'이었고 '지역주민'이었는데 말이다. 이 문장에 '타자화'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서 모순적인 감정이 들어 해당 개념에 대해 다시 한번 곱씹어보았다. 재개발담론에서 우리 '들어온' 집단을 다른 존재로 분리하고, 그들의 고유한 주체성을 부정하고 있는 건 맞았다. 하지만 이 개념은 타자화를 당하는 쪽이 차별과 배제를 받는 경우에 주로 사용되는 개념이다. 여기서는 타자화를 당하는 쪽이 오히려 소위 '중산층'들이고, 주류 담론에서의 '주체'들이 오히려 약자들인 '철거민'들이었다.
혹자는 지워지는 것은 실제로 '삶의 터전을 잃은 철거민'들이었고, 관에서도 이들을 지웠지 너희들을 지웠냐.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공간적 변화만 고려했을 때 그런 것이고, 실제 담론과 도시 이미지로 바라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 예를 들어 '관악구' '봉천동'이나 '동작구' '상도동' 등을 이야기할 때, 내가 자란 2만 가구 가량의 아파트단지촌을 바로 떠올리는 사람은 예나 지금이나 거의 없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관악구는 자신들을 청년수도라고 홍보하고, 고개 아래 1인가구로 전입하는 이주 청년들만 이야기할 뿐이다. 우리들은 예나 지금이나 담론에서 철저히 배제되어 왔다.
아현, 흑석 등 이미지 변화까지 수반한 지역들도 분명 있다. 그러나 이런 지역들의 경우 첫째, 2010년대 이후에 대규모 재개발된 경우, 둘째, 지역 전체가 재개발된 경우다. 반면 1990년대 서울 지역 내에서 집중 재개발된 대부분의 지역은 재개발지역과 기존 지역이 혼재되어 남아 있는데, 오히려 재개발지역이 비가시화되는 현상이 발생한다.
왜 이런 현상이 발생할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데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 글을 계기로 그분과 연락이 닿아 직접 만나 인터뷰이로 참여했다. 그리고 해당 인터뷰를 바탕으로 한 글이 사흘 뒤쯤 발행됐다.
그 글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이 문장이 그 인터뷰의 총평이었다.
"아파트 단지와 아파트 단지 사이를 이동하면서 존재하는 공간들에서 유희를 느낀다. 그렇다 보니 아파트 상가와 단지 내에서 쌓은 추억에 대한 기억이 많다. 봉천동 자체에 대한 기억이라기보다는 아파트 단지 내에서 경험한 기억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머리를 한 대 띵 하고 맞은 기분이었다. 이 인터뷰 글을 보기 전엔 나는 단 한 번도 저렇게 생각한 적이 없었다. 당연히 나는 봉천고개 출신이고 이 동네 출신이라고 생각했다. 12부의 연재 동안 앞으로 그런 '봉천동'과의 이야기들이 묘사될 것이다. 하지만 외부인의 입장에서 나의 그 핵심 경험들은 '봉천동'의 경험이 아니라 '아파트'의 경험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한들, 아파트단지가 하늘 위에 떠있는 것도 아니고 분명 그 동네에 존재했는데 동네와의 상호작용, 경험이 없을 수가 있겠는가. 그래서 나는 이 시리즈를 통해 소위 '재개발 신도시' 지역과 기존 지역이 혼재하던 그 시절의 생활상, 그리고 이 동네 신중산층의 아비투스 형성 과정을 풀어내려 한다.
누군가에겐 '상승 이동'의 시기, IMF 외환위기 시대
한국의 주택정책사 개론을 보면 대부분 '1970~80년대 강남 개발 → 1990년대 1기 신도시 → 2000년대 강남 재건축과 용인 등 외곽 개발..' 식의 선형적 구조만을 따르는 것을 볼 수 있다. 강남과 1기 신도시를 제외한 지역은 거의 다뤄지지 않는다.
특히 노태우 정권때 1기 신도시를 중심으로 주택공급이 확대되었다는 분석이 많다. 이는 한 면만 조명하고 다른 면은 조명하지 않는 반쪽짜리 분석이다. 아래의 자료가 뒷받침해주듯 노태우 정권때보다 김영삼 정권때의 주택공급이 더 많았으며, 이 때의 공급은 바로 이러한 도심재개발의 결과가 많았다.
이렇게 1990년대의 도심재개발은 '단군 이래 최대 호황'으로 불리던 시절, '중산층 전성기'라 불리던 시절에 진행되었다. 그런데 예나 지금이나, 재개발사업이라는 것은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는 사업이다. 사업진행 시엔 단군 이래 최대 호황이었는데, 이들이 완공되고 입주할 시점에 IMF 외환위기가 터져 버렸다.
외환위기 시기 주택정책 분석을 보면 '수요가 급감하였으나 주택의 공급이 늘어 가격이 급락하였다'는 평가가 있다. (김경환, 「외환위기 이후 10년: 전개과정과 과제- 외환위기 전후 주택시장 구조 변화와 주택정책」 경제학연구 2007 등) 수요의 급감은 IMF 금융위기 때문인데, 공급이 늘었다는건 어디의 공급이 늘었다는 것일까? 시기상 이 때의 공급증가는 시기상으로 약간 앞인 1기 신도시도 아니었고 약간 뒤인 강남 재건축도 아니었다. 1990년대 도심합동재개발의 결과물이었다.
그러다 보니 아래와 같은 현상까지 나타나게 된다.
[부동산] 전세 구하기 "입주임박 아파트 노려라" - 불경기로 잔금 못내 임대 속출 (2000)
입주를 앞둔 아파트는 잔금을 치르지 못해 입주를 포기하고 전세를 놓으려는 사람들이 많아 전세 물건이 풍부한 편이다.
지금이라면 상상도 하기 힘든 풍경이다. 지금 젊은 부부들에게 서울 중심부의 초신축 아파트를 노리라고 전문가들이 추천하고 있으면 현실파악이 되고 있냐는 소리 듣기 딱 좋지 않겠는가.
IMF 외환위기 시기에 대한 당시의 보도나 이후의 기록들을 보면 이 시기에는 모두가 피해자고 어려웠다고만 생각하기 쉬우나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IMF 외환위기 시절 가장 큰 피해를 본 것은 당시 40대 이상 관리자급, 쁘띠부르주아 계층, 그리고 노동자 계층이었다. 반면 30대 화이트칼라층의 경우는 상대적으로 큰 피해를 겪지 않았고, 오히려 이 시기가 기회로 작용했다.
너도나도 힘들었던 IMF체제 시기를 나름의 능력과 운으로 헤쳐간 게 386세대다. 나라가 IMF로부터 구제금융을 받을 당시, 이들은 직장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은 말단이나 그 바로 위의 대리급이어서 구조조정의 칼날을 피했다. 회사마다 연봉 높은 선배, 임원들은 잘려나가고 신입직원은 뽑지 않으며 허리띠를 졸라매던 시절에 386세대는 수년간 큰 어려움 없이 조직 내 위상을 키워갔다.
386 벤처 키즈도 대거 등장했다. 1996년 코스닥시장 개설과 1997년 '벤처기업육성에 관한 특별조치법' 시행, 여기에 1980년대 벤처 1세대 선배들이 닦아놓은 토양 위에 이른바 '군단'을 이뤄 등장했다고 당시 언론은 설명한다.
김정훈 신나리, 『386 세대유감』 1장 '축복받은 세대, 저주받은 사회'
주지하다시피 1997년 외환 위기 직후, 구조조정의 한파가 몰아 닥쳤다. 다행히도 아직 30대 중반이던 나는 그 격변의 흐름에서 한 발짝 비껴 날 수 있는 처지였다. 살생부 명단에 이름을 올리기에는 아직 나이도 어리고 경력도 미천했기 때문이다. 명예퇴직의 족쇄는 주로 40대 이상의 과장이나 부장급 인사들의 몫이었다. 나를 포함한 30대 초중반의 직장인들 상당수는 앞에서 대놓고 말하지는 못했지만, 조직의 인사 적체를 해소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술자리에서 수군대곤 했다. 누구에게는 퇴출의 위기가 다른 누구에게는 승진의 기회였던 셈이다.
박해천, 『아파트 게임』 3장 '1962년생 베이비부머의 버블 체험담'
다음은 신중간계급층과 노동자계급성원 간의 언어구사의 차이를 알아보고자 하였다. 'IMF 사태'라는 경제위기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그들의 반응을 면접을 통해 알아본 다음 표현과 내용의 차이를 분석해 보았다. <중략> 화이트칼라층 역시 현재의 경제상태가 아주 안 좋다는 것에는 동의를 하는 분위기이다. 그러나 이런 분위기 속에서도 특이하게 두 사람이 "지금 신문지상이나 매스컴에서 경제가 굉장히 어렵다고들 그러는데, 그.. 직장이 좀.. 든든한 직장이라 그런가 그렇게 심각하게 느낄 수는 없는데.." "조금 약간 뭐.. 침체돼 있다고 보죠. 약간 그 경제가 오르락 오르락하다가 다시 침체되는 그런 상황으로 보고 있습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즉, 이들은 현상태를 위기로 인식은 하지만 피부로 느끼지는 못하는 상태인 것이다. 반대로 쁘띠부르주아나 노동자는 천편일률적으로 '아주 어렵다'라고 얘기하고 있다.
김왕배, 『산업사회의 노동과 계급의 재생산』 4장 '계급과 언어'
많은 사람들이 '주거의 사다리' 운운한다. 그런데 사다리론을 이야기하면서 모두가 상승만을 이야기한다. IMF 시대부터 시작된 저성장, 역성장 시대의 성장은 이제 절대적 상승이 아니라 상대적 상승이다. 그리고 상대적 상승이라 함은, 누군가는 반드시 하강한다는 뜻이다.
'상대적' 계층 이동성은 필연적으로 제로섬 게임이다. 한 명이 소득 분포 사다리에서 위로 올라가면 누군가는 아래로 내려와야 한다.
리처드 리브스, 『20 VS 80의 사회』
많은 가계가 그러했듯이 IMF 이후로 집은 많이 어려워졌고, 부모님은 당시 소유 중이었던 서대문구 북가좌동 33평 아파트를 팔고 다시 이사를 계획했다. IMF 이후 1999년, 처음 이사한 집은 잠실주공 1단지였다. 1976년에 완공된 이 아파트는 엘리베이터도 없는 5층 건물에 10평 안팎인 작은 집이었다. 집 안의 나무로 된 문지방은 삭아서 무너져 내려 있었다. 평수를 확 줄이고 보유구조를 바꿨음에도 집안 사정은 여전히 나아지질 않았고, 이듬해 2000년에는 남양주시로 이사를 가야 했다.
박재현, 『확률 가족』'우리 집은 괜찮을 거야' (1980년생 자녀&1949년생 부모의 회고)
즉, IMF 외환위기 시절 소위 '주거의 사다리'를 탄 사람들은 IMF 외환위기 시절 '하강'을 겪은 수많은 윗세대와 쁘띠부르주아 계층, 노동자 계층 등이 존재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는 것이다. 최근 방영된 넷플릭스 드라마 '은중과 상연'에서의 상연이나, 에세이 '나의 이상하고 평범한 부동산 가족'을 쓴 화자 마민지 등을 통해서 묘사되는 것처럼 말이다. 주거 하강을 경험한 사람들에게 당신은 '그래도 주거의 사다리가 필요하죠^^'라고 말할 수 있는가? 사다리론은 제로섬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아버지 회사에서는 3대 PC통신 서비스 중 하나를 운영했다. 이 서비스가 최전성기를 맞이하던 시점은 아이러니하게도 IMF 외환위기가 절정이던 1997년 말이었다. 아버지 역시 제일 잘 나가던 시절이 이 시절이었고, 이 시기 유치원생이었던 나 역시, IMF 외환위기 시기는 어려웠던 시기가 아니라 오히려 신축 아파트, 더 평수가 넓은 아파트로 이사를 갔던 시기, 현재의 동네, '서울 (당시 신축) 대단지 아파트촌'에 완전히 정착한 시기로 기억된다.
'역세권'과 '한강 조망' 광고
막 이사왔을 시점에는 그래도 그 전까지 강북(쌍문동)에 약 6년 정도를 살았다보니 그 시절에 엄마가 쌓아놓았던 친분관계들도 강북에 좀 있었어서, 2000년 초에 상봉동에 있는 엄마 친구네를 갔던 적이 있다. 그 때 상봉역을 보면서 내가 저걸 타고 집에 가요, 라고 했었나 보다. 그 때 엄마가 "지금은 저게 우리 집까지 안가는데, 곧 우리 동네로 올거다"라고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그로부터 반 년 뒤, 2000년 8월 1일, 7호선의 마지막 미싱링크가 개통했다. 집 앞에 새로운 지하철이 생기고 역이 생겼다. 서울은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1~4호선까지밖에 없었다. 그러다 1990년대 초반 도심 합동재개발이 서울 곳곳에서 진행되면서, 이를 위해 필요한 대형 인프라 구축 사업이 진행되었으니 바로 2기 지하철 계획이었다. 이 두 사업은 서로 연관되어 있는 것이, 아래 입주 아파트 광고때처럼 개발 시작때부터 '5~8호선 역세권'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특히 5호선의 경우 기존 계획에서는 답십리에서 바로 종로로 접속하여 1호선과 나란히 달리다 서대문으로 합류하도록 되어 있었고 1호선 건설 당시 이를 반영하여 건설하기도 했으나 이 계획을 폐기까지 해가며 행당, 금호동 합동재개발지역을 경유하도록 재설계되기도 했다. 우리 동네 역시 재개발 시작할 때, 입주 시작할 때 모두 '7호선 역세권'을 강조했다.
이렇게,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현재의 서울지하철 틀이 완성되면서 '역세권 아파트' '한강뷰 아파트' 홍보가 시작된다. 사실상 강남을 넘어선 전국적인 현대 아파트 문화는 이 때 만들어진 것이다.
2000년 5월 30일 한국경제 기사가 특히 흥미롭다. 분석할 거리가 많은 기사인데 같이 살펴보자.
서울 '대규모 단지' 입주 눈길..오는 8월까지 1천가구이상 9곳 달해
2000.05.30. 한국경제
내달부터 서울에서 1천가구가 넘는 대규모 아파트 단지 입주가 잇따른다. 올 입주아파트중 가장 규모가 큰 신당동 남산타운을 비롯 암사동 현대,산천동 삼성 등 6월 한달 동안에만 1천가구이상 단지 4곳이 집들이를 한다. 오는 8월까지 입주하는 1천가구 이상 대단지는 9곳에 이른다. 이들 단지는 대부분 역세권에 위치한데다 편의시설도 잘 갖춰져 주거환경이 좋은 편이다. 부동산시장이 조정국면이기 때문에 매물도 넉넉해 원하는대로 물건을 골라잡을수 있다.
<1>신당동 남산타운=5천1백50가구의 대단지라 매물이 많다. 내달 10일로 입주일이 잡혔다. 가을 개통하는 6호선 버티고개역까지는 10분 걸린다.
<2>암사동 현대=입주를 한달여 앞두고 있다. 전체가구의 30%정도에서 한강을 볼 수 있다. 42평형은 대부분 한강이 보인다. 지하철 8호선 종점부근에 있어 교통이 편리하지만 입주후 도로교통체증이 예상된다.
<3>산천동 삼성=6월말 입주가 시작된다. 한강조망권을 갖춘게 자랑이다. 전체 1천4백65가구중 30%정도에서 한강을 볼 수 있다. 23평형은 대부분 복도식이라 주변아파트보다 시세가 낮다. 5호선 마포역까지 거리가 좀 먼게 흠이다. 추가부담금은 없을 것으로 예상된다.
<4>행당동 벽산=5호선 행당역세권에 대림,한진아파트에 이어 3번째 들어서는 대형단지다. 규모가 2천9백21가구에 이른다. 오는 8월 입주예정이다. 지금은 한강이 보이는 가구가 많으나 옆에 삼성아파트가 들어서면 18층이상에서만 한강을 볼 수 있게 된다.
<5>상도동 리버파크=8월말 입주예정인 상도동 리버파크는 매물이 많다. 노량진역에서 걸어서 10분 정도 걸리며 7월 개통예정인 7호선 장승백이,상도역과는 5분거리다.
주의점=요즘 입주하는 대형단지는 대부분 재개발.재건축아파트이기 때문에 입주시에 추가부담금이 내야하는 경우가 있다. 조합이 사업주체여서 예상대로 돈이 들어오지 않은 단지는 부족한 돈을 조합원들이 채워넣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반분양분이 아니고 조합원이 소유한 아파트를 살 때는 인근 중개업소를 통해 추가부담금이 없는지 확인해야 한다.
지금도 쏟아지는 부동산 광고기사로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하나같이 예시마다 '5~8호선 역세권'과 '한강 조망'을 강조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지금의 입주임박 초신축 서울 역세권+한강 조망 아파트들을 나열해 놓고 '매물도 넉넉해 원하는대로 물건을 골라잡을 수 있다'라는 표현을 쓸 수 있을까?
내 고향을 비롯한 이 많은 단지들은 지금 현재 '서울 구축'으로 불리고 있으며, 소위 “상급지 이동”에 성공한 주민들을 제하면 다수의 주민들이 이 때 또는 노무현 정권 부동산 폭등기 중에 입주하여 거주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여섯 살, 세기말의 새로운 보금자리(1999년)
1999년 11월, 밀레니엄을 한 달 앞둔 늦가을이었다. 슬슬 쌀쌀해지던 이 날 우리 가족은 도봉구 쌍문동에서 관악구 봉천동으로 향하고 있었다. 우리 앞에는 우리 이삿짐을 실은 이삿짐 차가 있었고, 이삿짐 차 뒤를 따르는 아빠 차에는 아빠, 엄마, 나, 그리고 동생이 있었다. 우리 가족이 향하는 곳은 바로, 이제 막 지어진 20층이 넘는 고층 아파트였다.
내가 태어나서 여섯 살 때까지 살던 곳이었던 쌍문동은 1980년대 후반에 개발된 중산층 아파트촌이었다. 특히 내가 살았던 그 쌍문동 아파트촌은 직장조합아파트 밀집지였다. 직장조합아파트란 1991년에 대한민국을 강타한 '수서지구 택지 특혜분양사건'과 연관되어 있는 제도다. 예전에는 직장에서 무주택자 사원들이 모여 '조합'을 결성한 후에 아파트를 분양받을 수 있는 제도가 있었다. 어릴 때부터 조금 신기했던 것이 부모님이 처음 신혼 생활을 시작한 곳은 부천 역곡의 한 빌라였다고 하는데, 1년 반만에 쌍문동의 아파트로 이사를 갔다는 점이다. 대기업 사원이었던 아버지와, 직장조합 아파트 간의 연결고리가 있다고 생각이 든다.
부모님이 쌍문동 아파트단지로 이사를 온 시점은 내가 태어나기 4개월 전이었기 때문에, 나는 나중에 스물다섯 넘어 독립하기 전까지는 중고층 아파트가 아닌 곳에서 살아본 적이 없다. 태어나면서부터 중고층 아파트에서 나고 자란 '집단'이 나타나는 첫 세대. 우리가 바로 그런 세대였다.
내가 여섯 살 되던 무렵은 이미 쌍문동의 아파트도 준공된 지 10년이 넘어가던 때였고, 우리 가족은 더 새롭고 넓은 집을 찾아 봉천동으로 향했다. 수유역과 미아리고개를 지나 혜화동, 서울역, 아빠 직장을 지나 한강을 건넜고, 한강을 지난 뒤엔 곧바로 터널이 나왔다. 터널을 빠져나와 좌회전하자 7호선 지하철 공사로 복잡한 대로가 나왔고, 그 길을 따라가니 큰 언덕 위로 새 아파트가 우뚝 솟아 있었다. 그곳이 우리의 새 보금자리였다. 도착하자마자 느껴진 것은 강렬한 페인트 냄새였다. 이 곳은 정말로 ‘갓 지어진’ 아파트였다.
당시는 IMF 시기로 부동산 시장이 매우 침체되어 있었다. 서초구 방배동과 막판까지 저울질했다는 얘기를 어렴풋이 들은 기억이 있지만, 자금 사정 때문에 결국 봉천동으로 결정한 듯하다. 너무 오래된 기억이라 명확하진 않다.
그리고 얼마 뒤 엄마는 여섯 살인 나를 아파트 단지 안에 있던 상가 건물로 데려갔다. 4층으로 올라가니 피아노 학원이 하나 있었다. 예원 피아노. 이 새로 지어진 아파트에 와서 내가 가장 먼저 시작한 것은, 세기말 중산층 어린이 필수 코스였던 피아노였다. 공장형 피아노학원이 웬만한 아파트 상가에 최소 하나씩은 있던 시절이었다. 그곳에서 봉천동 첫 친구를 만나게 되었고, 2000년이 찾아왔다.
일곱 살, 재개발 철거지와 철거 예정지 사이 우뚝 선 신축 아파트(2000년)
2000년이 되자 엄마는 내 유치원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쌍문동에선 네 살 때부터 큰길로 나가면 있었던 교회의 부설 어린이집에 다녔었고, 여섯 살 때 아파트 단지 안에 있던 유치원에 다니다가 11월에 이사를 오면서 자연스레 그만두게 되었는데, 이사 와서 첫해는 피아노학원만 다니다가 초등학교 입학 전 마지막 해였던 2000년도에는 다시 유치원에 가기로 한 것이다.
이 동네에서 제일 가까운 유치원은 소슬 유치원이었다. 작은 유치원 버스가 우리 단지까지 왔고, 그게 아파트 단지 밖으로 나가는 첫 모험이었다. 그걸 타고 처음 나오는 건 '극장 앞 버스정류장'이었다. 정류장명은 극장 앞인데 나는 한 번도 그 극장을 본 적이 없다. 알고 보니 이미 우리 가족이 이사오기 6년 전에 봉천극장이 철거된 것. 그러나 그 정류장 이름은 꽤 오래갔다. 내가 기억할 정도니 말이다.
강남고려병원 앞에서 우회전을 해서 현대시장사거리까지 가면, 봉천 4-2 구역(현 관악벽산블루밍)이 철거된 채 흙밭으로 남아 있었다. 또한 봉천 3 구역(현 관악드림타운) 역시 공사가 마무리작업 중에 있었기에, 유치원으로 들어가는 길은 거대한 흙더미 옆, 너저분한 공사 자재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는 좁은 길이었다. 철거지와 공사장 한복판을 뚫고 유치원에 등하원하던 날들이었다.
큰길 건너 현대아파트(봉천 1 구역, 92년 입주)를 제외하면, 나머지 '봉천 신도시' 아파트들 중에선 우리 아파트가 간발의 차이로 먼저 입주한 아파트였다. 그랬기에 막바지 공사 현장, 철거지 현장에 대한 기억은 물론이고 '봉천동 달동네'를 상징하는, 아직 철거가 되지 않았던 마지막 판잣촌의 기억도 있다. 물론 나는 우리가 살고 있는 '새 아파트'가 서 있는 땅 역시 이전에는 그와 똑같은 판자촌이었다는 사실은 전혀 알지 못했다.
그 지역은 바로 봉천동 7번지 일대, 봉천 11 구역(현 브라운스톤관악). 나머지 재개발 지역들은 우리 가족이 이 동네에 정착했을 때 이미 철거가 완료된 상태거나, 이미 새 아파트가 한창 올라가고 있었지만, 그 지역만은 아직까지 남아 있었다.
일곱 살 어린이의 눈엔, 그 지역은 반듯반듯하고 높게 솟아오른 우리 집과는 또 다른 분위기가 있었다.
마치 미로와도 같았던 그 곳. 친구와 나는 피아노 강습을 마치면 바로 아래에 있는 그곳으로 미로 찾기를 하러 그곳을 찾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곳도 사람 사는 곳인데, 그곳을 가면 똥파리들이 유독 많았기에 일곱 살 우리는 그 미로의 이름을 '똥파리길'이라고 붙였었다.
내가 '봉천극장'이라는 버스정류장 이름을 이상하리만큼 또렷하게 기억하는 이유도, 어쩌면 피아노학원 아래 그 똥파리길에서 미로 찾기를 하던 그 기억 때문일지도 모른다. 봉천극장은 우리가 입주하기 6년 전인 1993년에 문을 닫았지만, 봉천극장 동네는 그로부터 8년 정도, 약 2001~2002년까지 더 버텼다.
그렇게 그 해 유치원 생활이 끝나고, 2001년이 찾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