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쯤, 동네와 공간에 대한 물음 던지기 <동숭동 편>
영역을 확장시키기 위한 노련한 전략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은 영역을 확장하기 위해 조선의 국 ·공유지에 국가기관을 설치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경복궁 앞 조선총독부, 덕수궁 앞 경성부청, 그 건너편에 조선 체신 사무 회관과 경성 부민관, 동숭동 경성제국대학 등이 있다. 현재 조선총독부 건물과 조선 체신 사무 회관은 철거되었고, 경성부청은 서울도서관, 경성부민관은 서울시 의회 의사당, 경성제국대학 동승동 캠퍼스 건물은 예술가의 집으로 용도가 변경 되어 사용 중이다.
단순히 우리들이 그 동안 봐왔거나 사용해 왔던 건물의 존재 유무를 짚어 보는 것과는 별개로 조선의 땅을 지배하려 했던 일제의 노련한 전략이자 시도로서 건물이 배치되었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다. 이런 맥락에서 서울을 구성하고 있는 수 많은 근/ 현대 건물들을 다시 바라 본다면 서울의 역사를, 서울이라는 도시를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덕안궁의 자리를 차지한 경성부민관
그런데, 한가지 의문이 들었던 것은 경성부민관과 동숭동 경성제국대학의 위치였다. 이 건물들이 왜 그곳에 있는 것인지 내가 아는 지식의 한도 내에서 각 건물의 현재 주변 환경을 곰곰히 생각 해보면 연결 지어 설명할 방법이 전혀 없었다. 주변 동네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었던 것도 이유 중에 하나 였지만 표면적으로 쉽게 드러나는 물리적인 환경 요소가 없기 때문이다. 현재 경성부민관은 서울시 의회 의사당으로 사용 중이다. 으레 짐작할 만한 곳은 덕수궁과 정동의 대사관 정도로 연결 지어 볼 수는 있겠지만 글쎄. . 설명거리로는 뭔가 부족한 느낌이었다. 아무래도 자료를 찾아 봐야 겠다는 생각에 인터넷을 뒤적 거려 보니 경성 부민관이 위치한 곳은 과거 고종의 후궁이자 영친왕의 생모인 순헌황귀비 엄씨의 위패를 봉안한 덕안궁이 있던 터였었다! 경성 부민관 바로 옆에는 조선 체신 사무 회관도 있었는데(이후 국세청 남대문 별관으로 사용되다가 철거되었다.), 이 건물이 자리한 위치에서 부터 현재 조선일보 건물이 있는 곳까지가 바로 덕안궁 터였던 거다. 이로서 경성부민관에 대한 의문은 풀렸다.
그렇다면, 경성제국대학은 왜 동숭동에 지었을까?
이제, 마지막으로 경성제국대학에 대한 의문을 풀 차례다. 앞 사례들과는 달리 아무리 자료를 찾아 봐도 연관성 있는 이유를 찾기 힘들었다. 그래서 직접 찾아 나서기로 했다. 혹여나 근처에 가면 실마리를 풀어 낼 수 있는 장소나 표지석이 있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경성제국대학 본관 건물이 있는 마로니에 공원에서 출발하여 의과 건물을 지나 현재 서울대학교 병원까지 살펴 보기로 했다. 마로니에공원 자체는 일제 시대 이후에 조성된 공원이고 그 주변 동네의 환경이나 모습도 많이 변화해서 과거의 흔적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그 당시 학교 주변으로 교수들이 머물렀던 관사도 꽤 많았었다고 들었는데 거의 다 사라지고 없었다. 결과적으로 마로니에 공원 인근에는 본관 건물만 덩그러니 남아 있는 상태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게 아무것도 찾지 못한 아쉬움만 잔뜩 짊어 지고 건너편 의과대학 건물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 당시에는 폭이 넓은 길이어서 자연스럽게 연결 되었을 학교 건물들이 도로가 생기고 신호등과 횡단보도가 설치 되면서 별개의 건물처럼 느껴진다.
사실 의과대학도 남아 있는 건물로만으로는 표면적으로 연관성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터'라고 알려 주는 입간판이 설치 되어 있었지만 이것도 단순히 존재 여부만 증명해주는 것일뿐이었다. 그 어디에도 동숭동에 경성제국대학을 설립한 이유에 대해서는 언급 되어 있지 않았다.
건물을 돌아 뒤쪽으로 가 보았다. 본관 건물이 있던 마로니에 공원쪽과는 상반된 분위기로 비교적 조용하고 차분했다. 더군다나 병원 건물이라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날씨 탓인지 모르겠지만 괜한 긴장감이 돌았다. 아니면 기분 탓일지도 모르겠다. 인적도 드물어서 작은 소리에도 흠칫 놀랐다. 건물 내부로는 차마 들어가지 못하고 바깥에서 바라만 보았는데 안쪽에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어 있었다. 아마도 이후에 병원의 공간 사용에 맞게 일부 구조 공사를 하지 않았을까 싶다. 가운데에 연못도 있었는데 크기에 비해 많은 잉어들이 있어서 놀라웠다. 낡은 건물에 비해 주변으로 깨끗하게 잘 정리된 수목들이 다소 인상 깊었다.
애초에 명확한 답을 찾을 거라는 확신을 가지고 온 것은 아니였지만 주변을 돌아 보며 작은 실마리 하나는 찾을거라는 기대감은 있었다. 시간이 지날 수록 주변을 돌아 보면 볼 수록 왠지 모르게 막막함이 몰려 왔다. 게다가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했을 때 '뭘 해야 겠다' 는 다음 단계를 계획하고 온 건 아니었기 때문에 좀 당황스럽기도 했다. 여기서 답사를 그만 멈춰야 할지 아니면 범위를 더 넓혀서 봐야 할 것인지 결정해야 했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이왕이면 학교 병원에 온 것도 처음이니 길을 따라 가보기라도 하자는 생각으로 걸었다.
남들은 몸이 아파서 찾아 오는 병원에 별거 아닌 이유로 갈려고 하니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하필이면 가장 먼저 보이는 건물이 어린이 병원이었다. 가파른 오르막길을 올라 서울대학교 병원 도서관을 지나고 본관 건물 앞에 도착했다. 오르막길을 오르고 나니 과거에 이곳은 길이라기보다 언덕이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알고 보니 이곳은 사도세자의 사당이기도 했던, 창경궁의 정원 함춘원지가 있던 자리였다. 전혀 연관성이 없다고 좌절하고 있었는데 과거의 건물이 아닌 현재 사용 중인 건물 주변을 살피며 자료를 찾고 걸어 보니 조금씩 보이더라.
현재 서울대학교 병원 자리에는 장조 이선, 즉 우리에게 사도세자로 알려진 그의 사당, 경모궁이 있었고, 창덕궁과도 매우 가까웠다. (한 때 창경궁의 정원인 함춘원으로 불리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때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및 그 부속건물이 이곳에 세워지면서 훼손되었고 6.25 전쟁 때는 건물마저 불타 버렸다. 현재는 큰 석단과 삼문으로 쓰인 함춘원 문이 남아 있다.
"함춘원은 조선시대의 정원으로 지금의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부속병원이 위치한 곳이다. 『동국여지비고』에는 창경궁의 동쪽, 경희궁 개양 문의 남쪽 등에 있는 궁궐의 정원 이름이 함춘원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그중 그 입지나 규모로 보아 가장 대표적인 것은 창경궁 동쪽의 것이다. 함춘원은 성종 15년(1484)에 창경궁을 짓고, 풍수지리설에 의해 이곳에 나무를 심고 담장을 둘러 그곳에 관계없는 사람의 출입을 금하였던 것에서 시작되었으며, 성종 24년(1493)년에 정식으로 이름이 붙여져 창경궁에 딸린 정원이 되었다. 연산군 때에는 함춘원 밖의 백성들의 집을 없애고 확장하였으며, 군대를 배치하여 일반인의 통행을 금하고 대문을 만들었다. 그 후 중종은 백성들을 다시 돌아와 살게 하였다. 임진왜란 때에는 덕빈의 시신을 임시로 묻는 등 점차 관리가 소홀해졌으며, 인조 때에는 함춘원의 절반을 태 복사에 나눠주었다. 이후 140여 년간 말을 기르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영조 40년(1764)에는 사도세자의 사당을 이곳으로 옮겨지었고, 정조가 즉위하자 이곳을 경모궁으로 불렀으며, 정조 9년(1785)에는 이 일대를 정비하였다. 광무 3년(1899)에 경모궁에 있던 장조 즉 사도세자의 위패를 종묘로 옮기면서 경모궁은 그 기능을 잃게 되었으며, 경모궁도 경모 전으로 이름을 고쳤다. 광무 4년(1900)에는 경모궁 터에 6 성조 즉 태조·세조·성종·숙종·영조·순조의 초상을 모시던 영희전을 옮겨 세웠다. 그 뒤 일제가 나라를 강점한 후 경모궁 일대에 경성제국대학이 세워지면서 원래의 모습을 대부분 잃어버렸으며, 한국전쟁으로 인해 옛 건물이 불타 원래의 모습을 볼 수 없게 되었다. 함춘원은 조선 후기의 세련된 건물 중 하나이며, 현재 남아있는 유적은 함춘 문뿐이다." <내용 출처: 문화재청 국가 문화유산 포탈>
이처럼 동숭동 가까이에 창경궁과 경모궁이 있었으니 경복궁과 덕수궁과 같은 원리로 경성제국대학을 짓지 않았을까 예상한다. 현재 함춘원지는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부속병원 안에 있다고 했지만 답사 당시에는 이런 정보가 전혀 없었기에 볼 수 없었다. (현재 함춘원지라는 명칭은 서울 경모궁지로 변경되었다고 한다.)
창경궁 맞은 편, 경모궁 일대에 경성제국대학이 있었다.
올라온 길의 반대편 문으로 나왔다. 놀랍게도 길 건너편이 바로 창경궁이었다. 경성제국대학이 동숭동에 있는 이유에 대한 답을 좀 더 명확하게 증명할 수 있는 상황에 가까워졌음을 의미했다. 문 밖을 나와 우회전하여 담벼락을 따라 걸었더니 계속해서 병원 부속건물들이 나왔고 건너편 창경궁의 담과 평행하게 길이 이어졌고, 끝나는 지점마저도 비슷했다.
임상의학연구소와 장례식장을 지나 담이 끝나는 지점까지 혹은 서울대학교 병원 관련 건물들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걸어 도착한 곳은 혜화로터리였다.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서 시작된 답사는 서울대학교 병원을 지나 창경궁로를 따라 크게 돌아 혜화동에서 끝이 났다. 이로서 '확실하게 이거다!'라고 입증할 만한 자료나 근거를 찾은 건 아니지만 어느 정도 예상 가능한 범위 내에서 자체적으로 결론을 내릴 수 있는 흔적들을 찾을 수 있었다.
경복궁 앞을 지나갈 때마다 조선총독부 건물이 존재했던 그때를 상상했던 것처럼 서울대학교 병원을 지나갈 때마다 단순히 '마로니에 공원에는 경성제국대학 본관이 남아 있고, 건너편에는 의과대학이 있다'가 아니라 일제의 교묘한 전략에 대해서 다시 한번 되짚어 보면서 그때를 상상하게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