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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경민 Dec 13. 2020

노량진은 언제부터 고시촌이 되었을까?



서울 다시 보기

Re-Play Seoul 프로젝트 첫번째

[노량진]편


깜빡이듯 스쳐가는 노량진에 대한 기억은 그리 많지 않다. 회를 먹으러 수산시장을 간 것 외에도 내가 상상했던 고시촌의 풍경과는 많이 달라서 놀랬던 적이 있다. 전국에서 모인 학생들이 공부를 하면서 고군분투하는 모습이 있을 것이고 숨죽이듯 조용한 분위기일 거라 생각했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좁은 골목길이지만 불빛이 환한 조명과 오밀조밀 모여 자리한 식당과 카페들의 풍경을 마주 하면서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물론 좀 더 골목으로 들어가면 분위기가 달라지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시촌과 일반적인 동네와 다르다고 느낄 만큼의  차이점을 발견하지는 못했다.


노량진에서 경험했던 흩어진 기억 조각들을 모아 짧게나마 펼쳐 보자면 이렇다. 회를 먹으러 노량진 수산시장에 갔고, 엉터리 생고기를 먹으려고 1시간 대기를 했다. 또, 고시촌 수험생들의 힘든 마음을 들어보겠다고 좌판을 깔려고 준비했다가 일이 꼬여서 시작도 못했던 순간들이 있었다. 회식을 하러 오기도 했는데, 이렇게 늘어놓고 나니 노량진의 대표적인 장소인 고시촌과 수산시장과는 별개로 이곳에 방문했다는 것이 더 놀라운 것 같다.


아마도 직접적인 연관관계가 없어서 그런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내가 만약 이곳에서 공부를 하는 고시생이었다면, 조금은 다르게 보이거나 조금은 다르게 경험하지 않았을까?


그렇게 이미지로만 존재하던, 무엇인가를 먹기 위해 찾던 노량진이 생활 반경 안으로 들어오게 되면서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다. 버스 창밖으로 바라보는 풍경 자체는 여전히 같지만 우리가 알지 못하는 수많은 이야기들이 숨겨져 있는 느낌이 들었다. 노량진에 고시촌이 왜 형성이 되었고, 언제부터 고시촌이 되었을지, 연결고리가 전혀 없어 보이는 수산시장은 왜 있으며, 사람들은 왜 동굴 같은 통로를 거쳐 그곳으로 향하는지.  고시촌이지만 왜 이런 풍경과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는 것인지 등등. 눈으로만 보면 전혀 알 수 없는 알려지지 않은 것들에 대한 궁금증을 하나씩 하나씩 파고들기로 했다. 하나씩 밝히다 보면 현재가 보일 것이다.



이전의 역사


버스를 타고 노량진을 지날 때마다 창밖을 바라보면 종종걸음으로 학원으로 향하는 이들을 쉽게 볼 수 있고, 버스를 탄 손님의 옷깃에서 나는 비릿한 냄새를 맡을 수 있다. 그래서 가끔은 굳이 고개를 들고 있지 않아도 어느 순간 버스가 멈춰 섰을 때 '여기가 노량진이구나'라고 충분히 알 수 있다. 누군가 "노량진?"이라고 질문을 던졌을 때 떠오르는 대표적인 키워드인 고시촌과 수산시장의 시작은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대성학원

노량진은 1899년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인 경인선의 시발지이긴 했지만, 한강 이남에 위치한 과천군과 시흥군에 속했다. 서울시에 편입된 것은 1973년이었기에 그 당시는 마을이 여럿 모여 있는 주거지였다. 1970년대 들어서 도심 확장 정책으로 강남 개발이 시작되었고, 이때 강북에 있던 학원 중 일부가 강남으로 이전하게 된다. 그중 한 곳이 바로 [대성학원]이다. 1965년 서울 종로구 수렴동에 재수학원인 대성학원을 설립했고, 1975년 노량진으로 이전하였다. 이후 1980년대에는 공무원 공채시험 및 경찰, 임용고시와 연관된 학원들이 들어오면서 고시촌이 형성되었다.


 

노량진 수산시장

한강이 가까이에 있어 마치 수산시장이 형성된 건 당연하게 느껴지겠지만 노량진은 한강의 남북을 잇는 나루터 중 하나였다. 한강 이남의 모든 조운*(현물로 수취한 각 지방의 조세와 공물을 일정한 장소에 수납 후 배를 이용하여 운반하는 조직) 업무와 여객업무가 이루어지는 교통의 요지였다. 어선이 들어와 수산시장이 존재하긴 했지만 한국 최대 수산물 도매시장은 <경성 수산>이라는 이름으로 철도역과 가까운 의주로에 위치해 있었다. 1971년, <한국냉장>이라는 회사가 노량진에 도매시장을 만들면서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노량진 수산시장이 형성된 것이다.



결국, 우리가 '노량진?'이라고 질문을 던졌을  떠오르는 대표적인 키워드는 처음부터  지역에서 형성된 것이 아니라 도심의 기능이 분산되고, 옮겨오면서 현재의 모습으로 완성된 것이다. 수산시장이 노량진으로 이전하게  이유는 찾지 못했다. 다만, '관리 운영자가 변경되었고, 냉장창고가 있고, 한강과 인접한 '이기 때문이라는 정도다. 그렇다면, 대성학원과 노량진 수산시장이 형성되기 이전의 모습은 어땠을까?


다행히 그 시절의 노량진에 살았던, 그 시간들을 기억하는 이가 있어 그의 말을 빌려 전해 본다.


"사육신묘를 돌아 차를 세웠을 때 소방서가 그대로 있는 걸 보고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현대식 유리 건물로 다시 지어졌고 빨간 소방차 하나 볼 수 없었지만 소방서 자리는 그대로였다. 뒤돌아 보니 극장은 간데없이 사라졌다".  p221

"노량진은 도진 취락으로 시작되었던 마을이다. 상류의 한강진, 하류의 양화진과 함께 서울로 통하는 중요한 길목이었으며 한양과 한강 이남 지방을 연결하는 요충지였다. 그리고 근대가 시작되면서 달려온 기차가 맨 처음 멈추어 섰던 곳이 바로 노량진이었다." p226

"마을은 형체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기억 속에서도 그랬고 실제로도 그랬다... (중략) 별장의 아래쪽에 엎드려 있던, 이제는 사라져 버린 마을, 마을의 판잣집이 늘어서기 전의 역사도 있었을 것이다. 그곳은 강을 건너는 나루터 마을, 도진 취락이 먼저 자리 잡고 있던 곳이다. 이곳이 서울로 편입된 것은 1936년이다. 그 전에는 경기도 시흥 땅이었다. 나루는 노량진이라고 불렀다. 백로가 노딜던 나루터라는 뜻이다. 수양버들이 울창하여 노들나루라고도 하였다." p258 - p259

"1899년에 최초의 철도인 경인선이 제물까지 개통되고 다음 해에 한강철교, 1917년에 한강 인도교가 건설되면서 노량진은 나루터로서의 기능을 잃어버렸다. 그리고 노들나루터는 오갈 데 없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남루한 동네가 되기 시작했다. 마을은 철교에서 강변을 따라 별장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1968년 철거되기 전까지 나는 그곳의 마지막 거주자였다." p260 - p261

 < 김진송, 기억을 잃어버린 도시 중에서>


작가의 글을 보니 현재의 노량진에는 과거와 현재의 시간이 함께 머물러 있는 듯 보인다. 소방서는 출근길 버스 안에서 봤었고, 사육신 묘 또한 공원으로 조성되었으니 과거로부터 계속 시간이 이어진다. 극장은 본적이 없고 나루터 마을과 판잣집 또한 보이지 않는다. 대신 나란히 선 고층 아파트와 시장이긴 하지만 현대식 건물로 지어진 수산시장이 위치해 있다


그것들은 왜 사라지게 된 걸까? 아무도 이유를 말해주진 않는다. 대신 건물들이 남아 그 때 그 시간을 말해줄 뿐이다. 건물은 사람처럼 말을 할 순 없지만 그 건물이 존재하기 때문에 과거의 시간들을 역추적해 볼 수 있기도 하고,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져 존재의 유무를 알 수 없지만 기억 속에 남아 다시 꺼내 볼 수 있다.


시대를 넘나드는 시간들이 뒤섞여 존재하는 노량진은 시대가 변화하면서 끊임없이 도시의 시간들을 만들어가고 있다. 이런 과정들을 지켜보고 있으니 가끔은 그런 생각도 든다. 도시는 얼마나 계속 변화해야 멈추는걸까? 이런 흐름에서 노량진은 얼마나 더 모습을 바꿀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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