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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경민 Sep 18. 2022

[기고]“서울을 수집합니다.”

* 해당 글은『 걷고 싶은 도시 』가을호 에 기고한 글 입니다. 기록을 위해 남긴 것이기에 글의 배치가 다소 어색할 수 있으니 더 정확히 읽고 싶으신분은 링크를 클릭하여 pdf로 읽어주세요.



왜죠?

서울을 수집하는 SNS 계정을 운영하며 가장 많이 들은 질문이다. 서울을 수집하는 이유가 무언지 묻는 사람들 앞에서 내 머릿속은 복잡해진다. 딱히 한 문장으로 정리할 수 있는 명확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었다. 그저 여러 상황들이 연결되며 자연스럽게 시작했기 때문이다. 서울에 대한 궁금증과 그 답을 얻기 위해 일기 쓰듯이 SNS 계정에 남겨 두면 좋겠다 싶은 마음에서 무작정 시작된 것이었다. 일기처럼 쓴 글들이 쌓였고, 그 과정에서 경험한 크고 작은 깨달음이 연결됐다. 굳이 이유를 찾자면 서울에서 나고 자라지 않은 사람이 서울에 대해 물음을 갖고 하나둘씩 답을 찾아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또 스스로 부여한 의미와 가치를 잃고 싶지 않았고, 치열하게 고민하며 솔직하게 털어놓은 것이 지금까지 이어온 동력이었다. 이번 글은 도시서울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던 그때를 다시 떠올려 보며, 나는 ‘어떤 질문을 던졌는가?’를 되짚어 보려 한다.


<다양한 서울의 풍경들> 

#서울을 수집하는 이유_1. 앎과 배움의 대상 

취업을 계기로 서울에 상경 후 저렴한 월세로 알려진 동네에 집을 구했다. 3년 정도는 새로운 일과 생활에 적응하느라 서울을 알아봐야 겠다는 생각조차 못 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평소에 알고 있는 관광지나 명소 말고 갈 만한 곳이 어디가 있을지를 생각해 보았다.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버스 노선도와 지하철 노선도를 봤다. 갈 수 있는 곳이 수도 없이 많은 데도 대개는 지나쳐 간 곳일 뿐이었다. 회사와 집 사이 중간에 내려 어딘가에 가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도시서울에 대해서 아는 게 없다는 생각에 아찔한 마음이 들었다. 여행지로써 방문한 서울의 밤은 설렘보다 두려움이 더 컸다. 밝은 네온사인에 파묻혀 헤매다 길을 잃을 것만 같았다. 스마트폰이 나오기 전이었고, 함께 온 이가 나를 이끌지 않았다면 어둠에 갇혀 아무것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 두려움은 서울이라는 도시를 잘 모른다는 것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서울은 어떤 곳이야?


누군가 내게 이런 질문을 던졌을 때 적어도 모르겠다는 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 서울이라는 도시를 공부해 볼 필요가 있었다. 어린 시절 역사 과목을 무엇보다 좋아했었고, 교과서에 나오지 않는 내용들은 도서관에 가서 따로 찾아볼 만큼 깊이 파고드는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방식으로 도시서울을 공부하며 이해한다면 흥미로울 것 같았다. 하나의 연구 대상으로 바라보고 그동안 교육의 현장에서 배우지 못했던 지점들을 찾아 관찰하고 탐구하기 시작했다. 


관련 자료들을 찾아보고, 그때그때 떠오르는 생각과 감정들은 후기를 남기듯 글을 쓰기로 했다. 먼저 서울이라는 도시가 대한민국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어떤 위치에 놓여 있는지, 내가 나고 자란 도시와 무엇이 어떻게 다른지 함께 살펴보기로 했다. 서울에 처음 와서  놀랐던 것 중 하나가 서울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보다 타지 사람들이 나를 둘러싸고 있다는 점이었다. 서울은 어떤 도시이기에 이토록 다양한 도시의 사람들이 이곳에 살게 되었을까? 


#서울을 수집하는 이유_2. 사라짐의 의미를 깨닫다.

“출구 안 보이는 옥바라지 골목, 대책안 놓고 평행선” 

“대표 역사연구 단체들 옥바라지 골목 보존해야”

“서울시, 옥바라지 골목 철거 유예, 보존 청신호?”

“서대문형무소 옥바라지 골목 강제 퇴거, 용역업체· 주민충돌” 

<2016년 옥바라지 골목 철거 현장> 

뉴스에서는 옥바라지 골목 철거로 용역업체와 주민이 충돌하는 소식을 며칠간 이어 전했다. 어느 날은 당시 시장이 현장을 방문해 철거가 이뤄지지 않게 하겠다며 선언했다. 상황이 정리되는 듯했다. 나는 도대체 옥바라지 골목이라는 곳이 어떤 곳이기에 이 난리인가 싶어 들렀다. 이 옥바라지 골목은 무악동에 형성된 골목을 부르는 명칭이었다. 맞은편은 일제강점기 때 독립운동가들이 수감되었던 교도소였다. 그들의 가족들이 뒷바라지하며 머물던 숙박시설이 모인 골목이라고 해서 옥바라지 골목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 골목을 포함한 동네는 곧 재개발이 진행될 예정이었다. 건물 철거가 시작되면 골목도 함께 없어질 것이니 주민들이 반대했다. 더구나 관할 구청이 옥바라지 골목을 관광코스 자원으로 소개했던 사실도 드러나면서 더욱 반발심이 커졌다. 


뿐만 아니라 동네에서 오랫동안 거주한 주민들의 개인적인 이유도 분명히 있었을 테다. 뉴스가 보도되고 시장이 현장을 방문하고 하는 그 과정이 일주일 남짓이었다. 그러나 현장은 이미 철거 중이었다. 도로변 상가건물 몇 채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건물이 철거된 상태였다. 게다가 옥바라지골목은 소설가 박완서의 작품 속에서도 반복해서 등장하는 장소였다. 과거의 생활상을 보여줄 수 있을 법한 의미를 가진 시간을 쌓은 동네였다. 고증이 추가로 필요한 요소들도 있지만, 옥바라지 골목엔 역사가 존재했다. 이런 동네가 한순간에 사라지는 걸 목격한 일은 내게 충격이었다. 


보통 “오래된”, “역사가 있는”, “50년 된”, “100년”이라는 시간을 들으면 그 대상은 “지켜질 가치가 있다.”거나 “사라지지 않는 것”이라 인식하게 된다. 그렇지만 옥바라지 골목의 철거는 사회의 통념이 예상치 못한 이유로 ‘깨질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순간이었다. 동시에 역사가 있다고 여겨지는 골목이나 동네도 이렇게 사라지는 판에 우리가 일상을 보내는 평범한 곳들은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사라지는 중이거나 사라졌을 것이다. 동네 사람이 아니라면 사라짐을 전혀 알 수 없다는 생각에 마음이 분주해졌다. 나는 옥바라지 골목이 있던 무악동이라는 동네와 연결고리가 있던 건 아니었지만 오랫동안 쌓인 시간이 한순간에 무너지며 허망한 일이 일어난 걸 목격한 이상 모른 채 지나칠 수 없었다. 더 이상 허망해지지 않도록 사라지기 전에 기록해야 한다는 괜한 책임감이 생겼다. 

<어린 시절 10년동안 살았던 동네를 그려 보았다.>

먼저 서울에 있는 동네들을 찾아다니며 역사가 있든 없든 간에 어떤 방법으로든 수집하고 기록을 남기기로 했다. 옥바라지 골목 사례를 마주하면서 어린 시절에 10년 정도 살았던 동네 문득 생각이 났고 15년 정도 지난 현재(2016년 기준)는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졌다. 곧장 그 동네로 향했다. 아니나 다를까 나의 어린 시절이 고스란히 담긴 그곳은 이미 사라져 버렸고 아파트가 들어서 있었다. 어린 시절 함께 있던 아파트나 가게(목욕탕, 슈퍼, 시장 등)가 그대로인 모습은 무척 기묘했다. 건물이 노화됐고, 목욕탕이 문을 닫았고, 시장이 축소되면서 본래 기능을 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공간 그 자체가 사라지진 않았다. 은행이 있던 상가아파트, 우체국, 도서관, 경찰서는 계속 한 자리에서 세월의 변화를 맞이하고 있었다. 그래도 동네가 사라지고 없어진 걸 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내 마음은 허망했고 무거웠다. 


집과 동네를 바라보는 시선과 가치에 있어 나만의 관점을 형성하는 밑바탕이 된 동네이기에 더욱더 아쉬운 마음이 컸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사진이라도 많이 찍어 둘 걸 그랬다며 혹여나 하는 마음으로 오래된 앨범을 뒤적거렸지만, 동네 풍경이 담긴 어떤 사진도 없었다. 겨우 발견한 사진이 있었지만 풍경이 아닌 사람에게 초점을 맞춰 찍어 소용이 없었다.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동네를 그림으로 그렸지만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늘 항상 있던 곳이었고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 확신했으니 세세하게 볼 필요가 없었다. 나는 어떤 장소가 사라진다는 것이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 자각했고, ‘사라짐’이 한 개인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 생각하는 출발점이었다. 


#수집하면서 알게 된 도시서울그 환상과 이면 

이렇게 나는 서울수집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놀랍게도 어디서부터 무엇을 어떻게 수집할 것인가에 대한 계획은 없었다. 그저 질문을 따라갈 뿐이었다. 맨 먼저 수집의 시작점이었던 타지인으로 가졌던 서울환상이 깨졌다. 꿈꾸는 모든 것들이 열심히만 하면 이뤄질 것 같았고, 경험하는 모든 것들이 매일 매일 다를 줄 알았다. 하지만 무한경쟁 속에서 앞만 보고 달리는 상황이 반복됐고, 하루하루가 뻔하게 느껴졌다. 서울에 사는 모두가 경제적으로 부유할 거라는 생각은 착각이자 오만이었다. 인적이 드문 산속에, 도심과 떨어진 아주 먼 곳에, 물이 흐르는 하천 부지에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그림자처럼 살아가고 있었다. 그들은 ‘여기, 사람이 있다.’고 끊임없이 말을 하고 있었지만 아무도 듣지 않았다. 


스치듯 짧게 마주한 서울의 밤은 매우 화려했다. 매우 늦은 밤이었지만 사람들은 마치 낮인 것처럼 거리 위에 북적댔다. 골목을 가득 메운 네온사인 불빛은 사람들의 시선을 빼앗고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었다. 서울이 낮과 밤의 구분 없이 기계처럼 24시간 멈추지 않고 쉼없이 작동하는 이유란 시간에 맞춰 일하는 사람과 시스템이 존재하기 때문이었다. 생각과 달랐던 서울의 모습에 대해 하나씩 일일이 다 적자면 끝이 없다. 그저 수집하는 과정에서 개인적으로 가졌던 환상들은 조금씩 깨져갔다. 도시서울과 내가 나고 자란 도시 사이에서 느껴지는 차이는 격세지감을 느낄 정도로 컸다. 문화, 생활양식, 사고방식, 관점, 경험 요소 등. 물론 좀 더 깊이 들어가서 보면 개인차도 존재하기에 지역 차이로만 인식할 수는 없지만 분명 달랐다. 겉으로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었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 


도시서울이 가지고 있는 긍정적인 부분도 분명 존재하고, 그것에 대해 부정할 마음도, 필요도 없다. 문제에 부딪히고 해결되지 않는, 알지만 모른 척 지나치는. 소외당하고 외면하는 부분들이 눈에 보이고 마음에 와닿았다. 나는 해결책을 모색하는 것도 아니고, 해결할 수 있는 사람도 아니지만, 질문을 던짐으로 인해 화두를 수면 위로 끌어 올릴 수 있다고 믿었다. 모두가 열광하는 것들을 두고 의심하고 낯설게 볼 필요가 있으니까. . 


#도시서울을 다양한 관점으로 바라보기 위한 시도들 

나는 타인의 시선도 궁금해서 종종 서울을 주제로 하는 프로그램에 참여했고, 전시와 책을 읽었고, 새로운 프로젝트들의 진행을 관심 있게 지켜봤다. 그러던 중 개인적인 프로젝트로 연결하고 싶은 것이 생기면 시도해보기도 했다. 여러 아이디어 중에 실질적으로 이어진 프로젝트 2가지 사례를 소개해 본다. 


<좌) 마이패보릿 서울맵 프로젝트 /  우) 이 프로젝트가 탄생되게 된 직접적인 계기가 된 책> 


사례1) 마이 패보릿 서울 맵

서점에서 우연히 “TOYKO 35”라는 책을 보았다. 프랑스의 사진작가가 여행을 통해 촬영한 사진을 지도와 함께 배치했다. 처음에는 어느 여행 사진집과 별반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다. 책장을 끝까지 넘겨 기획 의도와 과정에 대해서 읽는 순간 그건 나의 착각이었다. 작가는 사람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당신에게 가장 의미 있는 장소는 어디인가요?” 


질문을 받은 사람들은 그 장소를 표현한 그림을 그려 작가에게 건넸다. 그림이지만 지도였고, 지도이지만 그림이었다. 작가가 사람들이 언급했던 장소에 찾아갔고, 작가가 자신의 관점을 담아 사진을 촬영했고, 자신의 의도대로 배치한 결과물을 책으로 묶어낸 것이었다. 서울을 수집하면서 내가 바라보는 서울이 아닌 타인의 서울에 대해서도 궁금해하던 터였다. 그래서 나는 책의 질문을 빌려 서울에 적용하기로 했다. 


당신에게 가장 의미 있는 서울의 장소 혹은 공간은 어디인가요?


사람들이 서울을 어떻게 인식하는지, 가장 의미 있는 장소로 어떤 곳을 가장 많이 언급하는지 궁금했다. 같은 질문을 던져도 모든 사람들의 답이 각기 다르리냐는 기대감도 있었다. 지역일 수도 있고, 동네일 수도 있고, 특정 공간일 수도 있고, 장소일 수도 있다. 나는 다양한 종류의 의미가 나올수록 사람들이 인식하는 범위가 넓다고 생각한다. 처음엔 누구에게 어떤 방식으로 질문을 던져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아서 지인들에게 먼저 묻기 시작했다. 동일한 질문과 설명을 했지만 누군가는 쉽게, 누군가는 어렵게 받아들이는 상이한 반응에 적지 않아 당황했다. 먼저 50명의 지도를 받아 보려던 목표를 20명으로 줄였다. 


질문 자체를 바꿀 수가 없어 참여자들에게 더 자세히 설명했고, 2017년부터 SNS를 통해 20명의 지도를 수집했다. 그들로부터 전달받은 지도를 들고 해당 장소에 찾아가 나의 관점을 담고 있다. 참여한 이들의 답은 정해져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그들의 지도는 참고를 하고, 내 시야에서 해당 장소에 대한 리서치를 진행하며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사진에 담아내겠다 결정했다. 같은 장소를 다르게 바라본다는 관점을 확산하는 게 이 작업의 핵심이다. 이제 이 프로젝트의 사진 촬영이 거의 마무리됐, 리서치 자료를 덧붙이는 작업을 시작할 예정이다. 편집과 디자인, 인쇄까지 걸리는 시간을 계산해보면 1년은 족히 더 걸릴 프로젝트이며, 책 작업이다. 

<관악구 봉천동 아카이브 사이트>

사례2) 서울시 관악구 봉천동 아카이빙

서울의 동네를 답사를 하면 그 동네에 대한 이해가 높아진다. 더불어 동네와 지역에 대한 리서치 작업도 이어진다. 촬영한 사진들을 살피고, 그중에서 정보가 될 만한 것들을 찾고, 찾은 정보를 기반으로 또 다른 정보를 찾는다. 이런 과정에서 얻어지는 자료들은 보통 기록 전문기관 혹은 관련 분야의 연구기관에서 정리한 것들이거나 재단, 협회, 관할구청에서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자료 정리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 외에는 개인이 개별적인 차원에서 남긴 다양한 기록물들이 존재한다. 


개인이 특정 주제나 키워드를 가지고 운영하는 블로그나 홈페이지에 남긴 다양한 형태의 기록들이 귀한 자료가 되는 순간이 있다. 어떤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라 오랫동안 간직하고 싶거나 습관적으로 남긴 기록물이 시간이 흘러 자료가 될 때도 있는 것이다. 지역마다 수집할 수 있는 기록물의 양에는 간극이 존재하는데 동시대에는 그 이유를 명확하게 판단할 수가 없다. 기록물이 존재하지만 공개되지 않아 접근성이 낮은 경우도 있고, 남겨진 기록물이 정말 하나도 없기 때문일 수도 있다. 개인이 접근할 수 있는 기록물이 전혀 없는 경우, 그곳에서 지난 시절 동안 살았던 사람들의 기억을 따라가는 수밖에 없다. 또 사실을 기반으로 쓴 자전적 소설을 참고자료로 활용하기도 한다. 관련이 있는 것들을 가능한 다 모으게 된다. 


내가 오랜 시간이 걸리고 구하기 힘든 기록물을 수집하는 만큼 다른 이들이 쉽게 보게끔 기록물을 모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아카이브의 형식을 딴 사이트를 만들었다. 기록물이 필요한 누군가가 한눈에 볼 수 있도록 말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아카이빙 사이트가 바로 ‘서울시 관악구 봉천동’이다. 


관악구 봉천동은 1970년부터 서울 도심에서 이주한 수재민과 철거민들이 정착하며 형성됐다. 과거에는 경기도 시흥군 땅이었고, 1963년 행정구역 변경으로 서울시에 편입됐다. 토박이 어르신이 쓴 자서전 내용에 의하면 그 시절의 관악구는 인구가 많지 않은 시골 같은 동네였다. 동네가 서울에 편입됐고, 많은 사람이 이주 해오면서 인구가 늘었고 흔히 말하는 달동네가 됐다. 외부에서 봉천동을 바라보는 시선은 그리 곱지 않았다. 조경란 작가의 자전적 소설 ‘나는 봉천동에 산다’의 주인공은 누군가가 봉천동에 사는 자신에게 거주지를 물으면 명확하게 답하지 않거나 얼버무렸다. 다른 자료나 주민 인터뷰 혹은 떠도는 소문에도 ‘봉천동 = 달동네’라는 인식이 있어 쉽게 자신의 거처를 밝히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이런 정황들로 인해 그 시절을 기억하고자 하는 사람이 있을지, 그 시절의 기록이 잘 남겨져 있을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달동네라는 이미지를 바꾸기 위해 행정동의 명칭마저 바꾼 관악구였다. 특정 시기의 특정 동네를 기록한 사진 자료가 반복적으로 보이긴 했지만, 그게 전부였다. 누가 남겼는지도 정확하게 알 수 없었다. 관할구청에서 지역자료 차원에서 작업한 도서가 있었지만, 실물로 구할 수 없고, 온라인 사이트에서 확인만 가능한 상태다. 많은 사람이 이런 기록물을 읽고, 활용할 수 있는 게 필요한 데, 관할구청의 기록실에만 보관되어 있어 접근하기가 어렵다. 그래서인지 지자체나 지역구의 공공재단에서 만드는 아카이빙 자료가 누구를 위해 만들어지는 건지 궁금할 때가 있다. 열심히 모으고 정리해서 책을 만들고, 언론에 기사도 배포하지만 정작 해당 자료가 필요해질 때는 찾기 어렵다. 그래서 나는 ‘과연, 왜, 누구를 위해서 그들은 지역의 자료를 아카이빙하고 기록물을 생성하는가?’에 대한 물음을 던지려 웹페이지를 만들었다. 


SNS 계정을 통해 <서울수집>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어떤 궁금증을 가지고, 어떤 시선으로 내가 수집한 기록을 바라볼지 모르겠다. 게다가 내 시작은 남들처럼 특별한 건 아니다. 다만 도시서울을 잘 몰랐기에 더 알고 싶었고, 내가 구현할 수 있는 방법을 했다. 처음에는 내 수집이 기록으로 해석될지도 몰랐고, 그 기록이 어떠한 방식으로 나아갈지도 몰랐다. 나는 그저 서울을 수집하는 일에 충실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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