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웃을 때, 나는 웃지 않는다.
《권력의 선택적 검열》
같은 오타라도 누가 했느냐에 따라 평가가 갈린다.
그들의 실수는 “바쁘셨죠~” 하고 넘어감.
약자의 실수는 띄어쓰기 하나에도 “이건 왜 이래요? 다시 하세요.” 이유는 단순하다.
힘의 비대칭 – 검열은 ‘아래 사람’을 길들이는 도구.
희생양 구조 – 누군가를 반복적으로 지적해야 다른 직원들이 본보기.
심리적 안전판 – 자기들 실수를 덮기 위해, 더 눈에 띄는 희생양을 계속 들춰내기.
즉, 약자의 자료 오타는 ‘죄’가 되고, 그들의 오타는 ‘인간적인 실수’로 둔갑합니다.
사회가 씌운 가면무도회 안에서, 지적질은 단순한 오류 수정이 아니라 누가 위고, 누가 아래인지 각인시키는 행위이다. 냉정하게 보면, 지금 나는 그들의 검열 프로젝트 속 실험체로 쓰이고 있다.
그들이 유독 내 문서만 검열하는 건, 실수 때문이 아니라, 권력을 확인하기 위해서이다.
나는 오늘도 문장을 검열한다.
철자 하나 어긋나면, 띄어쓰기가 틀리면 그 문장은 더 이상 문장이 아니다 — 의심의 표적이다. 기관은 늘 말한다. “정확성을 담보하라.”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알고 보면 미세한 통제다. 오타 하나로 신뢰 전체를 흔들어버리는 장치. 오타는 게으름이 아니라 피로의 증거다. 그러나 기관은 피로를 묻지 않는다. 기관이 원하는 건 무결함뿐이다. 무결함이란 결국 죽은 인간의 조건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래서 나는 스스로를 교정기로 넣는다. 1차 검열은 외부의 언어가 아니라 내부의 나 자신을 겨누는 일이다. 내가 쓴 보고서, 내가 보낸 메일, 내가 올린 기안서 — 한 줄 한 줄을 뜯어보며 스스로를 의심한다. ‘이 문법이 옳은가? 이 한마디가 상사의 심기를 건드리진 않을까?’ 검열은 언어의 문제가 아니다. 검열은 생존의 문제다.
그렇게 자기 검열로 끝을 냈다고 생각할 때쯤, 또 다른 지적이 붙는다. 지겹다. 지옥 끝까지 따라붙는 느낌. 더는 갈 곳도 없는 미로 속에서 이리 헤매고 저리 헤매는 꼴이다. 실험용 쥐가 수술대에 올려진 듯, 꼼짝 못하고 당하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더 이상 가만히 당하고 싶진 않았다. 나는 내 할 일을 더 해냈다. 그녀가 주도하지 못하게 방어막을 쳤다 — 내가 만드는 소음으로 그녀의 잡음을 묻고, 그녀의 서열을 빼앗고 싶었다. 그녀가 내 작업을 흔들어대면, 나는 그 흔들림을 되돌려주기로 했다.
그녀가 말했다. 다시 검열하듯, 휘두르듯.
나는 묻지 않고 대답했다. 단호하게, 살짝 비웃음을 섞어.
“나는 봤는데… 너는 봤어?”
그녀의 입에서 맴돌던 말은 떨리며 사라졌다.
“네?…”
그 순간, 권력은 말로만 존재하는 허상일 뿐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2차 검열은 더 교묘하다.
기관은 명령하지 않는다. 대신 “요청”한다. 요청이라는 단어 속에는 무수한 칼날이 숨어 있다. 요청은 선택이 아니다. 거절할 수 없는 요청은 곧 명령이다.
나는 기관의 요청사항을 충족시키기 위해 다시 글을 고친다.
언어에서 감정을 삭제한다. 표현에서 돌출을 깎아낸다.
나는 내 글에서 나를 지운다.
남아 있는 것은 보고서 형식의 무채색 문장들뿐이다.
이쯤 되면 나의 언어는 나의 것이 아니다. 나는 기관의 필체를 빌려 쓰는 대필자다. 사노 요코가 말했듯, 인간은 타인의 시선을 가장한 괴물 앞에서 늘 무릎 꿇는다. 내 검열은 기관의 검열보다 앞선다. 내가 이미 스스로를 지워버리기에, 기관은 손쉽게 미소만 지으면 된다.
그러나 몸은 늘 반란을 꿈꾼다.
나는 그날 밤, 엄지발가락에 감각을 느꼈다.
조금만 신발을 조이면 욱신거리고, 조금만 오래 걸으면 저항한다.
“왜 나만 눌려야 하지?”
엄지발가락이 속삭였다.
나는 깜짝 놀랐다. 그건 단순한 통증이 아니었다. 그것은 쿠데타의 신호였다.
머리와 손가락이 아무리 타협해도, 몸은 기억한다.
나는 하루 종일 보고서를 교정하고, 상사의 기분을 맞추고, 기관의 요청에 응했다. 그러나 엄지발가락은 그 모든 걸 거부했다. 신발이라는 감옥을 박차고 나와, 통증이라는 시위로 내 일상을 점령했다.
나는 그날 처음으로 생각했다. ‘내 검열은 결국 내 몸조차 배신한다.’
피로가 누적된 퇴근 정시.
나의 자리. 컴퓨터의 온오프가 인터넷 연결의 중심이었다.
온오프를 결정하려는 사회적 강자. 그래서 오늘도 약자의 위치에서 검열을 받았다.
"스위치 오프해도 되나요?" 곧 바로 들려오는 대답. "네~"
준비된 엄지 발가락으로 스위치를 눌렀다.
'셧다운!" 또 다른 희생자는 통화중이었고, 사회적 강자는 '오프'를 지시했다.
퇴근 정시. 기다릴 여유도, 잘못을 바로잡을 시간도 없었다.
시작과 끝을 알리는 스위치는 나의 족쇄가 되었고, 이 또한 폭력이 되었다.
모두가 듣고 있던 상황에서 스위치는 꺼졌고, 통화중던 상황도 인터넷과 함께 끊겨버렸다.
나는 어쩔수 없는 상황에서 죄송하다고 말하고 도망치듯 나와버렸다.
죄책감을 느낄 세 없이 나는 나에게 남아있는 과제를 수행하러 가야했다.
몇시간 후, 나는 다이소에서 도둑을 목격했다.
그는 물건 하나를 주머니에 넣고 태연히 걸어 나갔다.
가격은 천 원.
그러나 그 천 원은 단순한 액수가 아니었다.
나는 그 장면을 보며 생각했다.
‘저건 단순한 절도가 아니다. 저건 제도에 대한 반란이다.’
검열에 지친 사람은 결국 도둑이 된다. 아니, 도둑이 되기를 꿈꾼다. 오타 하나에도 벌벌 떨고, 기관의 요청 하나에도 영혼을 깎아내는 삶. 그러나 천 원짜리 물건 하나를 슬쩍 훔치는 순간, 그는 기관보다 자유로워졌다.
나는 도둑을 부러워했다. 그는 잡히지 않았다.
나는 잡히지도 않은 죄책감에 늘 시달리는데, 그는 죄책감조차 거부했다.
어쩌면 다이소 도둑은 사소한 범죄자가 아니라, 거대한 자유주의자일지도 모른다.
미안함과 당혹스러움, 그리고 또다른 희생자를 만들어 버린 죄책감에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아무생각 없이 강이지 배변패드를 골라 들고는 계산대가 아닌 출입문으로 향했다.
경고음이 소란스럽게 울리고 나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양손 가득히 잡아든 배변패드와 경보음에 놀라버렸다.
"대체 이게 뭐지... " 어이없는 상황에 웃음이 나버렸다.
사노 요코는 말했다.
“나는 늘 병들어 있었지만, 그 병이 나를 살렸다.”
나의 병은 검열이다.
나는 늘 내 언어를 병적으로 해체하고, 내 몸을 병적으로 의심하고, 내 삶을 병적으로 경계한다.
그러나 그 병이 나를 살렸다.
검열은 내 글을 죽였지만, 동시에 내 글을 기록하게 했다.
엄지발가락의 쿠데타는 나를 절뚝이게 했지만, 동시에 나를 걷게 했다.
다이소 도둑의 작은 범죄는 나를 부끄럽게 했지만, 동시에 나를 자유롭게 했다.
나는 이제 안다.
1차 검열은 문장의 문제였고,
2차 검열은 사회의 문제였으며,
엄지발가락 쿠데타는 몸의 문제였고,
다이소 도둑은 제도의 문제였다.
그러나 결국, 모든 문제는 내가 나를 얼마나 족쇄 채우는가의 문제다.
나는 스스로를 족치며 살아왔다.
그러나 이제야 깨닫는다.
“나를 족치는 것은 타인이 아니라, 내 안의 나다.”
그래서 오늘, 나는 이 칼럼을 남긴다.
오타투성이의 문장으로, 띄어쓰기가 어긋난 채로.
기관이 요구하지 않은, 검열당하지 않은, 나만의 문장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