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촌한옥마을의 현재
익선동과 정세권, 정세권과 익선동
익선동 166번지는 언론이나 SNS를 통해 조선의 개발업자 정세권이 조성한 한옥집단개발지구로 여러 차례 언급이 되었지만, 그가 개발한 또 다른 지역들은 그렇지 않다. 사실상 '익선동166번지' 자체도 지금처럼 핫플레이스가 되기 이전에는 그저 사람 사는 서울의 오랜 동네 중 하나 였고, 이 조차도 아는 사람들이 드물었으니, 어찌보면 '정세권'이라는 이름이 알려진 것은 익선동이 뜬 이후의 일이다.
북촌한옥마을
서울의 가장 대표적인 관광명소 중 하나인 북촌한옥마을. 위치상으로 궁과 종묘와도 가까워 관광코스로도 인기가 많다. 하지만 원래 이곳에는 솟을대문이 있는 집 몇 채와 30여 호의 한옥만이 있었다. 지금의 모습을 본격적으로 갖추게 된 것은 일제강점기 말 부터다. 도시한옥을 집단으로 개발한 지구이며, 이곳을 조성한 이가 바로 정세권이었다.
여기서 도시한옥이란, 큰 대지에 있던 전통 한옥을 철거하고 기존 전통한옥의 문제점들을 개량하여 도시에 가장 적합한 형태와 구조로 내부구조를 변경한 한옥을 말한다. 이는 당시 급증하는 경성의 인구에 따른 주택 부족 현상을 해결하고 일제의 북촌 진출을 막기 위해 진행한 개발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서울의 인구증가 과정에서 토지의 고밀도 압력에 대응하기 위한 자생적 주거 유형으로 등장한 것 이라는 점'과 함께 표준화 된 목재와 근대적인 건축재료를 적극 활용한 도시한옥」
-p42 <근현대 서울의집> -
아시다시피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의도적으로 조성된 집단 지구가 세월이 흘러 전통한옥마을이 되었다. 주거지역임에도 불구하고 '전통'과 '한옥'을 내세운 컨셉으로 관광지화 되어 갔고 2018년에는 한달에 만명이 찾을 정도로 관광명소로 자리 잡았다.
북촌의 현재, 현재의 북촌
한 때 광화문 인근에 위치한 회사를 다닌 적이 있다. 회사 건물 옆으로는 청계천이 흘렀다. 덕분에 한참 일을 하다가도 멍하니 창 밖을 바라볼 때가 많았다. 그럴 때마다 관광객이 타고 내리는 관광버스들이 분주하게 오고 갔다. 마치 공장에 물건을 나르듯이 사람들을 내려주고 또 태우고 어디론가 이동하고 도착하고를 수도 없이 반복했다. 어디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오는 것인지 내내 궁금해 하며 시선을 거두지 못했던 그 때 그 순간을 북촌에서 또 다시 마주 했었더랬다.
청계천에서 봤던 관광버스는 보이지 않았지만(버스를 세울 만한 마땅한 공간이 없었으므로) 별반 다를 바 없었다. 주변의 풍경 보다 먼저 눈에 들어 오는 건 오르는 길에 빼곡하게 자리 잡은 사람들이었다. 허를 두를 정도의 인파에 한시라도 이곳을 빨리 벗어나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 북촌은 내게 더 이상 오고 싶지 않은 장소가 되었고, 나와 멀어졌다. 그랬던 이 곳에 오랜만에 발길이 닿았으나 , 놀랍게도 북촌한옥마을로 향하는 입구서 부터 곳곳에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사실 이런 현수막을 본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였다. 발길을 끊겠다 마음을 먹었을 때도 지금 처럼 사방팔방 현수막을 걸어 놓지 않았을 뿐이었을 뿐 손글씨로 적힌 종이에는 같은 내용이 기재 되어 있었다. 시간이 꽤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사라지기는 커녕 더 많이 보이는 걸 보니 문제들이 제대로 해결되지 않은 채 갈등이 깊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서울시와 주민이 대화를 통해 함께 문제를 해결해 볼 수 있는 협의점이 전혀 없는 것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람들은 많았다. 문득, 한국을 처음 방문 하는 이들은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 들일까? 궁금해졌다. 좋다고 소문나서 한 걸음에 달려 왔는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으니, 그저 당황스러울 게 뻔했다. 주변을 이리 저리 살펴 보니 '조용히 해달라'는 피켓을 든 채 서 계시는 분들이 몇몇 보였다. 그러나 적극적으로 제스쳐를 취하진 않았다. 게다가 북촌마을을 오가는 길은 국유지로, 사람의 통행을 금지할 법적 근거가 없는 상황이니 참 난 감하기 그지 없다.
가회동 31번지
이런 상황일 수록 북촌한옥마을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기 때문에 글에 그 부분을 반영하고자 한다. 정세권은 부유층을 위한 거주지로 가회동 31번지를 개발했다. 이곳은 유난히도 사람들이 많이 몰린 곳인데, 아래에서 위로,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 보는 풍경이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길이 골목으로 연결되어 있다 보니 이곳에 도착 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삼청동에서 가파른 계단을 올라 곧장 도착 하거나 아니면 북촌로 11길의 입구에서 부터 천천히 걸어 올라 오거나.
천천히. 아주 천천히 걸어 올라갔다. 오랫만에 들른 북촌에는 많은 변화가 있는 듯 보였다. 공사가벽을 쳐 놓고 공사를 하는 곳이 군데 군데 보였다. 개발이 불가능한 곳이니 보수 공사 겠지?
주말 낮, 이곳을 찾은 건 잘못 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몰려 드는 인파에 눌려 저절로 혀를 내둘렀다. 이런 상황을 담기 위해 사진을 찍는 순간에도 사람들은 물 밀듯이 밀려왔다. 정말 현수막이 걸려 있는 것이 무색할 정도. 이 정도면 거의 재난 수준이라고 해도 무리가 없어 보였다. 인파를 뚫고 오르막을 올라 그 끝에 닿으면 주차장과 갈림길이 나온다. 몸을 반대 방향으로 돌려 걸어 왔던 길을 되돌아 보면 마치 산 정상에 올라와 있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공사 중인 곳 때문인지 삼엄한 현수막 때문인 것인지 알 수는 없으나 북적대는 인파에 비해 분위기는 다소 어수선 했다.
위 사진들을 차례 대로 보면 (위) 좌측 방향으로 가면 북촌 전망대로 (위) 우측 방향, (아래) 좌측 으로 가면 삼청동으로 가는 방향이다. 주소를 보면 북촌로 11길이라 적혀 있지만 작게 적힌 번지를 보면 삼청동으로 기재 되어 있어 쉽게 알 수 있다. 가회동의 범위는 어느 정도 까지 속하는 것인지가 궁금해서 일단 걸어 본 것인데 중간에 삼청동이라고 적힌 걸 보니 더 나아가면 가회동을 벗어나는 것이기에 가던 길을 멈추고 되돌아 왔다. 다시 주차장 앞이다. 지대가 높아 북촌전망대까지 가지 않더라도 저 멀리 풍경이 잘 보인다.
주차장에서 북촌전망대로 가는 도중에 골목 하나가 있는데 거기도 가회동이다.
북촌은 조선의 부유 계층을 대상으로 조성된 한옥 단지이다 보니 규모가 크고, 형태나 모양새가 가지각색이었다. 일단 기본적으로 각자의 집을 경계로 하는 담벼락이 존재한다. 지대 자체가 높은 것도 있겠지만 규모가 큰 한옥일 수록 담벼락이 더 높았다. 담장이 거의 집을 둘러싸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익선동의 담벼락은 이웃집과 맞닿아 있어 앞에서 보면 서로 붙어 있는것 같았는데. 여기서 큰 차이를 보였다.
어느 집은 들어가려면 계단을 올라 대문을 열어야 했다.
경사가 있는 길 위 낮은 대문은 평평하지 못한 땅의 높이와 맞추려는 듯한 흔적도 보였다. 이곳에 있는 한옥들도 익선동 처럼 내부 리모델링을 했는지 그 여부가 궁금했다. 예전에 어느 다큐에서 북촌에 살고 있는 외국인의 집을 공개한 적이 있었는데 공간적 변화에 대한 언급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빛바랜 담 자국, 일부는 없어진 창틀, 깨진 유리, 나무가 벗겨진 서까래 아랫 부분은 일제강점기를 거쳐 현재 시대가 오기 까지 함께 했던 북촌의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를 보여준다. 평소와 다르게 그냥 지나치기에는 너무 많은 것들이 보였다.
이권과 수익의 문제를 넘어서 어느 한 개발업자에 의해 조성된 한옥집단지구가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으면서 끊임없이 주목을 받게 되었지만 다소 과한 관심으로 현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그 누구의 잘못이라고 탓할 수 없는 애매한 시점에서 발생한 문제들이 완만하게 잘 풀리면 좋으련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주민과 서울시의 갈등은 극에 달하고 있다. 사실상 깊은 내막을 들여다 볼 수 없어서 그 어떤 판단도 쉽게 내릴 수 없다는 것이 가장 아쉽고, 주민과 서울시의 입장차가 다르기 때문에 그 어느 한쪽의 편도 들어 줄 수 없는 상황이다. 거주지였던 곳이 관광지화 되어 주민이 마음 놓고 편하게 살 수 없는 이 곳. 과연, 이곳은 누구를 위한 마을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