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등포에는 무엇이 있는데요?_영등포동

노량진역이 영등포역이 된 사연

by 이경민

1. 영등포역

영등포역은 서울역만큼이나 역사가 오래되었으나 인지도는 낮다. 전국에서 출발한 기차 종착지가 대부분 용산역 아니면 서울역이라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그렇기에 영등포역은 종착지에 도착하기 전에 지나치는 역 중 하나로 여겨진다. 나 또한 영등포역 인근에 거주하기 전까지는 당연히 서울역에서 출발하고, 도착하는 것으로 여겼다. 가끔 용산역에서 출발하기도 하고 도착하기도 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지척에 있는 영등포역을 두고 서울역까지 굳이 갈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인지하게 되었다. 운행시간대가 많지 않아서 선택의 범위는 좁지만 일정이 맞다면 이곳에서 출발하는 것이 편리했다. 이후로도 종종 영등포역을 이용하게 되었고, 주변 답사를 통해 자연스럽게 접점이 늘어나면서 영등포역의 시작과 역할에 대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영등포역은 1899년 9월 18일 경인선 개통과 함께 영업을 시작, 1936년에 이르러 경인선에서 경부선으로 편입되었다. 한강철교가 준공되기 전 경인선의 시종착역이었던 노량진역. 하지만 처음 노량진역은 노량진이 아닌 영등포에 위치하고 있었다.

잦은 홍수와 한강 범람으로 노량진에 역사를 설립할 수 없었기 때문에 영등포에 노량진역 임시역사를 세웠고, 이듬해 1900년 7월 8일에 이르러서야 진짜 노량진으로 이사를 가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후 남아있던 노량진역 임시역사와 시설물들이 주민들의 요구에 의해 영등포역으로 탄생하게 되면서 노량진역사의 흔적이 영등포역이 된 묘한 역사가 생긴 것이다.

영등포역은 영등포 지역이 경성부에 편입되며 1938년 청량리역과 함께 각각 남경성역, 동경성역으로 역명이 변경되었다가 1942년 다시 영등포역으로 돌아오게 된다. 한국전쟁의 발발로 1950년 역사가 파괴되어 1965년에 다시 지어졌고, 1990년 7월 21일 대한민국 최초로 철도역의 현대화를 위해 민간자본을 유치하여 설립되는 민자 역사로 준공되었다.

[참고사이트: http://www.mcnews.co.kr/68657]

영등포역은 1899년 7월 한강 홍수로 인해 임시 노량진역을 개설한 곳에서 탄생했다. 목조 건물이었으며 전쟁 때 소실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영등포역과 맥주공장을 비롯하여 밀가루, 피혁공장으로 향하는 철길이 연결되어 있었다. 물자 수송이 목적이었을 테다. 1938년 4월 1일에는 남경성역으로 이름이 변경되었으나 1943년 4월 1일 영등포역으로 이름이 변경되었다. 사람뿐만 아니라 물자를 수송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던 곳이 바로 영등포역이었다. 1990년대까지 꽤 오랫동안 영등포역 인근에서 자리를 지키던 맥주공장들은(OB, 하이트) 다른 지역으로 이전을 하게 되면서 공원과 아파트로 변화하였다. 아파트 단지와 공원 내에는 맥주공장이었음을 알리는 흔적들이 곳곳에 있다.


2002년 준공 영등포 푸르지오 아파트 단지 내에 하이트 맥주공장이 있던 자리였음을 알리는 흔적들
1933년 부터 1998년까지 (구)오비맥주 영등포 공장 부지는 영등포 공원이 되었다.

현재 민자역사 영등포역은 1991년에 완공되었고, 롯데백화점과 연결되어 있다. 사업자 설립기준으로 대한민국 최초의 민자역사이며, 롯데쇼핑이 역사 내에 롯데백화점 매장 운영을 위탁하고 있다. 점용기간 만료로 소유권이 철도공단으로 넘어갔지만, 입찰에 성공하면서 20년은 더 운영할 수 있게 되었다. 여러 모로 영등포역과 인근 지역은 서로 다른 시간 속에서 사라지고 남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공업지대가 주거지로 변모해가면서 진동하고, 그 진동은 파장을 일으키며 주변에도 영향을 미친다. 더디지만 조금씩 조금씩 변화하고 있다. 하지만, 공업지대로써의 영등포의 정체성이 온전하게 사라지는 데에는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영등포역은 경인철도 상에 위치로 주요한 역일 뿐만 아니라, 경부철도의 분기점으로서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리고 부근의 토질이 질그릇을 만드는데 아주 적합하여 연와. 와. 토관의 산출이 많았다. 또 철로를 통해 전국을 쉽게 연결되었을 뿐 아니라, 한강을 도선하여 마포. 용산. 강변 제지 역과 교역하기 쉬운 조건이었다."

[영등포문화원, 영등포 구지 제2권, 제1절 근대 이전의 산업경제, 451쪽]

2. 철도관사촌

영등포역 인근에는 철도 관련 종사자들이 거주했던 관사촌이 있었다.

일제강점기 경성에는 1500채 이상의 철도관사가 있었다. 철도는 일제가 조선을 지배하는데 가장 중요한 기간시설이었기 때문에 조선총독부는 철도종사원이 언제라도 신속하게 업무에 응할 수 있도록 철도역사 주변에 대단위 주거시설을 조성하여 그들에게 제공했다. 그리하여 경성에는 용산, 화천동(순화동), 금정(효창동), 합정동, 수색, 청량리 등지에 철도인을 위한 대규모 관사 단지가 형성되었다. 철도관사 단지에는 적게는 100여 채에서 많게는 5백여 채의 관사가 분포했다. 철도관사는 국장이 거주한 대지 1,200평의 고급 서양식 단독 사택에서부터 일반 철도 종사원용이 거주한 3등(건평 79평)~8등(10평)의 일본식 집단 가옥까지 다양했다. 주거시설 등 각종 혜택을 받은 철도종사원들은 가족적 유대감으로 똘똘 뭉쳐 일본의 식민 지배를 지탱하는 역할을 했다.

<일제하 서울의 대단위 철도관사 단지의 조성과 소멸, 이영남, 정재정>

위 논문 내용에 의하면, 철도 관련 업무의 신속대응과 일본의 식민지배를 유지하기 위해 철도종사자들이 거주하는 대단위 주거시설을 조성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영등포는 공업지대로 중요한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었고, 각 공장에서 반출되는 물자를 수송하는 역할을 하고 있던 영등포역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 무렵부터 일본의 본토 대자본도 영등포 진출을 타진하기 시작했다. 1924년에는 대일본맥주회사가 영등포에 공장 부지를 매입했다. 대일본맥주는 1930년대 들어 현지법인으로 조선맥주를 설립하여 1934년 맥주공장을 건립했다. (현재의 하이트진로) 이에 대일본맥주의 라이벌인 기린맥주도 현지법인으로 쇼와(昭和)기린맥주를 설립하고 비슷한 시기 공장을 준공했다. (현재의 오비맥주) 두 맥주공장은 철도 관사지를 사이에 두고 철도인입선을 이용할 수 있는 좋은 위치에 나란히 자리를 잡았다. 이후 영등포는 가네후치(鐘淵)방적, 동양방적, 대일본방적 등 유수의 대방적회사 공장이 잇달아 들어서는 등 공업지역으로 더 개발되었으나, 양대 맥주공장은 1930년대 초부터 영등포 공업지역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경성을 말한다: 신문 연재물로 본 일제시기의 '경성, 대경성후보지 선보기 순례_염복규]

위 글에 의하면 1930년대에 들어선 두 개의 맥주공장 사이에 철도관사지가 위치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여러 문헌과 자료에서 영등포 관사를 언급하는 내용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현존하는 영등포 관사는 없다. 흔적을 찾으려 애써보았지만 없었다. 오래된 몇 채의 집은 발견되었지만, 그것이 관사 일지는 알 수 없다.

1980년대 후반을 기점으로 영등포역 인근에는 새길이 났고, 1990년대 초반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던 관사는

1990년대 후반(1996년쯤)에는 자취를 감췄다. 이 시기의 위성사진을 보면 대부분 신축하여 새로운 건물들이 들어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1973년 당시, 영등포 인근에 있던 철도 관사, 1984년 위성사진에서도 확인 된다.
1988년에 새로운 길이 나기 시작하는데, 이때부터 균열이 나기 시작한다.


31일 상오 8시30분쯤 영등포1동 618 철도관사에 사는 1백25가구 3백여주민들이 영등포구청에 몰려들어 대책없는 철거를 반대한다는 「플래카드」를 들고 농성을 벌이고 있다. 영등포구청은 50년전에 지은 이 목조관사가 너무 낡아서 폭풍이 불면 무너질 염려가 있다고 판정, 철거계고장을 발부, 31일부터 철거에 착수키로 했는데 주민들은 1년내지 2년간 연기하든가 아니면 정착지를 마련해 달라고 요구했다.
1967년 7월 31일자, 중앙일보 <대책없는 철거반대>

영등포 사례와는 달리 철도 관사촌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남아 있는 곳도 있다. 대표적인 곳으로 대전 소제동이 있다. 또, 보수나 리모델링을 통해 겉모습이 변했지만 남아 있는 곳도 있다. 대부분 서울이 아닌 지방도시다. 서울의 경우, 손에 꼽을 정도로 적으며 그 마저도 리모델링으로 알아보기 힘든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과거 자료를 통해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지인의 SNS에 영등포역 관사촌이 찍힌 항공사진이 업로드되었다. 위치가 너무 명확한 데다가 자주 오고 가는 길이라 더 잘 알 수 있었다. 관사촌이 형성되어 있던 곳에 큰 길이 났다. 집은 한 채씩 한 채씩 사라지고, 새로운 건물로 모습을 바꾸었다. 고개를 들면 영등포역을 지나 문래동으로 향하는 고가가 보였다. 그렇게 건물이 하나둘씩 사라지거나 변형되는 동안 유일하게 그 모습 그대로 그 자리에 찍혀 있는 곳이 있었다. 바로 '영일 아파트'였다.


3. 영일 아파트

1969년 12월에 사용승인이 난 영일 아파트는 과거 영등포역과 연결된 철길로 추정되는 그 길 위에 지어진 아파트다. 층수도 높지 않아서 인근에 거주하거나, 자주 지나다니는 사람이 아니라면 잘 모를 수도 있을 것 같다. 1960년대 후반을 기준으로 따져 보았을 때 이 주변 지역은 대부분 주택가였으니 아파트로써는 유일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도 든다. 딱히 이렇다할만한 정보가 없어서 아쉬울 뿐이다.


차 한대와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정도의 길 위를 걷다보면 보이는 영일아파트

영일아파트의 '영일'은 어디에서 온 이름일까? 한번은 문래동을 거닐다가 '영일시장', '영일분식'도 봤다. 어딘가에서 '구로구 구일동'이 된 이유를 본 적이 있다. 구일동은 원래 구로 1동이었는데, 주민들이 구로로 불려지는 것을 꺼려하여 구일동이 되었다고 했다. 그럼 영일아파트의 영일은 혹시 영등포1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고, 관련하여 자료가 있는지 찾아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2008년 9월에 행정동 통합으로 영등포1동과 신길2동이 영등포본동으로 합쳐지면서 현재의 동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와 동시에 현재는 사라지고 없지만, 1960-70년대에 있었던 건널목의 존재도 발견했다.

좌) 1965.02.11일자_동아일보 / 우)1965.02.11일자_경향신문
좌)1973.8.8일자_동아일보 / 1970.02.24일자_경향신문

1990년대 후반까지 꽤나 큰 부지를 차지 하고 있던 맥주공장이 있었고, 이 공장들과 연관하여 건널목도 두 개나 있을 만큼 차량의 통행량도, 유동인구도 많았던 영등포역 인근인것이다. 현재 이 건널목들은 모두 사라졌지만 그 흔적으로 보이는 것들이 콘크리트 바닥에, 철로길변 주변에 보이고 있다. (다만, 추정이라 한번 더 확인해 볼 필요성은 있다.)

남부건널목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위치

이 주변을 걷다보면 마치 숨겨진 이야기를 캐내는 느낌이라 시간여행을 하는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키기도 한다. 사진 속 육교로 올라가 걸으면 영등포역을 지나 어디론가 향하는 기차 노선들이 길게 뻗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끝까지 걸으면 곧장 문래동 철공소 골목을 만나게 되니, 또 다른 지역을 탐험할 수 있다. 영등포라는 지역을 전반적으로 이해하게 되면 서울이라는 도시의 4/1은 이해하게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직 내가 본 것은 정말 일부인 것이고, 시기별로 쪼개면 더 깊고 넓게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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