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 비상등이 고장났다. 한 번 켜지더니 꺼지질 않는다. 정비를 몇 번 받았는데도 계속 이런다. 어찌하나. 차 세우고 정비를 부를까, 그냥 갈까. 그냥 가자.
비상등을 켜고 운행을 하니 먼 발치에서 이 버스를 바라보는 운전자들의 심기는 어떨지 궁금하다. "진짜 비상인가, 고장인가." 비상등을 켜고 다니니 운행에, 아니 행동이 조심스러워지는 듯 하다.
처음에는 난처함을 넘어 부끄럽기까지 했다. 정류장에 들어서는데도 비상등이라니. 좌측 차로로 넘어가야 하는데 비상등이라니. 그런데 시간이 흐르자 도로 위 상황만큼이나 내 의식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계속 감사하는 마음으로 가게 되네. 마치 웃고 싶지 않은데도 웃고 있는 삐에로나 조커처럼. 속으로 '감사하지 않아.'라고 외치면서도 겉으로는 감사하는 표정. 그런 버스를 운행하자니 생각의 범주가 '인생'에게까지 미쳤다.
웃고 싶지 않은데 웃어야 하는 사회생활, 그 속에서 여럿 번아웃으로 몸서리치는 이들을 봐왔고, 나도 그랬었다. '감사합니다. 미안합니다.'만 외쳐도 살인을 면할 수 있다는 지론을 믿는 본인으로서 계속 깜박이는 비상등을 보고 있노라니 헛웃음이 나온다.
속으로 열불나도 겉으로는 웃자. 그래, 웃자. 뭐. 크크.
생각보다 괜찮았다. 3시간 이상 운행하면서 감사할 일이, 미안할 일이 생각보다 많았다. 3시간 동안 방향지시등이 양쪽에서 깜박이는 상황이 처음인지라 당황했던 것도 사실이지만, 30분... 1시간... 2시간이 지나면서 오히려 편안해졌다. 감사란 이런 것인가. 계속 감사하면서 살면 편안해 지는 것?
날카로운 칼을 마음 속에 지니고 살았었던 그 옛날 내 모습이 오버랩됐다. 깜박이등 하나에 인생 숙제를 끝낸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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