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가 씌운 가면
출근길 엘리베이터에 들어서는 순간, 가면은 자동으로 착용된다. 웃고 있지도 않은데 웃는 척을 하고, 마음속에선 피가 거꾸로 솟는데 겉으론 ‘네, 알겠습니다’라는 대사를 읊는다. 사람들은 이 익숙한 위장을 “사회성”이라 부른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이것은 예의가 아니라 감금이다. 우리는 타인의 시선과 권력 앞에서 스스로를 감금한다.
나는 실험체다. 사회라는 연구실에서, 누군가의 관찰일지처럼 하루를 살아간다. 관찰자들은 평가를 하고, 등급을 매기며, 내 가면이 흘러내리는 순간을 즐긴다. 감정을 드러내지 못하게 하는 이 사회. 대표라는 이름의 권위자는 ‘냉철한 사람인 척’하며 평가자의 가면을 쓴다. 그들에게 직원은 피험자일 뿐이다. 문제는, 나 역시 어느 순간 그 실험에 순응해 왔다는 사실이다. 모두가 회사라는 가면무도회장에 입장한다.
들어올 때부터 얼굴에 무언가를 붙인다. 미소라는 가면, 순응이라는 가면, 혹은 “예, 알겠습니다”라는 가면. 이곳에서 진짜 얼굴을 내보이는 순간은 곧 ‘사회적 사형’을 의미한다.
세상은 언제부터인가 가면무도회장이 되어버렸다.
사람들은 각자의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 누군가는 권위자의 가면, 누군가는 희생자의 가면, 또 누군가는 충직한 꼭두각시의 가면. 그러나 그 어떤 가면도 본래의 얼굴을 드러내진 않는다. 오히려 본모습은 금지되어 있다. 가면을 벗는 순간, 사회라는 무도회장의 초대권은 사라진다. 그리고 나는, 그 초대장을 부여받지도 못한 채 한쪽 구석에서 실험체처럼 지켜보는 입장이 되어버렸다.
어제의 사건은 이 사회가 어떤 가면무도회인지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우편 발송 이슈. 단 30분 만에 끝날 수 있는 일이, ‘라벨지’라는 명목상의 규율 때문에 한 시간 반짜리 비극극으로 재탄생했다. 효율성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내가 지적할 권력이 있다”는 걸 보여주는, 심판자의 연극이었다. 이 회사라는 무도회에서, 규칙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권력을 가진 자가 임의로 규칙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당연’이라 우긴다.
주소를 출력해 봉투에 붙이는 일. 보통은 아무 말 없이 넘어가거나, 작은 수고쯤으로 처리되는 행위다. 나는 A4에 출력해 잘라 붙였다. 그런데 난데없이 지적이 들어왔다. "넘버링은 무슨 의미예요? 혼란스러울 것 같아요. 라벨지에 다시 부탁 드러요." 이미 다 끝낸 일을 두고 다시 하라니, 이건 지적을 위한 지적이었다.
지적이라는 이름의 공개 처형. 사회학자 어빙 고프먼은 『자아연출의 사회학』에서, 개인은 무대 위 배우처럼 자신을 연출한다고 했다. 그러나 문제는, 이 무대가 공정하지 않다는 데 있다. 무대 중앙에 선 사람은 항상 권력자이며, 그들은 종종 공개 지적이라는 ‘조명’을 켠다.
단순한 우편 발송 업무에서조차, 질문은 지시가 되었고, 지시는 명령으로 격상됐다. 그 자리에는 다른 직원들이 있었다. 지적은 개인의 실수나 효율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공개적인 낙인이었다. 한 개인을 불러내어, 무도회의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이 사람은 틀렸습니다”라고 외치는 것과 다름없다.
나는 얼굴이 붉어졌다. 창피함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그러나 그 순간, 사회는 그 붉어진 얼굴을 “직장인으로서 부족한 감정 조절력”으로 재단한다. 당당한 감정은 죄가 되고, 모욕을 견뎌내는 것이 ‘역량’으로 포장된다. 이 얼마나 비루한 사회인가.
우편 라벨지에 글자 크기와 자간, 행간, 장평까지 교정받았고, 우편번호와 주소, 수신자 그리고 전화번호 순서까지 교정받았다. 효율은 중요치 않았다. 오직 "내가 위에 있다"는 권위의 표식으로 기능하는 가면극이었다. 사람들은 흔히 규칙을 말한다.
시작 전에 존재하지 않던 가이드와 정보가 완료 후에 규정됐다.
“라벨지를 쓰세요."라고 했다. 그래서 라벨지를 만들어 썼다. 아무것도 준비되어있지 않은 상태에서 완료해야 됐다. 어느 위치에 있는 라벨지를 사용해야 하는지 알려 주지도 않았고, 어떤 프로그램을 사용해야 되는지도 알려주지 않았다. 완료 시점에 지적된 라벨지 이슈로 테스트 페이지 한 장 뽑는 데만 한 시간이 소요됐다. 이런 구조적 무능은 덮어둔 채, 지시는 오직 나에게만 집중됐다. 다른 사람들은 수기로 주소를 적어도 괜찮았다. 그러나 내가 하면 안 된다. 규칙은 동일하지 않았다. 그녀의 말은 그랬다. "당연히 수기로 써도 되죠? 그런데 라벨지를 쓰라고 했잖아요?" 권위자는 규칙을 자기 입맛대로 휘두른다. 가면무도회의 법칙은 ‘형평’이 아니라 ‘선택적 적용’이다. 해낼수록, 그들에게는 더 많은 지적의 이유가 생겨났다. 가이드는 없었고 지적의 기준은 묻지 않은 탓으로 돌아왔다. "말을 해야죠?" 몇 번이고 확인 됐던 업무 그리고, 구성원이 아닌 임시직으로 대하는 태도, 남의 집 살림을 마음대로 휘두를 수 없는 환경. 무한 도돌이표 찍어 내리기에 할 말을 잃었다.
결국 이 무도회에서 중요한 건 ‘일의 완성도’가 아니라 ‘가면극의 연출’이었다. 누군가는 지적을 하고, 누군가는 고개를 끄덕이며 복종한다. 지적하는 자는 권위자의 가면을 쓰고, 복종하는 자는 충직한 부하의 가면을 쓴다. 나는 그 무도회장의 가장자리에서 이 연극을 구경하며 깨달았다. 이건 효율적이지 않아도 된다. 이건 생산적이지 않아도 된다. 중요한 건 권위자가 권위자의 역할을 다했다는 연출, 희생자가 희생자의 대사를 읊었다는 사실이다.
사노 요코는 『죽는 게 뭐라고』에서 썼다. “세상은 원래 엉망인데, 굳이 내가 고쳐야 할 이유가 있을까.” 나도 마찬가지다. 어제 한 시간 반 동안 프로그램을 깔고, 라벨지를 붙이고, 세 번이나 컨펌을 받으면서 느낀 건 단 하나였다.
“아, 나는 이들의 놀이판에서 장기말이구나.”
웃으면서도 속으로는 “지들끼리 노는 무도회에 왜 내가 초대받았을까”라는 자조가 맴돌았다. 무도회에서 나는 탈춤 추는 광대였고, 무대 위 심판자는 마치 모두를 대표하는 권력자처럼 내 목을 치는 시늉을 했다.
하지만 정작 내 일은 제대로 끝냈다. 라벨지가 있든 없든, 결국 발송은 됐다. 무능한 건 누구였을까? 지적을 가장 많이 한 사람? 아니면 그 지적에 끝까지 “네”라고 답했던 나일까?
그 연출의 정점은 어제 퇴근길에 찾아왔다. 비극의 또 다른 장면은 퇴근길. 비가 내렸다. 사회적 강자는 우산이 없었다. 사람들은 각자의 우산을 펴고 집으로 향했다. 그는 그 자리에 덩그러니 서 있었다. 그동안 사장딸의 꼭두각시가 되어 충실히 가면을 쓰고 살아온 대가였다. 권위자에게 아첨하고, 약한 자에게 지적하며, 무도회장의 분위기를 떠받쳐온 그였다. 그러나 무도회가 끝나는 순간, 아무도 그를 챙기지 않았다.
그때, 나를 적대하던 직원이 등장해 그녀에게 우산을 씌워주었다. 잠깐의 호의, 잠깐의 꼭두각시놀이다. 그러나 골목에서 길은 갈라졌다. 사회적 강자는 버스정류장까지 함께 가지 못했다. 그 순간 장면은 인과응보로 완성됐다. 끝내 혼자가 될 수밖에 없는 사람. 나는 차를 몰며 그 뒷모습을 보았다. 비에 젖은 등, 어깨, 그리고 우산 없이 걸어가는 초라한 뒷모습. 그것은 마치 무도회의 가면이 벗겨진 민낯 같았다. 가면을 쓰고 있을 때는 권력자 곁에 기생하며 으스대던 사회적 강자가, 결국 비가 내리자 우산 하나 없이 쓸쓸한 광대로 전락한 것이다. 한때 권력의 동아줄을 꽉 잡았다고 착각한 그녀는, 결국 빗속에서 홀로 걸어가는 초라한 인간으로 드러났다. 그 장면은 이 사회의 잔혹한 리포트였다.
순간 나는 묘한 해방감을 느꼈다. 내가 오늘 하루 동안 들이받아야 했던 불합리, 가면무도회의 연극적 지적질들이 그 장면 하나로 응징당한 듯했다. 사회가 늘 그렇듯, 꼭두각시는 끝내 버려진다. 권위자의 손놀림에 춤을 추던 인형은, 더 이상 쓸모가 없어지면 무대에서 퇴장한다. 그 순간, 우산 없이 빗속을 걷는 인간으로 환원되었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제4의 관찰자, 즉 나를 늘 적대해 온 그녀의 역할이다. 이날 그녀는 마치 기회라도 얻은 듯, 사회적 강자에게 잠깐의 동정심을 베풀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인간적 호의가 아니었다. 그녀는 늘 계산적이었고, 마치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 굴었다.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녀는 곤경에 처한 이를 돕는 모습을 연출함으로써, 도덕적 우월성을 점수처럼 쌓아 올렸다. 다시 말해, 그녀의 행동은 한 개인을 돕기 위한 즉흥적 선의가 아니라, 타인의 시선 속에서 자기를 포지셔닝하기 위한 전략적 행위였다.
어빙 고프먼(Erving Goffman)이 『자아 연출의 사회학』에서 지적했듯, 사회적 상호작용은 언제나 무대 위 공연과 같다. 사람은 무대 앞(front stage)에서는 관객을 의식하며 연기하고, 무대 뒤(back stage)에서는 가면을 벗는다. 이 적대자는 무대 앞에서 ‘착한 역할’을 맡아 잠시 춤을 춘 것뿐이었다. 그리고 곧 무대에서 퇴장했다.
결국, 그 순간의 ‘호의’조차도 무도회 사회에서는 권력의 연장선일 뿐이다. 그것은 동료를 구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이미지를 관리하기 위한 퍼포먼스였다. 나는 그것을 호의로 보지 않았다. 그것은 쇼였다. 호의처럼 보이는 가면조차 결국은 권력의 한 방식이며, 무도회의 배우들은 저마다의 가면을 쓰고 자기 몫의 역할을 소화할 뿐이다.
사람들은 착각한다. “아, 그녀는 착하구나.” 하지만 사실 그 역시 하나의 역할극일 뿐이다. 진짜 성품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무도회에서 중요한 건 가면의 종류지, 얼굴의 진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면무도회 사회의 문제는 바로 여기 있다. 사람들은 가면에 취해 진짜 얼굴을 잊는다. 권위자는 자신이 권위를 가졌다고 믿고, 꼭두각시는 자신의 충성이 보장된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그 믿음은 언제든 깨진다. 가면이 벗겨지는 순간, 사람들은 서로를 챙기지 않는다. 인간관계란 결국 이해관계일뿐이라는 사실이, 비 오는 퇴근길에 너무도 정확히 드러났다.
나는 묻고 싶다. 왜 우리는 이 가면무도회에 집착하는가? 왜 굳이 힘든 쪽을 선택하는가? 모두를 위한 효율적 선택, 긍정적이고 선한 방향은 왜 이 사회에서 번번이 배제되는가? 그 고민 끝에 떠오른 단어는 권력이다. 권력은 자비로운 끈이 아니라, 팽팽하게 조여 오는 동아줄이다. 개인이 가진 힘은 언제든 타인을 옥죄는 도구가 된다. 사회적 강자가 보여준 삶은 그 단적인 예였다. 그는 권력의 동아줄을 잡았다고 믿었지만, 사실은 그 줄에 목을 매달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런 가면무도회는 유지되는가?
그 이유는 간단하다. 공개적 모욕이 당연시되기 때문이다. 권력자는 회의 자리에서 직원을 지적하고, 직원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인다. 그 부끄러움이야말로 인간적인 진실인데, 사회는 그것을 역량 부족으로 낙인찍는다. 마르크스적 시각에서 보자면, 이는 노동자의 감정을 통제하는 또 하나의 도구다. 감정을 숨기는 훈련을 통해 조직은 더 쉽게 지배한다. 부끄러움을 드러내면 “미성숙”이라 평가받고, 억지로 웃음을 지어내야만 “프로페셔널”이라 인정받는다. 결국 감정마저 자본에 착취당하는 셈이다.
하지만 이제는 사회적 폭력에 역심판이 필요하다. 무능한 심판자가 휘두르는 지적은 권력이 아니라 폭력이다. 그 폭력은 반드시 기록되고, 분석되고, 다시 돌려져야 한다. 심판자는 더 이상 ‘심판자’가 아니라, 비효율과 모순을 드러내는 죄인이어야 한다.
나는 희생자로 남을 생각이 없다. 이 무도회의 희생자 역할을 순순히 맡아 대사를 읊조릴 생각도 없다. 나에게 주어진 대본은 그들이 쓴 것이지만, 그들이 원하는 답을 들려주지 않을 것이다.
이 가면무도회 사회에서 우리는 결국 두 갈래 길에 서게 된다. 가면을 쓰고 무대 위에서 살아남을 것인가, 아니면 가면을 벗고 초대장을 반납할 것인가.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하다. 가면을 쓴 자의 말로는 결코 화려하지 않다. 사회적 강자가 사회 밖에서 그걸 증명했다. 빗속에서, 우산 하나 없이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이 바로 이 사회의 본모습이다.
그리고 나는, 차 안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며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꼴좋다. 이게 바로 인과응보지.”
내가 줄 수 있는 호의는 사회적 거리에서의 침묵뿐이다.
그 침묵은 패배가 아니라, 나만의 언어이자 마지막 방패다.
나는 이제 말 대신 거리를 남기고, 거리 속에서 나를 지킨다.
나는 아직 이 무도회에 남아 있다.
그러나 동시에 알고 있다. 이 무도회는 나를 갉아먹는다.
우편 발송 사건처럼 사소한 일을 비극으로 만드는 사회,
우산 하나 없이 비를 맞으며 처량하게 걸어가는 인간의 뒷모습,
그리고 착한 역할을 연기하다 사라지는 사람들. 이 모든 것이 회사라는 무도회의 진짜 풍경이다.
그리고 나는 매일 생각한다.
“가면무도회의 무대에서 춤을 추는 게, 정말 사회성 인가? 사회인의 역량일까?
아니면 가면을 찢고 나가는 것이야말로 진짜 용기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