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 기사는 ‘슈퍼 을’입니다.
서울시 시내버스 운송 운임은 성인 1,200원(카드가. 현금 1,300원), 청소년 720원(카드가. 현금 1,000원), 어린이 450원(카드 현금 동일)입니다. 경기도는 서울 요금보다 약 200원 비쌉니다.
대한민국의 대중교통 요금은 전 세계적으로 저렴하기로 정평이 나 있습니다. 해외여행을 해본 분이라면 쉽게 이해가 갈 것입니다. 국내 대도시는 대중교통 체계가 워낙 잘 돼 있어서 자가용을 굳이 이용하지 않아도 어디든 대중교통을 이용해 쉽게 목적지까지 도착할 수 있는 시스템입니다.
가격이 저렴해서일까요?
일부 승객들은 간혹 저렴한 대중교통 요금에 비례하여 저렴한(?) 행동들을 보이곤 합니다. 소위 ‘1,200원의 갑질’인 것인데, 뉴스에도 종종 나오곤 합니다.
실제 필자의 경험으로 보면 요금이 2배 이상인 경기도 광역버스(성인 카드 2,800원/ 현금 2,900원) 이용자들과는 사뭇 다른 반응을 보일 때가 많습니다. 특히 경기도보다 서울 버스 요금이 저렴하다 보니 더욱 그러한 일들이 벌어집니다. 저렴하므로 버스 기사도 저렴해 보이는 걸까요? 혹은 서울시 세금으로 버스 회사 지원을 해주기 때문에 소위 ‘내 돈으로 너희 월급 주는 거잖아’라고 생각해서 그러는 것일까요?
버스를 택시로 생각하는 분들이 종종 있습니다. 버스 정류장에 정차한 후 출발한 버스는 정류장 이외에 정차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손을 들어 택시 잡듯이 버스를 잡으려 합니다.
버스 기사가 문을 열어줄 것을 확신하고 버스 앞으로 내달려 옵니다. 버스 좌측에 자동차들이 즐비한 가운데 뛰어오는 승객은 위험천만한 상황과 마주하게 됩니다. 그렇게 뛰어오고도 문을 손으로 내리칩니다. 왜 문을 안 열어주냐는 식입니다.
그런 승객을 태우면 문제가 발생하기도 합니다. 일부 승객은 “고맙습니다”라고 인사를 하기도 하지만 인사 없이 들어가는 것은 양반이죠. “추운데 왜 안 태워주려고 하느냐?”라며 따집니다.
이쯤 되면 궁금해집니다.
손님들은 과연 ‘갑’의 위치에 있는 것일까요?
버스 기사는 ‘을’일까요?
필자의 개인적 의견은 승객은 ‘갑’이 맞아 보입니다. 우선 요금을 내고 승차했기에 운송 서비스를 제공하는 처지인 ‘을’은 승객을 목적지까지 이동시킬 의무가 생깁니다. ‘갑’의 위치는 맞지만 ‘갑질’은 예외입니다.
사전적 의미의 ‘갑질’은 갑을 관계에서 ‘갑’에 어떤 행동을 뜻하는 접미사인 ‘질’을 붙여 만든 말로, 권력의 우위에 있는 갑이 권리관계에서 약자인 을에게 하는 부당 행위를 통칭하는 개념입니다. 앞 장에서 언급한 교통질서를 무시하는 승객들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인데요. 보통 청년들에게 일어나는 사건은 아닙니다.
버스는 운송 서비스를 제공합니다. 버스 요금을 낸 승객을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운송해 주는 것이 버스 기사의 의무이자 숙명이죠. 그래서 버스 기사는 승객들과 어떠한 이야기도 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운송’에 그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운송’ 자체가 서비스이며, 1,200원 가치의 본분을 다했다고 봅니다. 회사에서도 승객들과 불필요한 대화를 자제하라는 권고를 수시로 합니다.
이에 반해 승객은 버스 기사를 자신의 ‘전용 기사’쯤으로 여겨 함부로 대하기도 합니다. ‘갑질’의 시작인 셈이죠.
몇 해 전 필자에게 있었던 일입니다.
야간에 술이 얼큰하게 취한 승객 두 분이 승차합니다. 뒷문과 가까운 좌석에 앉은 후 밤과 고구마를 까기 시작합니다. 필자는 여러 차례 주의와 경고를 보냅니다. 역시 아랑곳하지 않죠. 대체로 이 정도 쓰레기를 버리는 승객은 그 누구의 경고에도 반응하지 않습니다. 밤과 고구마 껍질은 그대로 바닥에 버립니다. 그 좌석은 차고지까지 공석이 되어 아무도 앉지 않습니다. 쓰레기는 누가 치울까요?
또 한번은 서울시 버스 체계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는 승객과 실랑이를 한 적이 있습니다. 필자에게 할 이야기는 아니라고 했죠. 하지만 그 승객은 역시 아랑곳하지 않고 1시간 가까이 큰 소리로 떠들더군요. 여객자동차 운수사업법 제26조 운수종사자의 준수 사항 중 ‘정당한 사유로 승차 거부를 할 수 있다’라는 조항과 운행 방해가 정당한 사유가 될 것이라는 생각이 겹치면서 그에게 하차 요구를 했습니다.
내릴 때까지 계속 욕설을 하더군요. 필자는 무슨 죄로 그 욕설을 감당해야 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세상에 불만 많은 넋두리쯤으로 여길 수도 있으나 10~20분이 아닌 장시간 그런 억양을 듣게 되면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에 이릅니다.
필자는 버스 기사로 일하며 폭행을 당해본 적은 없지만, 뉴스 미디어에 보도된 사실을 미뤄볼 때 이는 심심찮게 일어나는 사건이기도 합니다. 버스 운전기사 폭행이 너무 자주 발생하여 생긴 형사 처분 조항이 있습니다.
3년 이상 유기 징역. 대부분 버스에 부착하여 홍보하고 있습니다. 버스 기사는 만약 이러한 폭행 사건이 발생한다고 해도 ‘정당방위’라 할 수 있는 쌍방 폭행을 절대 가해서는 안 됩니다. 그냥 맞아야 합니다. 맞고 입원하는 게 최선이죠. 대체로 왜 맞는지도 모르고 맞게 되죠.
또 한번은 하차 벨을 누르지 않고 있다가 정류장을 지나치자 버럭 화를 내며 운전석으로 다가와 항의하는 승객도 있었습니다. 한참을 항의해 버스 출발이 지연되는 건 다반사죠. 그 승객의 요지는 이렇습니다.
승객이 뒷문에 서 있으면 내리는 것으로 간주하고 하차 벨을 누르지 않아도 뒷문을 열어야 한다는 것. 일행이 두 명이나 더 있었는데, 아무도 누르지 않았던 자신의 잘못은 뒷전이고 무조건 내려주지 않는 것에 대한 화풀이를 기사에게 하는 듯했습니다.
버스 요금 1,200원으로 구매할 수 있는 게 뭐 있을까요?
새우깡 한 봉지 정도?
솔직히 1,200원으로 무료 환승도 제공하고 정시에 승객의 이동권을 충족시켜주면 대단히 만족할 만한 서비스라고 생각합니다. GDP 대비 이 정도 버스 요금을 책정한 나라는 거의 없습니다. 재정 적자에 시달리면서도 서울시에서 상당 금액을 지원하는 이유도 정시성 확보와 대중교통을 서민들의 발이라 여기기 때문이지요.
짜장면 한 그릇도 5,000원인 세상에서 1,200원으로 버스를 탈 수 있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물론 시민의 혈세가 투입되어 부족분을 보존하는 것은 잘 알지만, 그것 때문에 갑질이 시작된다면 정당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1,200원을 내고 12,000원어치의 요구를 하면 안 된다고 봅니다.
저렴한 버스 요금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승객 스스로 버스 예절을 지켜야 하며, 하차 벨도 미리 누르고, 버스 내 안전 사항도 스스로 지켜야 한다.’라는 의미가 담겨 있지 않을까요? 버스 이용은 셀프서비스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이상을 기사에게 요구하고, 그 이상의 책임을 기사에게만 묻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되묻고 싶습니다. 버스가 제공하는 서비스는 ‘운송’에 국한해야 합니다. 이러한 인식 전환이 필요합니다. 운송 자체가 서비스입니다. 버스 요금이 선진국 수준인 3,000~4,000원까지 오르고, 버스 기사 연봉이 대폭 인상되면 아마 승객들의 요구 사항을 모두 들어줄지도 모르겠습니다.
인도 마하트마 간디는 ‘7가지 악덕’을 제창했습니다. ‘철학 없는 정치, 도덕 없는 경제, 노동 없는 부, 인격 없는 교육, 인간성 없는 과학, 윤리 없는 쾌락, 헌신 없는 종교’가 그것입니다. 이 중에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중요한 것은 ‘도덕, 윤리’가 아닐까 합니다.
대한민국 자본주의 오류의 시작은 언젠가부터 장안에 떠돌기 시작한 ‘손님은 왕이다.’라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1,200원으로도 왕이 될 수 있기 때문이죠. 왕에게 도덕이나 윤리는 중요치 않습니다. 흑인 노예제 해방을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돈만 있으면 누구나 왕 대접을 받을 수 있다는 잘못된 생각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매일 이용하는 공공재 성격의 저렴한 대중교통을 이용하면서 융숭한 대접을 받길 원한다면, 스스로 준법정신에 입각한 행동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무질서와 무개념, 무례함으로 일관된 행동 앞에 올바른 서비스를 받을 수는 없습니다. 생각해보면 버스에서 무슨 ‘극진한 대접’을 받길 원하는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승객과 버스 기사의 관계는 갑을 관계가 맞습니다. 버스 회사를 대표하여 승객을 운송하면서 최접점에서 그들을 맞이하는 기사가 모든 것을 감수해야 하므로 을의 위치가 바르다고 봅니다.
그런데요. 버스 기사는 버스 회사와의 근로 계약서에도 ‘을’로 표기됩니다. 진정한 ‘슈퍼 을’로 거듭나는 순간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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