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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경민 Jan 12. 2022

우리가 사는 도시를 잘 이해하기 위해 새겨볼 문장들

첫 번째 


도시 서울을 바라보다 보면 가끔, 이해가 되지 않는 순간들이 있다. 아무리 답을 찾으려 해도 쉽게 찾아지지 않는다. 그럴 때 마다 연관 키워드와 관계된 서적들을 골라 내어 찾으려고 애를 쓰지만 속 시원하게 해결된 적은 별로 없다. 다만, 그 과정에서 발견한 문장들은 내가 찾던 답과는 상관없이 생각해 볼 꺼리를 던져 주곤 했다. 그러다 문득 다른 것과 연결되기도 하고 그 과정에서 답을 찾기도 하고 답은 없지만 나만의 결론을 내리기도 하는 경험들을 안겨주었다. 이해되지 않는 도시의 현상들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도움 받았던 내용들을 잊지 않고 오랫동안 기억하고자 이곳에 남겨두려 한다. 아마도 그때 그때 와 닿는 문장이 달라서 무엇에 집중하고 있었는지 그 흐름이 어떻게 변화하게 되는지 읽을 수 있을 것이다. 



2022.1.12의 문장들


“우리나라 공간연구의 저발전을 설명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요인은 지역단위의 정체성 및 자율성 부재다. 서구 학계에서 공간지식은 도시의 일상적 삶과 밀접히 연관되어 생산되고 축적되어 왔다. 이는 중세 자치 도시의 전통을 계승한 지방자치의 오랜 역사 때문이다. 말하자면 도시의 주인은 원천적으로 시민이며, 시민의 생각과 선택에 따라 도시의 현자와 미래가 바뀔 수 있다는 전재와 기대가 기본적으로 깔려 있다. 그곳에서는 살기 좋은 도시에 대한 사유와 성찰이 일찍부터 고무되어 왔고, 이를 배경으로 도시의 인문사회학 자신의 존재감과 효능감을 지속적으로 키워 왔다. 선진국일수록 도시나 도시계획 관련 학과나 전공의 위상이 높고 인기도 많은 것은 이런 연유에서다. 이에 비해 우리는 시민이 도시의 진정한 주인이 되어 본 경험이 거의 없는 나라다. 제대로 된 시민혁명을 거치지 않았던 터라 성숙한 시민의식이 있을 리 없고 남부럽지 않은 시민교양 또한 있을 수 없다. 그러다 보니 일반 시민들이 도시공간 문제에 갖는 관심 역시 진정성의 측면에서는 갈길이 멀다. 

게다가 공간자치의 빈곤 혹은 부재는 지역 차원에서 공간지식이 축적될 기회를 배제해 왔다. 서구에서와는 달리 우리나라의 도시담론과 도시지식은 “국가적 차원의 도시 행정 및 도시계획 집단 주도로 형성” 되었고 그런만큼 지역학의 성격보다는 통치술의 일환에 더 가까웠다.”

<공간으로 세상 읽기, 전상인>



“인간의 삶은 언제나 시공간적 맥락 속에 위치한다. 공간과 장소를 통해 구성되는 지리적 맥락은 그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무척 일상적이고 익숙한 탓에 특별한 주목을 받지 못할 때가 많다. 이는 맥락이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너무 당연한 것이기에 새삼 의식적으로 주목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마치 물고기처럼 일상의 삶 속에서 지리적 맥락을 잊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지리학은 바로 그러한 맥락과 존재의 관계를 밝혀준다. 그런 의미에서 지리학자는 “우리가 ‘물’ 속에 처해 있는 존재임을 깨달을 수 있도록 해주는 특이한물고기이자 “맥락 속에서 헤엄치며 맥락을 탐구하는 물고기” 인것이다. 장소란 바로 이러한 지리적 맥락과 우리의 문화적 삶이 상호 교차하면서 구체화되는 산물이다.” 

<이주와 로컬리티 재구성,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계획가들은 도시를 이해할 수 있다고 믿는다. 기록을 뒤지고 그것을 분석하면 대상을 이해할 수 있고 그 정확한 이해를 바탕으로 옳은 계획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하지만 기록할 수 없거나 기록할 가치가 없다고 여겨져 순간만 존재하는 수 많은 행위들은 어떻게 기록하고 연구할 수 있을까. 그 기록되지 않는 행위가 가진 성질을 누가 무의미로 단정할 수 있을까. 그 순간의 가치를 담지 못한 데이터는, 그것의 분석은, 그로 인한 계획은 과연 옳은 것일까. 우리는 천 개의 눈을 갖지도 못했고, 사라진 실체들은 기억도, 기록도 할 수 없다.

< 예술이 말하는 도시미시사, 김정은/서정임/정이삭 >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문래동이란 곳의 어떤 이미지들은 부서졌다. 공공기관(예술기관 등)에서 예술과 산업의 협업을 몰아가고 있다는 생각만 들었다. 질문한 것 처럼, 지금 내게 문래동은 예술가들의 눈에 비춰질 수 있는(그들이 쉽게 접할 수 없는) 독특한 재료들, 시설물들이 매력적인 장소이기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공원에서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모여 운동을 하고 홈플러스에서 장을 보고, 생산활동을 하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있는 동네기도 하다. 나는 오히려 이런 이야기들로 문래동의 소재를 활용하고 싶었다. 재료와 독특한 산업구조물들이 환기되는 것만 문래동의 지역성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문래의 언어, 신동혁>


이미지로 포화된 지금 시대에 우리는 도시를 무엇보다 이미지로 경험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도시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이미지와 보기의 문제를 어떻게 생각해야 하며 우리가 보는 것과 그 이면의 역사적, 사회적, 경제적 현상을 어떻게 관계지어야 하는가.

<무엇이 도시의 얼굴을 만드는가?, 리처드 윌리엄스> 



케빈 린치는 장소의 정체성을 장소에 개별성을 부여하거나, 다른 장소와의 차별성을 제공하며, 독립된 하나의 실체로 인식하게 하는 토대 역할을 한다고 간단히 정의했다. 정체성은 도시나 경관의 물리적 외관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보는 사람들의 경험 , 눈, 마음, 의도 속에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정체성이란 단지 지명 사전 안에 있는 주소라던가, 지도 위의 한 점이 아니다. 정체성이 장소경험에 영향을 주고 다른 한편으로는 영향을 받기도 하는 장소경험의 기본적 측면이라는 점은 명백하다. 더 나아가 정체성은 장소 간의 차이나 동일성을 인식하는 것만이 아니라, 차이 속에서 동일성을 확인하는 훨씬 근본적인 행위이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장소의 정체성’만이 아니라 한 개인이나 집단이 가지는 그 ‘장소성에 대한 정체성’이다.

<장소와 장소상실, 에드워드 렐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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