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장: 2013년 ~ 2015년 '유주택 임차가정(2)'
하루빨리 봉천고개 봉천신도시로 다시 돌아가고 싶었던 나에게 엄마는 "네가 서울대학교에 들어가면 바로 그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했었다. 실제로 집 바로 코앞에 있는 버스정류장에서 서울대학교 내부 깊숙이 들어가는 5513번 버스를 탈 수 있다. 10장에서도 언급했듯 서울대학교 교수들도 많이 거주하던게 우리 아파트였다. 그러나 나의 서울대학교 진학은 실패했고 이 상황에서 동생의 입시가 남아 있는데 무턱대고 돌아갈 수는 없었다. 그렇게 수능 이후에도 강남 거주 기간이 지속된다.
'절망의 1주일'과 교대 준비
수능 결과는 결국 수리 영역에서 끝내 극복하지 못하고 2등급에 머물러 정시로는 목표 대학 진학이 불가능했다. 기 응시한 수시 원서 6장 중에 합격하지 못하면 재수를 해야 했다. 간혹 수능 대박이 터져서 수능 직후로 바로 이어지는 논술 시험을 쿨하게 던지는 사례를 나도 따라해보고 싶었으나 어림도 없었다. 수능 다음 날 바로 논술학원으로 직행해서 10시간동안 논술 파이널 돌리고, 그 다음날이 토요일, 성균관대 논술날. 그리고 논술 을 마치자마자 바로 논술학원으로 이동하여 일요일로 예정되어 있던 서강대 논술을 또 준비해야 했다.
그렇게 논술 준비 및 응시를 1주일동안 하고 11월 셋째 주가 되어서야 비로소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물론 아무것도 정해진게 없으니 불안해하면서 놀 뿐. 이제 수능도 끝났겠다 거의 1주일에 한 번씩 봉천동을 왔다갔다했다.
중앙학원, 김영일 교육컨설팅, 하늘교육은 뉴시스 후원으로 28일 수능결과 발표이후 서울, 경기, 인천 지역에서 '2013 수능결과토대 4년제 정시 및 전문대 지원전략' 설명회를 잇따라 개최한다.
다음달 1일 오전 11시에는 서울 광진구 건국대학교 새천년관에서, 같은날 오후 3시에는 서울 동작구 숭실대학교 한경직기념관에서 설명회를 진행한다.
다음날인 2일 오전 11시에는 단국대학교 죽전캠퍼스 학생극장에서, 오후 3시에는 인하대학교 하이테크센터에서 설명회가 열린다. 또 3일 오후 2시에는 서울 종로구 동성고등학교 대강당에서 진행된다.
설명회에서는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성균관대, 서강대 등 최상위권 대학 합격선을 비롯해 중상위권 대학 및 중위권· 중하위권 대학 합격선, 4년제 상위권 대학 수준의 전문대 합격선, 중위권· 중하위권 전문대 수준대별 합격을 발표한다.
뉴시스 2012.11.26. 「중앙학원, 수능결과 발표 후 입시 설명회 개최」
12월 1일 토요일 오후 3시엔 봉천신도시 바로 옆에 있던 숭실대학교에서 정시 지원전략 설명회가 열렸는데, 친구와 같이 여기에 참석했다가 아예 봉천동 친구네 집으로 이동, 1박2일로 놀면서 보드게임도 하고 노래방도 가고 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12월 6일 목요일 밤부터 12월 7일까지 하나씩 수시 발표가 나오기 시작했다. 불합격, 불합격, 불합격.. 처음에는 태연하다가 뒤로 갈수록 어? 어? 현실이 눈 앞에 펼쳐졌다.
이 상황에 오자 엄마 아빠 모두 갑자기 정시에 '경인교대'를 넣으라고 했다. 이 당시에 경인교대 07학번이었던 사촌언니가 임용고시에 합격하고 초등학교 교사를 하고 있었기도 했고, 언어 고득점이었던 나는 당시 표준점수가 아닌 백분위로 반영하던 경인교대 정시에 안정권으로 나왔기 때문이기도 했다.
엄마아빠가 갑자기 자꾸 경인교대 얘기하니까 당황스럽다
원래 계속 연대 정외과 지망이였고 다른대학도 정치쪽 지망했었는데 수시 전부 광탈하고 정시 쓰려고 하니까 갑자기 엄마아빠가 자꾸 저러시네ㅜ선생님 한번도 생각해본적 없는데
2012년 12월 9일 입시사이트에 업로드한 글
나는 교대에 가고 싶지 않다고 했지만, 이미 수시를 다 떨어졌고 정시에서도 목표 대학을 지원할 수 없는 상황에서 부모님의 말씀을 거스를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12/7 수시 발표일. 수시 원서 6장, 수시 넣은 학교 4개교에서는 모두 불합격 통지를 주었다. 그 예비번호조차 한군데도 없었다. 성균관대는 예비번호를 아예 주지 않는다고 희망고문하고있는 사람들이 입시커뮤니티에서 왕왕 보였지만, 예비번호가 있는 나머지 3개학교에서도 예비번호를 못받았는데 당연히 광탈이려니하고 기대도 하지 않았다.
다음날은 어떻게 살았는지도 모르겠고 12/9에 코엑스 정시박람회라는 곳을 갔다. 상담 몇 번 받다가 충격받고 바로 나와서 잠수탔다. 12/11은 학교에서 정시상담이 있는 날이었다. 내가 가니 선생님들이 너는 왜 왔냐고 한다. 다 떨어져서 왔다고 하니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이상하게 고3 내내 슬럼프였음에도 선생님들은 내가 연고대 수시를 붙을줄 알았나보다. 현실은 광탈이고 상담받고 가나다군을 픽스하고 나온다음 재수학원 선행반 시작하기 전에 미리 집에서 준비하자 하고 수학I 교재를 몇개 사왔다. 그리고 다음날 12/12는 공부 다시 시작하기 전에 한번만 쉬고 시작하자 해서 새벽부터 나가서 이곳저곳 쏘다니다 집에 왔다. 이날 마지막 목적지가 수원이었는데, 1호선 타고 올라오면서 '성균관대' '내리실문 ←' 이 보이는데 참 묘했다. 12/13. 이제 다시 수능공부에 매진해야한다. 시립도서관에 갔다. 공부 하다가 문헌실가서 책 하나 읽고 집에 갔다. 집에 가니 난장판이 나 있었다. 휴대폰 요금청구서가 나와 있었다. 나는 고3때 폰이 없었는데, 수능 끝나고 폰 받고나서 문자를 많이 하긴 했었다. 수능도 못보고 수시도 다 떨어진게 문자는 뭐 이리 많이했냐고 너는 재수 할 자격도 없다면서 엄마는 이틀전 산 수학I 교재를 싹다 찢어버렸다. 물론 휴대폰도 압수. 집이 이정도로 저기압이면 최소 4일은 집 분위기가 이렇다. 이틀 전에 산 수학I 교재도 찢겼고, 집 분위기는 이렇게 개판일텐데 이제 뭐하고 사나... 온갖 비극적인 상념에 잠기다 잤다.
아직 동이 트지 않은 다음날 새벽(12/14) 바깥에서 엄마가 아빠에게 얘 그냥 깨우지 말라는 얘기가 들렸다. 전날 그렇게 집 분위기 개판났었으니 그런거겠지 했다.
7시반쯤 일어났다. 아빠는 출근을 일찍하셨는데, 거실에 엄마가 전날에 아무일도 없었던것처럼 거실 노트북 앞에 평온하게 앉아 있었다. ?????? 이정도 싸우고나면 최소 4일은 저기압 분위기였는데 뭐지? 내가 잠을 덜 깼나? 개꿀잼몰카인가? 그 찰나에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엄마가 앉아 있던 거실 노트북 화면을 봤다.
"성균관대학교 합격! 축하드립니다. 이제 당신은 자랑스러운 성균인입니다."
??..??
상황을 파악하는데 꽤 오래 걸렸다.
전날 밤에 압수되었던 폰은 식탁 위에 올려져 있었는데 폰을 보니 성균관대에서 추합 발표 되었으니 확인하라는 문자가 와 있었다. 전날에 압수된바람에 엄마가 문자 확인을 했던 것이다.
2012년 12월 7일 밤 ~ 12월 14일 새벽 "지옥의 1주일"을 회고하며 썼던 글(2018)
그런데, 경인교대 정시접수 확정되고 재수준비를 하던 차에 저런 기적이 일어났다. 12월 13일 집에서 그 난장판이 일어났던게 12월 14일을 더욱 드라마틱하게 만들어주었다. 벌써 13년이나 지난 일인데 아직도 저 날을 생각하면 눈에 눈물이 고일 정도의 에피소드이다. 정말 다 포기했을 때에 일어난 일이었으니.
대학생? 고등학교 4학년?
그렇게 평생 남을 기억 속에 2013학년도 대입이 완전히 마무리가 되었다. 2012년 12월 14일부터 2013년 3월 3일까지, 그 3개월은 독립 전 유일하게 정말 아무 간섭과 걱정 없이 태평하게 놀고 쉴 수 있었던 기간이었다. 친구와 4박5일로 일본 도쿄를 다녀오기도 했다. 그런데 막상 대학 생활이 시작되니, 부모님의 간섭은 다시 시작되었고 이게 대학생인지 고등학생 4학년인지 잘 분간이 안 되었다.
일단 집을 구할 필요가 없었다. 똑같이 집에서 학교는 통학이었다. 물론 통학거리가 조금 길어지고 한강도 건너야 했긴 했지만 초중고 학창시절마냥 월화수목금 아침 9시 오후 4시 하교도 아니니 그렇게 어려운 것도 아니었다. 당시 타이밍 좋게 분당선 왕십리 연장도 직전 해 10월에 개통한지라 비록 환승 2번이 필요했지만 그렇게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등록금 걱정도 없었다. 아버지께서 재직하고 있는 대기업에서 등록금 지원이 됐기 때문이다. 아마 등록금 고지서를 증빙하면 기업에서 등록금 금액만큼 지원이 나오는 방식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아 짜증나 입학한지 얼마나 됐다고 토익하라그러고 오늘은 나불러서 취업을 위해 스펙쌓고 있는 사람들 보여주는 다큐 막 보라고 강요한다 완전 구역질나 난 저렇게 안살건데요
2013년 3월 18일 내 페이스북에서 발췌
이런 환경에서 집에서는 1학년 1학기가 개강하자마자 다시 학창 시절처럼 달리기를 강요했고, 학교에서도 1학년 신입생들에게 고시반을 권유하는 등 이게 대학생인지 고등학교 4학년인지 알 수 없는 시간들이 이어졌다.
현대 대학생 중에서는 나같은 경우가 대다수이며 보편화되어있다. 서울 및 수도권에서 나고 자라 서울 및 수도권의 대학으로 진학하는 경우에는 본가에서 그대로 통학하고 대학에 입학하면서도 입학 동시에 스펙을 쌓으라며 닥달하는 부모님을 겪으며 이게 대학생인지 고등학생의 연장선인지 헷갈린다. 그렇게 나의 스무살, 스물한살은 사실상 고등학교 4학년, 5학년과 같았다. 그런데 한국의 대학생 담론은 아직도 대학생 하면 '지방에서 상경하여 힘들게 생활하는 청년'의 이미지만을 상정한다. “서울에 집 있어서 좋겠다”는 말 뒤에 붙은 시선은, 집이 동시에 감시 시스템이라는 걸 인지하지 못한다. 상경 서사만이 대학생의 표준처럼 굳혀진 상태에서, 통학생의 답답함은 전혀 조명받지 못한다.
그렇게 수많은 '고등학교 4~7학년생'들이 양산되는 과정에서, 나의 경우처럼 '답답함'을 호소하지 않아도 문제다. 주어진 환경에 안주하는 수많은 경우는, '나이만 어른이고 자립심이 전혀 길러지지 않은' 아이들이 사회에 나오고 있다.
50대 주부입니다. 평범하게 결혼생활 하여 슬하에 딸이 하나 있고 남편과 시댁과 친정 모두 편안하고 화목한 집이예요. 양가 부모님 건강하시고 남편과 사이도 좋으니 제가 복이 있는 사람이다 생각하며 살았는데 사춘기때도 말썽 안부리던 딸 때문에 죽을 맛 입니다.
저희 딸은 어렵게 생긴 아이고 양가도 손이 귀해서 모두에게 사랑 받으며 자란 아이였습니다. 뭐라도 하나 더 사주고 싶어하고 한번이라도 눈길 받고 싶어하는 집안 어른들과 이모, 고모 사이에서 세상 행복하게 자란 아이였고 아이도 심성이 착하고 영특했어요. 중학교때까지는 전교 10위 안에서 그리고 고등학교때는 성적이 떨어졌지만 그래도 우등생에 속했죠. 어릴때부터 워킹맘이던 엄마 집안일도 스스로 도와주던 착한 아이였어요. 저랑 남편이 딸이 너무 귀한 아이이기도 하고 부부 모두가 무조건 공부를 잘해야 행복한게 아니라 생각했기에 딸에게 공부를 강요하지도 않았고 고등학교때 성적이 떨어졌을때도 '그럴 수 있어 원래 갑자기 어려워지는거야. 스트레스 받지말아. 대학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잖아' 달랬습니다. 맹세코 딸에게 학업 스트레스를 준 적이 없어요. 저희 부부가 딸이 눈물 날 정도로 쓴소리하며 훈육한 건 거짓말을 했을 때, 서랍장 현금에서 몰래 몇만원 빼간 날 등등 정말 하면 안되는 행동을 했을 때와 학생의 본분을 벗어났을때 정도 뿐입니다.
문제는 딸이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 준비를 하면서 생겼습니다. 요즘 취업하기 어렵다는 거 알고 있어요 고학벌 고스펙도 취업이 안되는 세상이란 거 저도 잘 압니다. 저희 딸도 그런 현실과 부딪혔고 저희 부부은 요즘 힘들다더라 하며 딸에게 용기를 주었지만 딸의 좌절감은 생각보다 컸던 걸까요? 어느순간부터 취업준비도 자기 계발도 안하기 시작하더니 지금은 그냥 동네 백수예요. 여기까지도 뭐 이해 하겠습니다. 이런 시간들이 흐르다보면 정신 차리는 날이 오겠죠.
제가 정말 답답한 건 이러면서 자기 위안을 한다는겁니다. "엄마 내 친구 누구는 나처럼 집에서 놀면서 엄마 설거지도 한번 안해준대 ㅎㅎ 그래도 난 기특하다 그치?" "엄마 저거봐봐 티비에 저렇게 사람 죽이는거 봐봐. 요즘에는 정신 이상자가 너무 많아서 나쁜짓만 안하고 살아도 1인분이래"
저는 이런 이야기를 들을때마다 너무 맘이 아파요. 처음엔 엄마아빠가 눈치를 안줘도 자기 혼자 자신감이 많이 떨어져서 그런가보다 하고 그래~ 맞아~ 딸밖에 없지~ 했는데 그게 아닙니다. 제 딸은 모든 안좋은 상황과 안좋은 사례를 보며 자기 합리화 하는 중이였어요.
'나는 집에서 지금처럼 착하게만 있으면 취업하고 결혼하고 복잡하게 살 필요 없지않아? 나는 엄마 아빠의 하나뿐인 딸인데?' 이게 마음 제일 밑바닥에 자리 잡혔습니다. 아차 싶었던 저는 딸에게 독립을 권하기도 했고 (딸이 죽어도 안한다고 울고 소리질렀습니다. 딸이면 아무리 내가 밥벌레 같아도 책임져야하는거 아니냐 귀찮다고 이제 나가라는거냐면서..) 딸에게 하다못해 아르바이트 어떠냐 권하기도 했고 (딸은 돈 필요 없답니다. 매일 집에서 티비보고 밥 먹으니 필요없을만 하죠) 영어학원이던 자격증 학원이던 너가 취업하고싶은 회사 준비를 하는건 어떠냐 해도 응~ 해야지~ 말 뿐이지 전혀 안합니다. 저희 부부는 남편이 55세쯤에는 미리 퇴직을 하고 같이 여행이라도 다니자 이 약속을 30년째 하며 살았어요
이거 하나 생각하며 남편도 새벽같이 출근했고 수술 전까지 워킹맘이던 저도 직장생활과 육아 동시에 하며 버텼습니다. 우리가 넉넉하게 쓰고 아이한테 부족함 없이 해주고 그리고 다 해결하면 그땐 우리끼리 오손도손 여행이나 다니자 약속했어요. 크루즈 적금도 있습니다 근데 딸아이를 30대 40대 아니 죽기전까지 우리가 키워야 할수도 있다는 생각에 너무 눈앞이 깜깜하고 암울합니다
남편도 그러더라구요. 우리 여행은 못다니겠다고.. 미우나 고우나 하나뿐인 자식인데 그래도 우리가 먹여살려여지 어쩌겠냐고..... 요즘 저희 딸 입버릇은 자긴 결혼도 안하고 평생 엄마아빠랑 살거랍니다. 누구 좋으라고 하는 소린지 모르겠어요 저는 정말 이해할수가 없어요 저도 압니다 제가 자식을 잘못 키웠다는 거.. 근데 이젠 잘 모르겠어요. 제가 정말 잘못 키운건가요?
제 딸은 정말 평범하고 화목한 가정환경에서 사랑받으며 자랐고 트라우마가 있을만큼 상처도 없고 남들보다 넘치진 않아도 부족하진 않게 생활하며 정말... 팔자 편하게 자란 아이인데 왜 이렇게 됐을까요. 무조건적으로 오냐오냐 자란 아이도 아니고 어릴때부터 엄마 집안일 도와주던 야무지고 착한 아이입니다. 취업과 사회생활은 제대로 시작도 안했으면서 준비과정에서 무너져 내려 모든걸 다 포기하고 평생 엄마아빠랑 이렇게 복숭아나 먹고 같이 티비 보고 살고싶다는게 절 너무 힘들게해요.... 제 동생 말로는 겉으로 티를 안내서 그렇지 우울증 같은걸수도 있으니 너그러운 맘으로 보라는데 솔직한 심정으로 제 딸은 우울증 걸릴 환경이 아니라 생각합니다. 그런 기질도 아니고 그렇게 자라지도 않았어요. 근데 이 아이가 우울증으로 이러는거라면 제 20년이 무너져내리는 기분일 거 같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사랑으로 애지중지 키웠는데... 나중에 먼훗날 혼자 남을 아이가 씩씩하게 잘 살수있게 나름 노력하며 같이 요리하고 어떤 야채가 더 좋은지 어떤 생선이 더 좋은지 알려줘가며 지냈는데.. 제가 믿을 건 시간밖에 없어요 시간이 흘러 제 딸이 철이 좀 들기를요...그런데 40대가 되서도 이러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제가 어떻게 해야할 지 조언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제 딸 나이 또래의 친구분들도 제 딸 마음을 저에게 설득 시켜주세요... 요즘 딸이랑 대화하는것도 너무 괴롭습니다.. 티비에 청년실업자 이런 소리 나오면 "것봐 다 그런다니까~" 하는 딸 보면서 한숨 안 쉴 자신도 없어요 이제
네이트판 2024.08.15. 「50대 주부, 제가 딸을 잘못 키운건지 너무 괴롭습니다」
요즘 언론과 사회는 계속해서 '그냥 쉬었음' 청년들을 조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그냥 쉬었음' 청년 서사의 뒤에는 '집 나가면 개고생'인 본가의 따뜻한 환경이 존재함을 언론과 사회는 외면하고 있다.
가계금융복지조사 자료(2019~2022년 통합)를 활용하여 성인이행기 청년의 부모 동거 및 사적이전과 소득·빈곤 실태를 살펴보았을 때, 19~34세 청년 중 상용근로자 비율은 36.2%이고, 비취업 비율은 49.9%로, 성인이행기 청년의 절반이 소득활동을 하지 않는다. 따라서 개인취업소득 기준 빈곤율이 60.0%로 높은 수준을 기록하였다. 그러나 19~34세 청년의 73%가 부모와 동거하며(사실상 생계를 같이 하는 경우는 동거로 간주), 부모와의 동거와 소득 공유가 청년의 빈곤위험을 48.8%포인트 감소시키는 것을 확인했다(부모 포함 균등화 가구소득과 부모 제외 균등화 가구소득 사이의 격차를 통해 계산). 그 결과 청년의 약 90%는 빈곤을 경험하지 않고 성인이행기를 경과한다. 반면 전체 청년의 10%를 차지하는 빈곤 청년은 부모와의 동거 비율이 상대적으로 낮고 이행기 초기의 사적이전소득 수준도 상대적으로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19~34세 한국 청년은 그 절반이 소득활동을 하지 않는 낮은 경제활동 집단으로 특징지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 90%의 청년이 빈곤에 빠지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소득활동을 하는 부모와 동거하면서 생활비용을 줄이고 소득을 공유할 수 있기 때문인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한국의 성인이행기에서 사적 가족의 역할이 결정적임을 보여준다.
또한 청년이 점차 재정적 자립 능력을 갖추어감에 따라 부모 집을 떠날 가능성은 커지지만, 일반적인 주거분리 시점이 여전히 ‘결혼’에 맞추어질 경우, 자립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취업한 상태에서 부모 동거가 지속되는 것을 확인했다. 정기적인 소득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인자녀가 부모와 계속해서 동거하는 것은 단지 관성에 따른 것이 아니라, 완전한 자립을 위한 준비의 수단으로 부모와 성인자녀 모두가 부모-성인자녀 동거를 활용하기 때문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부모와의 동거는 살펴본 바와 같이 소득 능력이 부족한 성인자녀의 이행기를 지원하는 역할을 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취업한 자녀가 부모와 분리된 독립된 주거자원을 확보하기 위한 준비의 수단으로도 활용된다.
최선영 외,「성인이행기의 생애과정 위험과 가족의 대응 실태」2023,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서울에서 자라지 않은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서울에 저리 아파트들이 많은데, 저 아파트들엔 누가 살까?"
서울열린데이터광장에서 제공하는 데이터에 따르면,
2023년 기준 서울에는 3,627개 단지, 19,660개 동, 1,650,369개 세대의 아파트가 있다고 한다.
이렇게 서울에 아파트들이 많은데, ‘서울의 아파트’는 특히 많은 청년들에게 그림의 떡이 된 지 오래다. 새로 집을 구해야 할 때. 그렇다면 그 전엔 어떨까? 그러니까, 굳이 새 집을 구할 필요가 없을 시기 말이다. 서울연구원에서 분석한 ‘2022년 서울청년패널 기초분석보고서’에 따르면, 2022년의 19-36세 서울 거주 청년 대상 분석 결과, 서울에서 태어나 자란 청년이 65.8%이다. 서울 청년은 마치 지방에서 이주한 청년만 있는 것처럼 언론이 매일 가스라이팅하는 걸 생각해보면, 현실과는 많이 동떨어져 있다.
다음으로는 부모동거 여부와, 부모의 자가 소유 여부에 대한 조사 결과이다. 부모와 동거하는 청년이 47.5%, 그 부모동거 청년 중 부모가 자가의 집을 가지고 있는 비율이 53%라고 한다. 그러니까, 서울 청년의 25%는 부모의 자가 집에서 부모와 동거하며 살고 있다는 거다. 참고로, 부모자가 부모동거 가구의 자가 가격 평균은 8억 9천만원이라고 한다.
무려 서울 전체 청년의 25%인데, 이 사람들이 과연 ‘소수’의 ‘특권층’일까? 이들이 지금 자신이 ‘중산층’이고, 심지어는 ‘서민’이라고 하고 있다. 서울 청년의 3분의 2가 서울 태생이고, 애초에 자기가 나고 자란 서울의 부모 집에서 계속 살고, 그곳이 편하니 주택비용을 마련할 필요 자체를 느끼지 못한다. 문제는 그들이 결혼할 때다. 결혼하고서도 서울의 도심지 아파트에서 부모와 함께 살 순 없으니 어떻게든 집을 구하긴 해야겠는데, 그들에게 주어진 ‘새로운 집’의 선택지는 서울 도심지의 빌라나, 서울에서 2시간 거리의 외곽 아파트 뿐이다. 이러니 결혼율이 떨어지고 출산율이 떨어지는 것이지, 성평등이 부족해서, 일과 가정의 양립이 부족해서, 이런 요인들이 주 원인이 아니다.
2024년 나의 메모.
"서울 친구들은 자취를 하는 저를 속도 모르고 부러워했어요. 'xx 유지' 딸 아니냐면서요. 아직도 부모님과 살면서 월급을 차곡차곡 모으고 있는 친구들이 많은데, 그 차이는 어마어마하다고 생각해요."
"서울의 부모님 집에서 생활하는 이들과 비교하면 ~ 손해본다는 계산이 나온다."
"누구네 집 딸"이 아니라 온전히 나로 살 수 있는 홀가분함이 좋아요."
같은 기사에 있는 말이다.
본인들도 잘 알고 있네. 속도 모르고 부러워한다? 본인들은 대신 '누구네 집 딸이 아니라 온전히 나로 살 수 있는 홀가분함'을 누리고 있지 않는가. 경제적으로 덜 힘든걸 부정하진 않는다. 대신 초중고대 서울러들은 그 '홀가분함'이 없다. 경제적으로 조금 낫다고 모든게 다 나은건 아니다. 그 홀가분함을 찾기 위해서는 서울 출신 사람들도 똑같이 월세 내고, 생활비 내면서 월급 모은다.
2021년 10월 8일 내 페이스북에서 발췌
나는 20대 중후반에 부모님의 지원을 과감하게 끊고 도심의 고시원과 인천의 다세대 주택 등에서 독립 생활을 해 본적이 있고, 그 경험 이후에 남긴 글이 위의 글이다. 그런데 여기서도 짚어봐야 할 문제가 있다.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생활을 선망했던 내가 독특한 케이스이고, 사실 독립을 하지 않고 본가에 계속 머무르는게 합리적인 선택이다. 나마저도 인천 거주 7년차에 접어들며 7년 내내 서울로 통근하다보니 슬슬 번아웃이 오는데 다른 사람들은 오죽할까?
대학을 타지역으로 진학하여 물리적으로 통학이 불가능한 경우를 제외하면 성인자녀는 부모와 동거하는데, 자녀가 부모의 도움 없이 주거비용을 조달하기 어렵고 기숙사 혹은 대학생 대상 사회주택은 한정적이기 때문이다. 부모 참여자들은 등록금까지는 부모가 지원해야 한다는 강한 책임감을 갖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최선영 외,「성인이행기의 생애과정 위험과 가족의 대응 실태」2023,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이제는 같은 권역으로 진학하는 대학생이 주류인 시대다. 수도권도 예외가 아니다. 그리고 이들은 대학에 진학해도 그대로 부모의 집에 머물며 동거한다. 2023년에 들어서야 겨우 한국보건사회연구원 등을 중심으로 이 현상이 주류화, 보편화되었음을 인정하고 연구하는 모습이 나오는 듯 하다. 늦었지만 꼭 필요한 방향이다.
강남 30년 구축 임차인은 강남 사람일까?
처음 3년은 대학 입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버텼다곤 하지만, 입시가 종료된 뒤에도 동생의 입시가 남아있었기 때문에 이 강남의 30년 넘은 구축 아파트에 계속 거주해야 했는데, 슬슬 이러한 불편한 점들이 피부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집주인들은 '재건축이 될 아파트'라며 집 상태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이것보다 더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어디 사냐"고 묻는 대학교 선배들과 동기들의 질문에 답하는 일이었다. 나는 강남사람이라는 정체성이 전혀 없었고 '동작 관악 지역 출신이다'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어차피 같이 하교한다면 알려질 수밖에 없었다. 이 당시 교류하던 선배 중엔 강동이나 송파 쪽에 살고 있던 언니들이 많아서 당시에 혜화 - 동대문역사문화공원 - 왕십리까지는 같이 이동하는 경우도 많았다.
"수연 학우는 어디 살아요?" "(머뭇거리다) 강남이요." 하면 "우오오오~" 하는 분위기가 너무 싫었다. 그것도 한 번만 이런게 아니고 다른 모임에 갈 때마다 계속 똑같은 일이 반복되니 더 그랬다. 안그래도 강남에 소속감이 없었는데 더욱 강남으로 돌아가기 싫어진 나는 결국 2013년부터 2015년까지의 기간 동안 아예 귀가를 최대한 늦게 하고 거의 학교에 있거나 각종 대외활동을 했다. 대외활동을 하던 곳들도 대부분 강북 지역에 있었어서, 내가 강남 사람인지 강북 사람인지 헷갈리던 시절이 이 시절이다.
몇 년 전 배우 A의 학폭 논란이 터진 적이 있다. 당시 많은 네티즌들과 언론들은 A가 강남의 중고등학교를 나온 것에 주목하며 자극적인 '강남 보도'에 매진했다. 그러나 이 사건을 자세히 보면 A는 원래 동대문구 출신으로, 그 지역 역시 배봉산 남쪽 자락을 중심으로 내 고향 아파트와 똑같은 시기에 준공된 중형 아파트단지들이 대여섯개 위치한 지역이었다. 내 고향처럼 분양아파트단지와 임대아파트단지가 1,2단지로 구분되어 있는 모습까지 비슷하다. A는 그 지역에서 중학교까지 다니다 해외에서 1년 유학 후 강남으로 전입한 사례다. A는 언니가 있다. 내 동생 역시 중학교 도중에 강남으로 이주를 했어야 했는데, 그 사례와 완벽히 일치하는 사례다.
“장평중에서 (1학년 2학기) 학급 부회장을 했다. 친구들 사이에서 인기가 좋았다. 그런 애가 대청중으로 가서 ‘강북냄새’로 놀림 받고, ‘식판사건’으로 괴롭힘을 당해 많이 울었다. 여기서(장평중) 그런 걸 겪어본 적이 없던 애인데... 대청중 초반에 적응이 힘들어서 원래 살던 장안동에 자주 왔다. 그때 기억이 남아있다.” (ㅅ씨)
디스패치, 2021.03. 「[단독] “그날, 노래방에 없었다”...A, 학폭 논란의 반전」
그 사건은 '강남'이라는 이너서클 밖에서 자라다가 청소년 시기에 갑자기 전학을 오게 되어 적응을 하지 못하여 벌어진 사건이었지만 아무도 이를 조명하는 사람은 없었다. 특히 나는 당시 기사의 이 부분을 보면서 너무 소름이 돋았다. "대청중 초반에 적응이 힘들어서 원래 살던 장안동에 자주 왔다."라는 부분. 내가 지금까지 나의 생활에 대해 묘사한 내용과 완전히 일치하는 부분이다. 장안동을 봉천동으로만 바꾸면. 나는 A와 동갑이고 같은 시기 같은 지역에 있었기에 간접적으로 들은 것이 있었다. 그래서 A가 가해자가 아니라는 확신이 있었지만 내가 직접 당사자가 아니기에 뭐라 끼어 들수는 없었다. 그래도 그 당시 방영 연기되었던 드라마도 로스트 미디어로 남지 않고 방영에 성공하는 등 어느 정도 누명이 벗겨진 것 같아 다행이다.
A는 강남 사람일까? A가 지금 어디에 사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당시 미디어는 A가 강남 사람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보도했다. A가 강남 사람이라면 나는, 특히 중학교때부터 강남에서 다닌 내 동생은 강남 사람일까? 어디까지가 강남 사람이고, 어디까지가 임시 이주민일까? 강남에 있던 시절 겪은 또 다른 동갑 연예인 S의 사례도 있다. S는 A나 나와 달리 '본투비 강남러'였다. 강남에서 태어나 강남에서 초-중-고를 다 나온 아이였다. 주변에 S와 어릴 적부터 친구였다는 애가 있었다. 신기했다. S와 A를 보며, 그리고 강남에 와서 다른 아이들과 나를 대비하며 분명히 느껴지는 차이가 있었다. 본투비와 이방인. 하지만 언론들은 본투비와 이방인을 묶어 모두 강남 사람으로 뭉뚱그렸다. 입시철만 되면 '출신 고등학교'만을 근거로 강남3구 출신이 명문대에 대부분~ 이러한 보도를 굉장히 많이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들중 적지 않은 숫자가 그 시기만 잠시 강남에 머무는 이방인임을 이들은 조명하지 않는다.
마지막 강남거주의 해, 동생의 재수
대입 정시모집 '나'군의 성균관대 글로벌경영학과 '수능 우선선발' 합격자 전원이 언어·수리·외국어 영역 만점자인 것으로 나타났다. 성균관대는 정시 원서 접수를 마감한 26일 곧바로 우선선발 합격자 779명을 발표했다고 27일 밝혔다. 우선 선발 합격자 명단 발표는 당초 31일로 예정됐지만 수능 성적만 100% 반영해 평가하는 방식이라 전형 시간이 단축됐다.
최상위권 수험생들이 대거 지원해 합격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특히 가·나군에서 분할 모집한 글로벌경영학과의 경우 나군에서 우선 선발을 통해 합격한 전원이 언어·수리·외국어 만점으로 확인돼 눈길을 끌었다. 글로벌경영학과는 나군 모집인원 36명의 70%를 우선선발을 통해 뽑았다.
김윤배 성균관대 입학처장은 "우수 학생들이 몰린 것은 학교에 대한 선호도 상승이 합격 점수에도 영향을 끼쳤기 때문으로 본다"고 자평했다. 언어·수리·외국어 3개 영역에서 모두 만점을 받은 인문계열 수험생은 288명. 전체 수험생의 0.1%가 채 안 된다.
한국경제 2012.12.27. 「[대입 정시] 성대 글로벌경영 합격자 전원이 언·수·외 만점자」
사실 성균관대학교가 목표 대학은 아니었으나 여러 사유로 결국 재수를 하지 않았다. 첫 번째는 경인교대 입학+반수가 99.9% 확정된 상황에서 너무나 드라마틱하게 합격시켜준 유일한 학교였다는 점, 두 번째는 유독 우리 학번의 인풋이 높았다는 점(재삼수 이상 및 특목고 출신 비중이 50%가 넘었다), 세 번째는 어떻게 딱 내가 입학하던 시점이 박근혜 정부가 출범하던 시기였는데 '성시경 내각'이라는 신조어가 유행했던 때였다는 점, 네 번째는 세 개 대학 진학이 아니면 모두 실패인데 과연 내가 1년을 더 투자해서 확실하게 성공한다는 보장이 없었기 때문, 다섯 번째는 그래도 서성한 라인은 최저 마지노선이었다는 점 등.
그렇게 나는 재수를 하지는 않았지만, 재수학원의 분위기를 5일로 압축해서 경험해 본적이 있다. 지금은 딱 한 군데 블로그에 그 흔적이 남아 있는데, 바로 강남메가스터디에서 2012년 추석에 진행했던 '자물쇠 학교'라는 프로그램을 이수했었기 때문이다.
그 해 추석은 9월 29일 토요일부터 10월 1일 월요일까지였고, 10월 3일이 개천절, 그리고 중간에 샌드위치처럼 낀 10월 2일은 모든 학교가 재량휴업일로 지정하는 분위기였다(아직 주말과 공휴일이 겹치면 다음 날을 공휴일로 지정하는 대체휴일제가 도입되기 전이었다). 이 프로그램이 무엇이냐 하면 고3 재학생들을 대상으로 재수종합학원 커리큘럼을 그대로 굴리는 것이었다. 그 자물쇠학교 반에 재학생들만 있었는지 실제 재수종합반에 재학생들을 끼워넣었던 것이었는지는 자세히 기억이 안 나지만, 굉장히 "빡셌던" 기억이 난다. 이 5일 프로그램을 마치고 내가 페이스북에 남긴 한 마디가 "세상에 나보다 잘난 사람은 너무나 많다."라는 말이었으니. 이 때 불과 추석연휴 3일 뒤인 10월 6일(토)에 연세대 논술도 예정되어 있었어서 저녁에는 논술추석파이널을 달렸다. 강남메가에서 논술학원으로 걸어가면서, 이 때쯤 슬슬 철거가 마무리되던 대치동 청실아파트를 거쳐 지나가던 기억이 난다.
사실 동생과 나는 2년 터울이기 때문에 1년이 겹쳐서, 2015년에 돌아가도 무리는 없었지만, 전세 계약 기간이 통상 2년이기 때문에 이 해까지는 강남에 남아 있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강남 거주 마지막 해였던 2015년은 동생이 재수학원을 다니던 해였다. 우리 집은 아버지께서 졸업 후 바로 대학 진학을 했었고 어머니가 재수 경험이 있었는데, 각자의 경험대로 아버지는 재수에 떨떠름한 편이였고 어머니는 재수를 꽤 장려하는 편이었다. 나에게도 수없이 반수를 권했으나 나는 결국 재반수를 하지 않았고, 동생은 반수를 했다. 동생이 다니던 재수학원은 휘문고등학교 건너편에 있는 종로학원이었다. 동생은 재수학원에서 그런대로 성과를 냈으며, 그렇게 강남 6년을 부모님 입장에서는 알차게 보내고 세 번째 연장 없이 2016년에 전세 계약기간이 만료되며 자연스럽게 봉천 신도시로 귀환하게 된다.
잠실야구장
1학년 1학기를 그렇게 방황하면서 보낸 후 여름방학은 무려 오후 6시 통금이 걸렸었다. 이 때 무료한 저녁 시간을 보내기 위해 시청하기 시작한 것이 바로 KBO 프로야구였다. 그 해 시즌은 서울 연고의 LG 트윈스가 10년간의 암흑기를 드디어 떨쳐내고 선두 경쟁을 하던 시즌이었다.
10월 2일. LG 트윈스가 3위로 떨어졌다.. 초등학생 때부터 인식은 있었다. 하지만 거의 관심은 없었다.
그러다가..올해 최악의 여름을 지나면서...엄마가 퇴근하시는 7시 이후에 시간 때울것을 찾다가 네이버 프로야구 문자중계를 보게 되었다. 초5때 쌤이 체육시간에 1년 내내 발야구를 시켰기에 룰은 빠르게 습득했고 특히 달리는 덧글 구경하는게 재밌었다. 내가 엘지팬이 된건 서울의 자존심이라는 캐치프라이즈가 유독 나를 울렸다. 둘째로는 약자 응원 심리였다. 엘지는 작년까지 10년 연속으로 가을야구에 실패한 전대미문의 기록을 갱신하고 있었다. 그런 팀이 비상하는 것을 보고 싶었다. 그리고 8월 28일 직관때. 다른 엘팬들이랑 같이 응원하니까 정말 좋았던 기억이 있다! 내년에는 좀더 많은 경기에 직관가보고 싶다. 올해 잊혀지지 않는 기억 중 하나가 될거 같다. 내가 첨 관심 가진 해에 드디어 비밀번호를 깼다!
2013년 10월 3일 내 페이스북에서 발췌
7~8월 쾌속의 질주를 하며 8월 20일엔 18년만의 8월 1위를 일궈낸 LG 트윈스는 9월 초반에도 다시 1위를 탈환하며 그 해 바로 우승을 차지하는가 했다. 그러나 추석 이후로 주춤거리는 틈을 타 삼성이 8연승을 하면서 우승의 꿈은 멀어졌고, 오히려 정규시즌 종료를 3일 앞두고 3위로 떨어지는 등 삐걱거리다 마지막 경기에서 극적인 역전승을 하며 2위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10년의 암흑기를 겪었던 올드 팬들이 감격의 눈물을 흘리던 기억이 난다. 10년의 암흑기를 모르고 그 해 7월부터 야구를 보던 나도 괜히 같은 감정이 들었다. 그러나 귀신같이 이어지는 플레이오프에서는 2차전의 리즈 8이닝 역투를 제외하곤 남는 것이 없이 탈락하고 말았다. 그 한 경기라도 임팩트있게 이겼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그리고 나는 이 해부터 13년째 LG 트윈스의 팬으로, 2025년 현재까지 13시즌을 봐 왔다. 그 기간동안 2014년의 '5할 도전기', 2015년의 환승없는 9호선, 2016년 '2년만의 후반기 대반격', 2018년 후반기 대추락과 두산전 1승 15패 그리고 오지환 아시안게임 파동, 2019~2022년 가을야구 잔혹사 등을 겪으며 어느새 나도 '10년의 기억'이 쌓였을 2023년 시즌 드디어 통합우승을 차지했을 땐, 나도 10년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며 펑펑 울게 되더라.
그렇게 13시즌~ing 을 프로야구를 봐 왔지만, 아직도 나는 14~16시즌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이 때는 2020년대 코로나 이후처럼 프로야구 인기가 하늘을 찔러 표를 구하기 어려운 때도 아니였고, 무엇보다 잠실야구장이 집과 매우 가까운 것이 장점이었다. 이 때는 잠실야구장을 마치 마실 나가듯이 나가는 것이 가능해서 직관을 굉장히 많이 다녔다. 미리 예매도 하지 않고 그냥 산책 나가듯이 나가서 현장 예매해서 보고 그랬다.
잠시 떠나 있어도, 익숙한 곳으로
장소를 공동체의 한사람으로 경험하든 개인적으로 경험하든 거기에는 보통 긴밀한 애착, 즉 친밀감이 생기는데, 친밀감은 특정 장소에서 여기를 알게 되고 알려지게 되는 과정의 일부이다. 우리가 장소에 내린 뿌리는 바로 이 애착으로 구성된 것이며, 이 애착이 포괄하고 있는 친밀감은 단지 장소에 대해 세부적인 것까지 알고 있는 것만이 아니라 그 장소에 대한 깊은 배려와 관심이다.
에드워드 렐프, 『장소와 장소상실』
2011년 말부터 안경을 썼고, 2014년 초에 사랑니 제거를 했다. 이 두 가지 상황은 모두 강남으로 임시이주한 2010년 이후에 있었던 일이었다. 그러나 안경을 처음 맞출때도, 사랑니 제거를 할 때도 나는 강남이 아니라 봉천 신도시로 향했다. 내가 주체적으로 봉천 신도시에서 하겠다고 한 것도 아니고 부모님께서 이미 10년간 이용하던 곳들이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곳으로 간 것이다. 아예 말도 안되게 먼 곳에 있었다면 새로운 안경집이나 병원을 알아봤겠지만 충분히 가고 남을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익숙한 곳으로 자연스럽게 향하게 되었다. 심지어 2015년에 자전거를 새로 살 때도 관악구에서 구매하고 강남으로 그 자전거를 타고 돌아오기도 했다. 그리고 이 시기 역시 2010~2012년과 마찬가지로 봉천 신도시로 돌아와 친구들과 놀고 1박하는 일도 계속 이어졌다.
최종적으로 나에게 이 강남 6년은 강남의 문화와 기존 봉천신도시의 문화가 애매하게 융합된 시간들이었다. 한편 아버지는 이 강남에서의 시간이 상당히 만족스러웠던듯 싶다. 아버지께서는 이 기간동안 코엑스 메가박스에 자주 가서 영화를 보기도 하시고, 봉은사에 자주 방문하시기도 하셨다. 그래서 세 번째 전세 기간이 만료되던 2016년에 강남의 다른 곳을 아예 매매하려는 생각도 잠시 하셨던 것 같은데, 최종적으로는 기존에 다른 사람들에게 전세를 줬던 '우리 집'인 봉천신도시로 복귀하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