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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서울 Jul 17. 2023

독후감 毒後感


삼십대를 시작하는 서른 살. 그 서른 살이 절반쯤 지났다. 지금 나는 길을 잃었다.


모든게 들쭉날쭉하고 불안하던 스무살 때에 비하면 어느덧 그럴듯한 어른이 되었음에

나름대로의 뿌듯함과 자신감을 느끼던 것이 불과 얼마 전이었다.

그러나 기실 타고난 부박함은 여지껏 어쩌지 못했는지, 약간의 위선만 벗겨보아도 이 안에 고스란히 남아있음을 발견했다.


그게 원인이 되어, 그리고 그 외의 여러가지 다른 원인들이 가세하여, 끝내 관계에서의 상실을 경험했다.

아끼던 장난감을 엄마가 버렸다고 서럽게 울던 일곱살의 상실은 얼마나 직관적이고, 명료하고, 이해하기 쉬웠던가.

그에 비하면 서른살에 경험하는 상실은 턱없이 미울만큼 논리적이고, 숨막히도록 어지럽고, 이해하기도 어렵다.


그리고, 커리어.

늘상 관념과 이상에 경도되어있는 나지만, 어쨌든 두 발 붙이고 있는 현실에서도 기어이 잘 해보고싶은 나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토록 조소하던 명문대 학벌과 그토록 경멸하던 회사원 생활에, 내 발로 질척질척 들어선 것이 아닌가.

안정적이고 지루한 이 직장생활이 내 향후 수십년의 삶에 미미한 온기를 꾸준히 줄 수는 있겠다마는

온기가 그 정도라는 것은 내 삶의 빛 역시 딱 그만큼 뿐일 것임을 나는 처음부터 알았다.

문제의식은 늘 느끼고 있었고, 그래서 지난 2년 반동안 더 나은 커리어로 길을 틀어보겠다고 몇번 씩 발을 구르고 팔을 휘둘러보기도 했다. 그러나 여지껏 커리어 면에서 조금도 나아진 것이 없다. 내 발버둥이랄 것들이 사실 너무 게으르고 짧았기 때문일테다.

그렇게 시간만 흐르는 중에 어느덧 현 직장에서의 내 엉덩이도 무거워졌다. 다른 곳으로 뛰쳐나갈 열정도 에너지도 많이 사라졌다. 스스로 경멸스럽지만, 인정하기가 끔찍하리만큼 싫지만, 나는 지금 안주하고 있다.


스스로에 대한 실망감, 관계에서의 상실감, 경력에서의 권태와 무능감.

지금 나는 길을 잃었다.




길을 잃으면 불안하다. 나는 불안감이 치솟을 때마다 손쉽게 찾는 마약이 있다. 이번에도 그 마약에 손 대기로 했다.

그 마약의 효능으로 말할 것 같으면, 일단 '괜찮다'는 느낌을 준다.

뭘 해야할지도 어디로 가야할지도 모르는 나로 하여금 '그래도 일단 오늘 하루를 성실하게 유익하게 보냈어. 당장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어디론가 좋은 곳으로 데려줄거야'라는 환상을 심어준다.

게다가 실상 아무런 발전없이 답보상태에 있을 뿐인 나에게 세상 사람들이 죄다 "잘했네", "열심히 사는군", "건강한 사람이야"라고 말해준다.

현실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고 길은 여전히 보이지 않지만, 최소한 길이 곧 보일것같은 느낌만큼은 계속 주입해준다. 그 덕에 내 불안감은 잦아든다.

나의 항불안제, 나의 벤조디아제핀. 이 마약의 이름은 바로 독서다.


나는 이 약에 또 손을 대려고 한다. 할 수 있는게 이것밖에 없으니까.




각종 통계와 연구와 매체가 요즘 책 안 읽는다고 호되게 혼내는 '현대인'들과 비교하면

나는 어려서부터 책을 꽤 좋아하고 많이 읽어왔다.

나는 그걸 늘 자랑스럽게 여겼고, 주변 사람들도 그런 나를 긍정하곤 했다.

그런데 그놈의 독서가 과연 좋은것인가? 나는 이제 진심으로 헷갈린다.


독서는 사유를 심어준다.

덕분에 나는 내 주변 사람들보다 단위 시간동안 더 넓은 대상에 대하여 더 깊은 생각을 한다.

시간과 자원이 무한정인 세계에서는 이런 다층적인 사유가 삶을 마냥 풍부하게 해줄 것이다.

여러 선택상황에 대하여 미결의 상태를 너그러이 허용하는 세계에서는 다면적인 사유도 흠될 것이 없을테다.

그러나 유한한 삶에서, 수많은 선택과 결단을 내려야하는 현실세계에서는, 다층적이고 다면적인 사유는 장애가 된다.


어느 연구에 따르면, 연애를 한두 번 해본 사람보다 연애를 여러번 해본 사람의 결혼 만족도가 의외로 더 낮다고 한다. 전 애인들의 각각의 장점들을 모두 경험했다보니, 현재의 단 한명의 배우자의 소박한 자질과 비교할 대상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사유도 마찬가지다. 한두 가지 사유를 하는사람보다 여러가지 사유를 하는 사람의 삶이 더 불만족스럽다. 한 가지 생각이 옳음을 증명하려면 그와 상충되는 수많은 생각들의 틀림을 증명해야하는데, 그 과정이 결코 쉽지 않기 때문이다.

생각이 너무 많은 나는 수많은 명제들 중에서 단 하나의 '좋은 것', '옳은 것'을 선별해내기 어려워한다.

모든 이들의 주장에서 일리를 찾는다. 아니, 찾는 것도 아니다. 그냥 '보인다'.


그렇게 보이는 내 이, 과연 좋은 눈인가?


동서양을 막론하고 어느 문화권에서나 '지혜'는 '본다'라는 감각, '눈'이라는 감각기관과 관련된 것으로 이해한다. 오딘의 눈은 지혜를 상징하고, 불교에서는 깨달음을 얻으면 이마에 제 3의 눈이 생긴다. 영어로 "I see"는 "알겠다"라는 뜻이고, 한자에서 賢(어질 현, 현명할 현)에는 見(볼 견)이 들어가 있다.

그러니 지혜로운 사람은 곧 눈이 좋은 사람이다.


그렇다면 좋은 눈이란 어떤 눈인가

사람들은 흔히들 눈을 포함한 인체의 여러 감각기관을 '외부의 감각을 수용하는 통로'로 생각한다.

그런데 어딘가에서 읽기를, 감각기관은 통로라기보단 오히려 필터에 가깝다고 한다.

즉 불필요한 정보는 거르고, 필요한 정보만 선별하는 것이 감각기관의 핵심적 기능인 것이다.

그러니 좋은 눈이란 것도 역시 마찬가지로, 오만가지 것을 다 보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것만 보는 것일테다.

지혜라는 것도 역시, 오만가지 사유를 다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 중에 필요한 것을 선별하는 것에 달려있다.

사방팔방 다 보는 것이 아니라 봐야할 방향만 치우쳐 보는 것, 즉 편견偏見이다.


내가 예술가라면, 철학자라면, 구도자라면, 모든 주장에서 일리를 보는 것이 좋은 눈이고, 지혜이고, 유용한 능력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술가가 되고 싶었던 수년간의 꿈이 무색하게 나는 보수적인 회사에서 고루한 일을 하는 회사원이다. 나는 다양성보다는 단순성을, 고민보다는 빠른 결정과 행동을 원하는 한국사회에 일원으로 속해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그 일원이며, 나에게 그 일원으로서의 심플함을 기대한다. 그러니 내가 선 이 광장에서 넓거나 깊은 사유는 나의 발목을 잡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불안하게 한다.





요컨대 나는 길을 잃었고, 불안하다, 그래서 책을 읽을것이다

책을 읽으면 나의 불안을 잠재워줄 뿐 현실에서의 진보는 마땅히 없는 것 같다.

다만 쓸데없이 관념과 사유만 늘어나며, 그것은 나를 현실에서의 지혜로부터 더 멀어지게 만든다.


그걸 알아도 담배술을 입에 댈 것도 아닌 나로서는 독서라는 항불안제 외에 마땅히 이 불안을 잠재워줄 것 없다.

그래서 책을 읽는 족족 해독행위를 동시에 해보고자 한다.

그것은 선별이다. 책에서의 온갖 사유를 선별하여 내 것으로 정하는 것.

온갖 정보의 입력으로 망가지고 있는 뇌를

글쓰기라는 출력 행위로 비워내고자 한다.


이 출력행위를 통해 나는 나만의 편견을 세우고 싶다.

이것도 옳고 저것도 맞는 것이 아닌, 선별과 필터링이 가능한 지혜의 기준을 세우고자 한다.


그래서 앞으로 쓸 글을 독(讀, read)후감이 아닌, 독(毒, poison)후감이라고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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