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봉천동이 아니라 성현동 - 07~08년

제08장: 2007년 ~ 2008년

by 수연

중학교 입학과 교복 파동

길었던 6년의 초등학생 생활이 끝나고 2007년 중학교 입학의 시기가 다가왔다. 어느 중학교로 배정이 되느냐? 가 잠시 초유의 관심사였다. 우리 학교 애들은 구암중, 상현중, 상도중, (봉원중) 중에 하나로 배정이 되는데 나같은 관악로 서편 애들은 보나마나 구암중이다. 라는 분위기였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그런데 관악로 동편 애들은 기존에는 거의 상현중학교로 갔는데, 이번에 상도중학교로 가게 되었다, 이런 얘기도 좀 돌았다. 그 때 좀 친하게 지내던 친구 한 명도 그렇게 상도중학교로 갔던 것 같은데, 그 이후로 어떻게 지내는지는 모른다.


2단지 임대아파트 아이들은 이 당시부터 봉원중학교로 배정을 받았다. 2년 뒤인 2009학년도에는 구암중학교가 선호학군이라 과밀화되는 바람에 1단지 분양아파트까지 봉원중학교 배정으로 변경하려다가 1단지 분양아파트 주민들의 시위로 무산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으며, 구암중학교는 개교 10년도 되지 않아 기존 건물에서 1층을 추가로 증축했다.


사실상 친구들 주변에서 나오던 중학교 예정지 3곳 중 2곳이 동작구 소재인것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 동네는 동작구 - 관악구의 경계 중 경계여서 두 지역의 정체성이 혼재되어 있다.


2007년 3월 3일 중앙일보 보도
2007년 3월 2일 SBS 보도

중학교의 시작은 처음부터 사회 돌아가는 것과 맞물려 뭔가 이상하게 진행되었다. 보통 중학교 들어가면서부터 교복을 입는다고 들었는데, 일단 2월에 교복을 사지 않았고 학교에서도 일단 3월은 사복으로 진행한다. 어쩌고 하면서 공지가 돌았다. 이 당시에는 그냥 하라니까 그런가 보다, 했는데 이 시리즈 연재하면서 중학교 첫 해 첫 달에 교복을 입지 않은 것이 기억나 서치를 해보니 특수한 경험이 아니라 그 해 초에 '교복 파동'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었다. 초등학교 입학 전 홍역 예방주사 의무화도 딱 내가 입학할 즈음에 홍역 파동이 터져서 시행된 바 있었는데 참 새로운 학교 입학 시기마다 무언가가 일어났다.


2006년에 고입을 치른 이 3년 선배들은 '에코붐 세대' 1번 타자(1991년생)로서 나중에 뒤의 2~6번 타자(1992~1996년생)에게들도 여러 영향을 끼치게 되는데, 첫 번째가 바로 이 교복 파동이었다. 외고 70만원 교복 사건으로 촉발된 이 난리는 공정거래위원회가 바로 나서 교복값 담합이나 과장 광고 여부에 대한 점검을 바로 벌이기 시작했다. 교육부도 이 분위기에 바로 '신입생은 5월부터 교복 착용' 발표를 하기에 이르렀다. 이 모든 일이 2007년 1월 말부터 2월 초까지 일어났으니 특히 신입생들과 신입생들의 부모들은 우왕좌왕할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일단 우리 집도 2월에 교복을 사지 않고 대기를 했고, 2007년 3월 입학식이 있던 날 우리 학교도 사복 입학식을 했다. 오죽하면 지상파 3사와 메이저 언론들까지 다 이 해의 입학식을 보도했을 정도.


그러나 2~3월에 그렇게 난리였던 '교복 파동'은 3월 중순이 지나면서 차츰 흐지부지되기 시작했고, 3월 중순까지 교복을 사고 있지 않던 우리 집도 3월 20일경에 '엘리트 교복'에 가서 교복을 구매했다. 그리고 4월이 시작되면서 교복을 입고 등하교하기 시작했다. 그런 파동이 언제 있었냐는 듯이.


하지만 이 때부터 등장한 개념인 '교복 공동구매'는 이 이후로 계속 어느정도 사회적 이슈가 되긴 한다. 제21대 대통령인 이재명이 성남시장 시절 이슈화했던 사건 중 하나가 무상교복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처음 겪은 대중교통비 인상

2007년 3월 22일 동아일보 보도.
2007년 4월 3일 숭실대입구역에서 노선도상 지하철 운임표를 수정하고 있다. 아직 종이표를 사용하던 시절의 흔적이 보인다.


2007년 4월 1일부터 대중교통비가 올랐다. 2004년 7월 대중교통 체계 대개편 이후 2년 9개월만이었다. 2004년 전에는 내가 혼자 대중교통을 타고 다닐 일이 거의 없었으니(그래도 3-2번-동작13, 2번-관악01번 덕에 250원 내고 마을버스 타던건 또렷하게 기억난다) 대중교통비 인상을 실제로 체감하게 된 건 이 때가 처음이었다. 참고로 나는 3월생이라 이 해 3월부터 청소년 요금을 내고 있었는데, '640원 시대'는 한 달도 누리지 못하고 그 전까지 어린이 요금 400원에서 바로 720원으로 거의 2배가량 올랐다.


놀라운건 청소년 요금의 경우 이 때 640원(2004년 7월 기준)에서 720원으로 오른 것인데 이 720원으로 거의 16년 가량 유지됐다는 것이다. 2012년, 2015년에 두 번 대중교통 요금 인상이 있었는데 그 때 모두 청소년 요금을 동결했기 때문. 내가 2007년 4월부터 2013년 3월까지 겪었던 지하철비 '720원'이 2023년 조정 직전까지 유지되고 있었다는 걸 알고 얼마나 놀랐었는지 모른다.


2007년 인상 때는 또 '기본요금 거리'를 '12km'에서 '10km'로 줄였다. 그런데 이 줄이는 거리에 숭실대입구역에서 청담역까지의 거리가 들어갔다. 기존엔 청담역에서 숭실대입구역까지 기본 요금이었는데, 이 조정 때문에 남성역까지 기본요금으로 바뀌어버린 것이다. 이 조정 덕(?)에 사당동의 기억이 생기게 되는데, 이걸 핑계로 걷기 운동도 할 겸 남성역에서 내려서 집으로 돌아오는 일이 종종 생겼기 때문이다.


남성역에서 숭실대입구역은 말이 한 정거장이지 거리도 엄청 멀고 경사도 있다. 가는 루트는 남성역 2번 출구에서 나와서 솔밭로 입구 삼거리까지 큰길을 따라 간다음, 솔밭로 입구 삼거리 쪽에서 골목(사당로2차길- 사당로2가길)을 따라 쭉 올라오는 거다. 그럼 사당LG아파트(현 사당자이)가 나오는데, 그 아파트를 왼쪽에 끼고 계속 걸으면 상도중학교 입구가 나온다. 거기서 왼쪽 LG아파트 쪽으로 꺾으면 관악푸르지오 111동 쪽으로 나오는, 사람만 지나갈 수 있는 샛길이 나온다. 이 글을 쓰면서 그곳을 다시 가봤는데, 그땐 없었던 사당롯데캐슬골든포레가 생겨서 분위기는 바뀌었지만 그 샛길은 그대로더라. 거기로 나와서 청림동 빌라촌을 조금 뚫고 지나가면 강남중앙교회, 우리 집으로 건너가는 횡단보도가 나온다.


후술하겠지만, 에픽하이파 - 빅뱅파 - FT아일랜드파로 친구 무리가 갈렸을 때 나는 에픽하이파에 속해 있었는데, 에픽하이 음악을 들으면서 이 루트 주파를 자주 했다. 청담어학원은 중학교 들어가면서 4시반에서 7시반으로 바뀌었고, 귀가길이니 10시쯤이었는데, 그 밤 10시의 서울과 에픽하이 음악은 정말 잘 어울렸다.



휴대폰

중학교에 입학했는데도 나는 휴대폰이 없었다. 슬슬 친구들 중에 휴대폰을 장만하는 애들이 생기기 시작했고, 나도 휴대폰을 가지고 싶다고 하자 엄마는 반 1등을 하면 휴대폰을 사주겠다고 했다.

2007년 5월 나의 첫 휴대폰

초등학교때까진 학기말마다 학력평가라는 이름의 시험을 보긴 했지만 석차 발표를 한다거나 하는 건 없었다. 중학교부터 매 시험마다 석차가 공개됐다.


그리고 2007년 4월 말 치러진 나의 첫 중간고사에서 반 1등을 차지한다. 성공한것 같지만 사실 성공이 아니었다. 원래 반 1등은 물론 전교권에 이름을 올리면서 '그 학년에서 키워야 할 학생'으로 눈도장을 찍어놨어야 했는데, '학교 시험'으로서는 처음 치뤄보는 OMR 마킹에서 대형 실수가 나와 버린 것이었다. 도덕 과목에서 객관식 문항이 25문항이었는데, 20번까지만 마킹을 하고 나머지 5문항을 마킹을 아예 하지 않았다. 플러스펜으로 예비마킹을 한 것도 아니고 그냥 아예 안 했다. 그 중요한 시점에 도대체 왜 그랬을까. 그래서 반 1등은 했는데 전교 20등대(상위 5% 정도)였다. 우리 반에서 당시에 전교권과 10등대가 안 나와서 반 1등을 하긴 했는데, 전교권으로 눈도장을 찍는데 실패한 거였다. 결국 이 때 전교권 눈도장 실패한 이후에 사춘기 심하게 오면서 1~2학년은 전교 10%대에서 놀았다.


여하튼 그 첫 시험의 기억은 '성취했다'거나 마냥 기쁜 기억은 아니지만, 여하튼 엄마가 말한 '반 1등'이라는 조건은 어쨌든 달성했으므로 약속대로 엄마는 휴대폰을 사주셨다. 그게 위의 휴대폰이었다. LG-KH1200.


저 휴대폰을 딱 1년 쓰고 갈아탄게 이제 아래의 휴대폰 삼성 Anycall SPH-W4950이었다.

2008년 6월 나의 두 번째 휴대폰

두 휴대폰의 출처 링크를 타 보면 알겠지만 둘 다 해당 폰이 막 출시됐을 때 구매했다. 말 그대로 '신상폰'!


그런데 이 시절 휴대폰은 전화 기능보다는 문자 기능 덕에 필요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청소년을 중심으로 문자메시지 인기가 엄청났기 때문에 소위 '알(KTF)' '콩(LGT)' 등의 단위를 사용하던 청소년요금제에서는 "문자를 얼마나 보낼 수 있느냐"가 핵심 키여서 '팅문자 프리미엄 요금제(SKT)'라느니 '쇼(SHOW) 알 문자매니아 요금제'라느니 하는 문자메시지 중심 프리미엄 요금제까지 등장하기도 했다.


당시에는 문자메시지 보관함이라는 것도 있어서 보관하고 싶은 문자는 따로 보관할 수도 있었다. 아래의 기사에 좋은 문장이 있어서 인용해보자면, "문자는 청소년들이 은밀한 이야기를 몰래 나눌 수 있는 수단"이자 "청소년들의 부자유와 비밀스러운 관계는 문자메시지와 '깔맞춤'한 것"이었다. 나는 어언 16~17년이 지난 지금도 저 휴대폰에서 초코쿠키체로 서로 주고받던 문자메시지가 잊히지 않는다. 이 시기 기사들에 묘사되는 '1시간에 100통' '하루에 100통'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요즘 청소년들은 말보다 문자를 통해 친구들과 의사소통을 한다. 하루에 100통 이상 휴대폰 문자메시지(SMS)를 주고 받는 경우가 다반사다. 이동통신사들도 문자 사용이 익숙한 청소년을 겨냥해 문자에 특화된 청소년요금제를 내놓고 있다.

한국경제 2009.03.31. 「문자 많이 보내는 청소년 엄지족 정액요금 이용한다」
고양시 백마중학교의 박OO(15)양은 친구와 잡담할 때 주로 문자를 이용한다. 지난 9월 초 저녁 8시 항간의 화제인 곱등이로 시작한 문자는 곱등이가 나타난 친구 집 이야기를 거쳐 그 애가 사귀는 남자친구 이야기, 두 반의 커플 이야기까지 이어졌다. 문자가 끝난 것은 1시간 뒤인 9시, 약 50통씩 100통이 오고 갔다. OO양은 문자 500통 쓰는 요금제를 이용하다가 최근 휴대전화를 바꾸면서 ‘무한문자’를 쓰고 있다. 500통 요금제 때는 개시 일주일 만에 문자가 다 떨어진 적이 많았다.

한겨레 2010.11.16. 「우리는 어찌하다 문자드립에 빠졌나」


기술 발달의 속도가 워낙 빨라서일까, 이 '청소년기 피쳐폰 문자메시지의 기억'은 앞세대도, 뒷세대도 모르는 '우리 세대'만의 기억으로 남게 되었다.



지방자치단체 주관 가족행사들

2007년 5월 '하이서울 페스티벌(노들섬)' 안내


아마 요때쯤이었던 것 같다. 지방자치단체 주관으로 가족이 즐길 수 있는 여러 소소한 축제나 행사들을 개최했던 것이. 2000년대는 ‘신중산층 가족 문화’가 가장 활발히 펼쳐진 시기였다. 00년대 초반의 중산층 가족을 겨냥한 이러한 문화체험 행사는 민간이 기획한 유료 체험전과 전시가 주도했다. 코엑스 전시장, 부천 아인스월드 같은 공간들이 대표적인 예시다. 다만 서울시가 2003년 하이서울페스티벌을 시작하면서 공공이 주최하는 도심 축제가 본격적으로 대중화되기 시작했고, 2005년 청계천 복원과 여의도 봄꽃축제의 출범을 거치며 00년대 후반기부터는 무대가 민간 전시장에서 도심·강변의 공공공간으로 서서히 옮겨갔다. 나는 그 흐름의 변화를 경험 속에서 직접 느꼈다.

출처

특히 2007년 하이서울 페스티벌은 우리 동네 근처인 노들섬이 유독 주 무대로 등장한 해이기도 했고(미라클 수중다리 건너기라는 행사를 적극적으로 홍보했다), 제7장에서 잠깐 지나가듯이 언급하기도 했지만 2006년 어린이날이 부처님오신날이랑 겹치면서 찝찝하게 끝난것도 있고 해서 이 해는 부모님이 더 어린이날을 특별하게 만들어주고 싶으셨던 것 같다. 이 해는 나는 중1이고 동생은 초5라 어린이? 청소년? 좀 애매한 시기긴 했는데, 특히 나에겐 진짜 마지막 어린이날이다 싶으셨던것 같다. 실제로 다음 해인 2008년부턴 나에게 5월 5일은 그냥 공휴일이다.


부모님, 동생과 함께 참가했었던 2008년 2월 '우리는 줄넘기 건강가족 행사(양재동)' 안내


한편 이 때쯤 되면 나도 꽤 커서 내가 직접 이런 서울시 행사들을 찾아가기도 했는데 2008년 서울 자전거 축제, 2009년 하이서울 자전거 대행진, 2009년 남산 백만인 대회가 그랬다. 또한 중학교로 올라가면서 외부 봉사활동 시간을 채워야 하는 게 있었는데 그것도 이런 서울시 행사랑 연계해서 채울 수 있는게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매 월 토요휴업일(놀토)마다 진행하던 '청계천 걷기대회' 였는데 친구들이랑 모여서 1년에 4번 정도 간 다음 봉사시간을 채워 왔다. 청계천 놀러가는 김에 다른 곳들도 구경하고, 놀고 오는 식으로. 이게 서울 지역 중학교에 소문이 많이 나서 중학생들이 엄청 오는 바람에 뉴스까지 탔다. 아마 교육청에서 공문도 한 번 뿌렸던 걸로 기억한다.


중학생 김모(14·서울 용산구)군은 토요일만 되면 새벽 같이 일어난다. 유독 늦잠이 많았던 그가 일찍 일어나는 이유는 단 한가지. 걷기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서다. 지난 두 달 동안 매주 빠지지 않고 대회에 참가했더니 뚱뚱하던 몸도 제법 날렵해졌다. 더구나 걷기대회에 참가하면 자원봉사활동으로 인정받게 돼 ‘일거양득’이다.

서울시내 곳곳에서 열리고 있는 ‘걷기 대회’가 중·고생들에게 건강과 성적 관리의 수단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현재 봉사활동은 중·고생들의 내신 등급을 결정하는 학교생활기록부(학생부)의 비교과영역에 포함돼 일정 시간을 채워야 우수한 점수를 받게 된다.

12일 서울시와 각 자치구에 따르면 매월 놀토(학생들이 학교를 쉬는 매월 둘째·넷째주 토요일)에는 청계천 일대에서 ‘청계천 시민 걷기대회’가 열린다. 이 대회 참가자는 오전 7시30분부터 10시까지 청계천 고산자교 문화광장을 출발해 마장2교∼서울숲(둘째주·7.2㎞), 두물다리∼서울광장(넷째주·5.5㎞) 구간을 걷는다. 목적지에 도착하면 완주한 학생들을 대상으로 4시간짜리 봉사활동 확인서가 발급된다. 이 대회는 지난 1년간 참가한 시민 5만8000여명 가운데 절반이 훨씬 넘는 3만5000여명이 중·고생일 정도로 학생들에게 인기가 높다.

지난 2일 같은 반 친구 2명과 대회에 참가한 중학생 박모(15)양은 “걷기 대회에 참가하면 운동도 하고 봉사활동시간까지 인정받을 수 있어 친구들이 서로 참가하려고 한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세계일보 2007.06.12. 「걷기만 해도 봉사점수 "쑥쑥" 중고생 걷기행사 참가활발」


이 때 서울시장이 오세훈이라 그래서 본의 아니게 오세훈 시장을 멀리서나마 정말 많이 봤는데 30대가 된 지금도 서울시장이 오세훈이다. 메르켈 총리의 장기집권을 본 독일 동년배들이 이런 기분이었을까? 물론 오세훈 시장은 중간에 10년 공백기가 있었다가 복귀한 것이지만 말이다.



뉴타운 열풍과 한나라당 전성기의 도래

2007년 12월 3일 뉴시스 보도

90년대 초~중반 착공하여 90년대 말부터 00년대 초에 대량으로 입주한 소위 '서울 뉴타운'이 성공을 거두면서 이 '뉴타운'이라는 것이 정치적으로 각광받기 시작했다. 특히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는 '뉴타운 선거'라고도 불릴 정도로 뉴타운이라는 개념이 한국 사회 전체를 강타했다. 그런데 흔히들 뉴타운이라는 단어가 이 때 나왔다고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다.


'뉴타운'이라는 개념이 최초로 들어와 보도된 것은 1962년 런던의 '뉴타운'을 소개하면서부터이고, 1976년 매일경제에서 '서울의 뉴타운'이라는 코너를 장기연재하면서 사용빈도수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이 때도 새로 조성되는 중산층지대를 뉴타운으로 지칭하긴 했으나 이 때의 뉴타운은 아파트촌만이 아닌 '현대식 고급주택(단독주택 등) 밀집지'도 역시 뉴타운으로 혼용되어 사용되었다. 이수단지, 봉천신림지구, 개봉지구 등이 그렇다.


그 후에도 신시가지 조성(80년대 목동 등)을 진행할때마다 '뉴타운'이라는 단어가 간헐적으로 사용되기는 하였지만 대중화되거나 정책화된 언어로 등장하지는 않은 상황에서, '뉴타운'은 90년대 활성화된 '합동재개발사업지'를 정조준하며 점점 정책화되기 시작한다.


이진설 건설부장관은 이어 사회간접자본확충과 수도권인구집중 억제를 위해 현재의 대규모 신도시형태가 아닌 인구 2만~3만명 규모의 뉴타운 개발이 바람직하다고 말하고 이의 개발에는 정부와 민간이 함께 참여해야한다고 말했다.

매일경제 1991.10.25. '아파트 분양가 93년 자율화'


1997년 8월 8일 조선일보 보도. "아파트재개발 - 도심속 복합뉴타운'
2000년 동아일보 연재 '클릭! 뉴타운'

90년대 중후반부터 차차 이 도심재개발이 성과를 보이며 97년 마포부터 '도심 뉴타운'으로 소개되기 시작했고 이어 2000년에 동아일보에서 '클릭! 뉴타운' 코너를 연재하며 봉천동, 응봉동, 길음동 등이 성공적인 도심 뉴타운 사례로 소개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에 맞춰 이명박 시정 출범 직후인 2002년 시정운영 4개년 계획을 수립하면서 '뉴타운사업'을 도입하게 되면서 뉴타운이라는 단어가 이 때 공식화, 정책화된다.


서울 지역 곳곳이 재개발을 통해 '성공적인 뉴타운'으로 변모하는 것을 목격하고, 그리고 대중교통 체계개편(2004년)과 청계천 복원(2005년)을 통해 '모던 서울'이 가시화되자 서울시민들은 이러한 흐름과 공약에 폭발적으로 반응하였고 수도권, 특히 서울 지역에서 이명박 시장을 위시한 한나라당은 2000년대 중반 내내 초압승을 거두게 된다. 특히 봉천신도시의 성공이 이 분위기를 더욱 북돋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 당시 대통합민주신당의 정동영 후보가 관악현대아파트에서 출마 선언을 했었고, 해당 선거에서 당선된 이명박 당선인은 당선 후 첫 재래시장 방문을 이 곳으로 했다. 정동영 대선후보는 이 '봉천신도시 출마 선언' 이후 바로 4개월 뒤에 진행된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봉천신도시와 연담화되어 있는 지역인 동작구 을 지역에 출마하였고, 그 때부터 2020년대 현재진행형으로 동작구을 지역은 '전국구 지역구'가 된다.


하지만 모두가 알다시피 이러한 '후속 뉴타운 장밋빛 구상'은 무참하게 실패하였고 보수정당은 이 이후로 완전히 정책 어젠다를 바꾸어 등장했던 2021~2022년의 일시적 기간을 제외하고는 수도권 지역에서 힘을 못 쓰게 된다. 이 때 뉴타운 정책이 실패했던 이유는 물론 대외적인 이유(2008 경제위기)도 있었지만, 더 큰 이유는 90년대 중후반 도심합동재개발(일명 도심 뉴타운)이 성공한 이유는 그 시대에만 존재할 수 있었던 수요와 공급 두 톱니가 정확히 맞물렸기 때문인데 이를 간과했기 때문이다.


먼저 수요적 측면을 보자. 이 연재를 시작하면서부터 밝혔듯이(2장) 이 90년대 중후반 도심합동재개발 사업이 완성되던 시점의 주수요자는 86세대였다. 86세대는 앞 세대보다 교육수준이 높은 소위 고급 인력이 많았는데 IMF 시기 이들은 상대적으로 어려움을 피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윗세대가 IMF로 인해 대량실직을 경험하며 그 자리를 채우는 소위 승진도 다른 세대보다는 수월하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


반면 뒷세대부터는 86세대만큼의 구매력과 수요력을 따라갈 수 없었는데 정부 당국은 이 '가용할 큰 규모의 현금이 없었던' 뒷세대들에게 '대출로 집 사라'는 정책 태도를 보였다.

2000년대 중반 한국주택금융공사(HF)의 설립을 시작으로 보편화된 주택의 금융화는 국가의 정책과 가구의 복지를 주택담보대출이라는 제도를 통해 구현했다. 빚내서 집을 사는 것이 제도화되었으며 현재와 미래의 노동은 채무 이행을 위한 것이 되었다. 미래의 소득은 주택을 매개로 금융제도 안에 종속되었으며 이로써 자본축적의 양식이 변화했다.

최시현, 『부동산은 어떻게 여성의 일이 되었나』

결국 뒷세대는 86세대에 비해 막대한 부채 부담을 감수하거나 또는 내 집 마련을 포기하는 선택지밖에 남지 않았다. 그렇게 이들은 바로 앞세대에 비해 인구수가 크게 밀리지 않음에도 앞세대(60-70만명)와 달리 40만명 출생아 시대를 열게 되었다.


그다음으로 공급적 측면이다. 90년대 중후반의 도심합동재개발 사업은 주로 무허가 주택 밀집지를 대상으로 이루어졌다. 무허가 주택은 말 그대로 '무허가'이기에 실소유자나 거주자가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기 매우 어려웠다. 게다가 이 시기는 아직 원거주자나 세입자 보호를 위한 법령도 미진했던 시절이므로 싼 값에 대규모 개발을 진행하기 수월했다. 그리고 이게 끝이 아니었다. 암흑의 역사로 잘 알려지지 않았었는데 이 시기 합동재개발이 성공한 제일 극적인 이유는 여기서 더 비용을 줄였다는데 있다. 바로 폭력 동원이었다.


이 브런치북을 연재하고 있는 이 시점에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 192화(2025.09.11. 방영) 에서는 정확히 우리, 그러니까 봉천신도시 지역 그리고 우리와 비슷한 시기에 대규모 합동재개발이 진행된 행당동, 도원동등지에 존재했던 '1990년대 합동재개발지역 용역깡패'들을 다뤘다. 당시 상황을 풀어 쓴 기사 링크를 달아뒀으니 한 번 확인해 보시라. 소위 '아다리가 맞았던' 수요-공급도 모자라 이런 폭력까지 동원해서 만들어진게 90-00 시기의 '서울 뉴타운 성공 사례'였다. 그 당시에는 정책입안자, 집행자들 모두 '이대로만 하면 계속 진행하고 성장할 수 있겠지' 생각했다.

(주)적준개발용역은 94년부터 재개발 현장을 거의 독점하게 되며, 이후 가장 많은 재개발 사업권을 수주한 업체로 자리잡게 된다. 적준은 철거현장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폭력을 행사하여 가장 확실한 철거회사로 자리잡게 된다.

1998.11. 「다원건설(구 적준용역) 철거범죄 보고서」


그러나 불과 10년 전과 달리 이 때쯤(2000년대 중후반) 되면 이제 대규모 재개발 할 만한 무허가 주택지들은 거의 다 이미 '도심뉴타운'으로 탈바꿈한 상태가 되었고, 일반주택들은 재개발을 하려면 그만큼의 보상이 이루어져야 했으므로 비용이 폭등하게 되며, 시대의 변화로 세입자 등에 대한 보호 조치 역시 더욱 강화되면서 자연스럽게 '뉴타운 신화'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10년 전마냥 폭력을 이용한 속도전이라도 이용해보려고 한게 2009년 초의 용산 참사다. 물론 처참한 실패로 돌아갔으며, 이 용산참사 전후로 한국 정치의 흐름이 바뀌었다고 보면 된다. 이 실패 이후 보수 정당은 아직까지도 제대로 된 출구 전략을 찾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2007년까지만 해도 이러한 믿음은 깨지지 않았었고, 당시의 서울은 90년대 중후반 도심재개발의 성공이 2000년대, 2010년대에도 계속 이어질거라는 청사진을 그리고 있었다.



'봉천동'이 사라지던 날

2008년 9월 1일부로 '행정동 봉천동'이 사라졌다. '행정동 봉천동'이 사라지기, 그리고 우리 동인 봉천2동의 경우 드림타운이 있던 봉천5동이랑 통폐합까지 예정되어 있었는데, 여하튼 그러기 딱 보름 전에 현 성현동주민센터인 '봉천5동 주민센터'로 갔다. 봉천5동 주민센터는 지금 성현동 주민센터 그 건물 그대로다. 봉천2동 주민센터는 이 때 통폐합된 뒤에 자치회관으로 전용했다. 이 날 봉천5동 주민센터를 왜 갔느냐? 요 당시 핫했던 '우주인' 고산 연구원의 특강이 있었기 때문이다.

2008년 8월 25일 뉴시스 보도

2006년 2월에 봉천2동 작은도서관 개관할 때 갔던 것도 그렇고 이 시절 나는 지역에서 뭐 행사하는걸 귀신같이 알았던 것 같다. 여하튼 저 특강을 가면서 '행정동 봉천동의 마지막이구나' 생각을 하면서 갔다. 그 당시에는 전혀 몰랐는데 고산 우주인이 봉천5동 주민센터에 왔던게, 그분이 여기 주민이여서 그런 것도 있었다!


2006~2007년 우주인 선발(소위 '한국우주인배출사업 프로젝트')도 상당히 이 시절 큰 이슈긴 했는데, 이 정도로 넘어가자.


전 봉천동에만 33년을 살았습니다. 실질적인 봉천동의 발전을 다보고 자란사람이지요...복개도로가 복개돼기전 상황도 보았고 2호선 전철이 생기기전 상황도 보았던 사람입니다. 그때에 비하면 봉천동 무지하게 발전했죠.. 타지역사람들이 봉천동에 대한 인식이 넘 안좋더라구요
심지어는 내가 볼때(극히주관적일수도 있습니다)도 현재 봉천동보다 못한 동네 친구들조차도 안좋은 동네라고 손가락질할때..(우수웠습니다)
2003.07.18. 부동산뱅크 관악드림타운 게시판
지금 소유하고 있는데. 참 교통좋고 여러모로 괜찮은 아파트인데
동네 이미지 때문인지몰라도 아파트 값이 요지부동이네요
2005.05.06. 부동산뱅크 성현동아아파트 게시판
어디 사느냐고 질문을 받은뒤 봉천동에 산다고하면
대부분의 반응은 왜 거기사느냐? 형편이 안좋게 되었느냐? 등
거의 부정적인 내용입니다.
봉천동이 현재 어떤 모습인지를 못 본사람이 대부분이면서 옛날 달동네만을 생각하는 것 같더군요.
따라서 제 생각은 꼭 동명이 바뀌어야 할 것 같습니다.
괜히 억울한 생각도 들고 그래서 인지 아파트 가격도 제자리인것 같습니다.
제가 궁금한 것은 동명 바뀐다고 한것이 작년 7월부터 신문에 나온것
같은데 진짜 바꾸는 것을 추진하고 있는지요? 바꾸고 있다면 현재 어디까지 진행되고 있는지하고 아시는 분은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2006.04.18. 부동산뱅크 관악드림타운 게시판


봉천동 개명 건은 다른 어떤 건보다도 2000년대 봉천 신도시 주민들에게 최우선 순위에 있었다. 봉천동이라는 지명이 예전부터 너무나도 유명했기 때문이었다. 뉴타운 주민들에게는 안 좋은 의미로.


조선일보 1993년 10월 7일 보도

애초에 재개발 시작도 전부터 '달동네 대명사 봉천동'이라고 헤드라인을 매번 장식할 정도였으니. 봉천신도시 사업이 완료되고 나서도 '봉천동 살아요'라고 말하고 다니기가 어려웠던 탓이다. 그리고 2002~2005년 부동산 광풍에서 '가격이 덜 오른 이유는(떨어진게 아니다!)' '동네 이미지 때문이다' 이런 이야기도 아무렇지 않게 돌아다녔다. 약간 이런 느낌이다. 마지막 장에서 자세히 묘사하겠지만, 2017년에 우리 집은 16년간 소유, 10년간 거주하던 봉천 신도시 아파트를 팔고 동작구 노량진에 있는 연식이 비슷한 아파트 단지로 이사했다. 그 때쯤 되면 한참 대학 고학년, 졸업반쯤 되던 시절이라 여기저기 면접을 보러 다녔는데, 받아봤던 면접 질문 중에 "어디 사느냐"고 하길래, "노량진에 산다"고 했더니 어디 고시원 이런 곳에 사는건지?하는 반응이 돌아왔던 적이 있다.


사실 봉천동 개칭 시도는 이 때가 처음이 아니었다. 1981년, 1992년, 1995년 세 번이나 시도했지만 좌절된 바 있고 특히 1995년 시도때는 당시 95년 선거에서 관악구청장으로 당선된 진진형 구청장의 공약이라 하여 상당히 사업이 진전, 개칭할 동명까지 다 정해놓은 상황에서, 내무부가 "주민 90% 이상이 동의해야 한다"며 기각, 좌절되는 일까지 있었다.

1995년 11월 19일 조선일보 보도.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동명 개정은 달동네 이미지보다는 '봉천동과 신림동은 각각 11동, 13동까지 있어서 어느 동이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 직관적으로 파악하기 어렵다는 문제가 있다'는 문제 의식에서 출발했다. 물론 그때도 '달동네 이미지 싫다'라는 의견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이 시기에는 봉천신도시가 조성되기 직전이었으며 오히려 10년이상 거주한 주민들은 봉천동 명칭에 그렇게 거부감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신림동의 경우 서울대학교 이미지가 있어 오히려 선호하는 지명이었다.

1995년 10월 24일 경향신문 보도.


네 번째 시도였던 2000년대 중반은 상황이 매우 달라졌다. 봉천 신도시의 조성이 완료된 것이다. 목동신시가지급 인구의 외지인이 대규모로 유입되었다. 지난 90년대와 달리 제도의 변화도 도왔다. 2005년 3월 지방자치법 개정으로 동의 명칭과 구역 변경을 지방자치단체의 조례로 개정할 수 있도록 하면서 지난 95년 구에서 모든 작업을 완료하고도 내무부의 기각으로 좌초되었던 사례를 피할 수 있게 되었다.


자치구가 아닌 구와 읍ㆍ면ㆍ동의 명칭과 구역은 종전에 의하고, 이를 변경하거나 폐치ㆍ분합할 때에는 행정자치부장관의 승인을 얻어 당해 지방자치단체의 조례로 정한다.

기존 지방자치법 제4조3항(2005년 이전)
자치구가 아닌 구와 읍ㆍ면ㆍ동의 명칭과 구역은 종전에 의하고, 이를 폐치ㆍ분합할 때에는 행정자치부장관의 승인을 얻어 당해 지방자치단체의 조례로 정한다. 다만, 명칭과 구역의 변경은 당해 지방자치단체의 조례로 정하고, 그 결과를 특별시장ㆍ광역시장ㆍ도지사(이하 “시ㆍ도지사”라 한다)에게 보고하여야 한다.

개정된 지방자치법 제4조3항(2005년 개정안)

이 변경은 현재까지도 유효하다. 2025년 기준 현행 지방자치법 제7조1항 ① 자치구가 아닌 구와 읍ㆍ면ㆍ동의 명칭과 구역은 종전과 같이 하고, 자치구가 아닌 구와 읍ㆍ면ㆍ동을 폐지하거나 설치하거나 나누거나 합칠 때에는 행정안전부장관의 승인을 받아 그 지방자치단체의 조례로 정한다. 다만, 명칭과 구역의 변경은 그 지방자치단체의 조례로 정하고, 그 결과를 특별시장ㆍ광역시장ㆍ도지사에게 보고하여야 한다. 로 조례로 정한 후 보고만 진행하면 된다. (승인이 아닌 보고이다)


이 2005년 3월 지방자치법 개정은 기초자치단체의 권한 강화를 목적으로 발의, 가결된 법안으로 읍면동 명칭 변경, 사무소 소재지 설치 및 변경, 시군구의 행정기구 설치 시 승인 절차를 폐지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당시 제17대국회 행정자치위원회 회의록을 보면 아래와 같은 내용이 있다.

◯강창일 위원 지방자치법중개정법률안 말이지요, 간단한 명칭의 변경인 줄만 알았습니다. 읍․면․동의 명칭 변경을 도 단위에 넘긴다 이렇게 간단히 알았는데 지금 그게 아니고 분합․폐치까지도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인지 그것하고요, 또 하나는 행정구조 개칭―개편―문제하고 직결되어 있는 것인지 간단하게 미리 알고 싶습니다.
◯행정자치부장관 오영교 통합은 포함이 안 되고 명칭 변경에만 국한되어 있습니다.
◯강창일 위원 단지 명칭 변경만입니까?
◯행정자치부장관 오영교 예.
(중략)
◯박기춘 의원 명칭 변경하고 사무소 변경이고요, 지방의회 쪽에는 조례로 규정되어 있습니다. 거기서 의견을 듣게 되어 있기 때문에, 거기서 많이 여과가 되기 때문에 염려하시는 부분은 많이 없을 것입니다.
◯행정자치부장관 오영교 지금 현재와 같이 분합의 경우에는 승인을 받도록 되어 있습니다.

제17대국회 제252회임시회 제1차 행정자치위원회 회의록, 2005.02.21.
◯행정자치부차관 권오룡 위원님들께서 지적하신 사항이 시․군․구에서 명칭과 구역 변경 시에 상급단체인 시․도지사의 승인 없이 바로 당해 자치단체 조례로 정하면 어떠냐 그런 말씀을 해 주셨거든요. 폐치․분합까지는 안 가고 명칭․구역 변경이기 때문에 그렇게 해도 큰 문제는 없고 다만 그렇게 해서 시․군․구에 자율권을 준다고 할 때 다만 그 결과는 시․도지사에게 보고하게끔…… 어저께 말씀하신 것이거든요. 그렇게 해도 저희는……
◯이명규 위원 무관하지요?
◯행정자치부차관 권오룡 예.
◯노현송 위원 그렇게 자율권을 주는 것으로……
◯행정자치부차관 권오룡 예.
◯이명규 위원 사실 제가 오늘 그 점을 지적하려고 했습니다.
◯행정자치부차관 권오룡 그러니까 이 위원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저희가 반영하지요.
◯이명규 위원 저는 어제 이 얘기는 안 했는데 금방 차관님이 얘기하신 것처럼 사후 보고로……
◯행정자치부차관 권오룡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러면 이것을 저희가 수정…… ‘명칭과 구역 변경은 당해 자치단체의 조례로 정하되 시․군․구의 경우……’
◯이명규 위원 ‘시․도지사에게 사후 보고한다’ 이렇게 하면 될 것 같습니다.
◯행정자치부차관 권오룡 ‘시․도지사에게 그 결과를 보고하여야 한다’로 하면 될 것 같습니다.

제17대국회 제252회임시회 제1차 행정자치위원회 법안심사소위원회 회의록, 2005.02.22.

동명 변경 과정에서 중앙정부의 승인 절차를 폐지하는 과정이 핵심인 것을 알 수 있다. 심지어 원안에는 '시도지사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는 내용이 있었는데 시도지사의 승인도 '보고'로 개정되어 통과됨으로서 온전히 기초자치단체의 의지만 있으면 동명 개칭이 가능하도록 제도적 변화가 이루어졌다.


관악구는 이 지방자치법 개정이 되자마자 발빠르게 대응한다.

서울 관악구가 봉천동, 신림동의 동 이름 변경을 추진하고 있다. 관악구는 △보통 인구 3만명이 넘으면 분동을 실시하는 전례와 △이번 3월 개정된 지방자치법 등을 들어 동 이름 바꾸기에 자신감을 나타냈다. 이에 따라 구는 관악구 동명칭변경 추진위를 구성하고 8월 하순경 주민 공청회 를 거쳐 동 명칭 변경에 필요한 절차를 밟아 나가기로 했다.

매일경제 2005.07.21. 「봉천동, 신림동이 사라진다」
[서울신문]‘달동네’의 대명사격이었던 ‘봉천동’과 ‘신림동’의 이름을 바꾸기 위한 서울 관악구(구청장 김희철)의 노력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 관악구는 10일 구청 기획상황실에서 ‘관악구 동명칭 변경추진위원회’를 구성, 활동을 추진할 추진위원들에 대해 위촉식을 가졌다. 위원회는 교수·변호사 등 각계를 대표하는 38명으로 구성됐다. 앞으로 위원회는 동이름를 바꾸는 것과 관련된 주요 결정사항, 새로운 동 이름 추천·심의·결정 등을 담당한다. 구는 지난 8월말 관악문화관 공연장에서 주민 1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동이름 변경추진에 대한 설명회를 개최한 바 있다. 이처럼 구가 동이름 변경을 추진하는 이유는 최근 이들 지역에도 대단위 아파트·대형 쇼핑몰 등이 대거 유치됐으나 여전히 예전 ‘달동네’의 이미지를 벗지 못하고 있다는 판단에서다.

서울경제 2005.11.11. 「관악구 동명변경 위원 38명 구성」
관악구 동명개칭에 관한 정책 토론회가 지난 11월 28일(화) 오후 2시 관악구민회관 대강당에서 유기홍 국회의원실 주최로 개최되었다.
이날 정책토론회에는 봉천동 지역에 위치하고 있는 대부분 아파트에서 입주자대표회의를 비롯해 부녀회 임원들이 집단적으로 참석하여 동명 개칭에 대한 높은 의지를 나타냈다. 이들 대표들은 정책토론이 끝날 때까지 자리를 지키고, 질의답변 시간에는 앞 다투어 의견을 제기하는 등 적극성을 보였으나 시간관계상 일부 의견발표에 만족해야 했다.

관악저널 2006.12.11. 「봉천동 아파트 주민들 동 명칭 변경 요구 커」
서울 관악구가 봉천동과 신림동의 이름을 바꿀지, 그대로 둘 것인지에 대한 구민들의 목소리를 공식적으로 듣기로 했다.
구는 오는 3월 봉천동과 신림동 주민 2000명을 대상으로 동명칭 변경에 대한 전화 설문조사를 전문 여론조사 기관 2곳에 의뢰해 실시한다고 14일 밝혔다. 설문은 ▷기존 명칭 선호도 ▷변경 찬반 여부 및 사유 ▷변경 방법 ▷추진 시기 등 동명칭 변경에 대한 주민들의 의견을 포괄적으로 묻게 되며, 조사결과는 3월 발표돼 동명칭 변경 여부를 결정할 중요한 자료로 활용된다.
관악구 관계자는 “최근 이 일대 지역에 재개발돼 고층 아파트와 빌딩이 들어서며 예전의 달동네 모습이 거의 사라졌지만 이름 때문에 과거 이미지를 떠올리는 경우가 많아 동명칭 변경을 고민하게 됐다”고 말했다.

헤럴드경제 2007.02.14. 「봉천동 洞명칭 변경 설문」


2005년 동명칭 변경추진위원회 구성, 2006년 토론회 등을 거쳐 2007년 주민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심지어 이 설문조사에서 찬성률이 생각보다 저조하게 나와서 지난 세 번의 시도때처럼 백지화되는듯도 했지만, 이 당시 서울의 대대적인 동 통폐합 움직임에 편승하여(2008년에 기존 5백여개 동을 4백여개 동으로, 약 100개 동을 통폐합하는 작업을 서울시 전체적으로 했었다.) 동 명칭 변경을 관철할 수 있었다. 2025년 인천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과 비슷하다. 인천 서구와 동구 역시 지역 통폐합에 편승해서 구 명칭을 변경했다.


절반 이상이 95년에 세부명칭까지 정해졌던 새로운 동 명칭 그대로 갔다. 성현동이 95년안에서도 성현동이었던건 이번에 자료조사를 더 심층적으로 하면서 알게 되었다. 그런데 08년에 변경할 때는 무슨 우리 동네에 예로부터 어질고 현명한 사람들이 많이 살았다고 하여 붙여졌다(한자가 成賢이다). 이러면서 홍보를 했는데 '?? 우리 동네 역사가 그랬다고? 금시초문인데' 한 기억이 있다. 아니나다를까 95년안 기사를 보니 살피재를 풀어 쓴 성현(省峴)동이더라. 오히려 유래를 알고 나니 동명에 애착이 생긴다. 동작구와 관악구의 정체성이 애매하게 혼재되어 있는 나와 정말 잘 맞는 이름 같아서 말이다.


우리는 그래도 어감이 좋아서 그런지 한자를 바꿔서 대충 넘어갔는데, 우리 양 옆 동네들이 문제였다. 95년안에서 '원당동'으로 정해졌던 봉천6동은 뜬금없이 '행운동'으로 정해졌고, '당곡동'으로 정해졌던 봉천1동은 '보라매동'으로 정해졌다. 2024년에 당고개역이 불암산역으로 개명될때도 개명 사유가 재개발 신규 이주민들이 '당(堂)'의 이미지를 꺼려했기 때문이었는데, 이 때도 그랬던 듯 하다. 보라매는 그렇다치고 원당 대신 행운은 무슨 생각일까, 나름 '당(堂)'의 이미지를 또 어떻게 비튼 것일까? 잘 모르겠다.


결국 2008년 9월 1일 동명 개정이 완료되고도 몇몇 동의 이름을 가지고 동작구, 강남구와 갈등이 붙어 이게 헌법재판소까지 갔고, 결국 헌재 판례까지 생겼다. 끝까지 다사다난한 동명 개정 작업이었다.



워크맨 MP3 구매

2008년 크리스마스엔 서울대입구역에 있는 하이마트에 갔다. mp3 플레이어를 구매하기 위해서였다. 내가 고른 제품은 이거였다. NWZ-B130F. 참고로 이전까지 내가 최신음악을 어떻게 들었냐면, 집 컴퓨터를 쓸 수 있을 때 음악을 크게 틀어놓은 다음 옆에 카세트 테이프를 가져다놓고, 공테이프를 넣고 녹음 버튼을 누른다. 그러면 그 공테이프가 음악을 녹음해서 음악 테이프가 된다! 이거였다. 물론 3장에서 언급한 것처럼 아빠가 각종 음악CD를 많이 가지고 있었어서 그걸로 어떻게 커버가 가능하긴 했는데, 이때쯤 되면 나도 밖에서 음악 들으면서 다니고 싶다, 그런 욕망이 생길 때였고 크리스마스를 이용해 부모님께서 사주셨다.


2005년 크리스마스의 해리포터 선물이 다음 해부터의 분위기를 바꿨듯, 2008년 크리스마스의 이 선물도 내 마지막 청소년기의 상징이 되었다. 이 mp3 플레이어와 함께 질풍노도의 중학생 시기가 2/3 지점을 돌아 마지막 3학년을 맞으며 '고입 입시생' 시기로 접어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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