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의 거래소

친구라 부르지만, 사실은 이해관계다.

by seoul

《관계의 거래소》_친구라 부르지만, 사실은 이해관계다.


친구라는 이름은 오래전부터 익숙했지만, 그 단어가 내게 따뜻했던 적은 드물다.

만남을 제안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같은 패턴이었다.

같은 취미를 공유해도, 같은 학년의 아이를 키워도, 그들은 동등한 눈높이에서 나를 부르지 않았다.

그들의 제안은 언제나, 그들이 나보다 위에 있다는 전제를 깔고 있었다.

나는 그 사실을 모르는 척했다.

웃고 떠들고 싶어서 만났지만, 결국 그들의 눈은 나를 평가했다.

나는 파트타이머로 고정급 140만 원을 번다. 그것은 나의 하루를 살아내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일 뿐,

나라는 존재를 정의할 수 있는 수치 따위는 아니다.

아이와의 시간, 하루 버티는 힘, 작은 여유.

그러나 그들에게 140만 원은 단순한 수치였다.

그 수치가 곧 나의 가치였고, 나의 자리는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기꺼이 정보를 제공했다. 껄끄럽지 않았다.

사실을 알렸을 때 서로의 존재가 확인되니까. 사람들은 동정으로 우위에 서고 싶어 한다.

사실과 불편 그리고 관계는 빠르게 정리된다.

그 돈으로도 충분히 살고 있으니까. 그러나 알았다. 그들의 질문은 호기심이 아니라 검열이었다.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그들은 안도했을 것이다.

“역시, 나는 그녀보다 낫다.” 그 한마디가 그들 마음속에서 거래처럼 체결됐을 것이다.

며칠 전, 전화 한 통이 왔다.

안부 전화처럼 포장된, 그러나 실상은 확인 전화였다.

“퇴사가 언제죠?” 목소리 속엔 걱정보다 호기심이, 위로보다는 확신이 깔려 있었다.

그는 여전히 내 상황을 알고 싶어 했다.

내 삶을 확인하고, 본인의 삶과 비교하여 더 낫다는 결론을 얻기 위해.

전화를 끊은 순간, 그들은 속으로 그렇게 정리했을 것이라 추측했었다.
“그래도 나는 그녀보다 낫다.”
그러나 그것은 추측이 아니었다. 실제로 그 말은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래도 내가 낫네요.”

그 한마디는 농담처럼 포장돼 있었지만, 농담이 아니었다. 그것은 위계의 선포였고, 확인 사살이었다.

내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전화했다면서, 퇴사를 묻는 안부였다. 그의 목적은 내 이야기를 듣고, 자기 상황과 비교하며, ‘역시 나는 그녀보다 낫다’라는 확신을 얻는 것이었으니까. 그에게 확신을 주었다.

"곧, 퇴사할 예정이에요!"

"퇴사하면 다른 데 갈 데는 있어요?"

"없어요. 찾는 중이에요!"

전화를 끊고 기분이 나빴다. 그는 한결 가벼워졌는지 휴일에 맞춰 보자고 했다. 나는 계속 소비됐고, 그녀는 만족했다. 만날 생각이 없었다. 이전부터 연락을 피했던 전화였는데. 아뿔싸.

연락처를 삭제하는 바람에 누구인지 모르고 받아버린 탓에 어지러웠다.

비교와 평가가 하나의 문장으로 응축돼 내 앞에 떨어졌다.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그 순간, 우리는 더 이상 친구가 아니었다.

그는 거래소의 투자자였고, 나는 그가 소비하며 안도하는 종목에 불과했다.

불쾌했다. 나보다 낫다면서 왜 자꾸 전화를 거는 걸까.

내 말투에 이미 반갑지 않다는 게 묻어났을 텐데도. 그의 목적은 내 기분이 아니라 그의 안도였다.

나는 또다시 거래소의 종목이 되어 호출당했다. 그에게 필요한 건 내 대답이 아니라 그의 확신이었다.

나는 다시 묻는다. 친구란 무엇인가.

웃고 떠들며 서로를 북돋우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위계를 확인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인가.

이상하리 만치 요즘에 오랫동안 연락 없던 친구들에게 전화가 잦다. 무슨 냄새를 맡은 걸까?

요즘은 SNS를 자주 하진 않는다. 바쁘다. 아이와 보낸 여름 막바지 호텔수영장에서의 물놀이 사진을 올렸다. 그게 나의 여름 피드의 마지막이었다.

온통 에세이에 신경이 곤두서있기 때문이다.

엊그제 에세이 연재를 위해 늦게 글을 쓰고 있었다. 독자들과의 약속과 연재가 요즘 나의 도파민이었다.

카톡에 메시지 하나를 보았다.

'자? 자니?'

나는 다급해 보이는 친구의 톡에 답답한 고민거리라도 있나 싶었다.

이야기할 사람이 필요하나 싶어 얼른 대답했다.

'안자! 전화해.'

친구는 갑자기 내가 생각이 났고, 내가 컴퓨터를 잘하는지 확인하고는 문서작성을 요구했다.

그리고 그 일을 해주면 대가로 커피쿠폰을 주겠다고 했다. 사실적으로 얘기하자면, 애매한 설명을 늘어놓으면서 '알겠어'라는 답을 유도하고자 했다.

무슨 요구인지 도통 알아들을 수 없었고 자정 12시를 넘긴 시각이었다.

에세이를 완료하지도 못한 나에게 문서작성을 요구였다. 터무니없었고,

"맨입으로 해달라는 게 아니라 커피쿠폰으로 퉁치자"라고 얘기했다. 부탁은 없었다.

나는 "챗지피티 돌려, 그리고 시간 들어가는 일을 커피쿠폰으로 퉁치자는 거야?"라고 했다.

나의 반문에 기분 상한다듯이 "됐어, 내가 할게."라고 하며 끊었다. 이건 무엇인가?

그 친구는 며칠 전 신변의 변화가 생겼다며 연락을 해왔었다.

"너는 괜찮은 거야?"라는 말에 본인은 괜찮고, 나는 어떤지 물었었다.

난 여전하고 똑같이 지내고 있다고 얘기했다.

친구는 당분간 말레이시아에서 아이 학업을 위해 머물러 있을 계획이라고 했다.

말레이시아 생활이 꽤나 괜찮다는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를 봤다. SNS를 통한 정보였다.

나 역시 아이의 학업문제로 해외 생활을 고민해 본 적이 있었다. 그리고 앞으로 고려해 볼 문제로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그 친구의 선택과 실행할 수 있었음에 부러웠다. 실제로 그렇게 말도 전했다.

그래서였을까? 나에게 그래도 될 거라는 무례한 태도?


나는 요즘 자주 생각한다. 왜 사람들은 안부라는 이름으로 상대방의 삶을 확인하려 드는 걸까. 전화가 온다. 메시지가 온다. 그러나 그들의 첫 질문은 늘 같다.
“요즘은 어때?”
그 말속에는 진심 어린 걱정보다는, 내 상황은 분명히 피폐할 것이다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그들의 질문은 호의가 아니라, 일종의 검열이다.


나는 과거를 떠올린다. 어릴 적, 동네 친구에게 돈을 빌려달라는 부탁을 받은 적이 있었다. 나는 거절했었다.

시간이 흘러 우리는 같은 지역으로 이사했고, 아이를 키우며 다시 자주 보게 되었다.

어느 날 그 친구는 집으로 불쑥 찾아왔다. 도와주는 척했지만, 실상은 내 생활을 샅샅이 스캔하는 눈빛이었다. 그 후 내게 한마디를 던졌다.
“네가 이렇게 살아줘서 나는 너무 고마워.”

그 말은 칭찬이 아니라 모욕이었다. 나는 그 순간 "뭐가 고마워?"

다시 반문했다. 친구는 대답하지 못했고, 기억이 안 난다고 말했다.

방금 한 말이 기억이 나지 않는단다. 나는 손절을 결심했다.


그리고 우연히 만났다. 나를 알아봤지만, 나는 그 친구를 알아보지 못했다. 나의 관심사는 주변이 아니라.

나였기 때문이다. 나를 빤히 지켜보고 있는 눈초리가 여전히 어릴 적 친구의 모습이었다.


엊그제 만난 또 다른 친구도 다르지 않았다.

몇 년 동안 연락이 없던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평소 나를 찾아준 적 없던 친구가 먼저 연락을 주고 만나자고 한 것이 너무 반가웠다.

그런데 뜻밖에 연락에 무슨 일이 있나? 싶었다. 무슨 일일까 싶었다.

친구는 방학시즌으로 시간이 생겼고, 나는 주말 말고는 시간을 낼 여유가 없었다.

출근 전 잠깐 시간에 만나서 점심을 먹자고 했다. 그날은 그 친구의 속마음을 알 수가 없었다.

시간을 내서 내가 있는 곳까지 찾아와 만나러 와준 것이 고마웠다.

짧게 식사를 마치고 나는 출근을 했다. 짧은 만남이 아쉬워 다시 만남을 기약하고, 또 보자 약속했다.

보통 친구는 약속을 대게 자주 잡지 않는다. 다음 약속도 언제 만나게 될지 몰랐었다.

그런데 나는 궁금했다. 친구는 갑자기 나를 찾았을까?

옛날처럼 내일이 없는 것처럼, 웃고 떠들고 마실 수 있을까? 생각했었다.

친구는 대학시절 다른 친구의 이야기를 전했다. 본인의 이야기도 아니면서, 그 친구의 성과에 부모님의 도움으로 이뤄냈다는 비평을 했다. 나는 궁금하지 않았다. 관심도 없었다. 우리의 이야기를 할 줄 알았는데, 다른 이의 이야기까지 하면서 다른 친구 상황에 나를 비교해 들추려는 그 친구의 속사정을 알아차리고 말았다.

내가 알고자 했던 이유와 그녀의 목적이 일제히 드러나버렸다. 할 말을 잃었고, 더 이상 나눌 이야기가 없었다.


왜? 우위에 서고 싶어 하는 걸까?

외모와 백그라운드가 나의 위치를 정하는 지표라면, 친구는 사실 거래자일 뿐이다.

관계의 거래소에서 우리는 서로를 주식처럼 평가한다.

나는 늘 소비되는 존재였다. 노동이 소비되고, 자존심이 소비되고,

관계마저 소비됐다.

그러면서도 나는 계속 거래소에 입장했다.

혹시 이번엔 다를까 하는 희망으로.

그러나 희망은 없었다.

그들은 여전히 나를 비교했고, 그리고 여전히 그들은 기준 아래 두었다.

관계란 거래소다.

서로를 친구라 부르지만, 사실은 주식처럼 거래되는 이해관계였다.

나의 상황은 곧 그들의 투자 지표였다.

내가 피폐해 보일수록, 그들의 삶은 상대적으로 상승한다.

나는 질문한다.
대체 어떤 부분이 나보다 더 낫다고 믿는 걸까?
사람들은 외모, 남편의 유무, 남편의 경제력, 부모의 배경, 집값, 차브랜드, 학력, 수입, 메고 다니는 가방의 브랜드 이런 척도들로 사람을 평가한다.

그 기준에 따르면, 나는 아래에 있어야 한다.


그러나 내 삶은 그들의 상상처럼 공허하지 않다.
나는 매주 패턴 텍스타일 디자인을 완성해 플랫폼에 업로드한다.
나는 한국어 교원 자격증을 1년 과정을 준비하며, 일주일에 한 번씩 온라인 학습에 시간을 쓴다.
지난 두 달 동안 전자책 네 권을 발간했다.

오늘은 카카오 이모티콘 제안서가 탈락했다는 이메일을 받았다.
나는 일주일에 네 번 브런치 스토리를 연재한다.

아침에는 아이를 등원시키며 30분을 쓰고, 오후에는 생계를 위해 5시간의 파트타임 알바를 한다.

왕복 45분의 출퇴근 시간을 견디고, 퇴근 후 아이를 픽업한다.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아이와 한 시간을 보내고 나서야, 강아지와의 산책 또는 실랑이.

그리고 남는 시간에는 글을 쓰거나, 책을 읽고, 그림을 그린다.

내 하루는 꽉 차 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사실을 모른다. 아니, 애써 외면한다. 왜냐하면 그들의 이야기 속에서 나는 언제나 피폐한 존재여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그들의 삶이 더 빛나 보이니까.

나는 점점 알게 되었다.
만남의 목적은 웃고 떠들며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만남의 목적은 언제나 우위의 확인이었다.
내가 실패한 부분, 내가 가진 결핍, 내가 벌어들이는

140만 원이라는 숫자는 그들의 자존감을 높이는 연료였다.

나는 그들에게 기꺼이 정보를 제공했다. 내가 버는 액수, 내가 하는 일들, 나의 바쁨.

그러나 그들은 그 모든 걸 듣고도 단 하나만 기록했다.

“140만 원.” 그 숫자 하나로 나의 삶을 규정했다.

그 돈으로도 충분히 살고 있다는 나의 대답은 무시되었다.

그들의 귀는 내가 아닌, 그들의 안도에만 열려 있었다.

이해관계 위에 세워진 관계는 친구가 아니다.

나는 문득 궁금해진다. 어떻게 하면 이 거래를 멈출 수 있을까.

부자들은 말한다.

“과거로부터 벗어나라. 성장이 멈춘 것들로부터 벗어나라. 그리고 부자의 곁으로 가라.”
나는 그 말을 듣고 묻는다. 그 말이 지침이 될 수 있을까. 어디로 가야, 나는 소비되지 않을 수 있을까.

자, 어디로 가면 될까. 누구의 곁에 서야만 자유로울 수 있을까.

혹은 누구의 곁에도 서지 않고, 나 홀로 퇴장해야만 비로소 자유로울 수 있을까.

나는 여전히 답을 찾지 못했다. 다만 분명한 것은 하나다.

관계의 거래소에서 친구라는 이름은 언제나 우위관계였고 소비되었다는 사실이다.


친구라는 이름으로 불려도, 나는 알게 되었다.
그 관계는 우정이 아니라 위계였다.
그들이 원한 건 나와 웃고 떠드는 시간이 아니라,

나보다 조금 더 나은 위치에서 나를 내려다보는 순간이었다.

나는 더 이상 설명하지 않기로 했다. 더 이상 변명하지 않기로 했다.

그들이 묻는 질문에 대답하지 않아도 된다.

왜냐하면 그 질문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을 위한 것이었으니까.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그들은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고, 나를 내려다보며 우위의 안도감을 얻는다. 그래서 기꺼이 밥값을 지불한다. 그것은 호의가 아니라, 일종의 통행료다. ‘네가 나보다 못하니, 내가 너를 챙겨줄게.’

그러나 반대로, 나의 상황이 그들이 예상한 것만큼 피폐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

그 밥값은 거둬들인다.

그때는 나에게 밥값을 요구한다. 우습다. 밥 한 끼의 결제 방식조차 관계의 서열을 증명하는 도구가 된다.

화려한 휴가 사진을 보낸다. 보여주기식의 여름휴가, 그들의 SNS는 언제나 활발하다.

그러나 나 역시 보냈다. 아이와 함께 바다를 보고, 계절을 느끼며, 소소하지만 따뜻한 시간을 보냈다. 타보지 못했을 것이라 단정했을 일본행 비행기도 이미 탔다. 아이와 단둘이, 그 어느 여행보다 소중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9월 마지막 주말, 우리는 두 번째 비행기를 탄다. 이번엔 중국이다. 업무적으로 도움을 받았던 거래처 부장님과 마라탕을 먹으며 대화할 기회도 마련돼 있다. 부장이 집으로 초대까지 해주었으니, 나는 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아이와 함께 떠나는 여행, 낯설지 않다. 출장으로 수없이 다녀왔던 곳이니까.

모든 경험에는 처음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내가 겪지 못했을 것이라고 쉽게 단정한다.

마치 내 삶은 늘 부족하고, 늘 결핍돼 있어야 한다는 듯이.


나는 그들의 눈과 귀와 입을 닫게 해주고 싶다.

내가 살아낸 경험은 그들이 모를 뿐, 결코 없는 게 아니다.

아이와 함께한 첫 비행, 두 번째 비행, 그 시간들 속에 깃든 나의 기쁨과 성장. 그들의 화려한 인증숏 뒤에서 웃고 떠드는 우월감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는, 나만의 충만함이 있었다.

나는 더 이상 거래소에서 화폐가 되지 않는다.

나는 시장을 떠난다.

그들의 장부에서 지워지길 바란다.


그리고 하루 전, 뜻밖의 일이 있었다. 우연히 본 채용 공고였다.

패션디자인비즈니스과 강의 전담전임교원 채용.

한 때는 잊고 있던 목표였고, 꼭 될 거야라고 다짐했던 내 목표.

아직도 멀리 봐야 할 줄 알았던 길이었다. 마감 시각은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나는 정신없이 달려 서류를 준비했고, 제한시간 2분 전, 제출 버튼을 눌렀다.

숨이 막히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나는 준비된 사람이었다. 스스로 뿌듯했다. 가능성을 기대해 볼만했다.

수많은 기록과 작업들이 나를 지탱했고, 그 결과를 서류로 정리할 수 있었다.

문득 소망이 생겼다. 이 길이, 우연이 아니라 운명의 이정표이기를.

관계의 거래소에서 끊임없이 소비되던 내가, 이번에는 새로운 무대에서 주체로 서기를.

그 기대가 크다. 나는 이제 나의 삶을 내 이름으로 증명하고 싶다.

그리고 운명이 나를 그 길로 인도해 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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