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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경민 Aug 08. 2018

요즘 핫하다는 그 동네, 혹시 알고 오셨나요?

<서울, 젠트리피케이션을 말하다>와 익선동 166번지

여긴, 어떻게 알고 오신 거예요?

실상과 다른 언론의 자극적인 보도와 SNS를 통해 일파만파 퍼져 유명세를 타게 되면서 일명 '핫한, 뜨는 동네'로 일컬어지고 있는 서울의 여럿 동네들이 있다. 주로 맛집이나 이색적인 공간으로 화제를 몰아가며 사람들의 발길을 유도한다. 유혹에 이끌린 많은 사람들이 앞치락 뒤치락 혹여나 트렌드에 뒤질 새라 해당 동네를 찾는다. 동네의 속사정엔 애초에 관심 따위 없고, 그저 예쁘고 핫한 곳, 인증숏이 잘 나오는 곳을 찾는 것이 전부다. 그래야 마음이 놓이기 때문이다. 그런 이들에게 "여기에 오게 된 이유가 무엇인가요?"라는 질문을 던지면 아니나 다를까 돌아오는 대답은 "친구가 여기 유명하데서요.", "SNS에서 많이 봤어요." 정도이고 그 이상의 질문을 던지면 답변을 듣기가 어렵다.

작년(2017년) 한 해 동안 도서 <서울, 젠트리피케이션을 말하다>을 기반으로 하여 목차에 수록된 동네를 직접 답사하고 인터뷰도 하면서 동네의 속사정을 알아보는 답사를 진행했다. 언론에서 반복적이고 지속적으로 강조되고 있는 부분들이 실제로는 어떤 과정을 거쳐 진행되고 있는 것인지, 주민들의 반응은 어떠한지, 젠트리피케이션의 대상이 되는 당사자들은 어떤 분들인지 등 여러 가지 사항들을 직접 확인해보고 싶었다. 그 범위나 깊이는 어느 정도 진행될지, 해야만 하는 것인지에 대한 계획을 세우진 않았다. 현장에 가서 분위기를 보고 가능하다면 현지 주민들이나 방문객과 인터뷰를 할 수 있다면 좋은 것이고 아니면 말고 정도로 주제는 무겁지만 진행 단계는 다소 가볍게 진행하기로 했다.


그렇게 시작된 현장 답사를 통해 단순히 '힙하다'라는 이유만으로 동네를 찾기에는 다소 무거운,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그들만의 속사정들이 존재했다 관심을 가지고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전혀 느낄 수 없는 무게감과 답답함은 전혀 다른 동네임에도 불구하고 비슷하게 느껴졌다. 아마도 뜨는 동네에서 발생하는 문제점이 비슷한 패턴으로 반복 진행되어 그 분위기에 고스란히 묻어나서 일 것이다.


사실 가장 안타까웠던 것은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방문하는 동네에 대해 모르고 온다거나 애초에 관심 조차 없다는 것이었다. 동네에 관심이 있다기보다 동네 안에 있는 '핫한 그곳'에 집중할 뿐이었다. 물론 안다고 해서 그 동네의 사정이 달라진다거나 호기심으로 찾은 동네를 굳이 알아야 하는 의무는 없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조차도 관심 없었던 경우가 많았으니. 그래서 이 문제는 옳고 그름을 따진다거나 잘잘못을 구분 짓는 행위와는 상관없다. 단지, '이 동네에 어떻게 오게 된 거예요?'를 물었을 때 '사진이 잘 나와서, 그냥 이쁘니깐'이 전부가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일 뿐이다.

요즘 핫하다는 그 동네, 익선동

익선동 태그 검색어 (2018년 5월 2일 기준)
1위: 익선동 한옥마을 4,562개
2위: 익선동 나들이 2,969개
3위: 익선동 동남아 2,012개
4위: 익선동 술집 1,933개
5위: 익선동 핫플 1,434개

가장 최근에 방문했던 익선동은 내가 처음 방문했던 2016년 이후 3년이라는 시간 동안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했다. 금요일 오후 6시. 저녁식사 시간과 맞물린 탓에 한 바퀴 돌아보며 먹을 곳을 선택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두 사람이 걷기에도 버거운 좁은 골목길에 가득 찬 사람들을 보니 그럴 마음이 싹 없어졌다. 돌아보기도 전에 이미 피곤해진 상태. 게다가 어딜 가나 웨이팅은 기본이었다. 식사를 위한 공간보다는 가볍게 술을 한잔 하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공간들이 많아 선택의 폭도 좁은 편이었다. 불과 1년 전만 해도 게스트하우스였던 곳은 슈퍼 같은 분위기의 술집으로 변화하였고, 여관이었던 곳은 리모델링 공사를 통해 호텔로 변모하였다.

세탁소가 있던 자리도 커피숍이 자리를 대신했다. 기존의 흔적들이 조금씩 사라지고 새로운 색깔을 입혀 나가며 기존에 존재하던 익선동의 정체성은 점점 변화했다. 하지만 정작 익선동이 과거에 어떤 동네였는지 관심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마도 처음부터 변화된 익선동을 접한 사람이라면 그럴 만도 하다. 하지만 여전히 골목 한 귀퉁이에 있는 한복집과 익선동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만들고 있는 한옥 건물, 돈암동과 연결되는 갈매기 골목 등 곳곳에 남아 있는 과거의 흔적을 세심하게 살펴본 이라면 과거에 이곳이 어떤 동네였는지 관심 가져 볼 만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혹시 이전에 어떤 곳이었는지 아세요?

현대식 고층빌딩이 들어 선 세종대로 인근과 종로 1,2가와 달리 종로 3가의 익선동에는 유독 기와지붕이 많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과거의 익선동은 일제강점기 때 발생한 심각한 주택난을 해결하기 위해 한 조선인 건축가가 집단적으로 개발한 한옥지구이다.

넓은 토지의 땅을 차지하며 관료들이 주로 살았던 고급 한옥 대신 좀 더 많은 사람들이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좁은 땅을 쪼개서 서민들에게 대량으로 공급하는 개량 한옥을 지었던 곳이다. 그 당시 수많은 일본인들이 경성에 유입되면서 자신들은 고급주택을 지어 살았지만 정작 경성에 살고 있는 조선인들은 살 집이 부족해 임시방편으로 지은 판잣집에 살거나 천변에서 노숙을 했다. 뿐만 아니라 집이 있어도 만주로 떠나면서 제대로 관리가 되지 않고 폐가처럼 방치되는 집도 있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건축을 하는 사람으로서 조선인들에게 땅을 쪼개서라도 주거공간을 마련하고자 했던 것이다.

익선동 166번지

대량으로 제공된 개량 한옥단지의 정확한 번지수는 익선동 166번지이다. 1920년대에 조성되었으니 벌써 100년이 다 되어간다. 하지만 이제 그 어디에도 과거 익선동 166번지 흔적은 없다. 원래 서민들의 주거지였던 곳이 상업공간으로 변질되면서 더 이상 익선동은 과거 건축가가 조성했던 한옥마을로서의 기능을 상실했다.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한옥마을'이라는 타이틀은 이제 어울리지 않는다.


"1925년 <경성 편람> 속 '건축계로 본 경성'에서 그가 언급한 내용을 보면 익선동의 개량 한옥이 탄생하게 된 배경을 알 수 있다. 대청에 유리문을 다는 등 전통과 근대의 문화가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새로운 시도를 했다. 식민지 하에서 고달프게 살아가는 이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편의를 제공하기 위해 당시에는 파격적으로 수도와 전기를 설치했고, 환기와 일조권 등도 신경 썼다. 익선동은 서민을 위한 근대 한옥지구였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는 창덕궁과 가까워 왕실 시설이 많았다. 특히 제25대 왕 철종이 익선동에서 나고 자랐다. 강화도령이라는 철종의 별칭은 강화도로 귀양을 가서 얻은 것이다. 철종은 임금이 된 후 어릴 때 살았던 익선동에 아버지 전계대원군의 사당인 ‘누동궁’을 세웠다. 그래서 익선동은 현대에 이르러 ‘누동궁 길’이라는 지명을 가졌다. 지금은 도로명 주소를 사용하기 때문에 사라져 버린 이름이지만…."

<2017년 3월 19일 자, 퀸 프리미엄 기사 내용 일부 발췌>

왕실의 궁이 있던 자리이기도 했던 익선동은 과거로부터 이어져 오는 골목길을 가지고 있지만 골목길을 궁금해하는 이도, 익선동의 역사를 궁금해하는 이도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아 보인다. 그저 '힙하고 핫하다'는 소문만 듣고 1시간 넘게 웨이팅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남들 다 하는 인증숏을 남기며 소비하기 좋은 공간으로 재탄생한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오진암과 유명인들

1960년대에는 현재 엠버서더 호텔 자리에 오진암이라는 유명한 요정이 있었다. 이와 연관하여 인근에는 한복집이 많이 있었다. 익선동 골목에도 유명한 한복집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그중 한 군데가 바로 형제 한복이다. 익선동이 순식간에 변화하는 상황에서도 꿋꿋이 남아 있던 형제 한복도 카페가 생긴다는 이유로 이사를 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2017.9월 촬영 사진

"익선동 166번지에 자리한 마지막 한복집 '형제 한복'은 지난 6일 마지막 바느질을 마치고 근처의 다른 동네로 이사를 떠났다. 다섯 평 한옥에서 보증금 200만 원에 월세 30만 원으로 3년간 한복 저고리를 지어오던 노정자(72)씨와 임형순(70)씨가 집주인으로부터 "자리를 비워달라"는 통보를 받은 건 두 달 전쯤. "카페를 차리겠다"는 이유였다. 형제 한복 바로 옆에서 한복 치마를 주로 만들던 '정화 한복'은 지난달 이사를 떠났다. 익선동 한옥마을 초입에 있는 '충신 한복'도 여든을 넘긴 할머니가 장사를 쉬는 중이다. 형제 한복의 디아스포라는 3년 전 시작됐다. 교동초등학교 뒤편인 익선동 34번지에 한때 터를 잡았지만 역시 카페를 차린다는 건물주에 쫓겨났다.

<2018년 4월 22일 자, 노컷뉴스 내용 일부 발췌>

형제 한복을 직접 찾아 가보니 이미 집은 비워져 있었고, 공사 중이었다. 뜯긴 창호지와 골목길에 놓여 있는 자재들을 보니 생각이 많아졌다. 때마침 짐을 빼는 장면도 목격했다. 이 골목에 있던 철물점도 어느새 문을 닫아서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는데 어느새 사람의 흔적 대신 공사가 시작되려는 기미가 보이기도 했다.

익선동 사람들

유명한 가수나 배우들도 익선동에 많이 살았고, 이후에도 여전히 가난한 서민들이 살며 서로를 다독이며 삶을 이어 갔던 곳이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사람이 사는 집을 찾기란 손에 꼽을 정도다. 다큐 3일을 통해 알게 된 이상화 할머니와의 대화를 통해 2017년의 익선동 현 상황을 조금이나마 짐작해 볼만 했다.



할머니: "집 팔았어. 이탈리안 음식 하는 사람이 와서 샀어. 올 겨울에는 이사 가야지."

본인(나): "어디로 가세요?"

할머니: "저기 바로 앞에 낙원 아파트. 아직 알아보진 않았는데 이제 봐야지 뭐"


2017년 7월 어느 날의 대화 내용이다. 할머니와 짧은 만남을 뒤로한 채 8개월 뒤쯤 찾은 익선동. 예상했던 이태리 음식점은 아니었지만 할머니 집은 정말로 다른 곳으로 바뀌어져 있었다. 계획하고 계셨던 낙원아파트로 가셨을까? 아니면 다른 곳으로 가셨을까?

할머니 집은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는 곳 중 한 곳이 되었다.

익선동 골목을 구석구석 살펴보니 이젠 정말로 사람이 살고 있는 집을 손에 꼽을 정도로 대부분 상점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곳을 처음 방문하는 이들은 분명 이색적인 가게들이 모여 있는 골목으로 기억하고 즐길 것이 뻔했다. 내가 처음 홍대를 보면서 개성 넘치는 사람들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모여 24시간을 즐기는 정말 '핫'한 동네라고 알게 된 것처럼 말이다. 이후에 홍대에서 젠트리피케이션이 가장 먼저 일어났었고, 서교 365가 있었다는 것도, 예전에 기찻길이 지나가던 동네였다는 것도 한참이나 지나서였으니. 아마 이것도 관심 가지고 들여다보지 않았더라면 아마 계속 홍대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그저 '핫한' 장소로 존재했을지도 모르겠다.

과거의 역사가 존재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 역사는 묻혔고 새로운 변화에 힘입어 트렌디한 동네가 되었다. 옛 골목을 유지하면서 동네의 매력을 만들어가겠다던 어느 누군가의 초심은 과연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변화 자제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변화에도 시간과 이해가 필요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 전제에는 사람들의 관심과 동네에 대한 앎에 대한 필요성도 강조하고 싶다. 더군다나 익선동은 가난한 이들에게 좀 더 저렴한 가격으로 집을 제공하기 위해 조성한 한 조선인 건축가의 바람이 담긴 동네라는 것을 잊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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