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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경민 Feb 20. 2022

도시의 지속가능성을 위해 우리가 물어야 할 것들(2)


사례 2) 남해의 대교와 남해각

우리나라 최초의 현수교이자 섬과 육지를 이은 남해대교를 건설한 현대건설 그리고 해태그룹에서 건립하고 운영까지 했었던 남해각.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두 기업이 참여하여 남해의 상징성 있는 장소를 만들었다. (물론 그 당시 집권한 정권 주도 아래 진행된 사업이다.) 분명, 그 당시 남해 사람들의 삶에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작고 사소한 것부터 큰 것까지.) 대교의 개통으로 남해~부산, 남해~서울을 연결하는 버스 편이 생겼지만, 누군가는 일자리를 잃었다. 남해대교가 관광명소로 떠오르자, 남해각에서는 사진사 19명이 일했다.

"처음에는 여기에 대교 놓기 전에 도선 있을 때 사무장으로 있었어....(중략) 수시로. 차만 오면 건너가고, 사람만 시간을 정해서 다니고, 차가 와서 하동 노량에서 클락션을 누르고 가고. 사무장직에 좀 다니다가 현대건설에 기공으로 잠깐 좀 다니고. 식당 일을 했지. 서울 횟집"
                                                                                                        <나 대교다, p145>

*도선: 배를 타고 건너다.
 도선 관련 기사: 노량 도선과 부잔교,
 http://www.nhtimes.co.kr/news/articleView.html?idxno=51843
"배가 부산에서 여수까지. 하루에 세 번씩 여기 정차를 했거든. 대교가 생기고 나서 나중에는 쾌속선 에인절호가 있었지. 일반 여객선은 없어져 버렸지. 그러면서 남해에서 부산으로 가는 고속버스가 생겼잖아. 대교가 있으니까. 그래 가지고 배가 제아무리 빨리 와도 차보다는 늦잖아. 그래서 부산 가는 시간이 단축되었잖아. 여기서 부산까지 배로 7시간 10분 걸렸었으니까."                <나 대교다, p30>
"19명까지 있었고, 그때는 하루에 대교를 걸어서 네 번을 왔다 갔다 했었어. 지금은 문화재 해설사가 있어서 지역에 대해서 안내도 해주고 그러잖아요. 그때는 해설사가 없었거든. 손님들이 "이 대교가 언제 생겼어요?"물어보면 우리가 다 말해주고. 68년 5월 착공해서 73년 6월 22 날 개통했습니다. 기둥 높이 60미터 총길이 660미터 총공사비 18억 2천5백만 원. 그 당시에 개통할 무렵에 인건비 해봐야 하루 오백 원. 잡부들 인건비가. 남해대교 글씨는 박 대통령이 직접 쓴 글씨를 했고"                                                                                                                                 <나 대교다, p69>
<1973년, 남해대교 개통식 풍경>
<2021년 5월 직접 촬영한 남해각 휴게소>
"그때만 해도 양식을 먹을 수 있는 곳이 남 해각이었어요. 도시생활을 접할 수 있는 곳, 돈가스, 아이스크림, 밥도 팔지마는 한식 종류가 아닌 이렇게 양식으로. 내도 돈가스라는 음식을 저기서 처음 먹어봤어요. 일반 가게에서 살 수 없는 것은 거기 가면 있었어요. 뭐 모이면 우리 오늘 저녁에 아이스크림 사 먹으러 가자. 항상 거기 가야 하니까. 그렇지 않으면 없잖아. 남해읍에 사람들도 "노량 가서 남해각 가자"이러면서 나왔을걸요. 종업원도 많고 항상 사람들이 붐비고"
                                                                                                      <나 대교다, p25>
"남해각은 해태그룹이 해서 해태 동상도 있었어. 그 이후에는 민간인한테 넘어갔지. 그 당시 남해각 유명했지. 그때는 규모가 상당히 컸어 남해에서는"                                       <나 대교다, p43>

신혼여행지, 수학여행지, 관광지로써 각광받던 남해대교는 삼천포, 창선 연륙교가 생긴 2000년대를 기점으로 차츰 관광객이 줄었다. 2018년에는 노량대교마저 개통되면서 남해대교를 찾는 이는 더 줄었다. 대교와 늘 함께 였던 남해각 또한 같은 운명을 맞이했다. 연관되어 있던 사람들 또한 그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차량 정비공, 사진사, 남해각 운영자, 매표소에서 일한 사람들을 비롯해 남해 거주민들까지. 각자의 삶을 살아가면서도 남해대교와 남해각의 유명세를 함께 누렸다.


남들이 말하는 한 순간의 추억이라기보다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지 조심스럽게 추측해본다. 국가의 대대적인 사업으로 진행된 남해대교의 건설이지만 대교가 생김으로 인해 남해 주민들의 생활상에 변화가 생김으로써 개인의 삶의 영역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예를 들면 일자리가 창출되고, 외부 도시와 연결되는 시간이 단축되고, 이동수단이 변경되고, 나가는 것이 쉬워진 만큼 외부 사람들이 유입되는 것도 쉬워졌다.

자료를 찾다가 남해대교에서 마지막까지 활동한 사진사의 인터뷰를 통해 더욱더 확신할 수 있었다. 그 당시 남해대교와 남해각이 한 개인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말이다. 당시를 회상하며 덤덤하게 들려주는 이야기와 구수하게 울려 퍼지는 그의 노랫소리가 마음을 울린다.


남해대교 때문에 내가 이 마을에 살게 됐지. 남해대교 때문에 먹고살게 됐지.



사례 3) 도서 <문래의 언어>를 통해 읽을 수 있는 문래동 생태계

현) 서울 남부지방법원과 검찰청은 과거에 '서울 남부지원, 지청'이라는 이름으로 문래동에 있었다. 뿐만 아니라 대규모 인력을 고용하는 큰 공장들도 많았다. 산업과 일상이 맞물려 하나의 생태계가 작동되고 있었다.


공장이 위치한 길목에는 사람이 많아 '명동길'이라 불렸고, 일이 끝나고 나서 발길이 향하는 곳이 바로 먹자골목이고, 당구장이었다. 법원 앞에는 변호사, 법무사 사무실이 있었고 그들과 연계된 사람들이 찾아오면 맞이할 다방도 있었다. 돈이 오고 가는 과정에서는 '새마을금고'라는 금융기관이 존재했다. 사람들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문래동 생태계를 만들어 가고 있었다. (더 넓게는 영등포구)


남양나일론, 방림방적, 롯데삼학, 한영전자, 동아건설 - 일하는 사람들 - 먹자골목, 당구장, 명동길

<1971년 4월 14일 자 경향신문에 실린, 문래동에 있던 대표 공장, 방림방적의 모습>
"여기가 먹자골목에다가, 그래서 여기가 전통 있는 골목이야. 저 밑에 골목 쪽이 남양 나일론이 있었고, 여자 속옷 하는 공장이 있었고, 그다음에 거기 좀 지나가면 롯데 삼학이 있었고 지금 아파트 짓고 있는데... 여기 안양천 하천 있을 때, 둑은 판자촌이여. 그때 당시는 이게 다 일본 건물이야."p110
                                                                                                                     <문래의 언어, 신동혁>
"그때만 해도 한영전자가 200명이 넘게 있었어요. 그 당시에는 동아건설도 있었거든요.(중략).. 그러다가 다방이 안되니까 '개미주점'이라고 차렸어. 얼마나 잘되었는지 말도 못 해요. 1층에는 내 식당, 그 옆에 두 개 있었고, 2층은 짜장면집 하나 있었고, 3층은 당구장이라, 그래 가지고 장사가 너무 잘됐지. 가발공장에 여자 남자가 200이 넘지를, 한영전자에 200이 넘지를, 그러니까 저녁에 어떨 때는 한영전자 11시에 끝나면 다른 손님도 안 받아. "p153
                                                                                                                       <문래의 언어, 신동혁>


문래동 법원 - 변호사, 법무사 - 다방과 마을금고

<1972년 1월 14일 자 경향신문에 실린 영등포지원, 지청 모습, 문래동 3가 75-5번지>
"그러니까 법원이 있을 때에는 변호사, 법무사들이 일렬로 쭉 있었고, 다방도 많았고...."
"아 그래서 다방이 많았구나! 신정 다방, 정다방....."
"그렇지, 그렇지! 다방이 20개가 넘었어. 그 당시엔. 뭐 지금은 다 없애버렸잖아. 안돼버려서. 그러니깐 법원 경찰청이 있어야 일부러 오고 누구 만나러 오고 그리고 그 법무사, 변호사들한테 들어오는 돈이 마을금고에 저녁에 넣고 아침에 빼가고 그랬거든."
"아 예전엔 ATM 같은 기계나 뭐 그런 수단이 없었죠!"
"없었지. 그러니까 마을금고에 딱 넣어두는 거지. 퇴근하기 전에 돈을 싹 집어넣고 필요할 때 찾아가고."
"아 그러니까 그땐 돈도 벌리고 그 돈 마을금고에도 넣고 조금은 쓰기도 하고 그랬겠구나."
"그럼 그럼! 그땐 사람이 '박진 박진'했어. 그땐 여기가(문래동 4가) 공장이 별로 없었어. 2000년 전에는 공장이 많이 없었어." p247

                                                                                                                     <문래의 언어, 신동혁>
"입이 되게 까다로워. 은행 직원들이. 지점장도 그렇고. 그 당시에는 은행 직원들이 대출해주고 그러면 제일 좋은 데 가서 밥 사주고 그러잖아요. 그러니까 까다롭지. 그땐 홀 보는 아가씨도 있고, 배달하는 남자도 있었고 장사가 잘 되었지. 하루에 뭐, 메밀 구구 7간씩 팔았어. p153
                                                                                                                       <문래의 언어, 신동혁>

법원이 다른 지역으로 이전하면서 문래동을 작동하게 하는 생태계에는 변화가 찾아왔다. 손님들을 응대하던 다방의 수가 줄고, 대규모 인원의 공장 직원들 대상으로 장사를 하던 식당들도 남아 있는 소규모 철공소 직원/사장님 혹은 동네 주민으로 대상이 변화하였다. 규모나 인원에서도 차이가 난다.


문래동은 일제강점기부터 국가의 주도로 조성된 준공업지역이었고, 준공업지역 안에 존재하고 있던 작은 구성 요소 하나하나가 서로 연결되어 하나의 생태계로 작동하고 있었다. 특히나 지역사회에 큰 역할을 하고 있는 공장들과 법원이 다른 지역으로 이전하면서 기존 생태계는 변화를 맞이 했고, 이전과는 다른 양상과 성격으로 생태계가 형성되었다.


준공업지역이지만, 공장의 이전으로 주거지역으로 바뀌면서 아파트도 많이 생겼고, 아파트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세대나 직업군에 따라 주변에 생겨나는 기반시설들도 달라졌다. 거주민들 뿐만 아니라 어떤 사람들이 해당 지역(혹은 동네)에 유입되느냐에 따라서도 분위기와 성격이 다르게 형성된다. 문래동에는 예술가들과 먹자골목에 형성된 식당들과는 또 다른 성격의 상업시설들이 생겨났고, 이를 추구하는 수요자들이 찾으면서 이전과는 다소 다른 문래동이 되었다.



사례 1,2,3)에서 알 수 있듯이 1차적으로만 보면 개인과 무슨 상관인가 싶고, 도시 발전 과정에서 쌓이는 역사적 흐름 같지만, 그 안에서 작동하는 가장 작은 요소요소 하나들의 구성을 보면 각기 다른 개인이 서로 맞물려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도시의 다양한 변화를 즐기는 것도 좋지만 그것들이 지속 가능하기 위해서는 '어떤 요소들이 조화를 이루며 나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들을 한 두 번씩 해보는 것도 필요하고 생각한다. '꼭 대단한 뭔가를 해야 한다' 라기보다는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에 주목하며 도시의 지속가능성에 대해 고민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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