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은하는 현재까지 관측된 수천억 개의 은하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즉, 우주에서 지구는 아무것도 아니다. 이보다 인간에게 큰 성찰을 주는 사실이 또 있을까? 이것만이 아니다. 진화론은 인간이 특별한 생명체가 아니라고 말해준다.
현재의 모든 생명체는 똑같이 35억 년을 진화해서 성공적으로 생존한 동료들이다. 어찌 보면 생명 존중의 윤리는 진화생물학에서 기원하는지도 모른다. 또한, 생물학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
▷아주 소수의 사람을 제외하면 우리는 놀기 위해 일한다. 일이 목적이 아니라 잉여가 목적이었다는 말이다. 잉여의 중요성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기계로 절약된 시간을 우리의 행복으로 전환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결국 석탄에너지는 태양에너지가 식물의 형태로 땅에 묻혀 있는 것이다. 땅속에 있는 ‘죽은’ 유기 탄소의 양은 지구상 생물체 전체보다 2만 6,000배가 많다.
▷우주는 138억 년 전 빅뱅이라는 폭발로 시작되었다. 빅뱅의 순간 이 거대한 우주는 점 하나의 크기에 불과했다. 우주가 팽창하며 온도가 낮아졌다. 온도가 낮아지면 물이 얼음이 되듯이, 뜨거운 우주 수프(?)에서도 양성자와 전자 같은 단단한 물질이 생겨났다.
온도가 더 내려가면 양성자 한 개와 전자 한 개가 결합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수소이다. 생각할 수 있는 가장 간단한 구조의 원자이다. 우주를 이루는 물질의 75%가 수소이며, 이들은 대부분 빅뱅의 부산물이다. 즉, 태양의 에너지원은 빅뱅이다. 결국 스마트폰은 시공간을 뛰어넘어 빅뱅과 연결된다.
이처럼 스마트폰의 에너지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전자기학, 고생물학, 생화학, 핵물리, 우주론이 필요하다. 과학을 공부하고도 세상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면, 그것은 전체를 보려는 노력을 안 했기 때문이다. 통합과학은 과학의 지식을 전체적으로 보려는 노력이다.
▷과학 논문도 관련 연구의 역사로 시작된다. 이렇게 보면 모든 학문의 근본은 역사인지도 모른다.
역사의 사전적 의미는 ‘인간 사회의 변천과 흥망’이다. 여기서 ‘인간 사회’의 대상은 대개 문자 기록이 남아 있는 기간이다. 이 기간을 역사시대, 그 이전을 선사시대라고 부르는 것만 보아도 역사의 주된 관심이 지난 5,000년 인간의 발자취에 국한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지구의 역사에서 인간이 차지하는 위치는 매우 보잘 것 없다. 지구의 역사를 1년이라고 한다면 호모 사피엔스가 출현한 것은 12월 31일 23시 36분이다. 선사시대는 20만 년이고 역사시대는 5,000여 년에 불과한데, 인간의 역사가 역사시대에 국한되어도 괜찮을까? 아니 역사가 호모 사피엔스의 역사에 국한되어도 좋은 걸까?
▷나 같은 물리학자에게 역사를 이런 식으로 접근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럽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에게는 이런 프레임이 익숙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런 시도는 아주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런 접근법에 반대하는 시각도 있다. 최근 과학이 공격적으로 모든 학문 분야를 정복하려 한다는 비판이 그것이다. 많은 과학자들의 생각은 이렇다. “철학적 질문에 물리학이 답을 하고, 인간의 행동은 진화론이 설명하고, 의식의 문제는 뇌과학이 답할 거다. 생명이란 한갓 생화학 기계에 불과하다.”
이제 우주의 본질에 대한 질문은 철학이 아니라 물리학의 질문이다. 자유의지의 존재에 대해 물리학자와 뇌신경학자가 토론을 벌인다.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동물생태학자와 진화학자들이 논쟁을 한다. 이런 과학자들의 지나친(?) 자신감이 인문학자들에게는 과욕으로 보일 수도 있다. 빅 히스토리 역시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역사를 과학에게 내어주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런데 왜 우주에는 다른 문명의 증거가 하나도 없는가? 여기에는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첫째, 생명이나 문명이 있더라도 완전 고립되어 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해당된다. 인간이 보낸 탐사선 가운데 가장 멀리 간 보이저 1호는 2012년 태양계를 벗어날 수 있었다. 35년을 비행한 후였다. 이대로 10만 년(!)을 계속 더 진행해야 알파 센타우리에 도착한다. 그러면 인간은 비로소 우주에 존재하는 1,000,000,000,000,000,000,000,000개 별 가운데 가장 가까이 있는 하나를 탐사하는 것이다. 전파를 보낼 수도 있지만, 거리가 워낙 멀다 보니 엄청난 세기로 보내지 않으면 우주 잡음에 묻혀버린다. 우주는 너무 광활하여 인간의 과학기술 정도로는 고립을 벗어날 방법이 없다.
둘째, 문명이 있었으나 사라져버렸다. 지구 생명의 역사는 35억 년에 달하지만 현생인류의 역사는 20만 년에 불과하다. 문자가 발명되고 나서 불과 5,000년 만에 우리는 자멸하기 충분한 과학기술을 가지게 되었다. 문명은 순식간에 일어나서 스스로 멸망하는 속성을 가진 걸까?
멸망이 어떤 모습으로 올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마겟돈의 전쟁일 수도 있고, 실험실에서 만든 치명적인 바이러스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살 수 없게 지구환경이 변하는 순간 인간 종이 남김없이 멸종될 것은 확실하다.
▷결국 기계지능은 모든 면에서 인간보다 우월하며 도덕적이기까지 하다. 수많은 종교가 추구하던 궁극의 경지란 대개 자아와 욕심을 버려서 도달하는 상태이다. 기계지능은 버려야할 자아나 욕심이 아예 없다. 기계지능은 인간이 도달하고자 한 열반의 경지에 이미 도달한 것이 아닐까? 이들을 인간처럼 만들기 위해 인간의 욕심을 넣어주는 것이 발전일까?
사람들이 걱정하는 터미네이터의 미래는 기계가 야기하는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 야기하는 문제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인간 대신 이들이 지구를 지배할 때 더 나은 세상이 될 거라 상상하는 것이 지나친 비약은 아닐지도 모른다.
▷윤동주의 시를 배워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발해에 대해 아는 것이 우리 생활에 어떤 이익을 주나? 이런 것은 교양이라는 답이 나올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나는 미적분도 교양이라고 말할 것이다. 미적분이 쓸모없다고 하는 것은 그것을 오로지 입시용으로 배웠기 때문이다.
자동차 운전도 입시용으로 배우면 시동조차 못 걸지 모른다. 미적분이 고등학교 교육과정에 꼭 필요하다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미적분 자체의 가치에 대해 말하고자 함이다. 미분이란 무엇이고 왜 알아야 할까?
▷미분의 사용은 뉴턴의 운동법칙에 국한되지 않는다. 어떤 ‘것’이 인과율의 적용을 받고 시간에 따라 변화한다면 미분을 이용하여 표현하는 것이 가능하다. 경제지표, 뇌 전위, 핸드폰 신호, 우주선의 궤적 등 법칙에 따르는 듯이 보이는 모든 것이 다 미분의 표현 대상이 된다.
미분으로 표현된 규칙에 따라 실제 한 계단씩 이동하여 미래의 값을 구하는 과정을 적분이라 한다. 수학적으로 적분은 미분의 역逆과정이다. 어느 학문이든 수학을 도입하기로 했다면 그것은 대개 미적분을 사용하겠다는 뜻이다. 결국 미분이란 인간이 우주를 기술하는 틀이다.
우리나라 중고등학교 문제집에 나오는 수학은 수학이 아니다.
수학은 문제집 바깥 우리 주위 어디에나 있다.
▷물리적으로 시간여행은 서로 다른 속도로 시간이 진행된 관측자들이 만나서 서로 시간을 비교하는 행위일 뿐이다. 두 사람이 처음에 시계를 맞추고 출발했을 때, 나중에 다시 만나서 보면 시계가 가리키는 시각이 서로 다르다.
시계가 느리게 간 사람은 시계가 빠르게 간 사람의 입장에서 과거에 해당하고 그 반대는 미래에 해당한다. 하지만 이것은 비교를 해서 나온 결과일 뿐 두 사람 모두 자신의 시간이 올바른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상대성이론은 시간이 관측자에 따라 다른 속도로 진행한다고 주장하는데, 속도만 다를 뿐 진행 방향은 정해져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시간은 증가하기만 한다. 즉 관측자가 시간을 되짚어 돌아가는 것은 절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백 투 더 퓨처 2>에서처럼 마티가 30년 후의 미래로 가는 것은 가능하다. 마티가 탄 타임머신 내부의 시간은 1초 흘렀지만 타임머신 밖의 세상은 30년이 지난 것에 불과하다.
여기까지는 물리적으로 괜찮다. 물론 이런 엄청난 시간 차이를 얻기 위해서는 타임머신이 어마어마한 속도로 움직여야 한다. 지구의 모든 자원을 다 끌어와도 이런 속도를 얻기는 불가능할 거다. 아무튼 원리적으로는 가능하다.
▷지구가 움직이는 것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지구가 태양으로 낙하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구에서는 태양의 존재를 느낄 수 없다. 태양에 관한 한 우리는 무중력 상태에 있는 것이다. 사실 지구는 태양 주위를 시속 1만 7,000킬로미터라는 어마어마한 속도로 움직이고 있다.
소리보다 빠르지만 우리는 느끼지 못한다. 갈릴레오를 비웃던 사람들이 알아야 할 사실이다. 이걸 이해하지 못하면 천동설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만 알아두자. 태양도 정지한 것이 아니다. 태양은 우리 은하의 중심으로 낙하하고 있다. 달은 지구로, 지구는 태양으로, 태양은 은하중심으로 낙하 중이고, 그 효과들은 모두 중력과 상쇄되어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지구상에 발을 딛고 서 있는 우리 인간은 낙하하지 않기 때문에 중력을 느낀다.
<그래비티>가 주는 평범하지만 심오한 교훈이다. 중력이 버겁다고 느껴지면 뛰어내리면 된다. 인생도 마찬가지이다. 몸을 허공에 내맡기면 자유로워진다.
▷양자역학의 난해함에 대해서는 모든 물리학 천재들이 서로 뒤질세라 한마디씩 남겼다.
양자역학을 연구하면서 어지럽지 않은 사람은 그걸 제대로 이해 못 한 거다.
_닐스 보어
양자역학을 완벽히 이해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_리처드 파인먼
양자역학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의 차이는 양자역학을 모르는 사람과 원숭이의 차이보다 더 크다. 양자역학을 모르는 사람은 금붕어와 전혀 다를 바가 없다.
_머리 겔만
이들이 누군지 모를 분들도 계실 거다. 세 사람 모두 이론물리학으로 노벨물리학상을 받았을 뿐이다. 금붕어 이야기에 기분이 상하셨다면 바로 잊어버리시길. 겔만Murray Gell-Mann은 말을 막 하는 것으로 유명하니까.
▷양자역학의 정통 해석인 코펜하겐 해석에 따르면 내가 관측하여 얻은 결과를 제외한 다른 가능성은 모두 사라져버린다. 내가 짜장면을 먹기로 했다면 짬뽕을 먹는 우주는 사라져버린 것이다.
이것은 형이상학적 문제일 수도 있다. 짬뽕을 먹는 우주가 존재하든 존재하지 않든, 짜장면을 먹는 우주에서는 다른 우주의 존재에 대해 어떤 단서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아무튼 관측이 다른 가능성을 모두 없애는 것이라 볼 수도 있다.
<쿼런틴>에 나오는 버블은 바로 인간의 관측에 의한 우주의 대량 학살을 막기 위해 설치된 것이다. 지금까지 열심히 설명을 따라왔어도 여전히 이게 무슨 말인지 감조차 안 올 수도 있다. 너무 실망하지 말고 파인먼의 말을 되새겨보시라. (“양자역학을 완벽히 이해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인류가 지구에 나타나기 전, 망원경을 가지고 우주를 관측하는 생명체는 없었다. 우주는 수많은 중첩 상태를 이루며 진행했을 것이다. 우주의 어떤 생명체는 이런 중첩 상태를 넘나들며 살고 있었다.
▷양자역학은 원자나 분자와 같이 너무 작아서 보이지도 않는 것을 대상으로 한다. 머리카락 굵기 정도의 길이면 원자를 일렬로 수십만 개나 늘어세울 수 있다. 양자세계에서는 하나의 원자가 두 개의 장소에 동시에 있는 것이 가능하다.
실제로 원자가 한 장소에 있는데, 우리가 어디 있는지 몰라서가 아니라 원리적으로 두 장소 모두에 존재한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면 당연하다고 답해주겠다.
▷원자가 있는 두 장소를 동전의 앞면, 뒷면으로 생각해도 무방하다. 동전을 던지고 확인해보니 앞면이었다. 그렇다면 확인하기 전에도 앞면인 것이 당연한 거 아닌가? 양자역학은 확인하기 전에 동전이 앞면인지, 뒷면인지는커녕 동전의 존재 자체에 대해서도 이야기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황당한 이야기로 들리겠지만, 양자역학이 없다면 우리 문명은 19세기로 돌아가야 한다.
▷거칠게 말해서 과학은 물질적이고 객관적인 증거를 바탕으로 결론을 내리는 방법론이다. 증거가 예측과 다르면 틀렸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틀린 것을, 또한 틀릴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과학의 진정한 힘이라 생각한다. 따라서 종교가 신의 존재를 과학으로 증명하려 한다면 큰 오류를 범할 수 있다. 증거에 따라 신이 존재하지 않을 가능성도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나의 짧은 지식으로는 신의 존재가 논리적 증명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신이 전능한 존재라면 과학의 방법에 묶여 있을 까닭이 없다. 신학이 과학의 방법으로 신을 증명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즉 신학과 과학이 서로 다른 사고방식임을 인정한다면, 둘은 양립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양자역학은 어렵기로 소문이 나 있다. 아무리 읽어봐도 무슨 말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아인슈타인은 양자역학의 혁명이 시작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지만, 끝까지 양자역학을 거부한다. 그 자신이 양자역학의 핵심 개념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양자역학을 만든 사람들조차 그 해석에 대해서는 의견들이 엇갈렸으며 서로 상대방이 잘못 이해했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나중에는 이해한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논쟁을 벌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