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서울 부동산은 폭등했다 - 16년 이후

제12장: 2016년 이후 '매도와 새로운 매수'

by 수연
2020년 6월 24일 동아일보 보도

2000년대 중반 한참 잠실주공을 필두로 한참 붐이 일었던 강남권 재건축은 2000년대 후반부터 2010년대 초중반까지 거의 멈추다시피 했다. 물론 이 시기 세계금융위기도 있었고, 오세훈 시정에서 박원순 시정으로 넘어가면서 시정방향의 변화가 있었다는 분석이 많으며 이것이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혹자들이 파악하지 못한 다른 원인이 있었으니 바로 이 시기가 서울 각 지역의 재개발아파트로 흘러갔던 386 화이트칼라층의 자녀들이 입시를 치루던 시기였기 때문이었다. 이들이 '유주택 임차인'으로 들어올 구축 아파트들이 필요한 시기여서 재건축이 잠시 멈추었다. 전세수요가 폭발하는데 그 기간을 철거시키고 썩힐 이유가 있겠는가? 수많은 재개발아파트 지역 고층 아파트 소유자들이 강남 임차인으로 몰려들었던게 바로 이 시기다. 이 시기에는 가용금액이 있는 이들(586 화이트칼라층)이 부동산 투기에 신경쓸 겨를이 없었기에 집값도 계속 그대로 안정세를 보였다.


이들의 마지막 타자들(96~97년생)이 슬슬 대입을 마치던 2014~2015년쯤 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강남지역의 2차 재건축 붐이 시작되었다. 기존 강남의 구축 아파트 소유자들은 이제 슬슬 교육전세수요가 줄어들 기미가 보이니 이 때를 타서 재건축 속도를 높인다. 돌아가는 이들은 이전에 이들이 임차전입할때의 집주인들과 마찬가지로 '아이들의 입시가 끝난 가구'가 된 이후에는 '굳이 대치동에 머물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이들은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기존 지역의 아파트로 돌아가면 되었다. 우리집 역시 6년간의 강남 임차인 생활을 마치고 2016년 봉천 신도시로 다시 돌아온다. 그리고 이들은 자녀들의 입시를 마무리짓고 나서는 사교육 지출비가 크게 떨어져 가용금액이 늘어난다. 지출은 감소하는데 이 때 86 화이트칼라층은 50대에 접어들면서 사회 중역의 위치에 올라 수입은 오히려 최고점을 찍는 시기가 된다. 아이들의 입시를 모두 마친 이들 역시 '부동산 투기' 흐름에 탑승했다. 이게 2017년부터 2021년까지 서울 전역에서 부동산 폭등이 일어난 원인이다.


2016년 초, 6년만에 다시 '우리 집'으로 돌아오던 그 날을 기억한다. 나와 동생은 아주 자연스럽게 그 전에 쓰던 방에 자리를 잡았다. 이제야 정말 집에 온 것 같았다. '고향집'이 이런 것이구나 싶었던 유일한 기억이다. 하지만 이 귀향의 기억은 오래 가지 못한다. 마지막 이동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훈남 정책통 아저씨


우리 가족이 봉천 신도시로 돌아오자마자 타이밍 좋게도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가 열린다.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 관악갑 개표 세부지표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관악갑 개표 세부지표

봉천 신도시가 속해있던 관악구 갑 지역은 2004년부터 2020년까지 5회 연속으로 같은 후보들이 대결을 펼친 지역으로도 유명하다. 김성식 후보와 유기홍 후보. 둘은 58년생 동갑에 서울대학교 77학번 동기로, 모두 운동권 출신이라는 것까지 비슷했다. 그러나 이후 행보는 조금 달랐는데, 유기홍 후보는 국민승리21을 시작으로 김대중 정부, 개혁국민정당을 거쳐 열린우리당으로 첫 선거를 치른 후 쭉 주류 민주당계 정당에 머물렀고, 김성식 후보는 최후의 비호남, 비DJ계 민주당이었던 통합민주당(1995~1997년)을 거쳐, 통합민주당이 한나라당과 합당하면서 한나라당 소속이 된다.


김성식 후보는 경제학과 출신으로 운동권 시절에도 정책기획부장을 맡았고, 원외에 있을 시절에도 실력을 인정받아 한나라당 제2정책조정위원회 위원장과 경기도 정무부지사를 지내기도 했다. 그는 내가 유치원에 다닐 때부터 이 지역에 출마를 시작해 초등학생 때도, 중학생 때도, 고등학생 때도, 대학생 때도, 직장인 때도 출마했다. 어릴 때 내가 바라본 그의 이미지는 '훈남 정책통'이었다.


하지만 이 훈남 정책통 아저씨는 계속 떨어졌다. 계속 떨어지면서도 계속 출마했다. 그렇게 세 번째 선거가 찾아왔다. 세 번째 선거쯤 되니 이제 얼굴과 이름이 정말 익숙해졌다. 동생과 집으로 배달된 공보물을 보면서 깔깔거리며 놀던 초등학생 시절을 거쳐 그 때의 난 중학생이 되어 있었다. 그 후보 블로그에 들어가 봉천동에 사는 중학교 2학년이다. 어릴 때부터 봐 왔고 응원한다. 이런 식으로 안부글을 남겼다. 4시간만에 답글이 달렸다. 꿈을 크게 꾸고 꼭 이루라고. 그렇게 그와의 블로그 펜팔이 시작됐다.


김성식 후보는 결국 관악구 갑에 출마한 지 3번만에 당선된다. 그 전에도 다른 지역에서 2번 출마 경험이 있었으니, 5번 시도만에 처음으로 당선된 것이다. 이때도 다세대주택 지역에서는 득표가 그렇게 높지 않았으나, 봉천 신도시 지역에서 어느정도 격차를 벌리며 당선되었다. 이는 그 후 서사의 시작이었다.


초선 임기 내내 '개혁 소장파'로 자리매김한 김성식 의원은 한나라당 주류와 내내 충돌하다 임기 말이었던 2011년 12월 한나라당을 탈당하고 다음 선거인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당시 새누리당에서는 이 지역에 후보를 공천하지 않아 사실상 1대 1 구도로 진행되었는데, 이 선거에서 봉천 신도시의 가장 상징적인 동네였던 성현동의 경우 무소속 김 후보가 해당 선거에서 당선한 민주당 유 후보에 오히려 4.25%p 우세하였고, 역시 봉천 신도시 지역이 많은 청림동과 은천동에서도 상당히 선전하는 결과가 나왔다.


그리고 다시 4년이 지나 2016년이 밝았다. 그 사이 김성식 전 의원은 "선거가 끝나면 다시 새누리당으로 돌아가겠지"라는 세간의 속평에 전면으로 거스르며 당시 돌풍을 일으키던 안철수 진영에서 활동하였고, 그가 갑작스럽게 민주당과 합당하자 합류를 거절하고 야인으로 남아 있기도 했다. 나는 그런 모습에 더 반했던 것 같다. 그렇게 이제 그는 현실 정치에서는 은퇴하려나 싶었던 때에,


2016년 새해와 함께 안철수는 국민의당을 창당하고, 김성식 전 의원이 전격적으로 합류한다. 그는 이어 그가 네 번 출마해 온 우리 관악구 갑 지역에 출마를 선언한다. 다섯 번째 도전이었다.

김 전 의원이 선거운동에 나선 것은 지난 23일부터다. 그는 선거운동에 나서기 전 기자에게 “제3정당 창당의 실패와 낙선 때문에 저를 아껴주신 분들을 뵐 낯이 없어 지역 행사에 자주 가지 못했다”고 털어놨다. 하지만 지역구민들은 핀잔보다는 “왜 이제야 왔느냐”고 웃으며 반겼다. 김 전 의원은 봉천로 사거리에서 주민들에게 휴일 인사를 하는 것을 끝으로 오전 선거운동 일정을 마쳤다. 그는 “내게 펄쩍 뛰어와서 안긴 대학생도 있었다”며 “언제 봐도 반겨주는 주민들이 있어 자신감을 얻었다”고 했다.

국민일보 2016.02.29. 「[4·13 격전지 르포] 유기홍 “지역 현안 해결 전력” VS 김성식 “낡은 정치판 바꾸자”」


이 기사에 언급된 펄쩍 뛰어와서 안긴 대학생이란 바로 나다. 그가 처음 이 지역에 출마할 때는 유치원생이었던 내가, 초등학생 시절, 블로그에 펜팔 남기던 중고등학생 시절을 거쳐 벌써 대학생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치뤄진 그 해 총선. 선거 결과는 놀라웠다. 전국적으로도 놀라웠지만 특히 관악 갑 선거는 더욱 놀라웠다. 서울에서 제3당 후보로 출마한 김성식 전 의원이 당선된 것이다. 수도권 전체에서 단 2명이 생존하였는데, 나머지 한 사람은 바로 당시 대권주자였던 안철수였다. 서울에서 제3당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된 사례는 이 해 선거의 대권주자였던 안철수와, 김성식을 제외하면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의 이부영 전 의원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2004년의 경우 명목상으로는 열린우리당이 3당이었으나, 당시의 열린우리당은 집권 여당이었고 한나라당을 제1야당으로 보아야 한다) 그리고 이 이후인 2020년, 2024년에도 당연히 서울에서 제3당 후보의 당선은 없었다.


이러한 기적은 그 전 선거들에서 계속 빌드업 되어 왔던 '봉천신도시 정치적 파워'의 마지막 피날레였다. 당시 0.8%p차(1239표 차)의 아주 근소한 차이로 당선되었는데, 당시 성현동에서 8.95%p차(1503표 차)로 앞서면서 이것이 결정적으로 작용해 승리했다. 그 외에도 역시 2012년과 마찬가지로 은천동, 청림동에서 높은 득표를 올렸다. 혹자는 '관악구가 호남 출향민이 많아 당시 호남에서 돌풍을 일으켰던 국민의당의 후광을 받은 것'이라고 주장하나, 이는 명백히 잘못된 해석이다. 왜냐하면 당일에 관악구 갑 내에서 선거가 하나 더 있었기 때문이다. 같은 날 진행된 관악구의원 보궐선거(중앙동, 청룡동)의 경우 국민의당 후보가 전형적인 호남 마케팅을 진행하였으나, 결과는 20%p차의 대참패였다.(두 동 모두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김성식 후보가 승리하였다.) 반면 김성식 후보는 유세 내내 단 한 번도, 호남의 '호' 자도 꺼낸적이 없다. 그는 선거 내내 그의 강점이었던 경제통 이미지로 선거를 끌고 나갔다. 이 전략이 효과를 보아 고층 아파트가 밀집된 봉천 신도시 지역에서 높은 득표를 올릴 수 있었고, 봉천 신도시 지역에서의 득표력 자체는 인정받았으나 당선에는 실패한 2012년과는 달리 당선증까지 거머쥐게 된 것이다.


이 선거의 결과는 많은 시사점을 남긴다. 기존 선거 분석에서는 양당 구도로만 분석하며, 자가 주택 소유와 아파트 거주자가 많은 지역에서 보수정당인 한나라당의 지지율이 높게 나타난다던가(손낙구) 등 자가 주택 소유 및 아파트 거주자의 증가와 보수 정당의 지지율이 비례한다 정도의 결과가 나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이 선거의 결과를 통해 이들이 '박정희식 반공, 발전주의 보수'를 지지하는 것인지, 소위 유승민, 김성식 등으로 상징되는 '경제통, 개혁 소장파 보수'를 지지하는 것인지 구분해야 할 필요성이 생겼다. 2024년 '보수 정당이 절대 승리할 수 없을 것'이라고 여겨졌던 동탄신도시에서 보수정당 출신의 개혁신당 이준석 후보가 제3당으로 당선되면서 이 가제의 연구 필요성은 더욱 커지고 있으나 아직 주류 의견으로 자리잡고 있지는 못한 상황이다.


그리고 이 선거가 '봉천 신도시의 마지막 피날레'인 이유가 있었다. 곧 이들이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 선거 직후 박근혜 대통령 탄핵, 문재인 정권 출범 등이 뒤를 이으며, 노무현 정권 이후 어언 10~15년 만에 다시 '상급지 이동'의 기회가 열린 것이다. 그리고 봉천동 집 매수 직후 바로 노무현 정권 부동산 폭등을 겪고, 10년 내내 "봉천동 집을 산 게 인생에서 가장 후회하는 것"이라던 아빠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여유자금이 많아진 세대의 2차 대이동

10억 아파트라고 해봤자 대출 4억 땡기고 + 내 돈 2억하고 + 신용대출 1억 + 증여받으면 장만이 사실 가능했기 때문이다. 서울에 사는 30~40대들이 바보는 아니다. 그리고 돈 많은 사람 서울에 많다. 정치인들은 착각을 하면 안 된다. 본인들만 국회의원 정치권력으로 사모펀드 쉘에 넣어 수십-수백 배 튀기 하고, 본인들만 지역지구 규제 장난질로 땅투기로 50배~100배 차익 낼 수 있는 게 아니다. 세상엔 머리 좋은 사람 많고 투자를 잘하는 사람도 많다. 그리고 주변에 부모님 집이 서울에 있으면 그 부모님 집은 대출이 0인 상태가 많다. 부모님 집 담보로 2~3억 대출받아 자식한테 현금 증여를 해서 집을 사라고 하는 것이다. 이게 불법인가? 국세청과 부동산원에서 집 살 때 현금 증여하고 이자만 잘 내면 그건 불법이 아니고 합법적인 차용증 절세라고 대대적으로 광고해주지 않았는가? 당연히 있는 집은 자식 집 빨리 사라고 차용증을 쓰고 현금을 펑펑 지원해 주는 것이다. 생각해 보자. 지금 대한민국에서 잉여 현금 생기면 할 게 뭐 있나? 1) 예금 적금 - 이자 1~2%다. 2) 주식투자? 뭐 많이 벌면 양도세 20% 떼어간다 하지 않았는가? 3) 부동산이다.

「바보아저씨의 부동산 이야기」 바른북스, 2022
"그리고 주변에 부모님 집이 서울에 있으면 그 부모님 집은 대출이 0인 상태가 많다. 부모님 집 담보로 2~3억 대출받아 자식에게 현금 증여를 해서 집을 사라고 하는 것이다."


86세대가 50대에 접어들때쯤 그들의 자녀 입시가 모두 끝났다. 자산축적으로도, 직장 내 위치에서도 가장 최상위에 속하는 50대가 되었을 때 오히려 사교육으로 대표되는 고정지출은 크게 떨어지는 것이다. 이들에게 잉여 현금이 넘치기 시작한다. 이제 막 20대가 된 자녀들은 이 잉여 현금으로 소비를 하고 -특히 해외여행 붐이 본격적으로 터지기 시작한 것이 이들이 20대가 된 2010년대부터였다-, 50대가 된 부모들은 이 잉여 자금으로 투자를 고민한다. 그런데 한국에서 투자라는 것은 결국 부동산 투자였다.


2017년 5월 9일, TV에서 "문재인 대통령 당선" 공고가 나던 그 순간, 아빠는 갑자기 차를 몰고 다니며 "임장"을 했다. 목표는 동작구 한강 인접 동네(노량진1동, 흑석동, 사당2,3동 등)의 아파트들이었다. 사람들은 큰 계기가 있지 않은 다음에야 기존에 살던 지역에서 먼 지역으로 이사를 잘 가지 않는다. 대부분 근처 지역에서 이동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노원구에서 남양주로, 일산에서 운정으로, 강동구에서 하남시로, 부평에서 청라로, 연수 동춘동에서 송도로 등등. 동작구와 관악구는 1981년 전까지 한몸이었고, 1981년 동작구 분구 이후에도 학군, 교통권역 등 여러 면에서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특히 내가 자라왔던 그 성현동아의 경우 사실상 주소만 관악구지 동작구 생활권에 걸쳐 있기도 했다. 그러니 같은 지역생활권이면서 한강변으로 프리미엄이 붙을 수 있고, 교통도 더 편리한 동작구를 자연스럽게 알아봤던 것 같다. 2009년에 강동구 이주를 고려할 때처럼 나의 진학 예정 학교와 연계해서 무리하게 생활권을 바꿀 이유도 없었고 말이다. 임장 과정에서 구축 아파트 단지들도 꽤 돌았다. 사실 구축이라곤 하지만 내가 지금까지 살아왔던 성현동아아파트와 연식이 비슷하거나 조금 더 되었더라도 큰 차이가 나지 않았다. 강남 살 때마냥 70~80년대식 구축이 아니었다. 참고로 현재 한강 벨트의 소위 구축 단지들은 리모델링 이야기가 솔솔 흘러나오고 있다. 리모델링이 되면 대박이고, 최악의 경우 되지 않거나 설령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몸테크'라고 불릴 만큼 견뎌야 되는 것도 아니었다. 익숙한 생활상 그대로 살면 되는 것이니까. 지금도 본가에 가면 2000년대에서 시간이 멈춘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 매도, 매수의 모든 과정은 속전속결로 진행되었다. 나중에 알고보니 이미 문재인 후보의 당선이 유력해지던 시점인 2017년 봄에 부모님은 성현동아를 매도했다. 당시 시세는 4억 5천만 정도였다(32평 기준). 그리고 두 달 뒤인 2017년 여름 동작구 중 한강에 인접한 동의 한 아파트 같은 평형을 매수한다. 당시 시세 약 5억 4천만원 선으로 대략 9천만원 정도 차이가 났다.


2025년 현재 성현동아 32평 약 8~9억 선, 이사 간 현재의 본가 32평은 약 12~13억 선에서 시세가 형성되고 있다. 여유 현금이 있었던 이들의 소위 '상급지' 대이동이 먼저 진행되었고, 이 현상을 목격한 외부인들이 너도나도 "이번 기회를 놓치면 앞으로 절대 서울에 진입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사후 진입을 노리는 현상이 일어나며, 대한민국 국민들이 모두가 다시 한번 피부로 느낀 '문재인 정권 부동산 폭등'이 그렇게 시작됐다.



강남을 넘어 한강벨트로

이 '문재인 정권 부동산 광풍기'가 지난 2020년대 선거부터는 더 이상 봉천신도시 지역에서 유의미한 표의 반란이 일어나지 않는다. 오히려 2025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20~30대 젊은 계층에서 큰 지지를 얻은 이준석 후보의 등장으로, 기존에 보수 정당 및 김성식 후보에 큰 힘을 실어준 성현동, 은천동, 청림동 봉천 신도시 지역들에서 오히려 민주당 이재명 후보가 다른 관악구 갑 지역보다 더 득표를 하는 상황이 일어났다.


반면 이 시기부터 메이저하게 등장한 개념이 있으니 바로 '한강벨트'다. 강북 지역에서는 마포, 용산, 성동, 광진구가, 강남 지역에서는 영등포, 동작, 강동구가 포함된다. 내가 10장에서 강남을 다루며 계속 문제를 제기한 지점이 있다. "언론들은 학령기 자녀가 있는 부모들의 강남 입성에 대해서는 다루지만, 그들의 입시가 종료된 후 어디로 떠나는가에 대한 언급은 미미하다"고. 1세대 강남 부모들이 분당이나 용인의 넓은 전원 집으로 향했다면, 2세대 강남 부모들은 '잠시 전세를 줬던' 서울 각지의 합동재개발단지로 우선 복귀를 한 후 문재인 폭등기 직전 원거주지 인근의 '상급지'로 향헸으며, 그 '원거주지 인근의 상급지'가 바로 한강벨트였다.


1세대 강남 부모들과 2세대 강남 부모들의 시대적 차이도 있었다. 1세대 강남 부모들이 자녀의 입시를 마치던 90년대 말 - 00년대 초까지는 '대가족'이 아직 대세인 시절이었다. 그 시절 보도들을 보면, 30평형대 아파트를 '중소형 아파트'라고 묘사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랬기에 1세대 강남 부모들이 자녀의 입시를 마친 후 이동하던 용인 지역에도 이러한 초대형 평수 아파트들이 꽤 있었다.

아파트 분양가격이 98년부터 자율화되면서 서울동시분양 아파트 분양가격이 크게 상승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공급면적(평형)에 포함되지 않았던 지하대피소 면적이 주택공급규칙 개정으로 공용면적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2000년 6차 동시분양부터는 통상 전용면적 25.7평짜리 아파트가 33∼38평형에서 30∼32평형으로 줄어들었다. 하반기에 평당 단가가 급격하게 상승한 이유 중에 하나인 셈.

그런데 2000년 하반기에 20평형대의 평당 분양가격이 낮아진 현상은, 평당 분양가격이 높은 강남, 서초 등 인기지역에서 20평형대 분양이 점점 사라지고 있는 반면, 서민들이 살고 있으며 평당 분양가격이 낮은 강북, 노원, 관악, 중랑, 금천 등에서 분양이 늘어나면서 평당 분양 가격이 낮아진 듯한 착시현상이다.

분양가격에서 대형아파트 분양가격이 크게 상승하고 있는 현상을 보이고 있는데, 이는 대형아파트의 경우 입지여건이 좋은 곳에서 분양되며 치열한 경쟁으로 내장재가 점점 고급화되면서 나타나는 현상으로 볼 수 있다.

경제가 양극화되면서 극소수 부유층을 겨냥한 아파트 분양가격은 계속 상승하는 반면 일반 서민층을 대상으로 하는 중·소형 아파트의 분양가격은 상대적으로 상승률이 낮은 현상을 보이고 있다. 그렇지만 아파트 분양가격이 자율화되었으므로 4∼5년 후에는 20평형대 아파트의 평당가격과 50평형대 아파트의 평당가격이 같은 위치에 지어질 때는 비슷해질 것으로 전망된다.

지난해 3차 동시분양 때 서초구 방배동에서 현대건설이 분양했던 53평형 아파트는 4억4,000만원이었던데 반해 올해 9차 동시분양에서 신동아건설이 방배동에 분양하는 현대산업 아파트는 56평형이 6억2,000만원으로 상승했다. 따라서 평당가격이 830만원에서 1,107만원으로 33% 이상 상승한 셈이다.

또한 99년 11차에 분양된 용산구 이촌동의 삼성아파트는 85평형이 13억5,000만원으로 평당 1,588만원이었던데 반해 올해 5차에 분양된 용산구 이촌동의 LG아파트 92평형은 24억5,000만원으로 평당가격이 2,663만원으로 67.6%가 상승했다.

반면 서민들이 많이 거주하는 중·소형아파트의 경우 작년 8차 때 동아건설이 관악구 봉천동에 분양했던 동아아파트는 32평형 분양가격이 1억9,500만원으로 평당 609만원인데 반해 올해 9차에 신도건설이 관악구 신림동에 분양한 32평형은 분양가가 1억8,500만원 평당 578 만원으로 오히려 평당가격이 5.3% 낮아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99년 4차 때 풍림건설이 노원구 공릉동에 분양했던 33평형이 1억8,500만원으로 평당가격은 560만원인데 반해 올해 9차에 경남기업이 노원구 중계동에 분양한 33평형이 1억6,300만원, 평당가격은 494만원으로 13.4%나 낮아졌다.

주거환경신문 2000.11.30. 「2000년 서울 동시분양 아파트 분양가격 분석」


그러나 강남 2세대 부모들이 자녀의 입시를 마치던 2000년대 후반~2010년대 중반은 시대가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이미 핵가족 구성이 대세로 굳어졌다. 더 이상 30평형대가 중소형 아파트라고 불리던 시대가 아니였고, '국민평형'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불리고 있었다. 이들은 넓은 집을 위해 서울 외곽으로 이동할 이유가 없었고, 다시 서울 각지로 돌아갔다. 이들이 기존에 보유하던 서울 각지의 아파트로 돌아가니, 서울 아파트의 매물은 극히 적어질 수밖에 없었고, 결국 신규로 진입하는 신혼부부 등은 경기, 인천 등 서울 외곽의 신도시로 빠질 수밖에 없었다. 2000년대 초반의 소위 '서민(?)이 거주하는 서울 33평 소형(?)아파트'는 더 이상 서민이 거주하는 곳도, 소형 아파트도 아니었다.


그렇게 2010년대 후반 이들의 주거 재구성이 완료된 후, 2020년대가 시작되면서부터 한강벨트의 보수성이 부각되며 정치권에서도 이 개념이 널리 사용되게 된다. 예를 들어 노량진1동의 경우 기존에는 전혀 보수성이 드러나지 않는 동네였으나, 2020년대 들어서 유의미한 보수 성향을 보여주고 있다. 노량진1동에서는 보수 정당이 대패했다고 여겨지는 2024년 제22대 국회의원 선거, 2025년 제21대 대통령 선거에서도 국민의힘이 승리했다.


그렇게 문재인 정권이 출범했다가 마무리되고, 정권도 2번 바뀌며 2025년이 되었다. 86세대는 이제 60대에 접어들있고, 그들의 자녀인 우리들은 30대가 되었다. 그리고 '강남'이라는 한정된 지역이 아닌, '한강벨트'로 소위 말하는 '서울 상급지' 구역이 확대되고 있는 것이 점차 가시화되기 시작한다.



일부 고소득 중산층 가족에서는 교육투자를 확대하여 자녀가 '좋은 대학'에 진학할 수 있도록 재정적인 집중 투자를 하고 부모의 높은 학력 자본이나 문화 자본을 활용하여 자녀의 진로에 대해 구체적인 조언을 한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 2023, 「성인이행기의 생애과정 위험과 가족의 대응 실태」

사실 현재의 본가에는 별로 추억이 없다. 우리 집이 봉천 신도시에서 한강 벨트권으로 이사를 왔던 시점은 내가 대학교 졸업이 임박했던 시점이었고, 나는 대학교 졸업 후 바로 본가에서 독립했다. 아버지께서는 학부와 대학원을 졸업한 직후 취직한 대기업에서 정년퇴직할 때까지 35년을 내리 근속했다. 한국사회의 90~00년대를 강타했던 굵직굵직한 IT 기반 사업들이 아버지 회사에서 고안되고 실행되었었다. 어머니 역시 6장에서 잠시 언급했던 것처럼, 학부 졸업 후 내가 태어나기 직전까지 학사장교로 군인의 삶을 사셨다. 그랬던 부모님이였기에, 부모님은 '안정' '정규직' '평생직장'만을 강조했다. 그러나 내가 원하던 진로는 '안정' '정규직' '평생직장'과는 거리가 아주 멀었다.

"여운이가 당신 의견에 따르지 않겠다고 하면, 그렇게 하도록 허락해주자. 그 대신 앞으로 우리에게 받는 경제적인 지원도 없어. 중요한 의사결정에서 자립하고 싶다면, 부모의 지원에서도 자립할 각오를 단단히 해야 한다고 봐. 특히 우리처럼 유복한 지원을 해주는 부모 아래에선. 나도 궁금해서 그래. 우리 딸이 누리던 것을 포기하고 살아갈 각오가 되어있을까? 지원을 뿌리칠 만큼 부모랑 뜻이 다른 걸까?"
"너는 부모님의 지원을 전부 거부하고 0에서부터.. 아니 0보다 마이너스로 시작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 같아?"
웹툰 '똑 닮은 딸' 168화 중에서


지금까지 풀어왔던 나의 성장기를 되돌아본다. 적어도 물리적으로는, 한 번의 부족함 없이 살아 왔다. 경제적 가난을 느껴 본적도 없다. 하지만 이런 '유복한 환경' 뒤에는 '부모의 의견을 따라야 한다'는 암묵적 강권이 존재한다. 나는 이를 견딜 수 없었기 때문에 독립했고, 동시에 모든 지원을 끊었었다.


그리고 이 시기의 강렬한 기억 때문에 문제의식이 생겼다. 독립하기 전에는 내 삶이 그저 평범한 삶인줄 알았는데, 나와 보니 나의 삶은 '특권'이었다. 주거비 지출을 최소화하기 위해, 그리고 본가와 최대한 떨어지고 싶어서 인천광역시 미추홀구까지 가서 집을 구했는데, 역으로 가는 버스가 항상 네다섯대씩 다니며 배차간격이 5분만 넘어가도 화가 나던 고향 서울에서의 삶에 비해 삶의 질 자체가 달랐다. 그리고 본가에서는 몰랐던 여러 일들을 겪었다. 보증금 마련(인천이라 조금 저렴했다.), 월세 및 관리비 내기, 곰팡이 퇴치 그리고 모든 생활비 지출과 저축까지 전부 내 월급으로 해결해야 했던 순간들. 그리고 처음 이사 갔을 때 분리수거 쓰레기를 버려야 하는데, 그동안 살던 아파트에는 당연히 있던 분리수거 분리장이 없어서 어떻게 버려야하는건지 아예 모르다가 알고보니 큰 비닐을 하나 구해서 거기에 다 쑤셔넣고 버리면 된다는걸 알았을 때의 그 당혹스러움 등. 독립 전에는 전혀 알지 못했던 생활들이었다.


제일 뼈저리게 느낀 건 '이런 삶이 크게 나아질 것 같지 않다'는 체념이었다. 인천 미추홀구의 다세대 주택에서 서울까지 통근하면서 나름대로 살아 나갈수는 있었지만, 더 넓은 집으로 이사간다거나 하물며 (그동안 내가 평생 살아왔던!) 아파트로, '온전한 내 힘으로' 이사를 간다는건 아예 꿈꾸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그래도 집에서 통제받는 것보단 나아서 어찌저찌 살아갔지만 말이다.


결국 4년을 그렇게 살면서 당시 다니던 회사에서 인정받아 승진도 해보고, 심지어 내가 정말 일하고 싶었던 분야로 이직까지 성공하는 걸 본 뒤에야 부모님은 다시 나에게 연락을 주었다. 그렇게 화해를 했고, 나는 신도시의 오피스텔로 거처를 옮겼다. 그렇게 4년만에 '익숙하던 아비투스'로 다시 돌아오고 나서야 나에게 기존에 주어졌던 환경이 실감이 되었다. 그 환경은 평범한 것이 아니었음을. 내 환경은 특권이었음을.


말로만 독립이 아닌, 정말 부모의 모든 지원을 다 끊고 살았던 그 4년의 시간이 없었다면 나는 평생 서울 요지 33평 아파트에서의 삶이 평범하고 당연한 것이라고 인식하면서 살았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도 수많은 '나와 비슷한 환경에서 자란 사람들'은 그렇게 믿으며 살고 있다. 본인들이 평범하고, 서민이라고 생각한다. 김민서 저 『나의 블랙 미니드레스』에서도 묘사되는 것처럼.

내가 우리 집안 경제 수준을 중산층과 서민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을 때 정부에서 친절하게도 종부세 개편안을 발표했다. 나는 이 개편안이 확정되면 감세 혜택을 보게 되는 가구가 대한민국에서 2퍼센트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그러나 우리 집은 몇 년 전 구입한 아파트 가격이 갑작스럽게 올라 고가의 아파트를 소유하게 된 것뿐, 대한민국 상위 2퍼센트라는 영롱한 계층에 어울리는 수준은 절대로 아니다. 그런 저런 사항들을 종합해본 결과, 나는 내가 대한민국의 전형적인 중산층 가정의 일원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나는 이 중산층 가정의 딸로 스물네 해를 살아왔다. 굳이 상류층을 넘보지만 않는다면 남부러울 것 없이 살아온 나는, 스물네 살의 나이까지 이루어놓은 것이 아무것도 없다. 돈으로 직결되는 부모님의 지원이 모자랐던 적은 이제껏 한 번도 없었다.

김민서, 『나의 블랙 미니드레스 1』



마치며: 首尾相關

'강남 좌파'의 아이콘처럼 되어버린 조국. 그는 지금 봉천 신도시에 산다. 이주 이유도 26년 전에 보던 풍경과 같다. 봉천 신도시의 첫 입주민들 상당수가 강남 재건축 1세대 시절 구축 아파트의 철거로 인한 임시 이주였던 것처럼, 그 역시 기존에 살던 방배동 삼익아파트가 철거하면서 임시 임차지로 이 곳을 택했다.

당시는 IMF 시기로 부동산 시장이 매우 침체되어 있었다. 서초구 방배동과 막판까지 저울질했다는 얘기를 들은 적 있지만, 자금 사정 때문에 결국 봉천동으로 결정한 듯하다. 너무 오래된 기억이라 명확하진 않다.

1장에서

다시 1장으로 돌아가 본다. 어린 시절 조각의 편린들이 떠오른다. 그 때 집안에서 조금만 도와 줬으면 어쩌구, 그 때 방배동에 갔어야했다 어쩌구, 그렇게 10년 이상을 후회하던 부모님은 결국 문재인 정권 출범과 동시에 봉천 신도시의 아파트를 청산하고 동작구 한강벨트로 넘어오고 나선 그런 말씀을 하지 않으신다. 노무현 폭등기 수혜는 받지 못했지만, 문재인 폭등기 수혜는 예측하고 빠르게 움직이기에 성공해서 그런 것일까.


이제 나와 동생의 입시도 진작에 마무리되고 둘 다 대학 졸업까지 한 마당에 강남에 있어봐야 세금 폭탄이나 맞을 것이고, 한강 벨트 아파트만 해도 이제 기득권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중적인 위치에 있다. 한강 벨트라는 개념이 슬슬 가시화되고 있긴 하지만, 아직 '강남'이라는 강력한 브랜드파워 뒤에 숨을 수 있는 위치다. 그들, 아니 우리들은 기득권이면서도 강남 뒤에 숨어 기득권이라는 공격을 피하고 있다.


고가아파트는 현금부자들이 많아서 거래되더라도 10~20억 서민아파트 거래는 줄겠죠.
3년전 대비 실거래 기준으로 흑석 OOO 아파트는 3년전대비 9억 상승하였으나 우리 아파트는 3.6억 상승했네요. 우리 아파트 보유하면서 상대적으로 가난해졌다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2025년 10월, 본가 대화방에 올라온 내용이다. 10~20억 아파트가 서민 아파트이며, 우리는 가난해졌다고 한다. 이게 맞나. 그리고 이 브런치북을 완결하고 발간하기 직전에 더불어민주당 복기왕 의원이 '15억 아파트는 서민아파트'라는 발언을 하며 도마 위에 올랐다. 사실 저 발언은 복기왕 개인의 생각이 아니라 이 가격대 아파트에 사는 대다수의 주민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음을 알고 있었기에 언젠가 정치인의 메시지로 나올 줄은 알았는데, 생각보다 더 빨리 나왔다.


우리 집이 그 10~20억 아파트가 되기까지의 타임라인을 나는 기억한다. 1999년에 처음 완공되고 분양될 즈음에 2억. 이 시절에 '매수'를 하고, 2005년 말에 3억 2천. 그 후 긴 횡보기를 거쳐 문재인 정권 출범 직전에 4억 5천. 그 시점에 9천만원을 추가로 부담하여 이곳으로 이주, 5억 4천에 들어와서 지금 저렇게 된 것이다. '내가 자라온 환경보다 내가 만들어갈 환경을 더 낫게 할 수 없다'는 것을 나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그 시절 중산층은 이제 더 이상 중산층이 아닌, 특권층이 되었다. 나는 '특권층이 된 중산층'의 반열에 오른 부모님을 나 혼자의 힘으로는 절대 따라잡을 수 없다. 이것은 내 개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90년대생 자녀들과 60년대생 부모들의 공통적인 이야기다.


이 원고를 마무리하는 시점에 조국 역시 다시 한 번 뉴스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제 자식처럼 부모 찬스를 가질 수 없었던 청년들에게 특히 죄송하다"란다. 혹자는 이 발언이 나오자 다시 조국을 조롱하지만, '부모님이 만들어준 환경의 수혜자'의 위치였던 내 입장에서 보면 현실을 관통하는 말로도 보인다. 몇십년을 가식이나 위선 떠는 것보다 차라리 이렇게 시원하게 이야기하는게 낫다.


나는 우리들이 차라리 인정했으면 좋겠다. 대한민국에 처음 등장한 '부모보다 가난한 자녀 세대'는 실존하고, 세습 사회가 이미 도래해 버렸다는 것을. 그 시작은 기득권인 '우리'가 '약자 코스프레' '서민 코스프레'를 멈추고 우리들의 위치를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fin.

keyword
이전 11화서울에서 자라 서울의 대학교에 다닌다 - 13~15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