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지 않는다고 해서 모르는 게 아니다.
《침묵의 언어》_말하지 않는다고 해서 모르는 게 아니다.
멍청한 여자는 모텔 문을 두드렸다. 굳게 닫힌 문 안에 사람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열리지 않는 문 앞에서 한참을 기다렸다. 그냥 돌아섰어야 했다. 그러나 열릴 때까지 기다렸다. 멍청했다. 멍청한 여자는 나였다.
안에서 그는 게임을 하고 있었다. 인기척조차 느끼지 못하고 화면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 순간 알아차렸어야 했다. 게임하는 남자, 화면에만 몰두하는 남자, 나를 진심으로 바라보지 않는 남자. 하지만 나는 그 몰입을 착각했다. ‘자기 일을 좋아하는 구나’, ‘자기 만의 취미가 있구나.’ 그렇게 믿었다.
대체적으로 남자들은 나에게 호감을 주지 않았다. 내가 호감을 표현해도 반겨주지 않았고, 친절하지 않았다. 그와 달리 그는 내 호의를 귀찮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좋았다. 새롭기도 했다. 우리는 서로 맞다고 생각했고, 관계는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그러나 그것은 곧 의무적인 관계로 굳어졌다.
임신했을 때 그는 무관심했다. 먹고싶은게 있다고 할때는, 밤늦게 먹으면 살쪄서 안된다며 나를 위하는 척 거절했다. 출산했을 때, 그는 나를 두고 집에 가서 잤다. 내가 허락했기 때문이다. “괜찮아, 집에 가.” 그 말에 신이 나서 그는 갔다. 나는 괜찮을 줄 알았다. 그러나 괜찮지 않았다.
아이의 탯줄조차 자르지 않았다. 비위가 약하다는 이유였다. 그때 알았다. 그는 아이를 사랑하지 않을 거라는 것을. 그 후 5년 동안, 별거 아닌 듯 별거 같은 생활이 이어졌다.
나는 점점 피폐해졌다. 나의 삶은 형편없었다. 그를 능력 있는 사람이라고 믿었었다. 그러나 생활은 그것을 증명하지 못했다. 내 이름으로 된 차, 카드, 집, 생활비. 모든 게 빚으로 누적됐다. 나는 이름만 남고, 내 모든 자산은 빚으로 갈아넣어졌다. 무일푼의 신분으로 떨어졌다. 피로는 쌓였고, 자존감은 무너졌다.
나와 내 아이는 궁핍에 내몰렸다. 나는 물었다. 나는 누구인가? 왜 이렇게 사는가? 그런데 왜 이렇게 살고 있는가. 잘못된 선택의 결과였다. 아이를 위해 시간을 내지 않고, 게임과 친구에게 기꺼이 시간을 쓰는 남자. 더 이상 믿을 수도 기다릴 수도 없었다.
점점 바닥으로 치닫는 상황에 그는 먼저 헤어지자고 부추겼다. 아이를 위해 그러는 척 살자고. 위장.
“서로에게 더 낫잖아.” 그렇다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그쪽이 낫다고 생각했다. 나도 위장인 척 했다.
생활비는 없으면서도, 운전을 하며 영어 공부를 했다. 오토바이가 아닌 차로 배달 일을 했다. 우스웠다.
뭔 짓거리인지... 진심으로 배우려 하지 않았던 사람이, 왜 이제야 저렇게 몰두하는 걸까.
나는 웃겼지만, 티를 낼 수 없었다.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재 작년 여름 라오스를 다녀온 후 였다. 사업차 간다고 말했었다. 사업이란 말 믿기지도 않았지만. 무슨 돈으로 가냐는 말에도 일때문에 가는 거라고 잡아 뗐던 사람이었다. 간다는 사람 말릴 수가 없었다. 거짓말이었다. 비즈니스라며 떠났다가 동남아 여자들과 어울려 돌아왔던 것이었다. 그 여행을 준비하기 위한 노력이었던 것이다.
나는 이메일에서, 아이의 태블릿에서, 공유한 컴퓨터에서, 더럽고 지리멸렬한 증거들을 보았다. 관계 동영상, 사진, 친구에게 신이나서 전하는 무용담 "이제 한국 김치녀들은 질려", "돈 안들이고 노는 방법을 배웠어."라는 대화 기록. 알고 싶지도 않은 정보들. 안봤으면 더 좋았을 뻔한 모든 것들이 고스란히 기록으로 남아 있었다. 그는 침묵했지만, 말하지 않는다고 모르는 게 아니다. 그는 모든걸 감췄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내가 아무 것도 모를 거라 생각한 모양이다. 나도 말하지 않았다. 모든 증거는 남아 있었고, 나는 알게 되었다.
그 이후 관계 종말을 맞은 듯 명확해 졌다. 그는 자기만의 의식이라도 되는 양, 사진과 동영상을 수집했다. 여자들과 어울리던 옷차림에 같은 장소의 사진을 아무런 죄책감 없이 아이에게 보내는 아빠였다. 믿고 싶지 않았지만, 나는 그 순간 알았다. 그는 아이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 아이가 “간식 사와”라는 말 한마디를 했을 때조차, 그는 돈이 없다며 거절했었다. 말하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아이를 향한 무관심은 이미 그의 모든 선택에서 증명되고 있었다. 그의 침묵은 변명이 아니었다. 그의 행동이 곧 그의 고백이었다.
치욕스럽고 더러운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페이스북에서 나를 팔로우한 고등학교 선배. 그 선배는 나의 남편의 페이스 북도 지켜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자격지심과 열등감으로 나를 집요하게 관찰하던 자. 말하지 않아도 그의 눈빛에서 나에 대한 분노가 내비쳐 졌다. 오랜만에 은사님과의 술자리. 불편하리 만치 먼 은사님의 댁에서 무언가 노골적인 술자리. 취조하는 듯한 분위기. 내가 살아온 시간을 증명이라도 하라는 듯 나를 공격했다. 모임 단체 톡방에서 나를 망신주려 들었고, 나는 끝까지 버티다 그를 공개처형했다. 나에대해 아는 거라곤 고등학교 때 미술반 선후배. 겨우 1년 함께 다닌 선후배. 단합회 외에는 겹친 적 없는 사람. 그런데 그는 나를 다 아는 척했다. 불쾌했고, 재수 없었다.
“남편이 돈을 안 주나?” 그가 던진 말은 단순한 질문이 아니었다. 여자가 경제활동을 하는 이유를 곧 남편의 부재, 생활고로 치환하는 통속적 해석이었다. 고등학교 졸업 이후 나의 삶을 단 한 번도 함께하지 않았던 사람이, SNS 몇 줄로 내 인생을 재단했다.
그는 나를 본 것이 아니라, 자신의 편견을 본 것이다.
나의 삶은 그가 멋대로 해석할 수 있는 낱말풀이가 아니다.
이 결과는 그 부족한 남자의 페이스북 기록 때문이었다. 어리석어도 너무 어리석은 행위. 오픈된 공간. 사회적 공간. 모두를 속일 순 없었다.
어이없었다. 나는 나를 위해 돈을 번다고 했다. 그게 사는 이유니까. 내가 배운 것을 써먹고, 내가 할 수 있는 일로 경제활동을 이어가는 것, 그것이 곧 나의 존엄이었다. 생계를 유지하는 일이 단순히 생활고 때문이라는 그의 얄팍한 해석은 내 삶을 지워버렸다. 그러나 나는 안다. 내가 버는 돈은 단순한 생계가 아니라, 내 존재를 증명하는 방식이다. 그게 맞고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부모님의 노고에 보답하는 일이라 생각한다.
동창들도 비슷했다. “괜찮아, 너는 서울 살잖아. 너가 이긴 거야.” 그 말은 위로가 아니었다. 누가 누구보다 더 잘됐나 하는 확인 뿐이었다. 그래서 모두와 안녕했다. 나는 모두를 차단했다.
나를 무너뜨리려는 관계를, 거래처럼 나를 평가하는 관계를, 모두 끊었다.
나는 생각한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이와의 관계를 지키는 것뿐이었다. 나머지는 다 무너져도 좋았다. 분노와 미련 속에서 한달 전, 나는 컴퓨터 데이터를 몽땅 날렸다. 4년 전에도 똑같은 일이 있었다. 나는 백업이 아니라 복구를 원했는지도 모른다. 과거로 회귀하고 싶었다. 그것이 내 소원이었을까.
시간이 해결해 준다는 말을 믿고 싶지 않았다. 그 뜻을 이제 좀 알것 같다. time will tell.
그는 나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저 수면 위로 드러났을 뿐이다. 그러나 나는 알았다. 말하지 않는다고 모르는 게 아니다. 침묵은 무지의 증거가 아니다. 오히려 진실은, 침묵 속에서 더 크게 울려 퍼진다.
사람은 말하지 않아도 드러난다. 침묵은 은폐가 아니라, 더 큰 고백이다. 나는 그 침묵을 읽어내는 법을 배웠다. 그리고 그것은 누구에게나 필요한 감각일 것이다.
관계의 실패, 실패한 인생 같았다.
나의 문제를 알아차린 사람은 아빠였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채버린 아빠. 알아챘지만, 내색하지 않으셨다. 아빠에게 보잘것 없어진 딸이라 아무말도 못했다. 아빠의 혼잣말에 나를 알아주는 이가 있다는 것만으로 위로가 됐다. 아빠에게 너무도 죄송했다. 또, 모든 것을 부정하고 싶었지만 부정할 수 없는 하나가 있었다.
나의 분신과 같은 아이.
우연히 본 영화 〈세인트 엑스〉에서 아이 엄마가 말한다.
“하룻밤의 실수로 사랑스런 아들을 얻었지만,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생각했다. 나도 언젠가 저렇게 말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때 잘못된 선택이었을까?
무한히 되묻고, 또 되묻는다.
무엇이 잘못된 것이었을까.
자책하고 자책해도, 돌아갈 수 없는 현실이 되었다.
잘못된 선택과 피폐한 관계 속에서,
단 하나 아이만은 내게 남겨진 가장 확실한 구원이었다.
영화 속 아이 엄마는 아이를 키우면서도 애인이 있었다.
이해할 수 없었다.
착하지만 무능한 남자의 아이를 낳고, 또 다른 사랑을 이어간다는 설정.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여자는 연애를 한다.
아이를 일하는 남편에게 맡겨두고, 아슬아슬한 데이트를 즐긴다.
나는 그 여자의 선택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대사에는 깊이 공감했다.
사랑은 실수였지만, 아이는 구원이었다.
그 문장이 내 삶의 축약처럼 느껴졌다.
아이와 함께 있는 내 일상은 영화처럼 짧게 퉁쳐지지 않는다.
“엄마, 좋은 사람 좀 만나지~”
아이의 한마디에 나는 웃었다.
엄마도 좋고, 아빠도 좋다는 아이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이 작은 아이도 눈치가 빤한가 보다 싶었다.
“그러게, 엄마가 바보였어. 좋은 아빠 만들어주지 못해 미안해.”
그 대답은 자조이자 다짐이었다.
아이에게도, 나에게도 이제는 없는 사람.
그럼에도 나는 가끔 생각한다.
혹시 다른 인연을 만날 수 있을까?
가능할까? 라는 물음표가 머릿속을 맴돈다.
그런 로맨스가 현실에 존재할까?
그저 상상만으로 끝날까?
옆에서 철통방어를 하는 작은 녀석 덕분에
누구와도 스쳐 지나갈 틈이 없다.
그래서 내 삶의 집중력은 언제나 100% 아이에게로 향한다.
《오시하나 내 멋대로 산다》는 책은 묻는다.
“여자들은 왜 로맨스를 갈망하는가?”
남자가 바람을 피우고 상처를 줘도,
왜 끝내 이루지 못한 사랑을 원하느냐고 묻는다.
또 영화 〈3000년의 기다림〉 속 지니는 여주인공에게 말한다.
“단 하나의 소원을 말해보라.”
여주인공은 처음엔 소원이 없다고 말하지만,
결국 그녀의 입에서 나온 건 사랑이었다.
“지니의 영원한 사랑을 원한다.”라고 단 한가지 소원을 빌었다.
결국, 여자는 사랑을 선택한다.
상처받고도, 버려지고도, 여전히 사랑을 꿈꾼다.
나 역시 영원한 사랑을 하고자 했다.
그러나 잘못된 만남이었다.
그 대가로 나는 많은 것을 잃었다. 왜 신중하지 못했을까?
사랑을 몰라서 그랬던 걸까.
나는 최소한의 사랑은 서로에게 책임을 다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정함, 서로를 지켜주는 힘.
그건 내 아이와의 관계 안에서만 가능한 것임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동화 같은 사랑은 결국 환상일지도 모른다.
현실에는 왕자도, 구원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펼치지 못한 다음 장면이 어딘가 남아 있을 거라 믿고 싶다.
씹어먹을 다큐멘터리 같은 현실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데렐라 동화속 이야기 처럼 약간의 판타지는 꿈꾸고 살고싶다.
상처받은 사람들은 늘 사랑은 필요 없다고 말하지만, 끝내 사랑을 갈망한다.
그것이 여자의 모순이자 인간의 숙명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 안다.
침묵을 읽어내는 법을 배운 나는, 더는 속지 않는다.
사랑을 기다리지 않는다.
내 아이와 나 자신으로 이 세계를 살아낼 것이다.
그 사랑과 다정함을 나는 아이에게서 배웠다.
그리고 아이를 통해 나를 알아가고있다.
아마도 나는 그 다정함 하나로
오늘도 버티고, 살아내고 있는 중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