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는 쇼윈도처럼 전시된다.
《사랑의 흉내》
_관계는 쇼윈도처럼 전시된다.
나는 오래된 친구를 만났다. 정확히 말하면, 한때의 동거인. 3개월 남짓 같은 지붕 아래 살았던 적이 있었지만, 결코 깊이 있는 관계는 아니었다. 성향이 달랐고, 그녀는 늘 잘난 체했으며, 내가 가까이 두고 싶은 사람은 아니었다. 시간이 흘러 연락도 끊기고, 관심도 사라졌다. 그래서일까, 오랜만에 다른 친구의 입을 통해 그녀의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반갑지 않았다. 오히려 불편했다.
그 소식이란 이런 것이었다. 그녀는 남편을 잘 만났다. 동기 남자를 남편으로 맞이했고, 시댁의 전폭적인 재정 지원 속에 남편은 파일럿 과정을 밟았다. 외국 유학 동안 그녀는 남편을 따라다니며 부모의 돈으로 안락한 생활을 보장받았다. 마침내, 남편은 국내 항공사의 기장이 되었다. 그것이 그녀의 삶의 “성취”였다.
나는 잠시 멈칫했다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래, 언젠간 떨어져 죽겠지.”
잔인한 말이다. 그러나 그 순간 나의 냉소는 가식 없는 솔직함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기장이든, 구두닦이든. 그들의 성취는 그들의 것이고, 나는 그것을 욕망하지 않는다.
그녀의 삶은 남편의 꿈 위에 세워졌다. 그녀가 성취한 것은 없다. 그녀가 소유한 것도 없다. 모든 것은 남편과 시댁의 자본으로부터 파생된 삶이다. 물론 편리하고 안정적인 삶일 것이다. 하지만 그 안에는 모순이 있다.
돈이 많을수록 자유로워질 것 같지만, 그것은 누구의 돈이냐에 달려 있다. 주체가 내가 아니라면, 돈은 곧 족쇄다. 남편의 성취에 의존하여 누리는 생활은, 그 자체로 이미 구속이다. 남편이 없으면 그녀의 자유도 없다.
이 지점에서 나는 깨닫는다.
내 돈이라면 → 돈과 자유는 비례한다.
남의 돈이라면 → 돈과 자유는 반비례한다.
그녀는 자유로운 듯 보이지만, 사실 남편의 이름표와 시댁의 지갑 속에 묶여 있다.
또 하나의 불편함은 동기 네트워크였다. 친구는 내게 그녀의 소식을 전하며 마치 성취담처럼 들려주었다. 하지만 그 이야기는 하나의 패턴이었다. ‘남편이 어디 다닌다’, ‘시댁이 어떤 혜택을 준다’, ‘해외에서 어떻게 지냈다’… 네트워크는 늘 남편과 집안 이야기로만 채워져 있었다.
나는 그 순간, 네트워크란 사실상 사회적 가면무도회라는 생각을 했다. 사람들은 타인의 성취를 자신의 장식품처럼 내세운다. 그러나 그 성취가 내 것이 아닌 이상, 그것은 껍데기에 불과하다. 나는 그 무도회에서 조용히 퇴장하고 싶었다. 남의 이야기에 나를 끼워 맞추는 순간, 나는 주체가 아니라 구경꾼이 되고 만다.
나는 배우자를 통해 자랑하고 싶지 않다. 내가 이룬 성과로, 내가 쌓아 올린 결과로, 나의 이야기를 하고 싶다. 그것이 내가 지향하는 삶이다. 타인의 업적에 기대어 존재를 드러내는 것보다, 내 꿈으로 내 이름을 새기는 것이 더 가치 있다고 믿는다.
물론, 남편이 기장이 된 것은 축하받을 일이다. 끝까지 해낸 결과라면 충분히 누릴 자격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녀의 성취가 아니다. 그녀가 남편의 성취를 자신의 성취처럼 포장하는 순간, 나는 거기서 흥미를 잃는다.
나는 부러워하지 않는다. 부러워해야 할 이유도 없다. 남편의 직업이 내 삶을 윤택하게 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내 삶의 무대에서 주인공이 되고 싶다.
만약 어떤 이야기가 누군가에게 불쾌감이나 불필요한 부러움을 강요한다면, 그것은 이미 좋은 스토리가 아니다. 좋은 스토리는 모두가 기뻐할 수 있고, 함께 즐길 수 있으며, 격려할 수 있어야 한다.
그녀의 스토리는 내게 기쁨을 주지 못했다. 오히려 따분하고 불편했다. 그래서 나는 조용히 마음속으로 퇴장했다.
돈과 자유는 절대적인 비례나 반비례의 관계가 아니다. 그것은 주체성에 달려 있다.
내가 주체라면, 돈은 나를 자유롭게 한다.
내가 객체라면, 돈은 나를 구속한다.
그녀는 객체였다. 그녀의 삶은 타인의 성취에 묶여 있었다. 나는 객체가 되고 싶지 않다. 나는 나의 주체성을, 나의 경제적 자유를, 나의 이야기를 원한다.
오랜 친구의 소식은 나를 전혀 기쁘게 하지 않았다. 그저 ‘남편의 성공’이라는 껍데기를 덧씌운 타인의 인생일 뿐이었다. 나는 그 무도회에서 가면을 쓰고 싶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나의 길을 간다. 나의 꿈, 나의 자랑, 나의 이야기.
타인의 성취에 기대지 않고, 나라는 실험체로서 매일 보고서를 써 내려간다.
타인의 꿈으로 산다는 것.
돈과 자유, 그리고 나 아닌 삶의 불편함.
“그래, 언젠간 떨어져 죽겠지.” 잔인한 말처럼 들리지만, 사실 그것은 진실의 다른 표현이었다.
누구나 죽는다. 기장이든 아니든. 그녀의 삶은 부러움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녀의 성취가 아니라,
남편과 시댁의 성취였기 때문이다.
돈과 자유는 절대적 비례나 반비례의 관계가 아니다.
돈의 주체가 누구냐에 따라 자유는 달라진다.
내 돈이라면 자유는 넓어지지만, 남의 돈이라면 돈은 곧 족쇄가 된다.
그녀가 누린 건 편리함이지 자유가 아니었다.
네트워크도 마찬가지였다. 모임에서 오가는 이야기는 언제나 남편과 집안 이야기뿐.
개인의 성취가 아닌 타인의 성취를 빌려 치장한 쇼윈도 같았다.
나는 조용히 그 자리에서 퇴장하고 싶었다.
내가 주인공이 되지 않는 무대라면, 남의 삶을 관람하는 구경꾼이 되느니 차라리 무대 밖이 나았다.
나는 내가 이룬 성과로 내 삶을 증명하고 싶다. 내가 직접 걸어온 길, 내가 쌓아 올린 결과. 그것이 비록 남들 눈에 초라하게 보이더라도, 그것은 내 것이기에 더 값지다.
타인의 성취를 빌려 살아가는 삶은 화려한 무도회 같지만, 결국은 남의 가면을 쓰는 일이다.
나는 그 무도회에서 퇴장한다.
사랑도 그 무도회의 연장선에 있다.
남편의 직업이 전시된다면, 그 옆에는 늘 명품가방이 따라붙는다.
“욕구를 명품으로 채우는 거야. 혹시, 대체 가방이 몇개야? "
새로운 가방을 메고온 친구에게 물었다.
어디에선가 본 말에 남편보다 명품이라는 글을 봤다.
남는 건 명품가방이라고.
"그래, 결국 남는 건 가방밖에 없데.”
부러웠다. 철지난 명품가방.
과시하기엔 부족한 작은 지갑.
웃으면서 되물었다. “그래서 몇 개야? 얼마나 모았어?”
마치 그 숫자가 사랑의 무게라도 되는 듯이.
나는 예전에 이런 말을 들어본 적이 있다.
“명품가방 하나도 안 사주는 남자라면 헤어져.”
그 말은 곧 사랑의 환산식이었다. 사랑 = 가방. 애정은 곧 명품의 수량으로 환산되고, 관계는 쇼윈도 속에 걸린 물건처럼 평가된다.
그랬어야 했던 것일까?
헤어지지 않아서 상대적인 초라함을 느꼈어야 할 위치를 맞이한 것일까?
나는 아이를 키우면서 한때 들뜬 마음으로 샀던 명품가방들을 헐값에 팔았다. 시간이 흐르니 그 물건들은 나에게 아무런 상징도 되지 못했다. 요즘은 명품조차 재테크의 도구가 되지 않는다. 넘쳐나는 신상, 넘쳐나는 중고. 다들 신상을 좇고, 이월상품은 순식간에 저평가된다. 아울렛에서 샀는지, 백화점에서 샀는지, 편집숍인지, 중고매장인지에 따라 또 격이 나뉜다. 같은 가방이라도 어디서 샀느냐에 따라 ‘사랑의 값어치’가 달라진다는 듯이.
명품의 유무가 곧 사랑을 증명한다. 가방을 메고 배우자 옆에 서면, 그 관계는 곧장 증명서가 된다. “봐, 나는 사랑받는 여자야.” 관계는 그렇게 쇼윈도 속 전시품처럼 배열된다. 누군가는 매장의 마네킹처럼 ‘완벽한 세트’를 보여주고 싶어 한다. 남편의 직업, 시댁의 자산, 그리고 팔에 걸린 가방.
하지만 나는 그 유리벽 너머에서 냉소적으로 바라본다. 그게 진짜 사랑일까?
나는 내 성취로 관계를 증명하고 싶다. 내가 해낸 결과로 내 삶을 전시하고 싶다. 가방이 아니라, 내 글과 내 작업, 내 목소리와 내 시간으로. 그게 비록 남들 눈에 초라해 보여도, 적어도 그것은 나의 것이다.
나는 가방으로 사랑을 측정하지 않는다. 내가 원하는 건 타인의 성취에 기대는 관계가 아니라, 나의 성취로 증명되는 삶이다. 명품은 남을지 모르지만, 내게는 내 이야기가 남는다. 가방은 중고가 되지만, 내가 쓴 문장은 기록으로 남는다.
사랑의 흉내는 쇼윈도처럼 전시되지만, 나는 그 무도회에 참여하지 않는다.
나는 내 삶을 내 목소리로 채우고 싶다.
내 아이와 함께한 시간, 내가 만든 작업, 내가 견뎌낸 과정. 그것이 나의 진짜 증명이다.
부러움을 유도하는 이야기였다.
그들이 얻은 행운들에 그 만한 대가가 따랐을 것이기에 샘이 나지는 않았다.
하지만 내가 성취하지 못한 것들에 대한 공격을 듣고 있자니 짜증이 밀려왔다.
우리의 만남의 목적이 일치 하지 않은 점에 아쉬운 탄식이 나왔다.
친구는 명품 가방과 본인도 아닌 그 외에 타인에 대한 배경을 삼아, 나의 상황을 들춰냈기 때문이다.
나는 관심이 없다. 타인을 깔보기도 싫고. 그들이 이뤄낸 성과에는 기꺼이 찬사를 보낸다.
하지만 내가 부러워할 대상은 아니었다. 내꿈은 기장도 아니고 기장 와이프도 아니기 때문이다.
내 꿈을 이루어가는 과정에 살고 있고, 그 과정이 즐겁게 느껴진다.
글을 쓰면서 새로운 날을 맞이 하게 된 나에게 또하나의 성취에 찬사를 보낸다.
안정을 찾은 친구에게는 너의 삶의 기쁨이 가득하길 바라겠고,
불안정안 나의 삶에는 어서 안정이 깃들길 바랄뿐이다.
인간관계는 우위를 가리기 위한 조건 만남이었다는게 아쉽게만 느껴졌다.
오징어 게임같은 관찰 게임. 지긋지긋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