갖고 싶다. 되고 싶다. 보여주고 싶다.
나는 더 이상 값으로 정의되지 않는다
《욕망의 가격표》_갖고 싶다. 되고 싶다. 보여주고 싶다.
살아가는 내내 이 세 가지 욕망은 내 안을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언제나 가격표가 붙어 있었다. 얼마를 지불해야 가질 수 있는지, 무엇을 희생해야 도달할 수 있는지, 얼마나 포장해야 남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지. 욕망은 순수한 희망이 아니라, 사회가 매긴 가격표를 따라 움직이는 조건부의 소망이었다.
갖고 싶은 것은 늘 나보다 비싸 보였다. 명품 가방 하나, 집 한 채, 안정된 직장. 모두가 손에 넣고 싶어 했고, 나 역시 그 무리에 섞여 그 욕망을 좇았다. 그러나 그 안에는 늘 계산이 있었다. 이월 상품은 저평가되고, 편집숍보다는 백화점에서 산 물건이 더 값어치를 인정받는다. 명품 하나에도 유통 경로가 서열을 나눈다. 욕망의 사다리에는 언제나 숫자가 붙어 있었다. 내가 그 사다리 어딘가에 서 있다는 사실만이 확인될 뿐이었다.
되고 싶은 것도 마찬가지였다. 교수라는 직함을 달고 싶었다. 그 자리가 주는 의미는 단순한 성취가 아니었다. “얼마나 쌓아왔는가, 얼마나 증명할 수 있는가”라는 냉정한 계산의 무대였다. 교수라는 이름조차 결국 사회가 붙여준 가격표였다.
보여주고 싶다는 욕망은 더욱 노골적이다. 몸은 거짓말하지 않는다. 거울 속 내 복부는 언제나 나를 배신했다. 잡히는 살, 내려앉은 피로, 무너지는 자존감. 사람들은 탄탄한 복근을 본 순간 평가한다. 건강해 보인다, 자기 관리를 잘한다, 매력적이다. 그러나 그것은 내 몸을 향한 평가가 아니라, 내가 그들의 욕망을 충족시켜 주었는지 여부였다. 보여주고 싶다는 욕망은 결국 남의 시선에 맞춰 값을 매기는 행위였다.
명품, 직함, 몸. 모두 내가 한때 꿈꾸었던 것이지만, 결국은 사회가 정해놓은 가격표 안에서만 의미를 가졌다. 내가 얼마나 벌고, 얼마나 쓰고, 얼마나 관리했는지. 그것은 곧 내 존재의 가치를 측정하는 척도처럼 굴러다녔다. 관계 속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친구라는 이름으로 다가온 사람들은 내 이야기를 듣고 안도했다. “그래도 내가 낫다.” 농담처럼 흘러나온 그 말은 농담이 아니었다. 그것은 나를 값 매기는 선언이었다.
나는 언제나 소비되는 존재였다. 나의 노동, 나의 관계, 나의 감정. 그러나 이제는 안다. 욕망의 가격표는 찢어버릴 수 있다는 것을.
갖고 싶다고 해서 반드시 빚을 질 필요는 없다.
되고 싶다고 해서 반드시 남의 기준에 맞출 필요도 없다.
보여주고 싶다고 해서 반드시 시선을 구걸할 필요도 없다.
이제 나는 욕망의 가격표를 사회가 아니라 내가 붙인다.
내 기준으로, 내 속도로, 내 힘으로.
갖고 싶은 것은 내가 감당할 수 있을 만큼,
되고 싶은 것은 내가 즐길 수 있을 만큼,
보여주고 싶은 것은 내가 사랑할 수 있을 만큼.
나는 더 이상 값으로 정의되지 않는다.
욕망은 여전히 내 안에 있지만, 이제 그것은 나를 소진시키는 족쇄가 아니라,
내 삶을 더 깊이 살아가게 하는 연료가 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묵묵히 말한다.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가질 것이다.
나는 내가 되고 싶은 것을 이룰 것이다.
나는 내가 보여주고 싶은 삶을 살아낼 것이다.
그것은 더 이상 남의 시선을 위한 전시가 아니다.
오직 나의 삶을 위한 선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