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실험체다.

모두가 나를 아는 듯 하다.

by seoul

나는 실험체다.

내 삶은 누군가의 관찰일지처럼 흘러간다. 집에서는 나라는 개인이었고, 밖에서는 규칙에 맞춘 배우였으며, 온라인에서는 편집된 프로필이었다. 이 세 개의 얼굴이 시간표처럼 교차하면서 나라는 존재는 점점 얇아졌다. 사생활은 이미 멸종했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를 해부하고 기록한다 — 증거를 남기지 않으면, 누군가의 재해석으로 내 삶이 사라질 것 같아서.

혼자 조용히 죽고 싶다는 말이 왜 이렇게 많이 떠오르는가. 조용히 죽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은 ‘누군가에게 신경 쓰이지 않는 삶’인데, 현실은 그 반대다. 누군가의 관심은 칼날처럼 양날이다. 적당한 관심은 위안이지만, 과도한 관심은 사유 공간을 침해한다. 나는 그 경계를 잃었다. 가족은 내 정보의 1차 소비자였고, 회사는 내 감정의 2차 시장이었다. SNS는 공적인 삶과 사적인 삶을 섞어 팔아먹는 중개인일 뿐이었다.

초능력이라면 좋겠다. 남의 생각을 읽는 초능력, 혹은 내가 읽히지 않는 초능력. 완벽한 타인과 마주하는 법을 배우고 싶다. 하지만 현실은 완벽한 타인 대신 ‘완벽히 관찰하는 타인’을 배치한다. 그들은 내 연기를 보고 박수치고, 내가 탈락하면 사라진다. 나는 관객의 기호에 맞춰 감정을 조종하는 방법을 익혔고, 그 대가로 내 감정의 상표권을 넘겨주었다. 그렇게 나는 공적인 삶의 표준모델이 되고, 개인적 삶은 보관소에 잠긴 채 썩어간다.

공적인 나 — 규격화된 표정, 시간 맞춘 말투, 무난한 취향.
개인적 나 — 밤에만 꺼내는 불편한 욕망, 실패, 부끄러움.
비밀의 나 — 절대 공개하지 않을 기억, 범죄도시 같은 수치, 사랑의 쓰레기통.

이 세 갈래가 내 일상에서 서로 경쟁한다. 공적인 나는 성실하다는 칭찬을 받고 연봉협상에서 위치를 점유한다. 개인적 나는 가끔 위로를 받고 잠시 치유된다. 비밀의 나는 어떤 보상도 받지 못한다; 오히려 드러나면 모든 게 무너진다. 그래서 나는 비밀을 더 쌓는다. 비밀은 저장하면 저장할수록 무거워진다. 무거운 비밀은 때때로 폭발한다.

사람들은 묻는다. “왜 그렇게 냉소적이야?” 냉소는 선택이 아니다. 냉소는 방어다. 누군가의 선의라는 포장지 안에 숨어 있는 권력의 칼날을 더는 믿고 싶지 않아서, 나는 웃음을 밑줄 치며 견제한다. 선의라는 이름의 균열을 볼 때마다 나는 기록을 펼친다. 그렇게 나는 타인의 ‘선함’을 재분류한다 — 진짜인지, 이익인지, 혹은 단순한 습관인지. 분류는 분석이며, 분석은 살아남기 위한 기술이다.

사회적 나와 인간관계는 늘 갈등을 빚는다. 관계는 교환이다, 라고 말하면 사람들은 불편해한다. 하지만 그것이 현실이다. 정보, 시간, 감정, 호의 — 모두 교환 가능한 화폐다. 어떤 이는 의도적으로 감정을 빌려주고 나중에 이자를 챙긴다. 어떤 이는 거래라고 생각도 못 하고 주기만 하다가 바닥이 나버린다. 나는 이제 거래의 장부를 들여다보고, 내 지출 내역을 계산한다. 누구에게 얼마를 쓸 것인가. 그 계산은 냉혹하다. 감정 소비의 ROI가 낮으면, 관계는 정리 대상이 된다.

욕구는 모순적이다. 나는 연결을 원하면서도 노출을 두려워한다. 누군가와 깊게 만나고 싶으면서도, 깊은 만남이 주는 책임과 소유욕을 혐오한다. 나는 사랑을 원하지만, 사랑이 요구하는 자기희생은 싫다. 그래서 나는 반쪽짜리 방식을 선택한다: 친밀함의 모조품을 거래하고, 정서적 신용카드 한도를 관리한다. 이 방식은 효율적이다. 하지만 효율성은 언제나 잔혹하다; 효율적 인간은 소모품을 닮는다.

가끔은 내가 피해자인가, 가해자인가 헷갈린다. 누군가를 배제했을 때 나는 자유를 얻었지만, 동시에 그 타인의 하루를 망가뜨렸다. 권력은 거대한 제도만이 아니라, 사소한 일상의 선택 속에서도 작동한다. 문 앞에서 먼저 나가는 행동, 회식 자리에서 웃음을 강요하는 침묵, 누군가의 제안을 가볍게 무시하는 손짓 — 이 모든 것이 미세한 권력이다. 나는 오늘 그 권력의 희생자였고, 내일은 내가 휘두르는 쪽이 될 것이다. 이 악순환의 중심에서 나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어떤 권력을 행사하는가?’

비밀의 삶은 편집할 수 없는 원고다. 공적인 삶은 수정 가능한 기사다. 개인적 삶은 때로는 그 사이를 오간다. 나는 세 원고를 동시에 쓰고 있다. 밤에는 비밀 원고가 소리 내어 웃지만, 아침이면 공적 기사로 바뀐다. 이 전환을 매끄럽게 하는 기술이 바로 사회적 생존술이다. 그러나 기술이 발달할수록 인간성은 오히려 뒤로 밀린다. 최첨단은 우리의 미련을 연장시키고, 우리는 그 미련을 최신 버전으로 업데이트한다.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건 익명성이 아니다. 익명성은 때로 자유다. 내가 두려워하는 건, 타인이 나를 완전히 이해했다고 착각하는 순간이다. ‘나를 안다’는 말은 내 모든 잔혹사를 줄줄이 늘어놓을 권리를 상대에게 준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통제의 포석이 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때때로 고의로 이해시키지 않는다. 오해는 방어가 되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이 책을 쓰는 이유는 단순하다. 사라지지 않기 위해서다. 누군가의 관찰이 아닌, 내가 남기는 관찰자가 되고 싶다. 기록은 반격의 도구이며, 자아를 복원하는 절차다. 나는 실험체였지만, 이제는 실험자이기도 하다. 나는 내 삶을 해부해 보고서를 만든다 — 차갑고 정확한 문장으로. 그것이 나의 복수이자, 나의 생존법이다.

살아있는 동안 나는 계속 기록할 것이다.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다. 나 자신에게 증명하기 위해서다. 내가 이토록 복잡한 감정과 욕망을 가진 존재임을,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일 아침 눈을 뜨고 출근하며 밥을 하고 웃는 비열한 일상의 연속이 바로 삶임을. 누군가에게는 무심한 하루일지라도, 기록은 그 하루를 증거로 만든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스스로를 해부한다. 누군가의 관찰이 아닌, 나의 증언을 남기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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