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리콥터 부모 밑에서 자라온 외동딸이 행복한 거라 믿고 싶다.
어렸을 적부터 공부에 대한 욕심은 크게 없었다. 원체 타고난 성격 자체가 칭찬을 좋아하고, 잘하는 것을 계속 잘하게 되는 걸 즐기는 스타일이었다. 공부는 내가 어렸을 적 살았던 동네가 도심도 아니었고 규모가 크지도 않았기에 딱히 경쟁이 심하지 않았던 탓일까, 초등학생과 중학생 때는 꽤나 전교권의 성적을 얻으며 순항했다. 그게 이 인생에 첫번째 전환점이었다.
김연아 선수는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들이 단 한 가지 그 어떤 누구보다 뛰어난 재능을 갖고 태어난다고 했다. 그중 자신은 피겨가 가장 뛰어난 재능이라는 것을 발견해낸 거라고, 그러니까 여러분도 본인이 가장 잘하는 한 가지의 재능을 찾아내 보라고. 돌아와 나의 경우에는 (우리 아빠의 말을 빌리자면) 부모인 본인들이 촌스러워서 이것저것 시켜볼 생각도 못했고, 중학생 때 까지는 나름 공부를 잘하니 공부를 시켜야겠다-라고 결정하셨다고 한다. 나역시 그 당시에는 더욱 순종적인 자식이었으니 부모님의 결정에 동의했고, 또 내가 잘하는게 뭔지도 모르는데 주변에서 공부 잘한다 하니까 따를 수 밖에. 그렇게 특목고로 진학을 했고, 이후 너무나 뛰어난 친구들 사이에서 방황했다. 세상엔 진짜 천재가 있더라. 손 쓸 수가 없이 똑똑하고 애초에 다른 사람들 말이다.
그렇게 친구들 사이에서도 뛰어나고 선생님들의 관심을 받던 학생에서 하위권 성적의 애물단지로 추락해버리는 경험은 해 본 사람만 알 거다. 그런 좌절감, 패배감을 고등학교 내내 겪고 큰맘 먹고 시작한 재수생활 이후 다시 본 수능도 망쳐버리며 그렇게 인생에 있어 나를 괴롭힐 첫 번째 패배를 겪어 버리고 만 것이다.
하지만 고등학교 3년 내내 죽도록 노력했으면 조금의 개선이나 더 나은 성적을 얻을 수도 있었겠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칭찬에 약하고 성과와 재미가 바로 눈앞에 보이지 않으면 그대로 손에서 놓아버리는 성격 상 끈질기게 책상 앞에 앉아 지독하게 공부하는 건 나와 맞지 않았다. 아이돌이 좋았고, 소설책이 좋았고 음악과 영화와 스포츠 등 학생의 본분은 공부라지만 공부보다는 취미 생활이 더욱 즐거웠다. 원래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은 법. 부모님의 눈을 피해 밤에 몰래, 등하굣길에 몰래 즐기는 이 취미들은 너무 재밌었고 이 콘텐츠들을 볼 수 있는 시간만 기다리게 됐었다. 그럴 때마다 부모님은 못마땅해 난리가 났었다. '제발 인생에 도움이 되는 것을 해라, 나중에 즐겨도 된다, 공부 좀 해라 공부!' 웃긴 건 서른이 된 지금까지도 이 이야기가 엄마 입에서 나온다. 참나.
광고회사에 처음 취업하고 나서 가장 놀라고 심장이 뛰었던 건, 직속 선배의 한마디였다. 'TV 자주 봐요? 영화관에 영화 보러 가요? 잡지나 신문은 봐요?' '광고 매체로 쓰이는 것들이고 요즘 트렌드도 알아야 하니까 TV에서 드라마나 예능 챙겨보고, SNS도 열심히 해요 알겠죠?' 세상에. 철이 들기 시작하면서부터 언제나 내 인생에 도움이 안 되는 것들로 치부되어 오던 모든 매체와 콘텐츠들이 업으로 삼게 되니 꼭 봐야만 하는 것들이 되었다. 반사적으로 이런 것들을 볼 때마다 내가 지금 이렇게 영화나 보고 있어도 되는 건가? 노래를 듣고 있어도 되는 건가? 이럴 시간에 영어 공부를 하고, 운동을 해야 하는 거 아냐? 또 이렇게 맥 놓고 보고 듣고 있다 보면 엄마한테 혼날 텐데?
부모님으로부터 모두 유해한 것이라 제한받던 모든 것들이 업무에 있어 필수요소들이 되고, 취미 정도로 여기던 것들이 직업이 되면서부터 그래도 그 악명 높은 글로벌 에이전시들에서 도합 5년을 버틸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싶다. 내가 광고를 좋아하고, 매체들과 콘텐츠를 좋아하는 것과는 별개로 직장인으로서의 가치관이나 번아웃은 피할 수 없었기에 이렇게 긴 휴식을 갖고 있지만.
그리고 이 휴식이 못마땅한 엄마가 또또 다시 그놈의 야구 좀 그만 봐라, 소설책 좀 그만 읽어라, 유튜브고 넷플릭스고 그만 봐라. 그럼 저는 제가 좋아하는 것들이 이런 거라서 쉬면서 실컷 즐겨보고 있는데 그거마저 하지 말라고 하면 저는 제가 잘하는 일이 무엇이고 저의 재능이 무엇인지 어떻게 알아내죠? 왜 모든 걸 엄마의 기준에 맞춰야 할까요? 그렇게 제 인생에 관여하고 싶으시면 저의 미래와 현재도 모두 엄마가 책임지고 관리해주셔야 하는 게 아닐까요? 원하시는 딸의 모양에 대해서는 끝없이 강요하시면서 왜 그 노력은 전적으로 제가 해야만 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제가 걸어갔으면 하는 탄탄한 미래에 대해 사사건건 간섭하시는 건 사랑이 아니에요, 그저 원하시는 기준이 너무 높고 숨 막히는 것이지요.
세상에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하잖아요, 그렇지만 저는 우리 가족이 서로를 이겨먹으려고 이렇게 간섭하는 게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저 너무 많은 걱정과 서로의 안위만을 신경 쓰다가 이렇게 어그러져 굴러가고 있을 뿐. 엄마와 아빠의 양육 방식과 저를 대하는 태도가 잘못되었다고 한다면, 이제까지 당신이 잘 못 살아온 거라 느끼고 그에 대한 상실감에 속상해하는 건 보고 싶지 않아서 그렇게까진 대들지 않겠지만 그래도 엄마, 제 인생은 제거예요. 그 핸들은 제가 쥐고 있을 거고 엑셀과 브레이크도 제가 밟을 거예요. 속도도 제가 조절할 거예요. 그러니까 제발, 이제는 제 핸들은 놓으시고 엄마 거만 신경 써줘요. 나 이제 서른이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