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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울시교육청 Jan 17. 2020

교과서를 따라가는 여행: 흥선대원군의 사가, 운현궁


흥선대원군은 모두들 잘 알고 있을 만큼 유명한 인물인데요.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 1820~1898)은 아들 고종의 즉위로 조선 역사상 유일하게 왕의 자리에 오른 적이 없지만, 살아 있는 왕의 아버지로 대원군에 봉해지고, 최고의 권력을 휘두르는 섭정을 맡게 된 역사적 인물이랍니다. 



이번 시간에는 흥선대원군에 대해 알아보고, 흥선대원군의 사가인 '운현궁'에 대해서도 살펴보는 시간을 가져볼 텐데요, 흥선대원군이 정치를 펼쳤던 조선시대의 모습은 어땠을지 함께 살펴봅시다.


조선의 정치가 '흥선대원군'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흥선대원군이 정치를 주도했던 19세기 후반 조선은 여러 면에서 많은 변화를 겪었지만, 급변하는 세계정세를 따라잡지는 못했는데요, 



서세동점이라는 새로운 세계사적 흐름과 세도정치 *로 피폐한 국가의 재건이라는 어려운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해야 했던 흥선대원군은 오늘날 한편에서는 개혁 정치가로, 다른 한편에서는 보수적인 국수주의자로, 엇갈린 평가를 받고 있답니다. 


*서세동점 : 서양이 동양을 지배한다는 뜻으로, 밀려드는 외세와 열강을 이르는 말.  

*세도정치 : 국왕의 위임을 받아 정권을 잡은 특정인과 그 추종세력에 의해 이루어지는 조선의 정치형태.     

    

흥선대원군은 혈통으로 보면 인조의 셋째 아들 인평대군의 8세손으로 왕권과 그다지 가까운 왕족은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안동 김씨들로부터 끊임없는 견제를 받아야만 했죠. 이에 흥선대원군은 19세기 초부터 시작된 세도정치의 고리를 끊기 위해 안동 김씨 주류들을 대거 정계에서 몰아냈습니다. 



그 와중에 국정 공백을 막기 위해서 김병학 등 일부 안동 김씨와는 손을 잡았고 당파를 초월한 인재 등용과 부패 관리 척결에 힘썼는데요, 그는 조선 후기 오랫동안 계속된 붕당 간 갈등과 국가 재정 파탄의 일부 원인이 전국에 널리 퍼진 서원에 있다고 보고 47개의 중요한 서원을 제외한 모든 서원을 철폐했습니다. 



또한, 법전 간행을 통해 19세기 변화된 사회에 적합한 법률 제도를 확립하였고 세도정치 동안 비대해진 신권을 제한하고 왕권 강화를 위한 여러 가지 정책들을 펼쳤습니다. 비변사 *를 폐지하고 양반에게도 세금을 징수하였으며 사치를 근절하기 위해 의복제도를 고치고 사창 제도의 실시로 지방관리의 부정을 막고 민생을 안정시켰죠. 



*사창 : 조선시대 각 지방 군현의 촌락에 설치된 곡물 대여 기관

*비변사 : 조선시대 군국기무를 관장한 문무합의기구.



흥선대원군의 개혁 정치는 양반사회에 큰 파문을 일으켰는데요, 양반들은 크게 반발했지만, 흥선대원군의 개혁으로 국가에 대한 의무와 부담을 고스란히 양인에게 전가하고 상류층의 권리만 누렸던 양반층에게 그 부담이 일부 돌아감으로써 국고는 풍족해졌고 양인의 부담은 줄어들게 되었습니다.


흥선대왕군은 왕권 강화를 상징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무리하게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당백전 *과 원납전 *으로 경제구조를 흐려 백성의 삶을 다시금 피폐하게 만들었으며, 서구의 새로운 사상이 왕권 중심의 유교사상을 교란시킬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천주교도들을 박해하고 쇄국정치를 펴 국제관계를 악화시키고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일 기회를 놓쳐버렸습니다. 



그가 집권하던 시기 막아낸 두 번의 양요(병인양요, 신미양요)는 집권 초기 행한 개혁 정치로 인해 강해진 국방력의 결과이기도 하였지만, 한편으로는 서구의 세력과 평화롭게 수교할 기회를 놓쳐버린 사건이기도 했답니다.



*당백전 : 1866년(고종 3) 11월에 주조되어 6개월여 동안 유통되었던 화폐

*원납전 : 조선 후기 흥선대원군이 경복궁 중수를 위하여 강제로 거둔 기부금



더 나아가 흥선대원군은 병인, 신미양요의 승리 후 전국의 주요 장소에 척화비를 세워 쇄국정치의 뜻을 결의했습니다. 비석에 새겨진 글은 이러합니다.

서양의 오랑캐가 침략해 오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해 할 수 밖에 없고, 
화해를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 
병인년에 만들고 신미년에 세운다.    



흥선대원군의 사저 '운현궁'

운현궁은 조선조 제26대 임금인 고종의 잠저(潛邸)이자 흥선대원군의 사저인데요, 한국 근대사의 유적 중에서 대원군의 정치활동의 근거지로서 유서 깊은 곳이랍니다. 흥선대원군이 왕실 집권을 실현시킨 산실이자 집권 이후 대원군의 위치에서 왕도정치로의 개혁 의지를 단행한 곳이기도 합니다. 



운현궁은 대원군이 권력에서 하야한 이후에도 계속해서 정치적 영향력을 내외에 행사한 곳으로, 고종이 즉위하기 전까지 살았던 곳이기 때문에 역사적 상징성이 더욱 큰 장소입니다. 흥선군의 사저가 운현궁으로 불리게 된 것은 1863년 12월 9일 흥선군을 흥선대원군으로, 부인 민씨를 부대부인으로 작호를 주는 교지가 내려진 때부터였습니다. 


*잠저:왕세자와 같이 정상법통이 아닌 다른 방법이나 사정으로 임금으로 추대된 사람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집, 또는 그 살던 기간


고종이 12살까지 살았던 운현궁은 철종 때 옛 관상감 터였던 운현궁에 왕기가 있다는 내용의 민요가 항간에 유행하였고, 고종이 등극한 후 대원군이 운현궁 터를 다시 확장하였습니다. 



운현(雲峴)이란 당시 서운관(書雲觀)이 있는 그 앞의 고개 이름이었고, 서운관은 세조 때 관상감(觀象監)으로 개칭되었으나 별호로 그대로 통용되었는데요, 서운관의 명칭인 운관(雲觀)과 운관 앞의 고개를 가리키는 운현(雲峴)이라는 명칭이 그대로 사용되었던 것이죠.


이로당 <출처 : 운현궁 홈페이지>

고종의 잠저는 당시 대왕대비 교지를 받들어 영의정 김좌근, 도승지 민치상, 기사관 박해철·김병익 등 일행이 명복(明福-고종의 이름)에게 익종의 대통을 계승토록 하기 위하여 고종을 맞이하러 최상급의 가마행렬을 갖추어 관현(觀峴)의 흥선군 사저에 갔을 때 흥선군의 위엄 있는 자세와 그의 둘째 아들인 명복의 천진스러웠던 모습에 대한 사실적 묘사에서 운현궁이 고종의 잠저였음을 알 수 있는데요, 



한일강제병합 후 일제는 1912년 토지조사를 실시하면서 대한 제국의 황실 재산을 몰수하여 국유화하고 이왕직 장관을 시켜서 운현궁을 관리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운현궁을 유지·관리하는 일은 소유권에 관계없이 이로당의 안주인들이 계속 맡았다고 합니다. 



운현궁의 소유권이 다시 대원군의 후손에게 넘겨지게 된 것은 1948년 미군정청의 공문에 의해서였는데요, 이후 그 소유권을 중심으로 대한민국 정부와 대원군 후손 사이에 법적 공방이 있었으나 그 해 9월 21일 결국 대원군의 5대손 이청(李淸, 1936- ) 씨에게 운현궁 소유권이 확정되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1991년 운현궁을 유지, 관리하는데 여러 가지 어려움이 생기면서 양도 의사를 이청 씨가 밝힘에 따라 서울시에서 매입하게 되었고, 1993년 12월부터 보수공사를 시작해 현재의 모습으로 정비되었습니다.


운현궁

하절기 개장시간(4월 초~10월 말)

9:00 ~ 19:00

(입장마감 18:30)


동절기 개장시간(11월 초~3월 말)

9:00 ~ 18:00

(입장마감 17:30) 


※ 매주 월요일 휴관

(단, 월요일이 공휴일인 경우 정상 개장.)


입장료 : 무료        


세도 정치에 맞서 왕권을 강화한 흥선대원군에 대해 알아보고, 이어서 흥선대원군의 사저인 '운현궁'에 대해서도 살펴보는 시간을 가져보았는데요, 어떠셨나요? 직접 가서 보면 느낌이 색다르니 이번 주말, 가족과 함께 '운현궁'을 방문해보세요~    


 

[참고 자료]

네이버 지식백과

운현궁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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