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깎이 대치동 키즈, 나는 이방인이었다 - 10~12년

제10장: 2010년 ~ 2012년 '유주택 임차가정(1)'

by 수연
2012년 11월 8일 목요일, 12년간의 학창시절이 마무리되었다. 2012년 11월 9일 동아일보 보도.

입학사정관(admission officer)이란 대학에서 신입생 선발 업무를 담당하는 교육과정 전문가를 뜻하고, 입학사정관제는 학업 성적 위주의 입시에서 벗어나 학생의 소질과 경험, 잠재력 등을 종합적으로 평가하여 선발하는 제도를 말한다. 교육인적자원부는 2007년 입학사정관제 시범 대학 10개를 선정하여 지원했고, 2008학년도 대학 입시부터는 이를 시범적으로 도입했다.
이 전형에 기대를 걸고 자녀를 지원할 수 있는 학부모는 정해져 있었다. 바로 지식인 엘리트 계층 또는 이들의 지원을 구매할 수 있는 경제적 상층계급의 학부모들이다. (중략) 한편 경제적 상층 계급은 이들 지식인 엘리트 계층의 문화적 자원에 손쉽게 접근할 수 있었다. 다양한 형태의 사교 모임과 사업 관계 등을 통해 그들이 지닌 정보를 활용할 수 있었고, 필요하면 언제든 자기 자녀의 지도를 맡길 수도 있었다.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식으로 말하면 초기 도입 과정에서 입학사정관제는 학생이 지니고 있는 문화자본의 양을 평가하는 전형이 될 운명이었다. 부르디외는 현금, 부동산 등 유형 자본과 구분하여, 사회화 과정에서 반복적으로 얻는 계급적 경험이나 경제적 자원을 바탕으로 체득하는 선호, 취향, 학력 등 무형의 가치를 문화 자본이라고 정의했다. 문화 자본은 장기간에 걸친 경제 자본의 투입을 통해서만 획득할 수 있으며, 장기적으로는 경제 자본으로 교환 가능하지만 즉각적 상호 교환은 불가능하다. 부르디외는 사회의 계급 질서는 단순히 경제 자본의 많고 적음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며, 문화 자본의 습득과 과시 전략에 의해 계급적 우열이 드러나고 이에 기초한 상징 권력이 계급 격차를 유지하는 수단이 된다고 말한다. 실제로 입학사정관제전형에서는 더 많은 문화 자본을 가지고 있거나 풍족한 경제적 여건을 바탕으로 자녀에게 더 많은 문화적 경험을 제공할 수 있는 계층이 혜택을 입었다.

조장훈, 『대치동』

2000년대를 열며 초등학생 아이들에게 문화 소양을 길러주고, 2000년대 중반 유학이 뜨고 외고가 뜨더니 2000년대 후반에서 2010년대 초반으로 오니 대학 입시에 '입학사정관제'를 도입한다. 한국 사회는 계속해서 86세대 화이트칼라 계층과 그 자녀들의 사이클에 맞춰 돌아가고 있었다.



한편 나의 한영외고 진학 - 고덕동 이사 플랜이 어그러지고 나서 2010년 2월 고교선택제를 통해 나는 강남에 있는 학교에 배정받게 된다. 초반 아주 잠깐 동안은 봉천동 집에서 통학을 했다. 그러나 이 기간이 길진 않았고 결국 이 해에 강남의 구축, 80년대에 지어진 복도식 아파트로 이사를 한다. 그리고 10년을 거주했던 봉천신도시 우리집에는 서울대학교 교수가 임차인으로 들어오게 되었는데, 엄마는 서울대 교수와 계약을 했다며 좋아하셨다. 그리고 이 해부터 6년간은 부모님 소유 집은 봉천신도시에 그대로 있지만 완전한 소위 '대치동 키즈'로 살게 되는데, 정책입안자들이나 연구자들이나 우리 같은 '임시 이주자'들도 전부 '강남 사람' '대치동 키즈'로 도매금으로 묶는다. 엄연히 다른 점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주거 양태에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아이들의 입시가 끝난 가구는 굳이 대치동에 머물 필요가 없었다. 대치동은 강남, 압구정, 청담 등지로의 접근성이 좋긴 했지만, 학원만 넘쳐날 뿐 생활 편의 시설은 턱없이 부족했다. 이들은 대치동의 낡고 좁은 아파트를 전세로 내놓고 일산, 수지, 판교 등 신도시의 신축 아파트나 청담, 압구정 등 더 화려한 도심으로 거주지를 옮겼다. 전세 매물로 나온 오래된 아파트로 대치동 신화에 감화된 불나방들이 날아들었다. 이들은 자녀의 입시와 자신의 경제적 성공을 함께 꿈꾸며 다른 지역에 있는 자기 소유의 아파트를 전세로 내놓고 대치동으로 들어왔다. 이제 사람들은 자기 집이 있어도 거기에 살지 않았다. 서울 외곽과 경기도에 있는 넓은 자기 집을 남에게 세 주고 낡고 좁고 비싸기만 한 전셋집에서 고생을 자처했다.
(중략)
"내가 여기서 전세 산다고 우습게 보는거야? 나도 OO동에 번듯한 내 집이 있어! 애들 공부시키려고 여기 와 있는 거지." 2000년대 후반으로 갈수록 이 새로운 유입자들이 대치동 학부모의 주류가 되었다,
(중략)
대치동에 자기 소유의 집이 있는 사람들은 더 이상 그곳에 살 이유가 없더라도 학원가 덕분에 계속 집값이 오를 테니 절대 집을 팔지 않고 세를 놓는다. 그리고 천정부지로 치솟는 주택 시세를 근거로 전세와 월세를 매년 올린다. 그러면 서울 외곽이나 경기도 일대에 자기 집을 소유한 대치동의 전세 거주자는 오른 집세를 감당하기 위해 자신이 소유한 집의 전세가를 높인다. 이를 본 옆집 주인도 덩달아 전세가를 올린다. 대치동의 전월세 상승은 그렇게 수도권 전체의 전세 대란으로 이어진다. 그 대란의 아수라장 속에서 자식 교육에 성공하고 하는 일도 없이 가진 집으로 돈까지 버는 사람들이 부러웠던 이들은 너도나도 시세 차익을 얻기 위해 더 좋은 입지를 찾아 해맨다. 그렇게 전국은 부동산 투기의 온상이 된다.

조장훈, 『대치동』

정확히 이 '불나방'들이 날아들던 시기가 이 시기였다. 조장훈이 묘사한게 정확했다. "넓은 자기 집을 남에게 세 주고 낣고 좁고 비싸기만 한 집"으로 들어왔다. 우리 집도 수많은 '이 시기 불나방'중 하나였다.


나는 갑작스럽게 바뀐 환경에 적응하기 힘들었다. 6학년때 처음 청담어학원 본원 갔을때 쉽게 적응했다곤 하지만, 주 2회 3시간씩만 강남에 왔다가 돌아가는 것과, 365일 24시간 강남에 사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하교 후 고향인 봉천신도시로 가는 시간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지하철로 20분이면 가니 갔다오기는 편했다. 특히 당시 가장 친했던 친구가 봉천동에 그대로 잔류했기 때문에(걔도 학교는 관악구에 있는 학교로 다니지 않았다. 지하철 타고 통학했다) 더욱 봉천동으로 가는 횟수가 늘었다. 아예 멀쩡히 다니던 중학교를 전학까지 가야했던 동생 역시 마찬가지, 아니 더 심했던 걸로 안다. 이 시기 이후로 동생과 유독 소원해졌다. "부모님의 모든 계획이 나의 진학 주기에 맞춰져 있어 자신이 원치 않은 환경 변화를 더 민감한 시기에 겪어야 했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반면 나의 경우와 전혀 반대되는 경우도 있으니 아래에 수록해둔다. 나는 전혀 공감이 가지 않지만 아래 보도에 따르면 '집이 좁아도 괜찮고' '대치동 키즈가 되었다는 자랑스러움이 있으며' '대치동 사람, 강남 사람으로 사회활동도 하고 결혼도 하고 싶다'고 한다.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니 그럴 수 있다. 하지만 강남의 집을 매매해서 이주하는 케이스가 아닌 이상 자녀의 입시를 마쳤는데도 임차인으로 계속 남아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타 지역에 자가소유 집이 있다면 더더욱. 실제로 이 지역의 20대와 그 부모세대는 일관적으로 전출자가 높게 나타나고 있다.

중앙일보 2012년 4월 5일자 보도

학원 찾기: 운좋게 성공한 영어학원


들어가기 전에, 나는 '야간자율학습' 개념을 아예 겪지 않았다. 이게 강남서초 지역만 그런건지, 서울 전체 지역이 그런지는 모르겠으나(내 기억상 더 앞시기면 몰라도 내가 이 시기를 겪던 2010년대 초반은 서울 지역 전체가 야간강제자율학습 문화가 없었던 걸로 기억한다.) 야간까지 학교에 붙잡아놓고 강제자율학습을 시킨다? 이런 문화는 아예 없었다. 그래서 나중에 대학교 진학 후 지방 출신 친구에게 야간자율학습 문화에 대해 들었을 때 굉장한 컬쳐 쇼크를 받았던 기억이 난다. 학교는 정규 수업+방과후학교 정도만 하고 오후 4시에는 전부 하교시켰다. 자율학습 시스템이 있긴 했는데 말그대로 정말 자율학습이었다. 학원 문화가 초고도로 발달한 강남 한복판에서 강제로 학교에 남아 자율학습을 시킨다? 상상할 수도 없는 문화였다. 그래서 이 파트에서는 학교보다는 '대치동 학원 문화'를 중점으로 다룬다.


우리 가족은 뒤늦게 강남 대치동 전선의 한복판으로 온지라, 일단 대치동에 도착하였으나 어떤 학원을 다녀야 하는지에 대한 정보 등이 전혀 없었다. 일단 되는대로 3월이 되자마자 은마아파트입구사거리쪽에 있던 영어학원 하나 입학시험을 봤으나 최종등록은 하지 않았다. 1학년 1학기 중간고사는 학원도 기존에 다니던 봉천동 수학학원 하나를 제외하고는 다니지도 않고 있었다. 입시학원과는 거리가 먼 청담어학원을 그만두고 난 후로는 영어학원도 붕 떠 있었다. 그렇게 급작스럽게 1학년 1학기 중간고사를 봤는데 성적이 처참했다. 국어 3등급, 영어 3등급, 수학 4등급.. 다른건 몰라도 나와 엄마는 영어 성적에 가장 충격을 많이 받았고, 곧바로 수능은 물론 강남 내신 대비에 특화되어있다는 영어학원을 찾았다.

선경어학원 고등부 정규 프로그램은 고등 1,2학년을 대상으로 한다. 정규 프로그램은 크게 세 과정으로 구분할 수 있다. (중략) 수능 만점과 각종 영어 공인시험 고득점을 목표로 수시입시 영어지문을 대비하는 'SS Program'을 주축으로 한다.

고2과정까지의 내신관리는 학교별로 시간을 구분해 운영한다. 학교별 교재, 부교재, 프린트, 맞춤형 핵심문제를 중점으로 다루며 학교별 담당 강사가 책임지고 맞춤형 강의를 제공한다.
네이버 블로그 2010.12.21. 선경어학원 고등부 프로그램

그게 2010년 5월부터 다닌 선경어학원으로 수능때까지 영어학원은 이 학원을 다니게 된다. 확실히 학원엔 학교별로 내신기출 빅데이터, 소위 문제은행이 있었고 그렇게 영어내신을 준비, 습득한 결과 1학년 1학기 기말고사부터 바로 성적이 나와, 강남 한복판에서 영어내신 1~2등급을 유지하게 된다. 모의고사 외국어영역은 볼것도 없이 무조건 1등급이었다. 사실 저기서 3년 내내 SS반이었긴 했는데 저 수능 프로그램보다는 학교별 담당 강사가 붙어서 빅데이터 자료(문제은행)를 통해 내신 대비를 할 수 있었던 저 내신수업의 효과가 굉장히 컸다. 내신은 저게 아니었으면 절대 못따라갔을거다. 영어학원은 소위 잭팟이 걸렸다고 해야할까, 수많은 대치동 학원 중 1학년 봄에 첫번째로 고른 이 학원이 잘 맞아서 수능때까지 이곳만 다녔다. 하지만 이 행운이 다른 과목까지 이어지진 못했다.



갈팡질팡하다 실패한 수학학원

서울역사박물관, 『2017 서울생활문화자료조사 - 대치동 사교육 1번가』

영어학원의 경우 2002-2005년 SLP. 2006-2009년 청담어학원. 2010-2012년 선경어학원. 이렇게 깔끔하게 등원했고 결과도 나쁘지 않았는데, 문제는 수학학원이었다. 수없이 옮겨다니면서도 학원이 나와 맞지 않아 몇개월에 한 번씩 옮겨다니기를 반복했고, 2011년 여름 겨우 맞는 곳을 찾아 성적이 본투비 강남아이들에 버금가게 회복되고 있던 차에 그 학원이 폐업하는 상황까지 발생하는 등 별의별 악재가 겹쳤다. 사실 강남 이주 전부터 기미가 있었다. 2006년 2월 청담어학원과 함께 다니던 봉천역 앞 뉴스터디는 2008년 5월까지 다니고 그만뒀고, 그다음으로 등록했던 곳이 신대방삼거리에 있던 하이스트동작이었다. 이 일대는 동작-관악 지역 최고의 학원가 지역으로 불리는 곳이다. 숭의여고-수도여고-성남고 등이 밀집되어 있는 지역이었으며 보라매초-대방중, 숭의여중 등은 소위 인기학군으로 불렸다. 그러나 이곳은 바로 고등수학을 고난이도로 들어가는 진도에 질려 6개월만에 그만두고 만다. 그렇게 무학원으로 2학년 2학기 기말고사를 봤고, 하필 그때 수학 시험범위가 '도형의 닮음'으로 거기서 처참히 깨졌다. 나는 아직도 수학의 다른 개념은 몰라도 '닮음'은 너무 힘들다. 이 '닮음 사태' 직후 관악로 251 빌딩에 위치하던 동네 보습학원 비슷한 곳을 다니기 시작하여 그때까지 다니고 있었다(2008.12. ~ 2010.5). 현재도 관악로 251 빌딩은 나름대로 '학원 빌딩'을 형성하고 있다. 그러다 강남이주 후 처음으로 맞은 1학년 1학기 중간고사 결과를 보고 기존 지역에서의 학원 교습을 전부 정리했던 것이었다.


대치동을 사교육 중심지로 만드는 핵심은 사실 대형 학원이 아니라 소규모 학원이었다. 위의 이미지는 서울역사박물관에서 2017년에 발간한 '2017 서울생활문화자료 조사 - 대치동 사교육 1번지'에 수록된 '학원 밀집 블록과 블록 내 학원 목록'이다. 저 목록은 심지어 해당 블록 내의 학원만 수록한 것인데도 저렇게 빽빽하게 있는 것이다. 내가 다닌 학원들 중엔 삼성동, 개포동 등 저 블록 밖에 위치한 학원도 있었고, 대치동에 위치하면서도 선경어학원이나 메가스터디 등 대치역 남측에 위치하던 학원들은 표시하지 않은게 저정도다. 어마어마한 수였고 저기서 하나를 골라야 하는거였다. 사실 영어학원(선경어학원)이 첫번째 시도만에 성공한게 운이 기막히게 좋은거였고, 수학학원 실패가 확률상 당연한 것이였을지도 모른다.

나의 강남 수학학원 변천 과정은 아래와 같다.
- C학원 (2010년 5월 ~ 2010년 8월)
- 수신학원 (2010년 9월 ~ 2011년 4월)
- D학원 (2011년 5월 ~ 2011년 11월)
- 1대1 과외방 (2011년 11월 ~ 2012년 5월)
- S학원 (2012년 5월 ~ 2012년 11월)

수신학원의 경우 삼성로 301에 위치했던 학원인데 2020년 정도까지 서치로도 많이 걸리고 저 서울역사박물관 자료에도 명시되어 있는 학원이다. 나머지 3곳은 모두 소규모 학원이었고 하나는 최악의 1대1 과외방이다. 변천 과정을 보면 다섯 곳 모두 반년을 넘기지 못하고 모두 관뒀다. 세번째 D학원의 경우는 약간 아쉬웠던 것이 나와 그나마 맞았고 2학년 1학기 기말고사에서 놀라운 결과를 이뤄내기도 했었는데, 학원 운영이 중단되면서 강제로 그만둬야 했다. 갑작스럽게 환경의 변화가 생겨버린 나는 그 직후 있었던 2학년 11월 모의고사와 2학기 기말고사에서 모두 좋지 못한 성적을 받았고 특히 수학에서 방황하게 된다. 그리고 고3을 앞둔 이 시기, 가장 최악의 선택을 하고 만다. 극약처방으로 1대1 과외방을 하게 되었는데, 비용만 엄청나게 비싸고 효과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소위 중하위권 대학에서 실시하던 '적성검사' 전문가였다. 그러니 나와 맞을리가 있었겠는가. 그곳에서 5개월을 허비하고 또 다른 소규모 수학학원으로 이동하여 수능까지 마지막 5개월을 어찌저찌 버텼지만, 결국 '수리 백분위 92'에서 더 이상 점수를 높이지 못하고 그렇게 학창 시절이 종료되었다. 목표 대학 진학에 실패한 가장 큰 원인이었다.

시군구별 대치동 전입 전출 비중. 2005년~2016년으로 우리 가족이 이주했던 2010~2015년이 전부 들어가는데, 관악구가 유의미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왜 이렇게 지속적으로 학원 선택의 실패가 이어졌을까. 문제는 바로 네트워크였다. 나와 마찬가지로 엄마 역시 그 해 이주해서 바로 소위 본투비 강남엄마 네트워크에 들어갈 수는 없었다. 결국 강남으로 이주해서도 봉천신도시 시절에 결성되어있던 엄마들의 네트워크가 그대로 이어졌다. 이게 이어질 수 있었던 이유는 봉천신도시에서 강남으로 임시이주한 가족들이 우리 가족뿐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꽤 많은 가족들이 같은 시기에 자녀들의 교육 문제로 강남으로 임시이주했기 때문에 네트워크도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이다.


문제의 그 적성검사 전문가 1대1 과외방 역시 바로 이 '봉천신도시 출신 강남 엄마 네트워크'에서 추천받아서 받게 되었었다. 나중에 5개월의 시간은 물론 막대한 경제적 손해까지 입게 되었다는걸 알고 나서 나도 나지만 엄마도 당시 해당 과외강사를 추천해준 사람을 상당히 원망했다. 하지만 원망하면 뭐하겠는가, 이미 엎어진 물이었던 것을. 봉천신도시 출신 엄마들의 네트워크는 당연히 본투비 강남 엄마들의 네트워크보다 정보력이 낮을 수밖에 없었다는 걸 이 경험을 통해 크게 깨닫곤 한다.



대형학원으로 성공한 국어와 사회탐구

국어(언어영역)와 사회탐구의 경우 봉천동 시절은 물론이요 강남 이주 후에도 학원을 다니지 않았다. 그러다가 사회탐구의 경우 학교에서 가르치는 과목이 아닌 과목을 수능에 응시하고 싶어 2학년 6월 모의고사에서 해당 과목을 노베이스로 응시해봤는데 4등급을 받은 이후 학원수강이 한 번은 필요하다고 생각되어 방학 때 속성으로 다니게 되었으며, 언어영역 역시 방학 때 학원수강으로 한 번 돌리게 되는데 이 때 활용했던 게 대치역 7번출구 바로 앞에 있던 메가스터디강남이었다.


메가스터디는 2000년에 대치동 학원가에서 인기를 끌던 대형학원 소속 강사들에 의해 설립되었는데, 메가스터디강남의 경우 메가스터디의 창립자 손주은이 현역 강사 시절 강의를 하던 '강남대일학원' 자리에 위치해 있었다. 사실 온라인 교육기업이라고 하지만 나에게는 오프라인 학원과 다를게 없었다. 어마무시한 대형강의였다는 점을 제외하면. 언어영역 최인호 선생님 강의의 경우에는 대형 강의실에 백여명은 들어갔던 것 같다.

온라인 교육기업 메가스터디(www.megastudy.net)는 12~13일 순천과 대전에서 수험생 대상 무료 입시설명회를 개최한다고 4일 밝혔다.
이번 설명회는 여름방학을 앞둔 지방 거주 수험생들에게 여름방학 학습전략 및 2012학년도 대입을 전략을 전달하는 행사다. 12일에는 순천 에코그라드호텔에서, 13일에는 대전 우송예술회관에서 오후 7시부터 진행된다.
1부에서는 메가스터디의 수능 영역별 강사들이 2012 수능 대비 영역별 여름방학 학습전략을 제시한다. 12일 순천 설명회에는 최인호(언어영역), 신승범(수리영역), 김기훈(외국어영역), 전재홍(사회탐구영역), 박선오(과학탐구영역) 강사가 강연자로 나서고, 13일 대전 행사에는 이규환(언어영역), 신승범(수리영역), 김기훈(외국어영역), 전재홍(사회탐구영역), 박선오(과학탐구영역) 강사가 강연을 맡는다.
2부에는 손주은 메가스터디 대표가 강연자로 나서 2012 대입의 핵심 이슈를 점검하고 대입 전략을 소개할 예정이다.
설명회 참석자 전원에게는 2012학년도 대입 전략 자료집과 학습정보지 메가진(MEGAZINE) 여름방학편 등을 무료로 나눠준다. (1599-1010)

머니투데이 2011.07.04. 「메가스터디, 무료 입시 설명회 개최」

서치 중 내 대입 입시기간(2010~2012)의 기사를 하나 찾았는데, 내가 들었던 언어 강사와 사회탐구 강사가 모두 등장하는걸 보니 당시 그 강사들이 메가스터디의 얼굴이었던듯 싶다. 사회탐구의 경우 전재홍 선생님의 'GADURY'와 'OSOK(One Shot One Kill)' 강의를 들었는데 한바퀴 돌린것으로도 어느정도 궤도에 오르긴 했다. 고3 여름에 다시 한번 돌려주었다.

최인호 언어는 에피소드가 있다. 처음에 2010년 12월부터 2011년 2월까지 백여명이 들어가는 대강의실에서 메가스터디강남 현강으로 들었을 때는 사실 별 생각이 없었는데, 수능 직전이었던 9월 모의고사와 10월 모의고사에서 연속 3등급이 뜨면서 멘탈이 박살난적이 있다. 수리영역도 2등급 백분위 92만 1년 내내 나오고 있었던 마당에 언어영역까지 이렇게 나와버리면 답이 없었다. 9월 모의고사날 저녁에 '하늘이 노랗다'는걸 물리적으로 체감한 적도 있었다. 여하튼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 최인호 언어 파이널을 인강으로 구매해서 1주일만에 전 강의를 수강한다음 정말 미친듯이 소위 최인호 스킬을 연습했다. 나는 소위 무지성 암기나 스킬 이런것을 별로 안좋아했으나 그때는 재고 가리고 할 여유가 없었다. 나는 지금도 2012년 한 해 내내 10월처럼 공부했으면 정말 목표대학 갔겠다. 그런 생각을 한다. 고3 9월이 되도록 관성적으로만 살았다가 10월에 정말 미친듯이 했다. 한 달 동안 언어만 (기출유형 원리 적용 작업과 병행해서) 1000문제를 풀었으니 그때는 진짜 뒤가 없어서 초인이 강림했었다.


2012년 11월 8일 대수능날, 언어 영역을 풀 때는 정말 나에게 최인호 선생이 빙의한것마냥 적재적소에서 스킬을 쓰며 풀어나갔고 결국 성적을 원상복구시켜둘수 있었다. 다만 그 해 언어영역이 워낙 쉽게 나와 1등급컷이 98점이었다는 점. 수능 채점할 때 언어 영역 채점이 완료되자 집안이 환호성으로 뒤덮였던 순간을 기억한다. 그 때는 1등급컷이 98점까지 나올 정도의 시험일진 몰랐다.



논술학원과 입사제


아직 논술전형이 주류로 남아있던 시절이다. 다만 내 입시때의 논술은 사실상 '준(準) 수능전형'으로 수능 최저등급은 당연하고 우선선발이라는 개념이 있었다. 예를 들어 연세대는 언수외 모두 2등급 이상이 수능최저등급 기준이고, 언수외 111이면 우선선발기준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때는 내가 합격한 입사제(학종)전형마저 수능최저등급기준이 있었고 논술과 기준이 동일했다. 나는 최상위대학들에 수능최저등급, 우선선발 등이 가장 빽빽하던 시기에 입시를 치뤘는데 그래서일까, 나는 아직도 나 때의 입시 제도가 맞다고 생각한다. 수시에 수능최저등급, 수능우선선발 기준 도입. 정시처럼 1점 1점에 희비가 엇갈리는건 아니면서도 일정 수능 점수는 보증받는 제도.


여하튼 아무리 준수능전형이라고 해도 논술을 치기는 쳐야 했던 만큼, 고2가 마무리되던 2011년 12월부터 2012년 2월까지, 그리고 2012년 7월부터 11월까지 윤진성논술학원이라는 곳을 다녔다. 이 학원 재학생들로 인터뷰를 한 나와 동갑인 친구들 기사까지 있으니 당시 나름 핫했던 듯 하다. 논술전형을 다 떨어지기도 했고, 이 학원의 기억은 의외로 거의 정말 없는데 이곳이 임팩트 있는 기억을 하나 남겨줬으니 바로 8월의 수시상담에서 여기 상담 이후에 대입원서 하나를 바꿨는데 그 바꾼 원서가 유일하게 붙은 대입원서가 되었기 때문이다.

저희 아이는 대학 합격 소식 듣고 제일 먼저 ‘윤진성 논술학원’ 김기식 원장에게 전화를 했어요. 감사 인사를 가장 먼저 전하고 싶은 사람이 김 원장이라고 하더군요. 김 원장 강의의 가장 큰 장점은 대면 첨삭입니다. 자신이 쓴 글의 방향이 어떻게 잘못됐는지 바로 지적을 받아 개선해 나갈 수 있거든요.

중앙일보, 2012년 10월 25일 보도
2010년 서울시의회 재정경제위원회 행정사무감사 주요업무보고

우리 집은 대입 원서를 쓸 때도 3년 전 고입 원서를 쓸 때처럼 내내 혼란에 시달렸다. 학력고사 세대였던 부모님은 입학사정관제를 굉장히 불신했지만, 봉사활동 시간을 관리해주긴 했으며 입학사정관제를 의식해서 중학교 시절부터 서울시 행사 찾아다니던 내가 여러 공모전이나 프로그램에 지원하는 걸 말리진 않았다. 이 때 내가 진행했던 봉사활동은 한강시민공원이나 국립현충원에서의 환경정화활동과 구립도서관 서가정리활동이었다.


그 와중에 학교 조례시간에 공문이 내려왔다. 그것이 2010년도에 서울특별시에서 진행했던 '대학 제안 『건강한 학교 만들기』프로그램이었다. 초-중학교땐 사회, 역사 관련 외부 프로그램이 많이 없어서 서운했던 차에 이번엔 사회, 역사 관련 프로그램이 있었다. 그렇게 참여하게 된 프로그램, 꽤 열정적으로 참가해서 대학교측에서 활동했던 내용들을 작은 책으로 한번 만들어보는게 어떻겠냐, 제안을 받았고 양재동 작업실에서 한 10부 정도 제본을 하기도 했다. 이 해가 경술국치로부터 정확히 100년 되던 해라 흥선대원군 시기부터 경술국치까지의 시기에 이루어진 사건 현장을 중심으로 많이 돌아다녔었다.


여기서 끝이였다면 그 프로그램이 이렇게까지 기억에 남진 않았을 거다. 그 다음 해에 2학년으로 진급하면서 이제 '사회' '역사'로만 나누어져있던 사회과목이 수능과목인 11과목으로 나뉘어지는데 이 때 '한국근현대사'라는 과목이 있었다. 우리가 최후의 근현대사 세대였다. 바로 다음 해부터 '한국사'로 통합되어 사라지는. 그 한국근현대사 과목을 내신에서 배우게 되었는데, 첫 시험인 1학기 중간고사가 너무 쉽게 나오자 선생님들은 기말고사의 난이도를 엄청나게 올려버렸고, 그 결과.. 전교 1등을 했다! 나는 성적표에 동점자 표시인 '()(괄호)' 없이 1 / XXX 라고 찍혀 있는 성적표를 그 때 처음 봤다. 그리고 학교에서는 과목별 전교 1등에게 과목최우수상이라고 하여 수상을 진행했고 그게 내 학생부에 찍혔다. 여기까지도 긴가민가했는데 이어지는 2학기에서는 아예 중간고사 100점 기말고사 100점 (전체평균은 50점 미만이었다.) 소위 백백을 찍어버리며 1 / XXX 2관왕에 올랐다. 이때쯤 되면 이제 근현대사 과목 채점할때는 그 강남애들이 우루루 내 자리로 와서 정답을 맞추곤 했다.


'입학사정관제'를 도입한 이명박 정부의 마지막 해이자 '학종'을 본격 도입한 박근혜 정부가 당선되던 대통령 선거가 있던 해에 대입과 수능을 치렀던 우리는 정말 '입사제'와 '학종'의 경계선, 과도기에 있었다. 슬슬 외부수상 내역 등의 학생부 기재가 금지되기 시작했으며(예를 들어 한국사능력검정시험 학생부 등록이 2010년까지는 됐고 2011년부터 금지했다), 교내 시상 등을 보는 분위기로 전환되고 있었다. 학교는 이런 분위기를 발빠르게 읽고 기존에는 영어경시대회, 수학경시대회만 있었던 것을 갑자기 한국사경시대회니, 시사경시대회니 하며 경시대회를 꽤 늘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초대 한국사경시대회에 응시했는데 그것도 대상!


여튼 예상치 못하게 인문계열 서사를 쌓아버린 이 시점에 나는 대입 원서를 쓰던 순간까지도 사회과학부의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수시 여섯 장을 전부 사회과학계열 학과 또는 사회과학부(학부모집인 경우)로 써놨었다. 4장 논술, 2장 입사제(학종). 이 수시원서 최대 여섯 장 제한도 3년 전 외고 지역제한마냥 우리때부터 규제를 걸었던 것이었는데 3년 전만큼 열받진 않았다. 어차피 목표대학은 한정되어 있으니. 물론 이 여섯 장 제한이 대학제한이 아니라 전형제한이어서, 예를 들어 한 대학의 전형 2개를 쓰면 그대로 2장이 소모되는 구조였기에 "또 우리때부터야?!" 싶은 마음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말이다.


그런데 그 때 논술학원에서 수시 컨설팅도 했었다. 사회과학계열 학과에만 6장을 몰아 쓴 나를 보고 원장님은 한참 생각하더니 "이 스펙과 서사는 인문과학계열에 어울린다. 하나는 인문과학계열로 바꾸자"고 하셨다. 그리고 결국 수시 6장 중 마지막에 바꾼 그 인문과학계열 원서 1장만 합격 회신을 받았다.


입학사정관제는 말이 안되는 제도라며 항상 입사제가 뉴스에 나올 때마다 욕을 하시던 부모님은 내가 나 하고 싶은거 하다가 얼떨결에 입사제로 붙어버리고 나선 당황하시기도 했었다.



그시절 탈출구, 센트럴시티

2012년 6월 17일 영풍문고 강남점 영업 마지막 날. 오후 12시 40분에 도착했다. 평소보다 사람이 많다. 계산대에 줄지어 서있는 사람들.
겉보기에는 오늘이 정말 영업 마지막날인지 실감이 가지 않았지만, 조금 둘러 보니 금세 실감이 갔다. 중간중간에 비어있는 공간들이 눈에 띄었다.
문구 코너는 더 심했다. 아예 비어 있는 코너도 있었고, 파인테크도 그 넓은 통에 서너개가 남아 마지막임을 실감케 했다. 가장 결정적이였던건 우연히 직원용 데스크를 지나가다 달력 오늘 날짜에 적혀있는 '전품목 정리' 이라는 다섯 글자.....괜히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오늘 계산을 네번 했다. 평소에는 아무렇지 않게 받던 "영풍문고 강남점" 이 찍힌 영수증을, 내일부턴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중략)
총 네개의 영수증. 그리고 한시간 만의 쇼핑이 끝났다. 음악이 나오는데, 평소에는 무심코 흘려듣던 음악이 왜 이리 슬프게 들리던지. 5년 반동안 자주 오던 이곳....절대 없어지지 않을 줄 알았는데...글이 너무 길어진것 같은데....정말, 오늘이 마지막이다. 영풍 강남점, 안녕!

2012년 6월 17일 내 페이스북에서 발췌

마지막으로 강남에서 가장 애정이 깊었던 공간 두 곳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고속터미널 센트럴시티와 대치-개포동 공공도서관이다. 먼저 센트럴시티. 70년대생 김시덕 박사의 고속터미널에 대한 가장 강렬한 기억이 고공(3,5층)에서 탑승하던 버스라면 90년대생 나의 고속터미널에 대한 가장 강렬한 기억은 센트럴시티 지하1층 좌 신나라레코드 우 영풍문고다. 신기하다면 신기하달까, 두 풍경은 20년 터울로 둘다 10년정도 존재하다 사라진 풍경이다. 전자는 80년대 10년. 후자는 00년대 10년. 이 센트럴시티 영풍문고를 내가 얼마나 사랑했던지 2012년 폐업할 때 온갖 갬성범벅된 글을 올리며 영업 마지막 날에 방문하기도 했었다. 최근 13년만에 센트럴시티 영풍문고가 다시 부활했다고 하여 한번 가본적이 있다. 7호선에서 올라와 3호선 대합실에서 카드 찍고 왼쪽으로 틀어서 다시 왼쪽 계단, 올라가서 오른쪽으로 턴. 내 몸은 동선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부활한 센트럴시티 영풍문고는 규모도 30분의 1로 줄고 위치도 그 때 그 위치가 아니긴 했지만 괜히 뭉클했다.


2000년 나란히 문을 연 삼성동 코엑스몰,강남 센트럴시티는 국내에서 초창기 몰링 문화를 개척한 주역들이다. 10여년 전만 해도 한 장소에서 오래 머물면서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쇼핑하는 몰링은 그리 친숙하지 않은 개념이었다. 이들 '1세대 복합몰'의 등장은 몰링을 새로운 소비 트렌드로 확산시키고 자리잡게 했다.
(중략)
강남 센트럴시티는 호남선 고속버스터미널을 기반으로 신세계백화점과 메리어트호텔 씨너스영화관 영풍문고 신나라레코드 등이 잇달아 둥지를 틀면서 강남권의 대표적인 생활문화공간으로 확장됐다. 백화점동(6992㎡),터미널동(1만4975㎡),호텔동(3306㎡) 등 세개 동을 합치면 면적이 축구장 3개와 맞먹는다.

한국경제 2011.08.10. 「[몰링! 소비 뉴 트렌드] 잠실 롯데월드·삼성동 코엑스몰·강남 센트럴시티 '몰링문화 개척 1세대'」

고속터미널 센트럴시티는 봉천 신도시와 대치동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 곳이다. 그래서 아직 봉천 신도시에 살고 있던 시절 청담어학원 본원을 다닐 때도 오가는 길의 딱 중간에 있어서 꽤 많이 다녔고, 그때부터 친숙해진게 강남 이주 후에도 계속해서 찾게 되는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코엑스와 유사한 소위 '1세대 복합몰'이었는데, 코엑스 역시 어린 시절 큰 영향을 준 공간 중 한 곳이었음은 5장에서 설명한 바 있다. 강남에 위치한, 비슷한 개념의 공간인데 나에게 코엑스는 어린이 시절 부모님과 함께하던 공간, 센트럴시티는 청소년기에 친구들과 함께하던 공간으로 기억에 남아 있다. 둘 다 현재도 존재하긴 하지만 내부 구조가 그때와 너무 많이 달라져버렸다.


서울 강남구 삼성동의 오피스텔에서 생활하고 있는 김병주씨. 퇴근 후 저녁식사를 마치면 어김없이 코엑스몰로 걸음을 옮긴다. 여유 있게 몰과 백화점, 멀티플렉스 등을 돌고 나면 1시간이 모자란다. 김씨는 “돈 들여 헬스클럽에 가느니 식사 후 느긋하게 한 바퀴 돌고 나면 저절로 운동이 된다”고 말한다. 2000년에 개점한 코엑스몰은 연면적 46만3000㎡의 복합문화공간이다. 현대백화점과 멀티플렉스 메가박스, 수족관 아쿠아리움, 대형 서점 반디앤루니스, 각종 레스토랑과 의류매장이 입점해 있다. 하루 동안 주중 10만 명, 주말 15만 명 내외의 방문객이 들고 난다. 김씨는 “인파가 몰리는 주말을 빼면 최고의 산책로는 몰”이라고 덧붙였다.
최근 몰을 방문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일 때문에, 쇼핑과 여가를 즐기기 위해, 김씨처럼 산책을 위해 몰을 찾는다. 관련 신조어도 등장했다. 몰에서 원스톱 엔터테인먼트를 즐기는 것을 ‘몰링(Malling)’, 몰링을 즐기는 이들을 ‘몰고어(Mall-Goer)’, 운동 삼아 산책하는 이들을 ‘몰워커(Mall-Walker)’라 부른다.

매일경제 2011.04.22. 「21세기는 몰링(Malling) 시대!」
몰이 도시 공간에서 다양하게 세포분열을 하면서 몰에 가는 것이 특별한 일이 아니라 ‘일상’이 된 몰링족도 생겨나고 있다. 어린 시절부터 동네에 몰이 있어 몰에 익숙한 청소년이나 20∼30대 젊은 층이 몰링족에 속한다.

한겨레 2015.02.17. 「쇼핑몰 가는 게 일상이 된 사람들, 나는야 몰링족」

우리는 이 '몰링(Malling) 시대'를 어린시절부터 체화한 첫 세대였다. 어릴 때 가족들과 코엑스, 청소년기에 친구들과 센트럴시티를 누볐다. 이마트, 코엑스, 센트럴시티.. 우리는 이들과 함께 자라왔다. 나는 지금도 여의도의 IFC몰이나 영등포의 타임스퀘어를 자주 찾고, 인천으로 독립해서도 연수구의 스퀘어원을 자주 찾곤 한다. 우리에게 몰은 '새로움'이 아니라 '익숙함'이다. '어린 시절부터 동네에 몰이 있어 몰에 익숙한 청소년'이 생겨나고 있다는 보도가 나온 게 벌써 10년이나 지났다. 과연 한국은 이러한 시대적 변화를 읽고 있는가?



그시절 자습의 추억, 개포도서관

나는 학교 자습파도, 독서실파도 아니었다. 나는 주로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것을 선호했는데 그 중 많이 갔던 도서관은 시립개포도서관, 대치도서관, 즐거운도서관 등이었다. 시립개포도서관은 개포주공2단지 옆에 있었고, 대치도서관은 은마상가에, 즐거운도서관은 대치4동주민센터 내부에 있었다. 대치2동에 행복한도서관이라고 역시 대치2동주민센터 내부에 있는 도서관도 하나 있었는데, 행복한도서관은 그렇게 많이 가보진 않았다.


나에게 강남에서 그나마 추억이 제일 많은 공간을 꼽으라고 하면 아마 시립개포도서관을 꼽을 것이다. 시험기간만 되면 도서관이 문을 열기 1시간 전인 아침 6시부터 대기하다가 7시에 입장하던 기억들, 늦게 도착해서 지하1층 식당에서 대기하며 공부하던 기억들, 특히 밤 10~11시까지 공부하다가 집에 돌아가던 그 밤의 작은 오솔길 같은 삼성로3길을 결코 잊지 못한다.


개포도서관 앞에는 달터마을이라고 무허가주택 밀집지역이 있다. 가끔 주말에 아침부터 개포도서관에서 몇시간씩 공부하다가 잠시 집중력이 떨어질 땐 그곳을 걸어보기도 했다. 봉천신도시에 처음 왔을 때 아직 남아있던 현 브라운스톤관악(봉천 11구역) 위치의 무허가주택 밀집지역이 생각나기도 하는 지역이었다. 양재천 아래쪽의 강남은 양재천 윗쪽의 강남과 느낌이 꽤 달랐는데 달터마을, 구룡마을도 그렇고, 개포동이 그때 재건축에 들어간 아파트가 하나도 없었고 개포주공이 전부 그대로 있던 시절이라 분위기가 은근히 아늑했던 기억이 난다.


수능 직전 1주일은 내내 개포도서관에 박혀 있었다. 5일째이던 수능 이틀 전 11월 6일 화요일 밤 너무 긴장되고 머리도 아파서 1층 자료실 입구에 있던 신문을 읽다가 자료실 들어가서 도진기 소설 '순서의 문제'와 '나를 아는 남자'를 한번에 완독해버린 때가 생각난다. 찐 전날이었던 7일 수요일은 수능 예비소집일로 시험장 미리 방문 뒤 3장에서 묘사한 13트랙짜리 서양 뉴에이지 음악을 들으며 마인드 컨트롤을 했었다. 사실상 대치동 키즈 생활이 마무리되는 시점의 기억들이다.


서울시교육청이 관내 도서관 중 최초로 강남구 개포도서관을 재건축한다. 41년된 도서관이 서울 교육을 반영한 미래형 공공 도서관으로 탈바꿈할 예정이다.
서울시교육청은 9일 강남구 개포동 개포도서관 건립부지 및 개포근린공원에서 '서울특별시교육청개포도서관 기공식'을 열었다. 정근식 서울시교육감은 기공식에서 "새로이 탄생할 개포도서관은 변화하는 사회 환경 속에서 시민과 함께 지식을 창조하고 문화를 향유하는 열린 교육·문화 거점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1984년 개관한 개포도서관은 40여년 만의 전면 개축을 통해 기존보다 확장된 연면적 1만2711.37㎡(부지면적 9만7361㎡), 지하 3층~지상 4층의 규모로 건립되며 2028년 1월 완공을 목표로 하고 있다.

파이낸셜뉴스 2025.09.09. 「개포도서관, 서울 도서관중 최초 재건축」
이 가운데 서울특별시교육청에서 운영하는 22개 도서관 및 평생학습관은 오래된 곳도 있기 때문에 리모델링을 하는 사례가 있다. 대대적인 보수를 마치고 7월 1일 새롭게 문을 연 동작도서관의 변화된 모습을 살펴봤다.
동작도서관은 1991년 개관 이후 33년 만에 새로운 공간으로 거듭났다. 공사도 무려 7개월에 거쳐 진행됐다. 지하 1층~지상 3층으로 이뤄진 공간이다. 타 도서관과 비교해 공간이 넉넉하지 않기 때문에 한정된 공간 내에서 최대한 많은 변화를 줬다.

내 손 안의 서울 2024.07.09. 「동작도서관, 33년만에 머물고 싶은 핫플로 대변신!」

2024년 초 봉천신도시에서의 추억이 많은 시립도서관인 동작도서관과 강남 임시거주 시절 추억이 많은 시립도서관인 개포도서관이 동시에 휴관을 했다. 공교롭게도 휴관 사유가 동작도서관은 리모델링, 개포도서관은 재건축이었다. 동작도서관은 리모델링이라 7개월만 휴관하고 2024년 7월 재개관한 상태다. 리모델링을 하면서 기존의 추억이 컸던 공간(1층 어린이실, 지하 독서회 하던 공간, 2층 식당이나 구 디지털자료실 등)들이 모두 사라지긴 했으나 뼈대는 남아있어 아 이쪽에 그때 그 공간이 있었지, 하고 떠올릴수는 있다. 재건축이면 아예 그것조차도 되지 않겠지.


개포도서관과 동작도서관의 같은 시기 다른 행보는 굉장히 상징적이라고 생각하는게, 70~80년대 조성된 소위 '강남 신도시'는 '재건축'을 통해 제2의 전성기를 구가했으나, 나는 90~00년대 조성된 봉천, 동작, 성동 등의 합동재개발아파트(서울 재개발신도시)들은 이미 20층 이상 고층아파트로, 재건축은 불가 최대 리모델링 정도로밖에 정비를 할 수 없다고 분석하고 있다. 그 차이를 각 지역의 도서관들이 미리 보여준 느낌이다.



2012년 11월 9일 금요일, 중앙일보 1면.

수능을 마친, 12년간의 학창시기가 종료된 다음 날의 중앙일보 1면. '2013학년도 수능' '개포주공 재건축 본격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취임'이 담겨 있는 것이 재미있다. 그렇게 이제 '성인의 시간'으로 접어들게 된다. 아니, 그렇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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