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가 됐든 첫 경험은 짜릿하다. 긴 영화의 주연으로 캐스팅되어 현장을 누비고 작품을 이끌고, 동료배우, 스태프들과 함께 웃으면서 일하는 그 현장이 얼마나 즐거웠는지 모른다. 현장에 늦은 적, 아니 웬만하면 그 누구보다 먼저 가 있었다. 모르겠다, 왜 그렇게 즐거웠는지. 추운 데서 벌벌 떨며 동료들을 맞는 게 마냥 좋았다. ‘쟨 뭔데 맨날 저렇게 빨리 와.’ 하는 표정을 보는 게 재미있었다.
“왜 이렇게 빨리 왔어. 우리 정민이.”
“못 일어날까 봐 안 자고 나왔어요. 뿌우.”
“그럼 피곤해서 연기를 못하잖아. 우리 정민이.”
“연기는 원래 못하니까 이렇게라도 해야죠. 뿌우.”
식의 대화가 자주 오갔고, 역시 모르겠다. 그게 열정이고 애정이라고 생각했다. 시작이었고, 처음이었던 그 순간들을 지금 떠올려보면 마치 첫사랑 혹은 고향을 떠올릴 때의 그것과 비슷하다.
▷이런 파란만장한 인생을 표현하기 위해서 배우들은 그 역할의 세세한 부분까지 모두 분석을 한다. 그 인물이 갖고 있는 기본적인 특기는 물론이거니와 작은 버릇과 말투, 표정까지 하나하나 세세하게 분석을 하고 표현해낸다.
얼마나 세밀한가, 얼마나 정확한가, 얼마나 특별한가, 얼마나 새로운가의 싸움이라고도 볼 수 있을 거다. 얼마나 그 인물에게 다가가는가, 그리고 그 인물을 얼마나 내게 끌어오는가의 과정을 거치면서 어느새 자연스럽게 그 인물이 되어버리기도 한다.(고들 한다. 나도 그래보고 싶다.) 매 작품 그런 것들을 훌륭하게 표현하는 배우들이 있다.
아직도 집중 받는 걸 극히 혐오하고, 사람이 많은 공간에선 숨조차 제대로 못 쉬는 인간이 연기는 어떻게 하느냐고 묻는 사람이 많다.
그럼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그래서 연기를 합니다.”
화도 잘 못 내고, 좋으면 좋은 티도 안 내고, 눈치 보고, 쭈뼛쭈뼛 전형적인 찌질이의 모습이 싫어서, 연기를 한다고 얘기한다. 무대 위에선, 카메라 앞에선 내가 화내는 걸 사람들이 이해해주니까.
내가 웃는 걸 사람들이 건방지다 하지 않으니까. 그래서 연기를 한다고 얘기한다. 그래서 그 순간만큼은 딱 그 연기하는 순간만큼은 재미가 있다.
▷"영화는 네 것 내 것이 없다. 이건 내 거네, 저건 네 거네 하다가 정신 차리고 보면 영화는 온데간데없다. 하지만 가운데 두고 모두가 같이 보고 있으면 영화는 늘 그 자리에 있다."
어느 날, 촬영을 마치고 이준익 감독님이 해주신 말씀이다. 모두가 같이 가야 한다는 거였다. 배우가 이 영화는 내가 주인공이니까 내 거야, 혹은 감독이 이건 내가 만드는 거니까 내 영화야 하는 순간 영화는 없다는 것이다. 소유하려 들면 안 되고 나눠야 한다는 말씀이었다.
▷"영화에 인생을 걸지 말고 그 영화를 같이 찍는 사람에게 인생을 걸어라."
라는 감독님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 것도 같다. 사람이 만들고 사람이 보는 영화, 나도 그 사람을 위로하고 그 사람을 위해서 연기해야겠다는 생각이다. 결과는 아직 나오지 않았지만, 과정이 너무나도 값지고 행복한 현장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는 그것을 이야기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그토록 아름다운 결과물이 남아 있지 않아 잊힌 이름 ‘송몽규’. 그리고 그와 같이 잊힌 수많은 ‘송몽규들’. 불합리한 시대를 마주하고 싸운 그분들은, 그 자체로 하늘이었고 바람이었고 별이었고 시였다. 그들이 온전하게 담긴 윤동주 시인의 시. 우리는 분명 그 시를 읽어본 적이 있다. 최소한 학창 시절 국어 교과서에서라도 말이다.
이 영화는 그분의 시를 국어 교과서에서 역사 교과서로 조심스럽게 모셔온다. 시적 허용을 가르치면서 시적 허용을 허락하지 않는 객관식 문답보다, 이 시가 쓰인 그 시대 그분들의 뜻을 잘 서술하기 위해 노력했다. 7할의 사실과 3할의 상상력으로 만들어진 이 영화도 한 편의 시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적어도 이 글을 보시는 분들께 부탁드린다. 강아지 버리지 마시라.
인터넷에서 우연히 어떤 글을 봤다.
'어떻게 개를 사랑해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은 있지만, 어떻게 사람을 사랑해야 하는지 모르는 개는 없습니다.'
▷어려운 일이다. 누군가와 대화를 하면 나도 모르게 ‘다음을 듣고 맞는 것을 고르시오.’식의 듣기 평가를 하고 있다. 듣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맞는 것을 고르는 게 중요해졌다. 어쩌다 틀리면 꾸중을 듣고, 실수하면 돌이킬 수 없는 시대에서 맞는 것을 고르는 데 혈안이 되어버렸다. 그저 들어달라는 것이었는데 그러다가 오히려 틀린 답을 말하는 바람에 상대는 더 힘들고 죄스러운 감정을 부풀린다.
“나 어제 술 먹다가 부장이랑 맞짱 떴어.”
“그 부장이 개새끼네!”
처럼 말이다. 설사,
“그건 네가 참았어야지. 네가 맨날 지각하고 핸드폰 하니까 부장이 그러지.”
라고 맞는 답을 말해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그들은, 그리고 우리는 그저,
“….”의 침묵과
“그랬구나. 가끔은 그럴 수 있어.”의 동의가 필요한 순간인데 말이다.
▷어차피 메이저는 소수다. 우리 대부분은 다수고, 마이너다. 핑클 좋아하면 주류고 써클 좋아하면 비주류가 아니라는 얘기다. 거의 모두가 마이너리거다. 원래 그렇다. 프로야구도 잘하는 선수 몇 명만 1군 무대를 밟는 거다.
자 그렇다면
“당신의 꿈은 최고의 마이너리거인가요?”
개소리다. 마이너리거의 꿈은 걸출한 메이저리거지 최고의 마이너리거가 아니다. 수만 번의 배트질로 1군을 평정한 2군의 전설 장종훈은 아직도 많은 2군 선수들의 희망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말이다. 프로팀의 지명을 간신히 받아낸 2군 선수 아무개에게 감독이 와서 하는 말이,
“넌 정말 훌륭한 2군 선수구나. 계속 2군에 남아서 나와 함께 2군 리그를 제패하자!”
라면, 그 아무개는 ‘대박! 날 이렇게나 알아주다니! 2군에서 짱 먹어야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난 안될 놈. 안되는 놈은 안됨.’이라고 생각할 가능성이 더 크다는 거다. 그리고 그 팀에선 더 이상 장종훈은 볼 수 없을 가능성이 크다.
마이너리거가 ‘Minor ’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인 ‘별로 중요하지 않은’으로 해석돼선 안 된다. 비단 야구뿐만 아니라 당신들이 속한 모든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다. 그 사회의 다수인 마이너들이 허약하면 그 사회도 그만큼 허약해진다.
1군과 2군의 교집합이 넓을 때 그 팀은 강팀이 되는 거다. 1군의 부상 선수 대신 올라온 2군 선수의 실력이 좋으면 좋을수록 팀은 강해진다. 그리고 그 2군 선수는 뼈를 깎는 노력으로 1군에 붙어 있기 위해서 최선을 다할 테고, 에라 모르겠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주전 선수까지 돼보고 싶을 것이고, 그러다 보면 타이틀도 얻고 싶을 것이고, 그러다가 메이저리그도 가보고 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아무도 관심 없던 선수에게 기회를 주는 팀과 그 기회를 잡은 선수, 그렇게 팀과 선수는 각자의 목표를 달성하려 애쓴다. 그게 좋은 팀이고 좋은 사회다.
▷<어벤저스>. 이 영화의 빌런으로 등장하는 타노스는 우주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생명체를 모두 반으로 줄이고자 한다. ‘난 그런 거 모르겠고, 그냥 다 때려뿌시고 시펑.’하는 예전의 우주 괴수들과는 조금 결이 다른 악당이다. 그래서인지, 우주를 지키고자 하는 타노스와 지구를 지키고자 하는 어벤저스의 싸움이 단순히 선과 악의 싸움처럼 보이지만은 않는다.
이 영화는 현재 지구가 처해 있는 위태로움을 어떻게든 이야기하고 싶은 것처럼 느껴진다. 무언가를 잃어가면서까지 지켜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묻고, 너무 많은 것들을 잃을 수 있는 현재의 위기를 말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자신의 딸을 잃어가면서까지 타노스가 이루고 싶었던 것은 과연 악(惡)일까. 앞서 이야기한 것의 연장으로, 그가 지구의 인구를 반으로 줄였을 때, 비극적인 건 인간밖에 없을 것이란 사실이 비극적이다. 어쩌면 지구는 타노스의 숙원이 꼭 이루어지길 바라고 있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