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07장: 2006년
이 해는 슬슬 '봉천 신도시'에 첫 입주할 때 유치원생이거나 초등학생이었던 아이들이 차츰 중, 고등학교로 진학할 시기가 된 만큼 이러한 뉴스로 한 해가 시작되었다. 현재를 보면 알다시피 완전이전은 빠르게 무산되었고, 이어서 제2사대부고를 건립하네 마네 하다가 결국 이것도 좌초되었다. 당연히 기존에 서울사대부고가 위치하고 있는 성북구의 극렬한 반대도 컸고, 사실 관악구 학부모들도 '오면 좋다' 정도였지, 강경하게 강대강으로 반드시 유치해야한다! 이런 분위기는 아니었다. 우리 동네는 강남, 특히 서초가 너무 가까웠다. 일단 특목고가 우선이고, 특목고가 안되면 강남 서초로 보내자는게 봉천 신도시 상위권 학생 부모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봉천 신도시의 초기 입주민들은 아이들을 여기서 초중고 다 보내겠다는 생각이 없는 경우가 많았다. 사실 만약에 여기까지 안되어도 여학생들은 숭의여고나 수도여고, 남학생들은 경문고(여기는 아예 같은 교육청 소관 학교들이기도 했고)로 보내자, 이런 이야기도 있었고, 다음 장들에서 다루겠지만 당시 공정택 교육감 주도로 진행되었던 서울 광역학군 도입이 훨씬 더 이슈였다. 사실 86세대와 그 자녀들(91~96년생 에코붐 세대)의 '교육 광풍'은 물론 대입도 대입이지만 '고입'에서 더 드러났다. 2007년 SBS 드라마 '강남엄마 따라잡기'의 배경이 괜히 중학교인게 아니다. 우리나라에 중학교를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는 거의 없는데 그 드라마가 중학교 배경인 이유가 있다. 봉천 신도시 조성 때 봉현초등학교와 구암중학교는 빠르게 진행되어 2003년, 2004년에 개교했는데, 고등학교만 지연되어 2012년에서야 개교하게 된 건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신림동 특목고 유치도 좌초됐고, 미림여고가 자율형사립고로 지정됐다가 4년만에 반납한 바 있다.
한편, 내 개인적으로도 이 해는 엄청난 변화가 있긴 했지만, 적어도 연말연초까진 그런 기미를 전혀 느끼지 못했다. 2005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날. 크리스마스 이브마다 부모님은 아파트 베란다에 선물을 놔두시곤 했다. 내 선물은 거의 항상 책이었고 미국을 다녀왔던 2003년, 그 해 크리스마스에 모노폴리를 그리워하던 나에게 사주셨던 부루마불이 딱 하나의 예외였다. 그리고 2005년 크리스마스의 선물은 당시 그 해 말에 출간되었던 '해리포터와 혼혈의 잔' 이었다.
온라인의 세계로
사실 그 전까지는 컴퓨터를 한다고 해도 학교에서, 또는 동네에서 친구들과 온라인게임(크레이지 아케이드-큐플레이-메이플스토리)이나 각종 플래시 게임 및 작품들을 하는 정도였지, 실제로 온라인 밖으로 진지하게 소통을 하거나 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 2005년 크리스마스 선물 이후로 모든 것이 변하게 된다.
그 전부터 동작도서관에서 해리포터를 종종 읽곤 했었고 매년 개봉하던 해리포터 영화도 항상 꼬박꼬박 챙겨보던 차, 혼혈왕자를 소장하게 되었으니 더욱 가속도가 붙어 2006년 1월이 되자마자 아예 마법사의 돌부터 불사조 기사단까지 전권을 섭렵하여 소장한 뒤에, 그 달 말 다음 카페 '해리포터 호그와트'를 발견해서 들어가게 되었다. 온라인 공간은 '신세계'였다.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모여서 내가 관심있는 주제에 대해서 서로 이야기도 나누고 여러가지 활동을 하고 있었다. 자기들끼리 마법기숙사 배정 같은것도 만들어서 멤버들을 그리핀도르, 래번클로 등에 배정하기도 하고 해리포터 팬픽을 쓰는 게시판도 있었다.
나도 그곳에서 해리포터 팬픽을 쓰기 시작했다. 별별 작품을 썼다. 지니 위즐리의 시점에서 소설을 써 보기도 하고, 한국인이 호그와트에 입학한다면?을 주제로 소설을 써 보기도 했다. '인터넷 커뮤니티'는 정말 '신세계'였고, 이 해리포터 카페가 내 첫 인터넷 커뮤니티였다.
봉천 2,3동 작은도서관 개관
▶ 봉천3동 작은도서관(봉천3동 1717-4)
‘글빛정보도서관’으로 이름 지어진 지하1층 지상4층의 봉천3동 작은도서관은 2004년 1월 공사를 시작 2년여 만에 연건평 210평으로 준공됐다. 도서 8,000여권, 열람석 총 139석을 갖췄다. 초현대식 봉천3동 작은도서관의 총사업비는 부지 사업비를 포함하여 24억5천만원. 1층엔 장애인들을 위한 별도의 열람실이 정보자료실과 같이 만들어져 도서에 관한 정보를 컴퓨터로 검색하여 필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어린이 전용 열람실(48석)은 2층에 별도로 마련되고, 일반인 열람실(20석)은 3층, 자유 열람실(50석)은 4층으로 도서는 2층, 3층에서 대여할 수 있다.
▶ 봉천2동 작은도서관(봉천2동 1703-1)
봉천2동 작은도서관은 기존 상가건물을 이용한 리모델링 도서관이다. 도서 3,000여권에 열람석 총 91석을 갖추었으며, 총사업비는 2억1천3백만원이 투입됐다. 상가 5층에 위치하며, 정보자료실 10석, 어린이 열람실 21석, 일반인 열람실 48석, 자유열람실 12석외 서고로 이뤄졌다. 정보자료실에서는 전자도서를 읽을 수 있으며, 각종 다양한 정보도 같이 검색할 수 있다.
관악저널, 2006 「봉천2,3동에 ‘작은도서관’ 잇따라 개관」
2006년 2월 27일과 2006년 2월 28일, 하루 간격으로 봉천3동 작은도서관(글빛정보도서관)과 봉천2동 작은도서관이 개관했다. 봉천2동 작은도서관 개관식 날에는 또 어디서 소식을 듣고 온 내가 거기까지 직접 내려가서 개관식을 관람하기도 했다. 김희철 관악구청장이 서울유치원 앞에서 커팅식을 했다.
2000년대 초반부터 기록되어 있는 나의 동작도서관 대출 내역을 보면 이 시기에 맞춰서 대출 내역이 끊긴다. 이제 더 이상 동작13번 마을버스를 타지 않고도 도서관으로 갈 수 있었기 때문인데, 이 2006년 2월부터 봉천동을 떠나게 된 2010년 2월까지 4년 내내 이 도서관을 정말 많이 다녔다. 도서 이용도 도서 이용이지만 지금은 미디어실로 사용중인 12석의 일반열람실(다음 해 중학생이 됐을 때부터 이곳에서 시험 공부를 꽤 자주 했다)과 당시에는 컴퓨터를 10대 운용하며 자유롭게(그 시절은 예약도 필요 없고, 시간 제한도 없었으며, 딱히 접속제한되는 페이지도 없었다!) 쓸 수 있는 디지털정보실까지 아주 알차게 이용했다. 참고로 옆동에 글빛정보도서관 컴퓨터는 매우매우 느렸는데 여기는 빨랐다.
이 도서관은 개관 초에는 이용실적이 저조하다는 이야기도 들으며 영어전용 도서관으로 변경하라는 당시 구의원의 제안도 있었다. 그 땐 그 제안이 바로 채택되어 바뀐다거나 하진 않았고 4년동안 잘 (+사실상 PC방 용도..) 이용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저 컴퓨터 자리는 항상 널널하게 있어서 언제 가든 불편함이 없기도 했고 속도도 빨랐던 걸로 기억하는걸 보니 저렇게 구의회에서 지적당할만큼 수요가 저조하긴 했나보다. 그 땐 몰랐다. 여하튼, 그 당시에 바로 그 제안이 채택되어서 직후에 이곳을 어린이 영어전문 도서관으로 바꿨으면 굉장히 화가 나지 않았을까 싶다. 그런데 2020년대로 넘어간 지금 다시 가보니, 어쩌다보니 그 때 그 구의원의 제안마냥 영어책 많은 도서관으로 유명해졌던데 참 세상이란 알다가도 모를 노릇이다.
곧 이 도서관(성현동작은도서관)과도 안녕이다. 이 도서관은 06년 2월 처음 개관할 때부터 나랑 인연이 있었다. 국회의원이랑 구청장이랑 와서 개관 축사하고 테이프 끊고 하는것도 다 보고..
집에서 컴퓨터한 시간보다 여기서 컴퓨터한 시간이 훨씬 많을 거다. 말 그대로 작은도서관이라 책이 별로 없긴 하지만 빌려본 책도 많고.. 책은 인소빌려봤던 여기서 5분거리 글빛이랑 더 추억이 있긴 하겠다. 글빛이랑 여기랑 관악도서관 3군데는 뭐 추억이 쌓여있으미
나와 희로애락 다 겪은 이 도서관을 떠난다는게 이 동네 떠나면서 제일 슬프다. 추억을 쓰자면 밑도 끝도 없을테니 이만 생략
2010년 2월 22일 월요일, 홈피 일기 재구성
농담이 아니라 정말 여기서 희로애락을 다 겪었다. 딱 '초6~중3' 이 시절이라 지금 생각하면 이불킥할 사연들도 많지만 그땐 그랬었다. 일기에 언급된 인소(인터넷소설)는 귀여니의 소설을 말한다. 사실 귀여니가 인기를 제일 끌던 시절은 2000년대 초반이라 우리세대보다는 약간 윗세대 이야기이긴 한데, 우리 세대까지도 영향이 있긴 있었다. 귀여니 인소의 추억은 대부분 단행본보다는 전자사전으로 보던 추억들을 꺼내곤 한다. 그런데 나같은 경우는 2000년대 후반 당시 글빛정보도서관에 단행본으로 비치되어 있던 귀여니 소설을 '도레미파솔라시도'를 시작으로 '늑대의 유혹' 등 전편을 완독한 케이스였다. 당시 글빛정보도서관과 관악산 입구에 있던 관악문화관도서관(현 관악중앙도서관)에는 이상하리만큼 인소 단행본이 많았다. 에픽하이의 평화의 날을 들으면서 글빛정보도서관에 간 다음 귀여니 소설을 읽던 화창한 봄날은 아직도 기억에 크게 남아있다.
학원 대개편, 그리고 강남으로
글빛정보도서관의 개관일인 2006년 2월 27일, 봉천2동 작은도서관의 개관일인 2006년 2월 28일이 더 기억에 남는 이유는 전자는 수학학원이었던 '뉴스터디'를 다니기 시작한 날, 후자는 어학원 '청담어학원'을 다니기 시작한 날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봉천2,3동 도서관 개관과 학원 대개편 외에도 이 시점을 기준으로 이전과 이후의 삶이 꽤 많이 달라서, 이 해까지 초등학교를 다녔음에도 나는 내 삶에서 어린이 시기와 청소년 시기의 기준점을 이 시점(2006년 2월)으로 잡는다.
이 때를 기점으로 전 해까지 배우던 피아노, 태권도, SLP 등등을 전부 정리하고(플룻만 학교 특기적성으로 했기 때문에 이 해인 6학년때까지 했다.) 완전 새롭게 다니는 학원이 재편되었다.
먼저 수학의 경우, 3장에서 묘사한 '기탄수학'과 공교육만으로 5학년때까지 배웠지만 이 때부터 봉천역 앞에 있던 대형 수학학원 '뉴스터디'를 다니기 시작했다. 이 관악뉴스터디학원은 아직까지 있는데, 내가 다니던 소위 전성기 시절에 비해 규모가 많이 줄어들었다.
이 시기는 소위 학군지에서 '명문학원'으로 입지가 쌓인 몇몇 학원들이 우리 지역같은 '신흥 신중산층 지역'에 분원(문자 그대로 분원이라는 표현을 쓰진 않았고 관악캠퍼스, 관악브랜치 등 있어 보이는 이름을 썼다.)을 내는 형식으로 학원이 확장되던 시기였다. 뉴스터디의 경우 노원에 본원을 두고 있었으며, 해당 기사에 언급된 '페르마학원(대치동 본원)' '영재사관학원(안양 평촌 본원)' '하이스트학원(목동 본원)' 등 모두 익숙한 이름들로 실제로 해당 학원들에서 특강을 듣거나 실제로 수업을 듣기도 했지만 그 지역 본점까지 가지 않아도 이미 관악-동작 지역에 분원을 냈으며, 모두 규모가 꽤 있었다.
특목고 시장이 커지면서 ‘명문’으로 인정받는 입시준비 학원들도 대거 등장하고 있다. 수강생이 3,000~5,000명에 이르는 대형학원도 적잖다. 이들 학원은 매년 수백명의 특목고 합격생을 배출하며 명성을 쌓아가고 있다. 최근에는 분원을 내며 덩치를 키우거나 아예 프랜차이즈 사업을 시작해 ‘기업’으로 성장하는 곳도 있다. 반면 차별화에 성공하지 못한 중소학원은 사양길에 접어들고 있어 대비된다. 유명학원 출신의 합격자는 계속 늘어날 전망이어서 ‘빈익빈 부익부’ 현상은 더욱 심화될 것으로 보인다. 흥미로운 점은 ‘명문’ 특목고 입시학원들이 지역마다 골고루 분포돼 있다는 점이다. 대입시장처럼 ‘강남’ 쏠림현상이 없다. 오히려 강남지역에서 특출난 성적을 내는 학원은 별로 없다. 송파, 목동, 일산, 분당, 안양, 노원 등 수도권 각 지역마다 ‘맹주’ 대접을 받는 학원들이 전국적인 지명도를 얻고 있는 중이다. 방학이면 부산, 광주 등 지방에서 유학을 오는 학생들도 상당수라고 관계자들은 입을 모은다.
한경이코노미 2006.10.19. 「특목고 비즈니스-오프라인 학원」
뉴스터디는 우리 집까지 셔틀버스가 왔다. SLP도 그렇고 뒤에 다닐 하이스트도 그렇고 이 학원 셔틀버스의 특징은 봉천 신도시의 많은 아파트단지들을 거쳐서 최종적으로 봉천역 앞에 있던 뉴스터디까지 간다는 거였다. 친한 친구들이 살았던 적이 없는 행운동 우성아파트나 은천동 두산아파트 등등의 구조가 익숙한 것은 이 때 셔틀버스들이 지나다녔기 때문이다. 빌라촌 한가운데에 서는 법은 없었고 오직 대형 아파트단지 몇 개를 돌다가 학원에 도착하는 루트였다. 그 당시에는 왜 그런건지 몰랐다. 그때부터 아파트 아이들과 빌라촌 아이들은 아예 다른 세상을 살고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한편 영어학원 SLP도 슬슬 그만둘 때가 되었다. 이때쯤부터 슬슬 사춘기가 오기 시작한 나는 SLP의 '어린이학원스러운' 분위기에 이때쯤부터 슬슬 거부감이 들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내가 SLP를 그만두겠다고 했을 때 엄마는 '청소년 전문 어학원'으로 그 당시 한참 뜨기 시작하던 청담어학원을 이야기했는데, 다른 과목은 몰라도 '영어'만큼은 관악-동작 지역의 분원이 아니라(물론 대형 영어 체인학원들의 관악-동작 분원 역시 당연히 있었다.) 강남 본원으로 보내고자 했다. 훗날 부모님 지원을 끊고 살던 몇 년동안 번역회사에 근무하며 돈을 벌고 이후 화해하게 되기도 하는데, 유독 이 시대의 부모님들(386세대)이 영어 교육에는 더 민감하게 반응한 점에 더하여 나의 부모님은 나를 수학 등 다른 과목은 학군지 출신 유명 학원들의 관악, 동작구 캠퍼스로 보내더라도 영어만큼은 재능이 더 있으니 지역 캠퍼스보다도 과감하게 본원을 선택했다.
그렇게 2006년 2월 25일 토요일 엄마랑 같이 처음으로 강남구 청담동이라는 곳을 가게 되었다. 일단 숭실대입구역으로 가서 승강장의 맨 앞까지 갔는데, 목적지인 청담역에서 청담어학원을 가려면 출입구가 장암방면 기준 맨 앞쪽에 있어서 아예 탈때부터 전동차의 맨 앞에 타고 간 것이다. 그런데 이게 습관이 되어서 지금도 전철을 탈 때 항상 열차의 맨 앞부분에 승차하곤 한다.
그는 '서울대반'만 도맡아 가르치던 인기 강사라 성적이 나쁜 학생들을 가르쳐 본 경험이 없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시험을 봐서 영어 성적이 좋은 학생만 뽑았다. 그랬더니 "반에서 1등을 하는 학생도 청담어학원 시험에 떨어진다더라"하는 소문이 돌았다. 그러자 학생들이 줄을 서기 시작했다.
초중학생을 위한 고급 영어교육이라는 새로운 시장도 그가 개척했다. "학자를 꿈꿨던 사람이 입시 교육처럼 소모적인 사업을 할 수 없다"며 초등학생과 중학생을 대상으로 입시 부담 없는 영어교육 서비스를 제공하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청담어학원은 100% 원어민 교사를 채용하고 연구개발(R&D) 센터를 만들어 교재도 직접 제작한다. 초중학생을 대상으로 한 이런 종류의 학원은 없었다. 경쟁자가 거의 없는 '블루 오션'을 찾은 셈이었다.
동아일보 2007.07.05 「어학교육기업 CDI홀딩스 김영화 사장」
실제로 저런 비슷한 소문이 돌았다. 특히 청담 본원은 일정 단계 이상을 받지 않는다고 했다. 당시 청담어학원 Blended Learning의 레벨은 English Chip 1~4 - Mega - Giga - Tera - Bridge - Par - Birdie - Eagle - Albatross - Master 이렇게 이루어져 있었는데 지역에 위치한 소위 '분점'인 관악캠퍼스의 경우 English Chip 1부터 전 과정이 오픈되어 있었지만 청담어학원 본원은 Tera 과정부터 오픈되고 그 이하 레벨은 아예 개설을 하지 않아 입학시험에서 이 레벨 이하의 성적을 받으면 아예 등록 자체를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입학시험을 치고 와서 괜히 두근거렸던 기억이 있다. 입학 시험은 iBT, 토플이었고 시험 결과 Tera 반에 배정되었다. 강남 청담 본원에 입학할 수 있는 자격은 주어졌지만, 그 중에서는 제일 하위 레벨이었다. 이후 2008년 말 쯤엔 Albatross 레벨까지 가게 된다.
이 때에 소위 '고급 영어교육' 수요가 생기기 시작했는데 이 시기(2006~2007년 무렵)에 매출이 2~3배씩 증가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 집도 그 흐름에 탑승한 것이다. 그때는 정말 전성기였다. 현재의 학동로97길 30에 있는 ADLV빌딩의 당시 이름은 라야빌딩이었고 건물 전체가 청담어학원이었다. 그 빌딩이 A빌딩. 그리고 영동대로137길 6에 위치한 백송빌딩의 3층도 전체가 청담어학원이었는데 그 빌딩이 B빌딩. 여기에 그 앞에 있는 리버뷰오피스텔 3층까지 임차해서 학원으로 썼다. 그게 C빌딩.
제9장에서 묘사하겠지만 2009년 무렵에는 현재 결혼정보회사 퍼플스와 산부인과가 위치한 학동로 521 땅까지 매입해서 신축, 청담어학원이 전층을 통째로 쓰면서 외고대비반을 운영하기도 했었다. 지금은 이 4곳에서 전부 철수하고 주소만 청담동으로 유지한 채 강남구청 인근 건물 3층이 전부지만, 이 시절 '초-중학생을 위한 고급 영어교육'의 수요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초등학교 4학년~중학교 3학년이 핵심 타겟층이었던 이 학원의 운영진은 정확히 86세대의 자녀들이었던 에코붐 세대(1991~1996년생)들이 이 시기를 빠져나가는 시점에 귀신같이 '익절'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2011년 기사)
영어는 외국어가 아니라 국어다!
김 대표가 찾아낸 또 다른 길은 바로 'ESL(제2언어로서 영어) 사업'이다.
그 동안 영어는 그 중요성과는 별개로 철저히 '외국어'였다. 그래서 시험점수가 중요했고 말이 되는 것, 즉 '표현력'만이 강조돼 왔다. 그러나 이제 영어를 국어 교육하듯 체계적이고 근본적으로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 그의 소신이다.
"영어도 표현력뿐 아니라 논리력과 창의력이 중요해요. 특히 논리를 가르치면 영어뿐 아니라 모든 시험과 협상에 강해지죠."블렌디드 러닝은 '학생에게 가장 알맞은 학습 콘텐츠를 가장 효과적인 채널(교실, 인터넷, 모바일)로 공급'하는 것.
이를 통해 무분별한 조기유학을 대체하는 '영어대안학교'이자 '유학 대비ㆍ유학 후 언어개발 지원기관' 기능을 하도록 했다."교육시장이 완전 개방돼 국내 대학과 학원이 외국 유명 교육기관과 경쟁해야 합니다. 실패율 높은 조기유학을 안 가도 국내에서 얼마든지 수준 높고 질이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거죠."
매일경제 2006.05.27. 「CDI홀딩스 김영화 대표 - 영어도 국어교육하듯 '기본기'부터 잡아야죠」
당시로서는 굉장히 혁신적이었다. 사상 최초로 입시 중심이 아닌 '조기유학을 대체'하는 학원으로 자신들을 타겟팅하며 등장한, '영어를 국어처럼 가르키자'는 모토로 센세이션을 일으킨 청담어학원. 당시 초등학생 고학년~중학생 자녀를 둔 신중산층 학부모들에게 열광적인 반응을 얻었으며, 강남 본원 이외에도 서울의 각 재개발 신축 지역, 경기도의 1기 신도시, 인천 연수, 대전 둔산, 부산 해운대 등 각지의 신시가지들에서도 호응이 높았다. 이 해(2006년)는 조기유학 붐이 점차 정점을 찍고 있던 때이기도 했다. 내 동년배들의 이야기였다. 조기유학까지 보내기는 어려운 이 계층의 학부모들에게 청담어학원의 마케팅은 대성공을 거뒀다. 참고로 조기유학은 이 해에 정점(2만9천명대)을 찍고 2007~2008년까지 2만7천명대에서 횡보하다 2009년부터 본격적인 감소세로 접어든다.
다만 청담어학원의 경우 '국내 입시'를 등한시하였기 때문에(심지어 중학생 이상의 경우 내신기간에는 아예 수업을 안 했다) 결국 한국 교육 특성상 이들이 중학생 후반으로 넘어가면서 대거 입시학원으로 이탈, 2010년대 이후로는 이 때의 전성기를 다시 누리지 못한다. 그러나 2000년대 중후반의 '전성기'는 정말 대단했고(어느정도냐면, 청담역이 이 시기(2000년대 중후반)에 7호선 모든 역 중 이용객 수가 가장 높게 잡혔다.) 이 시기에 초등학교 마지막 해와 중학교를 보낸 나는 영향을 상당히 크게 받았다.
강남과의 첫 교류
청담어학원 본원은 당연하게도 봉천동까지 셔틀버스를 운행하지 않았다. 처음으로 혼자 지하철을 타고 등하원을 하게 되었다. 가는 길은 그래도 어렵지 않았다. 집 앞에 서는 마을버스 관악01번을 타고 숭실대입구역에서 내려서 7호선으로 갈아타고, 장암행이나 도봉산행 열차로 아홉 정거장을 거쳐 청담역 12번 출구로 나와서 쭉 걸으면 됐다. 도어 투 도어 45분이었다.
나는 생각보다 빠르게 강남 '청담'이라는 곳에 적응해 나가기 시작했다. 처음 만난 반이 정말 쿵짝이 잘 맞는 행운이 겹쳤기 때문이다. 청담어학원은 3달에 한 번씩 레벨테스트를 iBT TOEFL로 보는데, 이 때 다음 단계로 승급하거나(레벨 업) 아니면 다시 한번 그 레벨을 3개월 더 수강하는(스테이) 경우로 나누어진다. 이 때 스테이를 한 번 하면 '재수' 두 번 하면 '삼수' 이런식으로 불렀다.
같은 반에 테라 과정을 3수하고 있는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와 빠르게 친해졌다. 그 애는 학원 근처에 살고 있었다. 걔랑 학원 시작하기 전에 여기저기 다니고 최근까지도 열려있다가 올림픽대로 구조개선공사로 5년간 막힌 청담대교 굴다리를 건너 한강도 보고 하는 생활이 이어졌다.
지금도 그렇지만 이 때도 이미 '강남' 하면 '우러러 보는 느낌'이 있었다. 분명 함께 어울려 놀고 있었는데도, 나는 그 친구가 강남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그 때는 내가 불과 4년 뒤에 (임시적이지만) 강남 사람이 될 지도 몰랐고, '우리 아파트의 원주민들 중에 강남 출신이 많으며 또한 우리 아파트 초기 주민 중 강남으로 들어간 사람이 많다' 라는 것도 몰랐다.
내가 이 학원을 3년 반을 다녔지만 학원에 있던 시간 말고 따로 주말에 약속을 잡아서 친구와 같이 논 것도 이때밖에 없다. 심지어 아직 휴대폰을 사기도 전이었어서 정말 고전적 방식으로 청담역에서 몇 시에 만나자. 이렇게 구두약속을 하고 만난 것이었다.
한편 다른 친구는 서초구에 거주하면서 사립초등학교인 계성초등학교에 다니고 있었는데, 당시 게임보이(어드밴스, SP 등)를 3대, 닌텐도 DS를 1대 소유하고 있었다. 참고로 닌텐도 DS가 국내에 본격적으로 보급된 건 2007년~2008년 즈음이다. 그 시절 2006년 봄에 닌텐도 DS를 소유하고 있다는 건 굉장히 희귀한 일이었다. 그 애는 마지막 날에 게임보이 하나를 나에게 그냥 선물로 줬다. 그 비싼 게임보이 어드밴스를 그냥 준다는게 너무 신기하긴 했다. 그 게임보이는 한 2년동안 요긴하게 써 먹었다.
그리고 6개월 쯤 지났을까, 2006년 엄마 생신은 목요일이었고 청담어학원에 가는 날이었다. 청담어학원을 7시에 마치고 중간에 고속터미널역에서 내려서 '강남지하상가'를 탐방하며 엄마께 줄 생신 선물을 찾으러 돌아다니다 나무로 된 컵을 하나 사서 간 기억도 난다. 불과 1년 전까지만 해도 애들이랑 청계천으로 버스를 타고 가는것도 꽤나 큰 '활동범위 이탈' 이었는데, 이제 강남지하상가에서 선물도 자연스럽게 사게 되었다. 아직 초등학생이라 돈도 없어서 천원짜리 컵이었는데, 그 컵 꽤 오랫동안 썼다. 그렇게, 나의 '활동 범위'가 강남까지 조금씩 확장되고 있었다.
한글판이 없으면 영어로 하면 된다
2000년대 중반의 닌텐도 시장은 암흑기였다. 2000년대 초반 '포켓몬스터 금.은' 버전이 한글화가 대성공하면서 많은 어린이들이 이 게임을 하고 추억을 가지고 있지만, 2000년대 중반에 발매된 닌텐도 게임들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당시에는 닌텐도에서 직접 한국으로 게임을 배급하지 않고, 대원씨아이라는 곳을 통해 유통했는데 이들이 게임을 한글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시기에 나왔던 소위 포켓몬스터 3세대인 '포켓몬스터 루비 사파이어'와 '포켓몬스터 파이어레드 리프그린'은 한글화가 되지 않았는데, 당시 포켓몬스터 시리즈를 좋아하던 친구가 있었던 나는 그 버전들의 영문판은 구할 수 있었으므로 그냥 영문판으로 진행했다.
이 기간동안 영어로 게임을 하면서 딱히 불편함을 느끼지 않았다. 사실 초등학생들에게는 낯선 단어, 예를 들면 'palalyzed' 같은 단어도 자주 나오는데 자연스럽게 그냥 했다. 이 시기에 괜히 '영어 공용어 논쟁'이 일었던게 아니다. 나에게 아직도 보만다는 Salamence고 파비코리는 Altaria다. 심지어 이게 어린시절 추억보정이라도 된건지 한글판으로 즐겼던 포켓몬 2,4,5,6세대보다(6세대까지만 하고 관뒀고, 최근에는 포켓몬 유튜버들을 자주 보긴 한다.) 영문판으로 즐겼던 3세대의 기억이 더 좋게 남아 있는 것도 신기하다.
숙제를 온라인으로
청담어학원의 특징이라고 하면 한 20% 정도는 오프라인 교재로 숙제를 했는데, 나머지 80%의 숙제는 온라인으로 진행을 했다는 점에 있다. 이 시대에는 굉장히 혁신적이었다. 리스닝의 경우 '단 한번'만 듣고 저 빈칸들을 채워야 했고(You will not be able to listen to the audio again!) 라이팅의 경우 작문을 해서 제출하면 강사들이 첨삭과 평가를 내려주곤 했다.
이 '온라인 숙제'는 다른 방면에서 이전 장에서도 가끔씩 언급했지만 원래 컴퓨터 사용이 주말에 1시간, 이런식으로 굉장히 제한되어 있었는데, 이때부터 이 청담 숙제를 핑계로 컴퓨터를 이전보다 자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심지어 이때부턴 게임도 안하고 싸이월드나 인터넷 커뮤니티를 했으니 더욱 클릭 딸깍으로 왔다갔다 하기가 쉬웠다. 그리고 인터넷을 하기 위해서 학교 도서관 컴퓨터와 마침 이 해 개관한 봉천2동 작은도서관의 컴퓨터도 아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요즘처럼 스마트폰이 있는 시대에는 인터넷 한번 하겠다고 도서관 컴퓨터들을 전전하는 2000년대 후반의 에피소드들이 이해가 가지 않을텐데 그땐 그랬다.
마지막 부처님오신날과 달마사
우리 친가가 독실한 불교 집안이고, 외가의 경우는 미국으로 유학갔던 외삼촌이 전 가족에게 전도를 하여 기독교 집안이 된 상황에서, 부모님께서는 그렇게 종교 색채가 강하진 않았지만 매년 부처님오신날에는 반드시 나와 동생을 데리고 사찰에 갔다. 문제는 나의 마지막 어린이날이었던 2006년 5월 5일은 부처님오신날과 어린이날이 겹친 날이었던 것! 그 해 달력을 한 번 찾아보시길. 정말이었다. 내년에 중학교에 가는 나는 그 날이 마지막 어린이날이었는데 부모님은 어린이날보다 부처님오신날이 우선이었고, 결국 서러움이 폭발해서 별로 좋지 않게 끝난 그런 추억도 있다.
우리 집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흑석동의 사찰 '달마사'. 제일 가까운 사찰이다 보니 꽤 자주 가는 곳이었다. 흑석뉴타운의 뉴 자도 없던 시절이라 지금 달마사를 가보면 놀랍다. 달마사는 그대로인데 달마사 주변 환경이 아예 달라졌기 때문이다. 여하튼 달마사에서 2000년대 중반에 '영화 동산'이라는 걸 상설한 적이 있다. 내 기억 속에 확실하게 있는데 소스가 하나 남아 있다. 무척 반가웠다.
서울시 동작구 서달산 달마사(주지 미명 스님)가 ‘영화 동산’을 7월 26일 개설한다. ‘사찰을 지역 주민들을 위한 문화 공간으로, 이웃과 정을 나누는 정겨움의 마당으로’란 목적으로 설치한 달마사의 영화 동산은 야외 영화 상영관으로, 올 6월 초 철쭉과 진달래, 소나무 등 우리 토종 식생을 관람석의 주변에 조경해 300여평 규모로 야외 무대를 꾸몄다. 달마사의 법당 바로 옆에는 300∼500여명이 앉을 수 있는 공간이 있고 관객들과 마주한 동산의 중턱에는 가로 7m, 세로 5m의 스크린을 설치한다. 달마사 미명 스님은 “사찰은 불자만이 오는 곳이라는 고정 관념에서 벗어나기 위해 주말 영화 동산을 상설하게 됐다”고 설명하면서 “악천후 등 야외 영화 상영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사고가 없을 땐 올 여름 매주 주말마다 서달산 인근의 주민과 불자들이 원하는 영화를 상영할 계획”이라며 영화 동산의 운영 방침을 설명했다.
법보신문 2004.06.29. 「동작구 달마사,‘영화 동산’상설」
2004년에 시작해서 아마 몇 해는 더 했던걸로 기억한다. 내 기억 속에 하나 남아 있는것은 2006년 8월 5일에 이 달마사에서 영화 '말아톤'을 봤던 것이다. 2000년대 중반에 나온 애니메이션인 '오세암'도 아마 여기서 보지 않았나 싶다. 그렇게 강남과의 교류가 시작된 이 해에도 지역 사회 내에서의 교류 역시 지속적으로 있었다.
눈 내리던 연말과 상가 만화 대여점의 폐업
아직도 보면 아련해지는 사진이다. 슬슬 2006년 말로 접어들면서, 11월에는 4년동안 배웠던 플룻 연주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학예회에 나갔고, 12월엔 숭실대에서 열린 '동작음악회'에 선생님이랑 같이 방문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때쯤 동아행복상가의 도서대여점 '독서클럽'이 문을 닫았다. 폐업은 2006년 말인데 폐업하고 나서도 꽤 오랫동안 그 공간이 방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간판 자체는 무려 2016년까지 살아남아서 로드뷰로도 확인할 수가 있다. 그 자리에는 나중에 24시간 무인카페가 유행하기 시작한 2010년대 후반즈음 무인카페가 들어왔다가 최근에는 인테리어업체가 들어왔다. 이 상가는 생길때부터 지금까지 25년 넘게 알았다보니 입점하는 가게를 보면 환경 변화를 느낄 수 있다. 인테리어업장이 상가에 하나둘 입점하는 걸 보면 확실히 내 고향 아파트가 '구축'이 되었음을 체감하게 된다.
도서대여점의 전성기였던 1990년대 중반엔 전국에 12,000개가 넘는 도서대여점이 운영되기도 했었지만, 2000년대에는 그 절반인 6000여개로 감소했고 2010년대엔 2000~3000개로 줄었다. 2003~2004년부터 다음, 네이버가 '웹툰 서비스'를 진행하기 시작했고, 인터넷 시대가 열리며 웹하드 등으로의 유통 등이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2010년대부터는 대여점보다는 '만화카페' 형식으로 트렌드 자체가 바뀌게 된 것도 있었다.
사실 초등학교 6학년때 폐업한 곳이라 여기서 책을 정기적으로 대여한다거나 한 기억은 없으나 마지막 폐업 때가 기억에 남는 것은 폐업한다고 남은 만화책들을 소위 '떨이'로 팔았기 때문이다. 그 소문이 나한테까지 들려왔고 이때다 해서 '도라에몽' 만화책을 꽤 많이 구입해서 집에 가져다 두었다. 이후 중간중간 비어있는 편수를 채우겠다고 영풍문고 강남점(당시 고속터미널 센트럴시티 소재. 2000~2012. 다음 해인 2007년부터 2012년까지 꽤 자주 이용하게 된다.)에서 도라에몽을 좀 더 수급하기도 했다.
5년 뒤인 2011년 '명탐정 코난'에 재미들렸을 때, 강동구 지역에 방문했다가 폐업 준비중인 만화방을 발견하고 똑같이 떨이 만화책(코난)을 대량으로 구매한 적이 있었는데, 이 때의 행동은 5년 전 우리 상가에서의 경험이 있었기에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이렇게 2001년부터 2006년까지, 길고도 긴 초등학생 시절이 마무리가 되었다. 마지막 연말은 가족들이 다 같이 청계천 루체비스타에 방문하며 끝을 맺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