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목고 응시제한에 중3은 속탄다 - 09년

제09장: 2009년

by 수연
동아일보 2009년 12월 8일 보도. 이날은 한영외고 입시날이기도 했다. 내가 지원자 1222명 중 한 명이다. 이 해의 고입, 특히 서울 지역의 고입은 '카오스' 그 자체였다.

문예영재를 꿈꿨었다

외고 입시생 시절 이야기로 들어가기 전에 먼저 중학교 2학년 말에 있었던 이 사건을 이야기하고 넘어가자. 2008년 10월 서울특별시교육청에 이런 공고가 났다. 2004년부터 2009년까지 서울특별시교육청의 수장을 맡았던 공정택 교육감의 핵심 역점 사업 중 하나였던 교육청 영재교육. 이 영재교육이 한창 붐이던 시절, 나는 수학, 과학, 정보 분야에는 상대적으로 관심이 없었고 사회나 역사 분야는 모집하지 않았으므로 영재교육원과는 딱히 인연이 없나 싶었는데, 이 해에 성북교육청에서 '문예창작분야 영재'를 서울시 초, 중학생 전체를 대상으로 모집을 했다. 수학, 과학, 정보 분야는 서울 11개 교육청에 모두 개설되기 때문에 이 분야로 지원하려면 지역 교육청, 그러니까 우리는 동작교육청에만 지원할 수 있었는데 문예창작분야는 서울 11개 교육청 중 성북교육청에서만 개설해서 서울시 전체로 지원 자격이 열린 것이다.


7장에서 잠시 언급했는데 기억하시는가, 6학년때 해리포터 카페에서 팬픽을 쓰던 나의 모습을, 이 공고를 보고 나는 문예창작 영재교육원에 지원하기로 했다. 엄마도 어쨌든 영재교육원이라 그런지 도전에 뭐라 하시진 않았다. 글빛정보도서관에 가서(성현동작은도서관은 소장 저서가 적었다) 책도 읽고 소설도 쓰면서 보냈다.

기말고사가 11일에 끝났었는데 기말고사 끝나자 마자 다음날에 비장하게 성북구의 석관중학교까지 가서 2차 시험을 보던 날이 생각보다 생생하다. 그리고 1주일 뒤 2차 합격자 발표가 나왔는데.. 결과는 시원한 낙방이었다. 12월 27일 토요일 창작실기검사랑 면접을 그래도 나름 준비하고 있었는데 국어능력검사에서 탈락한다고? 자존심에 스크래치가 세게 났다. 이 때 문예창작 영재교육원 붙었으면 다음 해 5월에 내가 지금까지 써놨던 소설들 전부를 엄마가 찢어버리는 일은 없었을까? 이 때 낙방과 다음 해 5월의 자작소설 전부 소실 사건 이후로 15년 넘게 소설을 쓰지 못했다.



외고대비반 시작

'문예창작 영재교육원 입시(?)'가 한창 진행되던 시기와 비슷한 시점에 청담어학원에서도 기존의 '조기유학을 대체하는 Blended Learning'에서 외고반으로 넘어갔다. 사실 중학교 첫 학기 첫 시험에서 어처구니없는 OMR 실수로 전교탑 눈도장을 실패한 이후로 어언 3학기(1학년 2학기~2학년 2학기) 내내 슬럼프 기간이라 내신이 그렇게 좋지는 않았다.(상위 10% 정도) 그리고 나조차도 아래에 서술할 고입 제도 자체의 혼란과 더불어 내 자신도 이리저리 갈대처럼 상산고도 생각했다가 나중에는 하나고가 생긴다고 해서 하나고도 생각했다가 왔다갔다 갈대마냥 굴기도 했다. 그래도 일단 외고입시 준비는 들어가기로 했다.



날벼락, 외고 지역제한 발표

2009년 2월 3일 동아일보 보도


그런데 2009년 2월 2일 외고 입시를 1년 남겨두고 서울시교육청은 급작스러운 발표를 한다. 내신비중 확대도 이슈였지만 더 큰 이슈는 외고 대입 시 지역제한을 두겠다고 공포한 것이었다. 외고가 있는 지역에 거주하면 반드시 그 지역으로 지원해야 했다. (광역자치단체 기준)


이 발표가 문제였던 것은 우리 지역의 경우 오히려 서울 내의 외고보다 경기도(과천, 안양 등)의 외고들이 더 가깝기도 해서 경기도 외고로 진학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았다는 점이다. 우리 역시 선배들의 선례에 따라 이 방향을 고려하고 있었는데 이 방향이 완전히 막혀 버린 것이었다. 당시까지 경기도 외고 정원 중 약 40% 정도를 서울 지역 학생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걸로 끝나지도 않았다. 당시 '외고 죽이기' 분위기로 인해 '자립형 사립고' '자율형 사립고'가 뜨던 시절이었는데 이 '자립형 사립고' '자율형 사립고' '외고를 비롯한 특목고' 중 단 1곳에만 지원이 가능하도록 바뀌었다.


2009년 4월 1일 동아일보 보도
올해 중학교 3학년인 예나(15)는 잠자리에 들었다가도 몇 번씩 일어나 한숨을 쉰다. 예나는 "1년만 먼저 태어났으면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 들어서 공부할 때도 집중이 잘 안 된다"고 말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예나는 올해 고교 입시에서 1차로 전주 상산고 시험을 본 뒤 2차로 한국외국어대부속외고(용인외고)에 지원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교육과학기술부가 초중등교육법 시행령을 개정하면서 이 꿈은 깨졌다. 새 시행령에 따라 올해 중학교 3학년생들부터는 자립형사립고나 자율형사립고, 외국어고, 국제고, 과학고 가운데 한 곳에만 지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동아일보 2009.04.01. 『특목-자사고 응시제한에 中3은 속탄다』

저 기사의 '예나'는 나와 동갑인데 저 말이 정말로 공감됐다. 1년 차이로 이렇게 많은 것이 바뀐다니 이게 말이 되는 상황인가.


'특목고'로 사실상 문과는 외고, 이과는 과학고 시절도 아니고 무슨 자율고에 자사고에 하나고등학교가 개교한다는 말도 있고 정신이 하나도 없는 와중에 그 많은 학교 중 단 한군데만 지원할 수 있다는 것이 말 그대로 '멘탈 붕괴'였다.



86세대의 자녀들이었던 에코붐 세대들에게 '특목고 열풍'은 '사회 문제'로까지 비화됐는데, 내가 고입 입시를 치르던 2009년이 유독 시끄러웠던 이유는 에코붐 세대 선두주자들이었던 선배들의 2009학년도 대입이 마무리되고나서 보니 외고 출신 학생들이 상위권 대학에 많이 진학했다는 결과가 터져 나왔기 때문(후에 2019년 '조국 사태'의 주인공이었던 조민 역시 1991년생에 정확히 외고-상위권 대학 루트를 탔다.)이었다. 이명박 정권은 '외고 죽이기' 기조를 이어가면서, 대신 이 수요를 '자율형 사립고(자율고)'로 돌리고자 했다.


이런 과도기 속에서 우리들은 정말 혼란스러웠다. 실제로 이 당시 나는 2학년 11월부터 3학년 5월까지 청담 외고대비반을 하다가 그만두기도 했으며 특목고 지원했다가 불합격하면 아예 자율고는 지원도 못해보고 일반고로 진학하게 되는 사태를 막기 위해서 아예 특목고 지원을 단념하고 자율고로 지원시키려는 수요가 이때 반짝 늘었다.(언론에서도 푸시해주었다. 그래프 참고) 이게 이명박 정부와 교육부, 교육청의 의도기도 했다. 웃긴게 제도를 이렇게 만들어놓고 자율고 리스트를 확정해서 발표한게 2009년 7월이다.


특히 강남, 서초 지역의 자율고들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편이였는데 세화여고와 현대고는 2010학년도가 아닌 2011학년도부터 자율고 전환이 예정되어 있었기에 대안으로 목동의 한가람고, 정동의 이화여고가 차선책으로 고려되었다. 실제로 나와 싸이월드 '공다'를 같이 쓰던 친구 중에 아예 특목고, 자사고 지원을 과감히 포기하고 이화여고에 들어간 다음후에 서울대학교에 진학한 사례도 있었다. 그리고 남학생들의 경우 강남권역의 세화고, 중동고가 떴다. 타이틀에 올려져 있는 경쟁률이 저렇게 나온건 이유가 다 있었다.


우리집도 막판까지 저 자율고에 원서를 내느냐 특목고에 원서를 내느냐 자사고에 원서를 내느냐 결정을 못하다가, 결국 외고 지원을 하기로 했다.


그럼 이제 또 어느 외고를 지원할지 결정해야 한다. 단 한 곳에만 원서를 넣을 수 있었기 떄문이다. 게다가 경기도 지역 외고 진학도 막힌 상황이다. 우리 지역에서는 서울지역 6개 외고 중 대원은 약간 서울대같은 느낌으로 완전 최상위권만 지원하는 분위기, 대일, 서울은 좀 멀고, 그나마 같은 남서부 권역인 명덕외고가 대세로 굳어지는 분위기였다. 그 외 버스로 바로 갈 수 있는 이화외고도 조금 고려되었다. 우리 가족은 하루 날잡고 서울 6개 외고를 전부 돌아보기도 했는데, 결국 강동구 상일동에 위치한 한영외고로 결정했다.


이때쯤에 엄마아빠는 봉천동 집을 빨리 처분하고 싶어했다. 연초에는 마포구 공덕지역을 좀 알아보시는것 같더니, 결국 내가 외고에 원서를 넣기로 결정되자 내가 한영외고에 붙으면 고덕, 명일, 상일동 쪽으로 이사를 간다는 계획까지 세워 두었다. 이때 우리집이 시세가 약 4억 정도, 이 때 고덕주공아파트들은 아직 재건축되기 전이었고 약 5~6억 정도로 시세가 형성되어 있던 시절이다. 이 때는 지독한 부동산 침체 시기였는데 강동구 재건축시장은 조금씩 뜨고 있었다. 봉천신도시 초기 주민들 중 많은 사람들이 강남 재건축 아파트 분양을 받고 소위 '대박'을 친 사람들이었던 상황에서(그들은 임시로 왔든 뭐든 간에 '우리 이웃주민들'이었다!) 후발로 강동구 재건축시장을 노리는 전략이다.


이게 나름 합리적인 계획이었던게 실제로 나중에 고덕주공, 삼익그린12차 등이 2016년에 철거되는데, 그 사이인 2010년 ~ 2015년이 플랜을 이행하지 못하고 결국 봉천 집을 그대로 둔 채 강남 구축 아파트(이곳도 2010년대 중반 이후에 재건축됐다.)로 임차이주하여 살았던 시기와 정확히 일치하기 때문. 어차피 똑같이 '학군지 몸테크' 할거였으면 저게 합리적이긴 했다. 성공만 했으면.



강남 공동학군 추진, 그리고 고교선택제


거듭 말하지만 2010학년도(2009년) 고입은 정말 폭력적이었다. 수많은 특목고, 자사고, 자율고 중에 딱 하나만 골라서 지원할 수 있고, 거기서 불합격하면 무조건 일반고로 강제 진학해야 하는 구조였다. 그랬기 때문에 일반고 진학과정에 대한 관심도도 굉장히 높았는데, 이 때 등장한게 바로 '고교선택제'였다. 이 고교선택제는 2005년 제기된 '광역학군제'가 모티브였다. 그 중 '관악-동작 지역을 강남 지역 학군과 통합하자'는 소위 '강남 광역학군제'를 처음으로 던진 인물은 이계안 의원이었다. 이 해 초부터 서울시교육청은 관련 내용을 검토는 하고 있었던것으로 보이는데, 이계안 의원이 소위 '트리거'를 날려준 것이다.

2005년 8월 23일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전체회의. 대기업 경영자 출신인 이계안 의원(열린우리당)이 질의했다.

“폭등하는 부동산 문제는 교육 문제와 직결돼 있다. 광역 학군제를 도입하거나 주소지를 초월한 학군제를 도입하는 등 교육 정책의 변화가 필요하다. 부동산 문제 해결의 열쇠가 되는 강남에 광역학군제를 도입할 의사가 없느냐.”

부동산 상승의 원인으로 강남 8학군을 지목하고 학군 조정을 통해 이 문제를 풀라는 주문이었다. 경제 부처 출신인 김진표 교육부총리는 이전 교육 수장들과 달리 긍정적으로 답변했다. “부동산 대책의 일환으로 학군 조정을 긍정적으로 검토할 수 있다. 학군 조정 문제는 시도교육청의 소관이지만, 긍정적으로 검토할 수 있는 사안이며 서울시교육감, 교육위원회와 협의해 보겠다.”

대한민국 정책브리핑, 2007.10.22. 「위장전입에 집값까지 "8학군이 뭐길래"」

정책브리핑에서는 단순히 '대기업 경영자 출신'이라는 수식어로 퉁 치고 넘어갔는데, 나는 어떤 정치인이 발언을 할 때 그 정치인의 지역구를 유심히 본다. 정치인은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정치인이고 지역민의 표를 받아 당선되며 지역민을 대변해야 하는 인물이기에 정치인의 발언은 지역민을 대변하는 발언이라고 해석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이계안 의원의 당시 지역구는 서울 동작구을. 상도1,5동 사당동 흑석동 동작동을 관할하는 지역이다. 바로 어디? 여기였다. 봉천 신도시와 초근접하여 있는 바로 옆 지역구. 우리집은 관악구갑 지역구에 속해 있었지만 동작구을 지역이 걸어서 5분도 안걸리는 곳에 위치하여 오히려 관악구갑의 먼 동네보다 동작구을의 지역들과 더 연담화되어 있었으며, 우리 봉현초등학교 졸업생 중 절반 이상은 이 지역구의 중학교로 진학했다. 정당의 문제보다는 지역구의 문제였음을 적극적으로 증명하는 사례가 바로 이 기사인데, 한나라당은 이 당시 열린우리당 현역 의원과 열린우리당 국회의원을 겸직하던 교육부총리가 추진하던 광역학군제에 원칙적으로 반대하는 입장이었으나 당시 동작구을 지역 출마를 타진하던 이군현 한나라당 비례대표 의원은 적극적으로 찬성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군현 의원은 실제로 훗날 2007년 동작을 당협위원장을 거쳐 2008년 공천까지 받았었다. 그리고 지난 8화에서 언급한 것처럼 4개월 전 대통령 선거의 (사실상) 집권여당 후보였던 정동영 후보가 이곳에 출마선언을 하며 한나라당도 정몽준 후보로 후보를 교체하게 되는 나비효과가 발생한다.


이계안 의원의 2005년 8월 이 질의와 김진표 교육부총리의 답변은 단순히 지나가는 질의가 아니었다. 바로 엄청난 호응을 받으며 당장 광역학군제가 추진될 것처럼 직극적으로 보도도 되었다.


왜 이정도로 호응을 받았는가? 90년대 후반부터 00년대 초반에 서울 각지의 '합동재개발지역' 신축 대단지 아파트에 입주한 주민(386 화이트칼라층)들의 자녀들이 슬슬 고입을 치를 시기가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80~90년대에는 강남 안에서 소화가 가능했던 소위 '신중산층' '상위중산층'들이 00년대 이 시점에는 강남에서 도저히 전부 수용하지 못할 정도로 규모가 커져 서울 각지에 퍼져있었고, 이들의 수요에 맞는 교육공급이 필요했다.

서울 고교학군 광역화 시나리오
교육 당국이 부동산 문제 해결 방안의 하나로 서울 강남과 강북지역의 교육 격차를 해소하는 고교 학군제 변경을 검토키로 함에 따라 앞으로 학군이 어떻게 개편될지 학부모와 학생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특히 ‘강남 8학군’의 조정 문제가 초미의 관심사로 떠오를 전망이다.

가장 유력한 학군 조정안은 현재의 11개 지역교육청별로 분리된 학군을 인접 학군까지 묶어 6~7개로 축소하는 광역학군제이다. 예컨대 도봉구와 노원구가 속해 있는 북부학군과 강북구·성북구가 속해 있는 성북학군을 합쳐 하나의 학군으로 만드는 방식이다. 또 강남학군과 강동학군, 동작학군을 합쳐 하나의 학군으로 묶는 것도 광역학군제다.

광역학군제는 현재 서울의 11개 학군을 시대 상황에 맞게 통폐합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대중 교통의 발달로 통학 시간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된 데다 학군수를 줄이면 학생들의 고교 선택의 폭이 다소 넓어져 교육 불만족 문제를 어느 정도 해소할 수있다는 것이다. 광역학군제가 도입될 경우 강남학군 인접지역, 가령 동작구에 사는 학생들도 강남 명문고교에 진학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다. 현재는 동작구 사당동 주민들은 길 하나면 건너면 강남 학군인데 그쪽 학교를 갈 수 없는 상황이다. 반면 8학군에 거주하는 학생이나 학부모들은 상대적으로 학교에서 먼 곳에 배정되는 경우도 나오게 된다.

문화일보 2005.08.24. 「서울 고교학군 광역화 시나리오」

결국 핵심은 동작-관악 지역 재개발아파트 학생들을 강남 학군으로 보내겠다는 것이다. 이 당시에는 노원학군과 목동학군이 무시못할 독자적인 학군을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강북-성북 지역 재개발아파트 학생들은 노원으로, 강서-영등포 지역 재개발아파트 학생들은 목동으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성동-동작-관악 지역 재개발아파트 학생들을 강남으로 보내겠다는게 이 시나리오의 핵심이었다. 그러나 당시 대부분의 언론들은 핵심을 전혀 잡지 못하고 강남강북 개념에 매몰되어 제대로 된 문제진단을 하지 못했다.


강북 엄마들은 강남에 살지 않더라도 학군 조정을 통해 강남 8학군에서 공부할 수 있게 한다는 김 교육부총리 발언에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더러는 "또다시 우리 강북 엄마들과 아이들에게 열등감을 심어주는 막말"이라고 불쾌감을 표시했다.
서울 도봉구 창2동에서 초등학교 6학년 아들을 키우는 송아무개(40)씨는 "교육부총리 말을 듣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마치 나와 내 아들이 강남으로 보내달라고 애걸이라도 한 것 같다
고등학교 1학년 아들을 둔 서울 은평구 신사동에 사는 김미선(45)씨는 "광역학군제 논의는 서민들의 삶과 동떨어진 것"이라고 일축했다.

그러나 강남과 인접한 지역의 학부모들의 생각은 약간 달랐다.
성동구에 살며 '다리 하나면 건너면 강남으로 갈 수 있다'는 박아무개(38)씨는 김 교육부총리 발언이 실현되기를 바랐다. 박씨는 "아이들이 강남으로 건너가 학교에 다니면 열등감을 받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있지만, 부모 입장에서 자식이 좋은 학교에 가는 것을 반대할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동작구에 살며 중학교 다니는 두 아이를 키우는 장아무개(45)씨도 "강남에 살지는 못해도 아이만이라도 강남에 보내 양질의 교육을 받게 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나 장씨는 "부동산 정책의 일환으로 나온 말이기 때문에 실현 가능하리라고 보지는 않는다"며 씁쓸한 표정을 보였다.

오마이뉴스 2005.08.24. 「"우리가 언제 강남 보내달라 애걸했나"」

비판적인 논조를 연신 쏟아내던 오마이뉴스도 실제 취재에 들어가보니 성동, 동작, 관악 지역의 민심까지 왜곡할수는 없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강남 지역 학생들이 비강남권 학교로 진학할 위험이 있는' 이 제도가 그대로 시행되기는 어려웠고 이틀 간의 해프닝으로 끝나면서 이 때 합동재개발지역(뉴타운지역)에 자율형사립고를 두는 정책과 광역학군제를 보완한 고교선택제가 대안으로 등장하기 시작한다. 다만 위에서 확인할 수 있었듯 특히 성동-동작-관악 지역 합동재개발아파트단지를 중심으로는 이 정책이 굉장한 호응을 끌었기 때문에 그 이후로도 계속 광역학군제 도입 시도가 있었다. 다음 해(2006년) 3월 다시 광역학군제가 화두에 올랐을 땐 관악-동작이 타겟이라는 점을 명확히 하는 헤드라인이 나오기도 했다.


다음 광역학군제 비판여론으로 한 발 물러선 집권여당이 투트랙으로 추진한게 바로 서울 분할론이었다. 서울 분할론 자체는 1992~1994년경 서울 인구가 피크에 달했을 시절 한 번 크게 논의된 적이 있는 주장이긴 했다. 그런데 2005년 서울 분할론은 다시 제기된 타이밍이 '공동학군제 해프닝(2005.08.23~24)' 직후였고(2005.08.26~09.), 동작-관악 지역이 열린우리당안이든, 한나라당안이든 전부 서초구와 묶여서 발표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동작-관악의 강남학군 편입을 공동학군제라는 이름으로 실시하려다 무산되자 이 지역의 민심을 달래기 위해 부랴부랴 꺼내든 대책이었고 주민들은 다시 한번 환호한다.

열린우리당이 검토 중인 개편안에 따르면 서울시는 인구 150만∼250만명 규모의 중·동·서·남·북서울시 등 5개 시로 나눠진다. 중서울시(175만)는 종로·중구·용산·서대문·마포·은평구, 동서울시(200만)는 성동·광진·동대문·중랑·강동구 등을 통합한 중규모 광역시다. 또 서서울시(212만)는 양천·강서·구로·금천·영등포구 등이며, 남서울시(248만)는 동작·관악·서초·강남·송파구, 북서울시(182만)는 성북·강북·도봉·노원구 등이다.

이에 비해 한나라당 개편안에 따르면 서울시는 모두 9개 시로 재편된다. 우선, 종로·중구와 용산·서대문구 일부를 묶어 1개 시를 만들고, 은평구와 서대문·마포구 일부가 또다른 시로 구성된다. 성북·도봉·강북구를 묶고, 노원·중랑구를 통합해 각각 하나의 시로 구성된다. 또 동대문·성동·광진구와 강남·송파·강동구, 동작·관악·서초구가 각각 하나의 시가 되고, 영등포·구로·금천구와 양천·강서구도 통합된다. ‘서울분할론’은 서울의 ‘공룡화’에 따른 부작용을 해소하기 위해 불가피한 조치라는 명분을 깔고 있다.

서울신문 2005.09.21. [클릭이슈] 서울분할 與 “5개市” 野 “9개市”

이 서울 분할론은 말로만 진행된 것이 아니라 실제로 국회에 지방행정체계 개편 특별위원회도 만들고, 다음 해(2006년) 4월 임시국회에서 처리하겠다는 보도까지 나온 바 있으나 결국 좌초됐다.


결국 이 모든 시도들이 실패하고 공정택 체제의 서울시교육청이 추진한 정책이 바로 '고교선택제'였는데 고교선택제란 다음과 같다.

선(先)지원 후(後)추첨 방식으로 3단계에 걸쳐 학교를 선택할 수 있다.
1단계로 서울 전 지역에서 2곳을 선택하고, 여기서 탈락하면 2단계로 거주지 학군에서 2곳에 지원할 수 있다.
1, 2단계에서 각각 학교별 정원의 20%, 40%를 희망자 중에서 추첨 배정한다.
1, 2단계에서 원하는 학교에 배정받지 못한 학생들은 3단계에서 거주지와 인접한 2개 학군을 묶은 통합학군 학교 중에서 추첨 배정받게 된다.


이는 여러가지를 절충한 것인데 2단계를 거주지 학군으로 둔 것은 거주지 학군에서 소위 '지역 명문 일반고'를 키우라는 취지이고, 2005~2006년까지 그 난리였던 광역학군제가 마지막 3단계에 반영이 되었다. 성동-동작-관악 주민들은 강남학군이 인접학군이기 때문에 이론상으로는 지역에 그대로 있으면서 강남학군 진학의 길이 열렸다. 하지만 저 제도는 1~3단계 전부가 추첨이기 때문에 '운'의 요소가 상당히 있는 불안함이 있었고, 그래서 병행추진된 정책이 위에 설명한 '자율형 사립고' 되시겠다. 사실 얘도 경쟁률이 1:1을 넘어가면 역시 운의 요소가 있긴 했지만, 그래도 한 번의 선택 기회가 더 보장되는 것이었으니.


그리고 저렇게 정해진 룰에 가만히 있을 학부모들이 아니었다. 특히 자녀가 일정 성적 이상을 기록하고 있으면 더 그렇다. 절대로 저렇게 가만히 앉아서 '아~ 서울 전 지역에서 2곳 선택하고, 안되면 거주지 학군에서 선택하고, 안되면 추첨 배정 받은 곳 그냥 다니면 되겠네'라고 하지 않았다. 특히 거주지학군이 2단계고 40%를 배정하며, 광역학군이 3단계(이 단계에서도 당연히 거주지학군이 포함되어 있다.)였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결국 거주지학군이 중요했다. 움직이는 사람들은 움직였고, 그 뒤를 후배 학부모들도 따르고 있었다.


"지금도 동작에서 서초로, 성동에서 강남으로 위장전입 등을 통해 움직이는 사람들은 움직인다"

2005년 8월 24일.

"동작구의 5개 중학교 중3 학생들을 대상으로 샘플조사를 해본 결과, 학생들 중 203명이 서초구에 주소를 두고 있었다. 이건 교육적으로 바람직하지 않다."

"위장전입한 것인가?"

"단정적으로 말할 수 없지만, 어쨌든 동작구의 중학교에 있으면서 서초구로 주소가 되어 있는 학생이 203명이었다."

2006년 3월 30일.



그시대 연예계를 주도하던 90년대생들

2009년 1월~3월 방영한 KBS 월화드라마 '꽃보다 남자'

KBS 월화드라마 폐지를 막았다고 알려진 2009년 상반기 최대 히트 드라마 '꽃보다 남자'! 이 땐 정말로 친구들과 대화에 끼려면 이 드라마를 꼭 시청하고 와야 했다. 처음에는 대화에 끼려고 보기 시작한 거였지만, 드라마 자체도 당시엔 재밌었어서 빠져들었던 기억이 난다. 월요일은 학원 갔다가 돌아오는 시간이어서 휴대폰 DMB를 켜서 보기도 했었다. 이 드라마는 그리고 OST가 정말 맛도리 그 자체로 지금도 가끔 듣는다.

KBS2 월화드라마 '꽃보다 남자'가 첫 방송에서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며 화제의 중심에 섰다.
일각에서는 청소년들을 겨냥한 드라마로서 겨울방학 특수가 아닌가 하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타깃 설정을 중고등학생으로 한 '꽃보다 남자'가 겨울방학 특수와 맞물려 시너지 효과를 보인다는 것.

지난 5일 첫방송된 '꽃보다 남자'는 시청률 14.3%(TNS집계 기준)를 기록했다. 이는 첫 방송 시청률치곤 상당히 높은 수치다. 특히 그동안 KBS 월화드라마 평균시청률인 5%보다 3배 가까운 시청률을 기록해 눈길을 끌었다.

아이돌 스타의 출연과 만화적인 상상력, 재기발랄한 내용과 화면 등이 청소년들이 좋아할 만한 취향이라는 평가다.

서민 여고생이 네 명의 꽃미남 재벌군단을 만나면서 벌어지는 다양한 이야기들은 청소년들에게 유쾌한 환상에 빠지게 한다는 것.

뿐만 아니라 요즘 청소년들이 좋아하는 아이돌 스타 이민호 김현중 김범 김준 등과 여주인공 구혜선의 이미지 캐스팅이 성공적이었다는 분석이다.

방송 직후에는 주연 배우들의 이미지가 원작 만화 속 이미지를 그대로 재현, 확대시키는 비주얼이라는 의견이 주를 이뤘다. 이를 반영하듯 '꽃보다 남자'는 여성 10대에서 가장 높은 시청점유율을 기록했다.

아시아경제 2009.01.06. 「'꽃보다 남자' 인기요인과 그 한계」


이 꽃보다 남자의 성공으로 KBS는 2010년, 2011년, 2012년에도 계속해서 연초 겨울방학을 겨냥해서 청소년타겟 드라마인 '공부의 신' '드림하이' '드림하이2'를 런칭하고, 2013년에는 2002년을 끝으로 사실상 종영했던 '학교 시리즈'가 다시 부활해 '학교 2013'이라는 이름으로 방영되기도 했을 만큼 '꽃보다 남자'는 이 시기 청소년드라마 붐을 다시 일으킨 선도적인 드라마였다. 청소년드라마인데 최고 시청률이 30%를 넘었다. 이 시절 시트콤 쪽에서도 청소년들의 인기를 끌었던 것이 있었으니 '하이킥 시리즈'인데 이것도 인기에 힘입어 '거침없이 하이킥(2006~2007)' '지붕뚫고 하이킥(2009~2010)' '하이킥 짧은다리의 역습(2012)'로 3부작에 걸쳐서 런칭되기도 했다. 그리고 예능으로는 '무한도전(2005~2018)'이 청소년들의 인기를 끌었다. 무한도전이나 하이킥은 아직도 유튜브에서 24시간 스트리밍을 하기도 할 정도로 우리 세대에게 큰 추억으로 남아있다.


TV 프로그램 이야기가 나온 김에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다. 한국 사회에서 큰 이슈가 되는 주제들은 에코붐 세대의 성장과 놀랍도록 비례 관계에 있다. 에코붐 세대가 아이들일땐 어린이용 애니메이션이 뜨고, 청소년일땐 아이돌과 청소년 드라마가 뜨고, 20대 초반이 되니 메갈리아-페미니즘이 이슈화됐었고, 이들이 20대 후반이 되니 '이대남'이 기존 'X세대'와 달리 '정치적 주체'로써 등장하지 않았는가. 5년 뒤엔 아마 '30대'가 조망될 것이다. 그렇다면 가요계열은 어떨까. 에코붐 세대는 굉장히 이른 시기에 데뷔하여 무려 15년간 가요계에서 장기집권했으며, 이들이 은퇴하고 난 후 가요계는 이전의 명성을 다시는 찾지 못하고 있다.


에코붐 세대 가요계 장기집권의 서막을 연 그룹은 2007~2008년 한국사회 전체를 들썩였던 '원더걸스'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1992년 '서태지 신드롬'에 비견되던원더걸스의 초기 데뷔 멤버 5명 중 3명이 1992년생이었다. 그당시 겨우 만14~15세였던 것이다. 이들이 가요계를 휘어잡으며 2000년대 중반 소위 '소몰이 창법'이라고 불리던 가요계를 후크송으로 무장한 아이돌 중심으로 완전히 바꿔놓았다. 청소년드라마를 시청률 30%로 만들었던 '또래세대' 에코붐세대들의 호응이 전 연령층으로 번졌다. 원더걸스의 Tell Me는 UCC열풍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는데 현재의 유튜브, 숏폼 문화 등의 시발점이다.


원더걸스는 2007년 하반기 Tell Me - 2008년 상반기 So Hot - 2008년 하반기 Nobody 3곡을 모두 대히트시키며 거의 시대의 상징이 되었고, 원더걸스가 이 인기에 힘입어 미국진출을 하고 난 이후에는 이들과 같은 시기에 데뷔했던 소녀시대가 2009년 1월 Gee부터 시작해서 또 공전의 대히트를 치면서 아이돌 시장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원더걸스 1황의 시대에서 여러 걸그룹들이 대히트를 치는 긍정적인 확장시장이 열리며 카라, 티아라 등도 히트곡을 내며 자신들의 이름을 알렸다.


아이돌 보이그룹들의 인기도 결코 뒤쳐지지 않았다. 보이그룹 시장은 H.O.T.와 젝스키스 - god - 동방신기로 이어지면서 중간에 아예 공백기가 있는 걸그룹 시장에 비해 지속적인 인기를 누리는 그룹의 계보가 어느정도 끊기지 않고 내려온 편이다. 그 다음 궤를 이어받은 보이그룹이 빅뱅이었다. 빅뱅은 원더걸스와 같은 시기에 2007년 거짓말, 마지막 인사 - 2008년 하루하루, 붉은 노을을 메가히트시키면서 아이돌 시장을 대세로 만드는데 공헌했다. 그 이후 2008년, 사실상 전 멤버 90년대생(온유는 89년 12월생)으로 이루어진 샤이니가 데뷔했고 나중에 2015년 'View'도 히트하는 등 롱런한다. 이후 2PM 등이 연달아 데뷔한다.


우리는 꼭 아이돌만 좋아한것도 아니었는데, 밴드그룹 FT아일랜드나 힙합그룹 에픽하이도 그 시절 인기를 끌었다. 내 주변에선 거의 취향에 따라 아이돌 빅뱅이냐 밴드 FT냐 힙합 에픽하이냐로 나눠지는 분위기였고 그렇게 무리가 형성되기도 했는데, 나는 에픽하이파 무리에 속해서 다녔었다. 자연스럽게 데뷔앨범 'Map of the Human soul'부터 한참 그 무리에 같이 다니던 시절 나왔던 'Remapping the Human soul(2007, 대표곡 Fan, Love Love Love)' 'Pieces, Part One(2008, 대표곡 'One'), 'Lovescream(2008, 대표곡 '1분 1초')', '[e](2009, 대표곡 'Wannabe'), 'Epilogue(2010, 대표곡 'Run') 등을 전부 섭렵하고 다녔던 기억이 난다.


2010년대 초반, 10대 후반 시절에는 또래였던 아이유(1993년생)가 솔로로 가요계를 평정하기도 한다. 2010년 여름 '잔소리'부터 예사롭지 않더니 2010년 말 '좋은 날'에서 소위 3단 고음과 함께 메가히트를 치고, 2011년 '너랑 나'에서 다시 한번 가요계를 휩쓸었다.


그렇게 2000년대 중후반부터 연예계를 주름잡던 에코붐 세대는 20대가 되어서도 그 영향력을 계속 유지했다. 소녀시대, 빅뱅, 샤이니, 아이유 등은 2010년대 중반에 들어서도 계속 앨범을 내고 성적이 좋았으며, 2010년대 중반에는 3세대 아이돌로 전부 90년대생으로 이루어진 러블리즈, 레드벨벳, 여자친구 등이 데뷔했는데 이들은 또 새로운 느낌으로 또다른 전성기를 열었다.


그러나 2020년대 들어서 2010년대 중반에 데뷔한 이 그룹들까지도 전부 계약 만료와 그룹 해체를 겪으며, 90년대생들은 소위 '연예인'으로써든 '팬'으로써든 전부 20대 후반, 30대로 진입하게 되었고 그렇게 80년대 후반생~90년대생들이 장기집권하던 가요계는 20년대 이후 그 시절 대중성에 맞먹는 신드롬이 전혀 일어나지 않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요즘도 카페나 병원 등에 가면 이 시절(2000년대 후반~2010년대 초반) 음악이 굉장히 자주 들린다. 사람들이 청소년기 후반~성인기 초반에 접한 음악을 계속 선호하는 경향은 여러 연구에서 일관되게 관측되어 왔다. 86세대의 자녀들인 에코붐 세대의 문화적 코호트가 뚜렷하게 형성되어 있고 이들의 힘이 상당히 강력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싸이월드

커뮤니티 사이트들을 중심으로 퍼지고 있는 원더걸스의 ‘nobody’ 뮤직비디오 영상에 대한 반응이 심상치 않다. 성급한 원더걸스의 팬들은 벌써 ‘대박’을 점치고 있다.
(중략)
‘nobody’는 원더걸스 4집 프로젝트 앨범의 타이틀곡으로 음원을 공개하자마자 싸이월드에서 1위에 올랐다.

스포츠동아 2008.09.24.

앞서 언급했던 2000년대 후반 가요계는 그 시절 또 다른 문화 아이콘이었던 '싸이월드'와 아주 긴밀한 관계에 있었다. 싸이월드 차트는 거의 준 공식차트로 동아일보에서도 인용할 정도였다. 내가 이 시기 왠만한 가요들은 다 기억하고 추억이 존재하는 이유가, 이 때는 싸이월드 차트 100에 있는걸 그냥 다운받아서 듣고 하는게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중성이 생길 수 있었던 것도 있다. 2020년대 이후 알고리즘의 세계에서는 그게 되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아직도 이 시절 음악을 거의 자주 들어서 2020년대 이후 신곡은 뭐가 있는지도 잘 모르기도 한다.


지난 주말 서비스를 연 싸이월드 역시 이용자들 사이에선 자신들이 과거 어떤 흔적을 남겼는지 다시 보기 위해 재가입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취업준비생 남동연(25·여) 씨는 몇 년 전 휴대전화가 초기화되면서 과거 사진들이 모조리 없어졌다고 한다. 그러나 싸이월드가 다시 서비스를 재개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과거 사진들을 볼 수 있단 생각에 주저 없이 재가입을 했다고 한다. 남씨는 “평소 친구들과 싸이월드가 다시 열려 ‘공다(공유 다이어리)’를 다 같이 보면 재밌겠다고 생각해 왔다. 전날(3일) 관련 기사를 보자마자 바로 (싸이월드를)깔았다”며 “어릴 적 앨범을 보며 친구들이랑 추억을 공유하고 나만의 일기장으로 사용할 것 같다”고 말했다.
서울 마포구에 거주하는 정서영(28·여) 씨도 “어떤 사진들이 남아있는지가 궁금했다”며 “싸이월드에 어떤 게 있는지 이제는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잊고 있던 추억의 흔적을 다시 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서울 강남구에 거주하는 김모(28·여) 씨도 “과거 미니홈피라는 나만의 공간이 있어 많은 추억을 남겼었다”며 “물론 학창 시절 (싸이월드를) 한창 사용하던 추억에 대한 향수도 크다. 블로그를 쓰듯이 싸이월드를 쓸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소감을 밝혔다.

헤럴드경제 2022.04.04. 「다시 찾는 ‘포켓몬빵’ ‘싸이월드’…옛 추억에 열광하는 MZ세대」

이 기사는 인터뷰이들의 나이를 명시해놓은게 재밌다. 정확하게 내 또래들로만 이루어져있는게 너무 보이니까. 특히 저 '공다'라는 단어를 자연스럽게 사용한다는 점에서 그 시절 입에 붙은 단어가 그대로 나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기사도 내 기억에 남아있는 '공다'라는 단어를 그대로 서칭했더니 나온 기사이다. 문자메시지와 싸이월드 미니홈피 다이어리가 내 중학교 시절 생활을 상징하는 투탑이다.



한영외고 불합격, 빨라지는 계약 시계

새벽 5시 반에 눈을 뜨고, 6시 반에 집을 나섰다. 숭실대입구에서 7호선을 타고 군자에서 환승했다. 고덕역에 도착해 내리는데, 갑자기 사람들이 와르르 쏟아져 나온다. 평소에 이렇게 인파가 많은 역이 아닌데, 다들 오늘의 ‘경쟁자’들이라는 생각이 스쳤다. 고덕역은 출구가 다섯 개. 4번 출구 쪽이 유난히 붐볐다.

역 안 세븐일레븐에서 찹쌀떡이랑 초콜릿을 샀다. 3412번 버스를 타고 두 정거장 가서 내렸다. 평범한 2차로 도로인데 차들로 꽉꽉 막혀 있었고, 정문으로 들어가니 대여섯 개 학원에서 우루루 격려 인사 같은걸 하고 있었다.

고사장은 한영중학교. 다행히 앞자리를 배정받았다. 9시에 영어 듣기시험 시작. 언론에서는 쉬울거라더니, 막상 문제는 전년도 기출보다 더 까다로웠다. ‘내년부터 영어 듣기가 빠지니 마지막이라 작정하고 어렵게 낸건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10시에 시험 종료.

그리고 진짜 고문 시작. 구술면접이 10시 25분부터인데 내 번호가 뒷 번호라 예상 입실 시간이 12시 40분… 두 시간 넘게 아무것도 안 하고 앉아 있었다. 잠깐 졸다 깼더니 고작 30분이 지났을 뿐. 앞쪽에서 안내를 도와주던 언니·오빠들은 한영외고 재학생들이라 했다. 중간에 눈이 내렸다. 괜히 낭만적이었다.

면접은 막상 들어가니 떨리면서도 무난했다. 끝나고 고덕 이마트에서 점심을 먹고, 11월 16일부터 12월 8일 사이에 나온 신곡 열 곡을 드디어 이어서 들었다. 그런데 오늘도 수학학원을 가야 해서, 집에 오자마자 수학 숙제를 해야 한다는 사실…

2009년 12월 8일 화요일, 홈피 일기 재구성
한영외고, 떨어졌다. 담담하려고 했는데 자꾸 낙오자가 된 기분이 밀려온다.

작년 12월에도 문예창작 영재원에 도전했다가 3차도 아니고 2차에서 떨어졌는데 또 불합격이라니. 사실 작년 말부터 외고 대비를 시작하긴 했지만 내신이 모자랄 것 같아 5월에 멈췄었다. 합격한 애들은 아마 계속 이를 악물고 버텼겠지.

이번 1학기때 상위 4%대의 성적을 다시 회복했고, 2학기 중간고사 땐 그걸 뛰어넘어 전교권 성적이 나와 도전해보기로 했다. 하지만 곧바로 기말고사 준비를 시작해야 했고, 실전준비기간으로 남은 건 11월 16일부터 12월 7일까지 한 달도 채 안 되는 시간뿐이었다. 1년 넘게 준비한 사람들이 널렸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그 짧은 시간에 뭔가를 뒤집어보려 했던 거다. 그래도 오늘은 그냥 받아들이자. 툭 털고, 조금 더 단단해지자

2009년 12월 11일 금요일, 홈피 일기 재구성

결국 1학년 2학기~2학년 2학기 시절 내신이 10%대로 떨어졌을 때의 기록 때문에, '그때 내신이 너무 낮지 않나' 하는 기억에 괜시리 포기했던게 불합격으로 돌아온 듯 했다. 사실 구암중학교는 '관악구에선 요지부동 1위 중학교'라고 불릴 정도로 실력이 있는 학교였으나(거의 대부분이 재개발아파트 입주민으로 이루어져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우리 중학교 전성기가 훨씬 지난 2023년에마저 '구암중학교는 인근에서 알아주는 명문중학교다'라는 묘사가 있을 정도) '상위 10%'라고 찍혀있는 숫자만 보고 괜히 단념한 것이다. 나중에 대입때도 비슷한 일이 일어난다. 내가 어느 집단에 속해있든 거기서 최상위권을 하지 못하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어 과감한 선택을 하지 못했다. 여하튼 불합격 통보를 받았고, 이걸 보고 가만히 기다리기나 하면 되는 그런 타이밍이 아니었다. 나를 한영외고에 보내고 고덕동으로 이사가려던 부모님의 계획도 어그러졌고, 당장 그 '고교 선택제' 대비도 해야 했다. 외고에 100% 붙는다는 보장이 없으니 엄마가 안전장치를 마련해 놓기는 했었다.


이 시기는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에서 촉발된 세계금융위기 시절이였고 한국 역시 부동산 침체기였으며, 설상가상으로 아버지께서 당시 약 20년째 근속하고 계시던 회사 역시 이 해 말에 '3사 대합병'을 하는 등 국가적으로도, 가정적으로도 정신이 없던 시기였다. 내가 한영외고에 붙었으면 무리해서라도 강동구 고덕동으로 가서 소위 '몸테크'를 했을 지도 모르는데, 내가 한영외고에 떨어진 이상 굳이 강남에 가지 않고 강동구에서 그럴 필요성이 많이 없어졌다. 결국 강남으로 가기로 했다. 강남은 2000년대에 재건축이 완료된 곳이 어느정도 있었긴 했지만 아직 재건축 진행 전인 단지들도 꽤 남아있는 상태여서 아예 강남 재건축예정단지를 매매한다는 생각까지 있었던걸로 기억한다. 그러나 일단 강남 매매를 하려면 봉천 집이 팔려야 하는데, 이 시기에 봉천 집을 파는 난이도도 높았으며 강동 재건축예정단지보다 강남 재건축예정단지의 시세가 훨씬 높아 부담이 훨씬 크기도 했다. 나는 2010년 봉천 집 전출 계약때와 강남 집 전입 계약 때 유독 몇십시간씩 집을 비우던 부모님이 기억난다. 그 시절 나름의 고충이었던 듯 싶다.

이들의 보유한 주택의 가격 상승률은 2주택자나 자가거주자에 비하여 낮음. 보유주택을 처분하지 않는 다기보다 처분하지 못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음. - 김민철, 「유주택 전월세 거주 가구의 실태 및 정책적 시사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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