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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연정 Nov 22. 2019

뾰족한 슬픔이 가시처럼 돋아난 흐린 날, 펜을 들다

[N잡러의 잡다이어리] 일상에 감사하기 

어린 시절의 기억은 이제 많이 흐릿해졌지만, 무서운 꿈을 꾸다 이른 새벽에 깨어났던 내 나이 여덟 살의 기억은 여전히 생생하다. 놀란 나를 달래던 부모님의 손길 너머로 정적을 뚫고,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친할머니의 부고를 알리는 소식이었다. 할머니가 계셨던 전라남도 강진은 서울에서 한참 먼 곳이었다. 죽음이 무엇인지 실감할 수조차 없던 어린 내게 그 거리는 생과 사의 거리만큼이나 아득하게 느껴졌다. 할머니는 극심한 차멀미로 아버지가 취업 후에 정착한 서울에는 정작 한 번도 와보지 못하셨다 한다. 사랑했던 막내아들의 사는 모습을 보기 위해 차에 몇 번이나 올라타셨지만, 읍내 이상의 거리를 끝끝내 벗어나시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할머니가 멀리 사셨던 까닭에 자주 뵙지 못했고, 그만큼 할머니와의 애틋한 추억은 없다. 하지만 직업의 특성상, 해외로 나가는 일이 잦았던 나는 비행기를 탈 때면, 늘 할머니를 떠올렸다. 멀리 있는 자식을 그리면서 마음으로는 수만 번 그렸을 서울, 그리고 원거리의 여행은 미처 꿈꿀 수도 없었을 할머니를 대신해 떠나는 듯한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할머니가 갖지 못했을 어느 하루, 그 특별한 순간을 일상으로 보내는 것이 내게는 더없는 사치처럼 느껴졌다. 

지난 해 12월, 나는 겁에 질려 깨어났던 어린 시절의 그날처럼 평소보다 한참 이른 아침에 깨어났다. 그리고 어머니로부터 친척오빠의 부고를 전해 들었다. 믿고 싶지 않은 소식이었기에 악몽이기만을 간절히 바랐다. 

고종사촌 지간이었던 오빠는 서울로 대학을 진학하면서 우리 집에 잠시 머물게 되었다. 전라남도 광주가 본가였기에 서울에는 기댈 곳이 없었던 까닭이다. 오빠는 ‘분위기 메이커’라는 수식어에 딱 맞는 사람이었다. 누군가를 비하하거나, 불편하게 만들지 않고도 특유의 넉살과 호쾌한 웃음으로 함께 하는 이들을 편안하게 해주는 법을 알고 있었다. 멀다면 멀고, 가깝다면 가까운 친척 사이였지만, 한창 예민했던 10대 시절의 나에게 힘과 용기를 불어넣어준 사람이기도 했다. 글짓기 상을 타온 어느 날에는 내게 글을 참 잘 쓴다며, “나중에 꼭 글 쓰는 사람이 되라!”고 격려해주었다. 그 후로도 “요즘은 어떤 글을 쓰고 있느냐?”고 종종 묻곤 했는데, 그 말 한마디에 마치 작가라도 된 것처럼 마음이 들뜨곤 했다. 지금은 누군가의 칭찬을 들어도 마냥 기뻐할 수 없는 어른이 되었지만, 그때는 사소한 칭찬 한마디에도 어깨가 으쓱해지던 시절이었다. 

이후 오빠가 하숙을 하게 되면서 우리 집을 떠났고, 취업을 하고 난 이후에는 자주 얼굴을 보지 못했다. ‘사는 게 바쁘다’는 그 흔한 이유였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오빠는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을 하게 됐고, 나와 우리 가족, 친척 모두는 함께 축하인사를 전하면서 결혼식에서 오빠의 행복을 빌어주었다.  

그러나 조카를 낳은 지 열흘도 채 안 되어 오빠의 부인이 세상을 떠났다는 비보가 전해졌다. 오빠가 결혼한 지 3년이 채 되지 않았던 어느 날이었다. 처음에는 너무나도 믿기지가 않아 한참을 멍하게 있었다. 조금씩 현실임을 실감하게 되면서 남겨진 친척오빠와 이제 세상에 갓 태어난 조카가 안쓰러워 눈물을 쏟곤 했다. 

공연기획자로 일하며 서울과 지방, 해외를 오가는 바쁜 일정을 보내고 있던 나는 그 핑계로 장례식에 가지 못했고, 조카의 돌 때도 광주에 끝끝내 가지 못했다. 그 대신에 조카를 위해 돌 반지와 편지를 고모 편으로 보냈다. 아직 글을 읽지 못하던 조카였지만, 편지 속에 담은 마음이 언젠가는 전해지리라 믿었다. 그때는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이후 오빠는 광주에서 더 먼 곳으로 떠나 새로운 일을 시작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얼굴을 보기는 어려웠다. 광주에서 열린 축제의 통역으로 일하게 되어 광주에 머물게 되었을 때, 나는 고모를 찾아뵈었다. 광주를 찾았던 첫 번째 해에는 오빠와 조카 모두 볼 수 없었지만, 두 번째 해에는 어느새 키가 훌쩍 자란 조카를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오빠는 멀리서 일을 하며 지내고 있었기에 볼 수 없었다. 오빠의 안부를 묻자, 고모는 전화를 걸어 오빠를 바꿔주었다. “오빠, 저예요! 저 광주에 와 있는데, 광주 안 오세요?”라고 나는 통성명도 없이 반가움을 표시했다. 그러나 오빠는 목소리만 듣고는 내가 누군지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내 이름을 듣고서야 어릴 때보다 목소리가 성숙해져 몰라봤다며 연신 미안해했다. 그때도 오빠는 여전히 배려심이 넘치는 사람이었기에, 너무 오랜만에 연락한 내가 무정했다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못했다. 

다만 한없이 밝았던 예전의 목소리는 사라지고 없었다. 오빠가 내 목소리를 낯설어 한 것처럼, 나도 오빠를 타인처럼 멀게 느꼈다. 오빠는 지금은 전주에서 일이 바빠 갈 수 없다며, 다시 광주에 오게 되면 미리 연락을 달라고 말했다. ‘나중에 꼭 얼굴을 보자’는 기약이 오빠와의 마지막이었다. 

부고 소식을 듣고, 그때 전주에 가지 않았던 나를 탓하고, 후회했다. 그리고 또 한 번 나중에 두고두고 후회할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당시 한 공연예술축제의 총괄로 일하고 있던 나는 개막까지 한 달이 채 남지 않은 시기에 자리를 비울 수 없다는 이유로, 오빠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봐주지 못했다. 직업의 특성상 야근이 일상이었지만, 그날 8층 사무실에서 내려다본 세상은 온통 잿빛이었다. 전 직원이 퇴근한 후에 사무실을 홀로 지키면서 일을 하던 나는 참았던 눈물을 펑펑 쏟았다. 

오빠는 전주로 삶의 터전을 옮긴 뒤부터 주로 위험한 고층 건물의 공사 일을 맡아 했다고 한다. 문득 젊은 시절, 돈을 벌기 위해 중동에 가서 일하셨다는 한 선생님의 말씀이 생각났다. 고층건물의 용접이 주된 업무였던 선생님은 쉬는 시간이면, 건물의 꼭대기 층에서 낮잠을 청하셨다 한다. 어떤 마음가짐이었을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던 나는 굳이 그랬어야 하는 이유를 물었다. 과거의 순간을 마치 현재로 불러온 듯한 눈빛으로 그 선생님은 두려움과 친해지기 위함이었노라고 나지막이 읊조렸다. 높이가 주는 위압감에 지고 만다면, 일은 늘 공포의 무게로 자신을 짓누를 것이기에 삶을 지탱하는 업으로서 영위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으리라. 그 선생님처럼 고층 건물에서 일하는 삶을 일상으로 받아들이면서 살았을 오빠를 떠올렸다. 그 누군들 위태로운 일상에 단련되고 싶겠는가. ‘오빠는 그런 고된 날들을 보내며 무엇을 생각했을까?’ 이해해보려 애썼지만, 그 마음의 일부도 제대로 이해할 수는 없었다. 

장례식에서 돌아온 부모님은 쉬이 잠들지 못하셨고, 나 역시 자다 깨다를 반복했다. 새벽에는 부모님에게 오빠의 이야기를 들었다. 오빠의 핸드폰 속에는 저장된 전화번호도 몇 개 되지 않았고, 영정사진으로 쓸 만한 사진 한 장도 제대로 남아있지 않아 오랜 친구가 가지고 있었다던 사진을 받아 부랴부랴 영정사진으로 썼다고 한다. 주변 사람을 늘 웃게 했으면서 ‘어째서 그 슬픔과 고통을 주변 사람들에게 털어놓고 나누면서 조금이라도 덜어내지 못했을까?’ 원망스럽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은 그 마음을 어렴풋이 알 것도 같다. 항상 주변에 웃음을 가져다주었던 오빠는 그 밝음이 어둠으로 바뀌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혼자 감내하려고 했던 것이리라. 항상 웃던 오빠가 겪은 일에 담담해질 만큼 우리가 가진 슬픔의 형체는 뭉툭해지지 못했을 테니까. 오빠의 서글픈 얼굴이 막 깎아놓은 뾰족한 연필심처럼 우리 마음을 아프게 찌를까봐 염려했던 것 같다. 

어렸을 때, 웃는 사람은 항상 행복해서 그런 줄 알았다. 그때는 사물의 겉만 보았고, 행간을 읽을지 몰랐다. 보이는 것을 곧이곧대로 믿고, 하는 말 그대로를 진실로 받아들였다. 그때 바라본 오빠는 늘 행복한 사람이었다. 오빠도 분명 힘든 일들이 있었을 텐데 그때는 철이 없어 짐작조차 할 수 없었고, 타인의 마음을 제법 헤아리게 된 지금은 오빠가 세상에 없다. 

얼마 전 다른 친척 오빠와 통화를 하면서 생전의 오빠를 추억했다. 여느 날과 다르지 않았던 그때, 오빠와 함께 했던 시간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오빠를 다시 볼 수는 없지만, 오빠의 진면목을 아는 이들과 지난 기억을 꺼내볼 수 있다는 것이 단 하나의 위안이라면, 위안이다. 

우리는 지극히 평범한 일상을 뒤흔드는 수많은 사건들을 맞닥트리면서 살아간다. 그중에서 가장 슬픈 것은 곁에 있는 이들이 하나둘씩 떠나간다는 사실이다. 생이라는 시작이 있는 것처럼, 누구에게나 마지막이 있다는 것은 자명한 명제다. 그렇지만 한마디 준비나 예고도 없이 한 사람이 생을 마감하는 일은 언제나 허무하고 쓸쓸하게 다가오고는 한다. 

오빠의 죽음 이후로, 나는 일상을 더욱 면밀하게 돌아보게 되었다. 문득 별 다를 것 없이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시간을 너무나도 안일하게 흘려버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은 그 누구도 예언할 수 없기에, 다음으로 미루는 습관이 얼마나 어리석인 일인가를 생각했다. 바로 지금 이 순간이 아니면 평생 하지 못하는 일이 되거나, 전하지 못하는 말이 되어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때 후회해도 이미 늦은 일이다. 경험 이후에 찾아오는 깨달음이 더욱 통렬하게 다가오는 것은 이 때문이리라. 

하루를 더욱 소중하게 가꾸고, 보다 특별한 날들로 남기기 위해 일상의 기록들을 글로 남겨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유독 사진 찍히는 것을 어색해하고 싫어했던 내가 누군가를 만나면 꼭 사진을 찍자고 제안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우리는 역설적으로 소중한 사람의 부재 이후에야 그 존재의 가치를 깨닫는다. 나는 그 부재의 슬픔에 익숙해지기보다는 그 슬픔을 더욱 통렬하게 느끼는 사람이고 싶다. 그만큼 내 곁을 떠나간 사람들을 쉽게 잊고 살고 싶지 않기도 하거니와, 힘든 상황을 겪고 있는 주변 사람들의 아픔을 공감하고 위로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기 때문이다. 그것이 평범하게 반복되는 하루를 퇴화된 감성이나 무미건조한 마음가짐으로 헛되이 흘려보내지 않는 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고층건물을 보면 오빠를 떠올리고, 비행기를 타거나 멀리 여행할 때면 여전히 할머니를 생각한다. 그러면서 먼저 떠난 이들이 가질 수 없었던 그 하루를 더욱 소중히 여기고,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면서 살아야겠다고 재차 다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먼저 떠난 오빠가 불쑥 그리워지는 순간이 있다. 오빠가 잠들어있는 납골당에 찾아가 이 글을 전하면서 감사인사를 전해야겠다. “나는 오빠 덕분에 일상을 더 감사히 여길 줄 알게 되었고, 더 열심히 글을 쓰게 되었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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