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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경민 Jun 30. 2022

[기고] 사라지는 것을 기록하는 의미

* 해당 글은『 걷고 싶은 도시 』(2022년 여름호)에 기고한 글 입니다. 기록을 위해 남긴 것이기에 글의 배치가 다소 어색할 수 있으니 더 정확히 읽고 싶으신분은 링크를 클릭하여 pdf로 읽어주세요.


여기는 항상 있을 거라 생각했지. 없어질 거라고 생각 안했지. 
그 때는 이런 기록을 남긴다는 생각을 안 했었으니까.


우연이었다

나는 현재 재개발/재건축 현장을 다니며 사라지는 대상을 기록하고 있다. 기록 대상은 주로 오래된 주택, 아파트, 시장과 같은 우리의 일상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장소다. 일반적으로는 대상지와 연관된 추억이나 기억을 바탕으로 기록이 시작되지만, 나의 경우 대개 우연에서 시작됐다. 물론 그 기반에는 장소와 연관된 경험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완전 무관하다고는 볼 수 없지만, 대상지와 관계가 없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 이유로 나의 기록에는 그 어떠한 질서나 규칙은 존재하지 않으며 무한한 반복의 과정에서 형성된 나름의 분류 방식이 존재할 뿐이다. 생각나는 주제나 방식이 있으면 적용해서 해보는 것이 전부다. 망설여지는 부분은 과감히 포기하거나 마지막 숙제로 남겨둔다. 기록의 시작은 대상을 만나는 일에서부터다. 물리적 장소(혹은 공간) 자체를 담아내는 것이 기본적인 내용이고 대상지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 혹은 장소, 그 장소가 미치는 영향력 등 눈에 보이지 않지만 직· 간접적으로 형성되어 있는 <장소성>에 주목하며 기록한다. 


기록의 시작과 대상에 대해 지금은 이렇게 정리된 문장과 언어로 설명할 수 있지만 초반에는 혼란과 의문의 연속이었다. 내부인과 상호작용하지 않은 채 분리된 관찰자이자 외부인으로서 기록 하는 것이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오류는 어떻게 보완해야 할지, 이렇게 담긴 기록물들은 어떤 가치가 있는지, 세상이 말하는 기준과 범위를 벗어난 시도는 과연 어떻게 받아들일지 등 무수히 많은 질문이 생겨났다. 답이 없다는 것에 한계를 느꼈고, 설사 답이 있더라도 그 답에 갇히지 않으려고 무단히도 애를 썼다. 더구나 그 과정 자체도 우연의 연속이다. 이렇게 시작된 기록이 의미가 있으려면 무엇보다 명확한 판단과 가치 기준이 있다는 나만의 결론을 내릴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끝까지 해보자는 다독임의 과정도 필요하다. 이글은 기록 전문가가 아닌 일반인이 우연을 만나 기록을 시작하고 그 과정에서 겪은 흔들림과 우여곡절 끝에 의미와 확신을 갖게 된 사례이다.


사례1. 아현동 <철거풍경

2017년 여름이었다. 매일 반복되는 하루를 보내던 시기였고, 점심시간만큼은 알차게 보내고 싶은 마음이었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걷는 것뿐이었다. 최대한 점심을 빨리 먹고 회사 주변 동네를 산책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시간이 예측 불가했기 때문에 산책 가능한 거리를 체크해 가면서 이동 했다. 익숙해진 이후로는 대상과 시간을 미리 계산하면서 산책 시간을 조율했다. 내게 산책은 별다른 목적이 없었고, 이동할 수 있는 범위가 제한적이다 보니 무작정 걸을 뿐이었다. 그러다 우연히 아현동이라는 동네에 발을 들여 놓았다. 첫인상은 무척 황량했다. 재개발이 확정되어 주민들이 이주한 상태였고, 일부 건물은 철거된 상태로 있었다. 사람들이 버리고 간 물건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고, 가게 간판은 떼어져 있었다. 주민들이 모두 떠난 것은 아니었다. 몇몇 사람들이 남아 재개발을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골목 여기저기에 걸린 현수막을 보았고, 벽에 적힌 문장들을 읽었다. 발길이 쉽게 떨어지지 않을 만큼 간결하고 묵직했다. 골목을 걷고 계단을 오르내리며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온전히 마주했다. 동네의 끝자락에는 거대한 모래 언덕이 있었는데 이곳은 아현동이 아니었다.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1년 전 방문 했던 염리동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없어질 것이라 상상도 못했기 때문에 조금은 충격적이었다. 게다가 지역적 특성과 연관 지어 ‘소금길’이라는 이름을 만들어 브랜딩을 진행했고, 범죄예방디자인 사업을 통해 벽에 벽화를 그리고 가로등을 설치했던 곳이다. 사업을 시작한 지 5년도 채 지나지 않아 철거가 진행되었다. 그래서 황량한 풍경을 마주했을 때 금방 알아차리지 못했다. 답사하면서 걸었던 길과 걸으며 보았던 수많은 집의 풍경들이 한 줌의 모래로 변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재개발>이라는 것은 수십 년 동안 쌓아 올린 시간과 노력을 한순간에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 수도 있는 거라는 것을 이때 깨달았다. 

우리가 살아가는 도시가 과거로만 남아 있지 않고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 변화 한다는 건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 과정 또한 모두가 받아들일 만큼 자연스럽게 흘러간다면 변화를 막거나 부정하진 못한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 못한 부분도 있다. 외부의 압력에 의해 변한다면, 이는 변화라기보다 강제다. 변화된 풍경을 마주하고 답은 없지만 솟구치는 의문에 한동안 그 자리에 서서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었다. 돌아가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지만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벽에 쓰인 문장들은 격했지만, 누군가의 현실이었기에 쉽게 지나칠 수 없었다. 내부 사정을 잘 모르기 때문에 그 어떤 판단도 결론도 내릴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다만 이러한 현상이 왜 일어나고 있는지, 해결할 방안은 없는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이후에도 여러 차례 방문하면서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왜 해야 하는지 명확히 알지 못한 채 ‘해야 할 것 같은’ 책임감이 들었다. 나는 철거되지 않고 남아 있는 아현동의 일부를 기록하기로 했다. 어떤 결과를 가져오게 될 지는 나중에서야 알게 될 일이었다.


나는 아현동에서 계절이 변화해감을 알았다. 매 주말마다 찾아간 덕이었다. 사람의 온기가 사라진 채 남은 건 오직 건물뿐이었다. 골목길을 거닐 땐, 한낮의 뜨거운 열기도 싸늘하게 만드는 기운 때문에 긴장감이 한껏 고조됐다. 달라지는 풍경만큼이나 알지 못했던 부분들이 조금씩 생겨났다. 남은 세입자와 철거용역직원들을 제외하고는 사람이 없을 거라고 예상했지만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이곳을 거쳐 갔다. 대학가와 가깝고, 동네를 통과해서 끝까지 가면 시장이 있다. 멀리 돌아서 가야 하는 거리를 짧게 만들어 주는 가파른 언덕이 있었기에 배달 오토바이도 거침없이 지났다. 사람들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엔 오히려 생명력이 빛을 발했다. 


비와 눈을 맞고, 햇빛을 받으며 무럭무럭 자라났다. 여름엔 푸름이 가득했고, 가을엔 단풍이 붉게 물들었다. 겨울엔 아무도 밟지 않은 쌓인 눈을 최초로 밟아 보는 기쁨을 누리기도 했다. 추운 날씨에 꽁꽁 언 얼음이 흘러내려 멋진 고드름을 만들어내기도 했는데 그만큼 그해 겨울은 유난히도 추웠다. 반대로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는 건물은 시간이 지날수록 무너져 내리고, 망가져 갔다. 철거 때문에 제거했던 문을 범죄예방 차원에서 다시 달아 막아 놓았다. 문에는 빨간색으로 ‘투쟁’이라고 쓰여 있었다. ‘문’은 사회에서 짊어진 많은 것들을 내려놓을 수 있는 집으로 들어가는 통로였는데, 철거 대상으로 변하는 순간 아무도 들어갈 수 없는 막힌 공간이자 가장 불편한 장벽이 되어 버렸다. 


가장 짠했던 지점은 길고양이들과의 만남이었다. 사람은 자신의 의지로 사는 곳을 정하고 이동할 수 있지만 영역 동물인 길고양인들은 한번 정해진 영역을 잘 벗어나지 않는다. 또한 재개발이라는 상황을 인지하지 못하기에 사람들이 모두 떠난 이곳에서 오랫동안 남아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다행히도 아현동에는 길고양이들의 밥을 챙겨주는 캣맘이 있었는데 직접 마주한 적은 없었지만, 곳곳에 설치된 고양이 급식소를 통해 그들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렇게 평소에는 인지하지 못했거나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특별해지는 순간들이 계속 생겨났다. 자신의 추억이 담긴 사진이나 액자를 버리거나 벽에 걸어 둔 채 떠났다. 개인정보가 기재 되어 있는 신분증이나 서류들도 버려졌다. 나는 이것들을 하나둘씩 모아 집으로 가져 왔다. 버려진 순간에 어떤 사정이 있었을지는 알 수 없다. 그저 버려져 있었을 뿐이다. 쓰레기가 되어 태워져 없어지는 것보다 어디선가 유용한 쓰임이 되면 좋을 것으로 생각했다. 조만간 사라질 공간에서 동물과 자연, 사람과의 관계, 이를 이루고 있는 동네의 생태계를 깨닫게 된다. 참으로 아이러니했다. 소 잃고 외양간을 고치듯, 사라진다고 하니 우리의 삶을 탄탄하게 받쳐 주고 있던 요소들 하나하나가 눈에 들어오게 되고 그 과정을 이해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들여다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들을 하나씩 알아가던 중에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문득 깨달았다. 어디선가 들려오던 음악 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고, 재개발을 반대한다는 의미로 달아둔 빨간 깃발과 현수막이 바람에 흔들리며 고요한 정적만이 남아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장마가 찾아왔다. 비가 내리고 태풍이 한바탕 지나간 뒤 다시 방문한 아현동은 달라져 있었다. 여름 내내 푸르렀던 커다란 나무가 태풍을 견디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졌다. 7~8마리 정도 되던 고양이들은 모두 어디로 갔는지 1~2마리밖에 보이지 않았다. 건물이 철거되거나 공사가 진행되는 속도는 더딘 편이어서 크게 변화가 없었지만 ‘그래도 여기 아직 사람 사는 동네’라고 나름 목소리를 내던 것들이 조금씩 사라져 갔다. 단풍이 황량한 골목을 그나마 빛나게 해했고 해질 녘 노을은 붉게 타 올랐다. 갈 때마다 강아지 산책을 시키던 사람이 있었는데, 겨울이 되니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유난히도 추웠던 어느 겨울날, 자주 목격되던 고양이 한 마리를 보았다. 햇볕이 내리쬐고 있는 부서진 건물 잔해 위에 자리를 잡고 낮잠을 청하는 모습을 보면서 과연, 재개발이라는 행위는 무엇이며, 누구를 위한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사람이 살던 동네를 넘어 함께 공존하고 있던 길고양이들의 터를 없애버리면서까지 얼마나 잘 살려고 이러는 것일까? 오랜 기간 형성되어 온 관계성을 가진 많은 다양한 것들을 지워 버리는 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것이 우리가 말하는 당연한 변화일까? 변화하는 건 당연하기 때문에 모든 것이 없어져야 한다는 것인가? 없어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더 이상 필요 없는, 쓸모없음일까?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은 모습일까? 아현동이라는 동네와 관계성이 없는 상태에서 철거 풍경을 기록하니 알 수 없는 감정과 끝도 없는 의문을 가지게 되는 상태에 이르렀다. 가장 결정적인 사건이 하나 발생했다. 내가 ‘기록’이라는 행위에 빠져 아현동을 헤매는 동안 세입자로서 살아가던 A라는 분이 스스로 생을 마감하였다. 변화는 당연할지언정,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상황이 때로는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그 당연하지 않은 상황 속에서 일어나는 변화는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니 재개발과정에서 일어나는 변화는 모두 당연하다고 확언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이 사건 이후로 나의 기록과 재개발 현장 공사는 추운 겨울 내내 한동안 멈춰 있었다. 다만, 그의 명복을 빌고, 불합리한 부분에 대해 발언하는 내부의 목소리는 더 커졌다. 왠지 모를 미안함에 한 동안 아현동을 방문하지 못하고 있다가 공사가 재개된다는 소식에 한걸음에 달려와 기록을 다시 시작했다. 그분을 위해서라도 마지막까지 마무리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건물이 하나둘씩 철거되고, 사람들이 매일 지나다니던 길, 함께 공유하던 주소가 사라지는 것을 목격했다. 아현동은 그렇게 다시금 아무도 살지 않던 과거 시절의 자연 상태로 돌아가 거대한 모래 언덕이 되었다. 동시에 2017년 여름쯤 시작했던 나의 기록 또한 예상치 못한 상황으로 우여곡절을 겪은 뒤 2019년 2월쯤 끝이 났고, 다음 해 <철거풍경>이라는 책으로 출간되었다. 1년 7개월 동안 아현동을 오가며 보고 느끼고 했던 감정과 생각들을 텍스트로 다 담아낼 수 없었지만, 인생을 살면서 이런 귀한 경험을 할 수 있었던 것에 감사했다.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동네가 과거에는 어떤 곳이었고, 어떤 과정을 거쳐서 지금의 모습을 갖출 수 있게 되었는지 그 맥락에 대해서 이해하고 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서울에 존재하는 수많은 재개발 현장을 돌아보면서 ‘재개발’이라는 행위를 통해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무엇일지, 현재에 직면한 변화들이 그저 당연한 변화일지, 아니면 좀 더 나은 삶을 살아가기 위한 필요조건의 변화인지, 좀 더 본질적인 측면에 가까운 고민을 하게 되었다. 내가 사는 집과 동네, 더 나아가 도시라는 큰 범위에서 어떤 맥락과 관계를 맺고 현상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 살필 필요가 있음을 깨달은 경험이기도 하다.  


사례2. 상도동 <영도시장>

상도동 영도시장의 기록을 시작하게 된 것도 아현동만큼이나 우연이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영도시장을 처음 알게 된 시점을 떠올리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 애초에 목적지가 아니었고, 지나가다가 발견한 장소였다. 한 가지 강렬한 풍경이 잔상으로 남아 있었다. ‘영도시장’이라는 글씨가 또렷이 새겨진 ‘문’이 있었고, 그 문을 통과하면 건물에 입점한 가게들이 길 양옆으로 쫙 펼쳐졌다. ‘이것이 전부인가?’라는 생각이 들 때쯤 옆을 돌아보면 사이에 길이 연결되어 또 다른 가게들이 나타났다. 그 가게들을 따라 들어갔는데, 눈앞에서 가장 맞닥뜨린 건 여러 개의 현수막이었다. 

영도시장을 철거하고 해당 구의 종합행정타운 건립이 결정되었는데, 몇몇 상인들이 반대 현수막을 제작하여 시장 내부에 걸어 두었다. 시장 철거 확정 이후에도 계속 장사를 하는 상인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다른 곳으로 떠났기 때문에 내부 상가 건물은 비어 있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현수막에 적힌 말들이 더욱 돋보여 실감 났고 시장의 분위기는 대체로 침체되어 있었다. 어린 시절 자주 들리던 시장과 비교 해봤을 때 시장 형태와 물리적 공간에는 차이가 있었지만, 경험적인 측면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기에 묘하게도 감정이입이 되었다. 


정확하게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철거가 확정된 것과 어린 시절의 경험과 무관하지 않다는 측면에서 아현동의 상황과 많이 닮아 있었다. 자연스럽게 ‘기록 해야겠다’란 결심을 했고, 매주 아현동에 갔던 것처럼 매주 영도시장을 들렀다. 기록의 시작은 우연이었지만, 기록이라는 행위는 책임감이 되는 순간이었다. 그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아직 떠나지 않은 이들이 더 많다는 것이었다. 이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면서 할 수 있는 기록에 대해 고민했다. 사라질 영도시장에 대한 과거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거라는 가능성을 품고 인터뷰를 해 볼까도 생각했다. 일반적으로 구술 인터뷰라는 것을 통해 사라지는 장소에 대한 기억과 정보를 기록한다. 아현동 때보다는 여러 가지로 시도해볼 만한 것들이 많은 것 같아 생각나는 대로 노트에 적었다. 하지만 곧 고개를 흔들며 X자를 그었다. 해당 지역구와 시장 상인 간에 존재하는 문제가 해결 되지 않았고, 내부적인 이해관계를 모르는 상황에서 인터뷰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할지가 의문이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남아서 장사를 하고 있는 상인들에게 불쾌감을 주면서까지 할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번에도 시장과 관계성이 존재하지 않았기에 그 거리감은 더욱더 커져만 갔다. 평소 자주 들리던 시장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동네 주민도 아니었기에 외부인으로서 존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관계성’에 대한 고민은 한층 더 깊어졌다. 철거가 확정되었지만, 상인들은 매일 장사를 하러 시장에 나왔고 그들을 관찰하고 시장의 달라지는 모습을 기록했다. 이 과정을 반복하고 또 반복하면서 혼란 속에 있었다. 노트에 무엇을 기록해야 할지 썼다 지우기를 여러 번, 결국 이곳에 계신 상인들과는 관계를 맺지 않기로 했다. 



대신 관리사무소를 방문하여 시장 사정에 대해 이것저것 여쭤보고 평소 궁금했던 2층 내부와 옥상까지 둘러보았다. 영도시장은 1960년대 후반에 형성되었지만 비교적 규모도 컸고, 그에 부응하는 건물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기에 여러 명의 관리인이 교대근무를 하며 관리하고 있었다. (나중에 여쭤보니 시장 상인회가 운영하는 것이 아닌 해당 구에서 채용한 것으로 밝혀졌다.) 하지만 영도시장 자체에 대한 세세한 궁금증은 풀리지 않았기에 아쉬웠다. 관리 사무소 아저씨와 1차 인터뷰를 끝내고 나니 누구와 대화를 나누고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나눠야 할지 모르겠는데 인터뷰에 대한 욕심은 자꾸 생겨났고 갈증이 났다. 사진은 잔뜩 쌓였지만 정작 영도시장의 이야기가 없어 앙꼬 없는 빵 같았다. 명확한 기준 없이 스스로 의미를 만들어 나가야 하는 지극히 개별적인 기록이라는 것은 수많은 우여곡절을 거쳐 결과를 확실히 만들어 내지 못하면 비교적 쉽게 무너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이때 잠깐 하게 되었다. 누군가의 평가나 해야만 하는 의무가 있는 건 아니지만 이 과정이 의미 있고 가치 있다며 다독이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던 중 거듭되는 혼란을 깨고 잠시였지만 경계를 넘어 조금 나아 갈 수 있게 된 계기가 생겼다. 내가 시장을 방문하는 시간대에 항상 자전거를 타고 시장 내부를 돌아다니는 아저씨가 한 분 계셨다.  


사진 뭐 찍을게 있다고, 왜 찍는 거예요? 
(따지는 거 아니고 다정한 말투로)  

먼저 질문을 던진다는 건 대답할 가능성도 높다는 의미다. 왜 사진을 찍고 있는지 이유를 설명해드리며 대화를 나누다 보니 참기름 가게를 운영하셨던 사장님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근처에 살기도 하고, 심심할 때마다 와서 자전거를 타면서 시간을 보낸다고. 쇠뿔을 단김에 빼는 김에 평소 궁금했던 부분들을 물었다. 현재 시장의 상황, 상인들 간의 이해관계에 대해 알게 되었고, 추가로 인터뷰하면 좋을 대상자도 추천해 주셨다. 퇴근하던 길에 지나던 관리사무소 직원분들도 잠시 가던 길을 멈추고 한 두 마디 보태 주었고, 덕분에 그동안 고민하고 혼란스러워했던 부분들이 일부 해결되었다. 모든 것이 우연이었고, 어느 하나 계획대로 된 것이 아니었다. 그저 매일 고민하고 시도 때도 없이 발걸음 하고 그게 전부였다. 마음이 결국 닿았던 것인지 영도시장에 대해 기록으로 남길 무언가를 얻을 수 있었다는 것에 힘을 얻었다. 이들과 대화를 나눈 지 얼마 되지 않아 시장은 결국 철거되었다. 회사에 다니고 있었기에 철거되는 과정을 자세히 살펴볼 순 없었지만, 부서진 잔해 사이로 덩그러니 남은 어느 가게의 출입문을 보고 누군가의 기억 속에 진하게 남아 있을 영도시장을 잊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또 한 번의 출판을 결심하며 기록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 ‘사라지는 대상을 기록한다는 건

이렇게 혼란과 염려를 거듭하면서까지 사라지는 대상을 기록하게 된 두 가지 사례를 살펴보았다. 사라진 장소와 모두 직접적인 관계는 없지만 결과적으로 어린 시절의 동네와 시장이 사라지는 것처럼 여겨져 정서적 유대감을 느끼게 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쯤 되니 특정 장소와 한 개인이 맺는 경험적 요소가 어떤 연관관계가 있는 것인지 궁금했다. 

“장소애착은 실제공간을 개인의 경험에서 의미 있는 곳으로 인식하고 이 공간을 유대감이 형성되는 ‘장소’로 간주한다. 즉 장소에도 감정적인 유대감으로 형성되는 것으로 정의 될 수 있다. 이는 개인의 인지적 또는 평가적 신념이 물리적 환경에 의해 나타나는 것으로 사람간의 상호작용을 통해 개인과 특정 장소 간 심리적이거나 정서적 유대감으로 형성 될 수 있다.”

<전통시장에서의 경험학습이 장소애착과 장소 충성도에 미치는 효과>, 이지은

우리를 둘러싼 환경 중에서도 유독 장소 경험이 내게 와 닿았던 이유에는 위의 구절을 인용했듯이 개인적으로 의미 있는 곳이자 유대감이 형성되는 장소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서적인 상호작용이 가능한 관계로 인식하고 발전하였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이 두 장소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기에 그때의 기억과 감정이 떠올랐고, 마치 아현동에 살았던 것처럼, 마치 영도시장에 자주 왔던 것처럼 친숙하게 느껴졌다. 실제로 어린 시절 오랜 기간 살았던 동네도 어느 새 사라졌고 신축 아파트가 들어섰다. 안타깝게도 그 순간을 기록하지 못했다. 시장 또한 변화의 풍파를 맞아 예전과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고, 그 모습을 본 순간 낯선 감정마저 들었는데, 변화하지 않고 그 모습 그대로 영원할 것이라는 착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것이 내가 사라지는 대상을 기록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였다. 인간의 기억이란 오류를 범하기도 하고 언젠가 잊기 마련인데, 이러한 시행착오를 덜어줄 수 있는 유일한 행위가 기록이라는 것도 앞의 두 사례를 통해서 충분히 경험하게 되었다. 또한, ‘사라짐’이라는 상태는 반드시 변화를 수반하게 되는데 그 변화의 시작과 과정에 대해 우리는 단 한 번도 진지하게 고민하거나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 계기를 좀 더 많은 사람이 가질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 그것에 의의를 두고 기록하고 있으며 그 과정에서의 시행착오나 경험을 전함으로써 완벽하진 않지만, 지속적으로 행하는 것에 의미를 두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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