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도시의 관계성 탐구 프로젝트
해당 연구는 도시분야의 전문가는 아니지만 전문가가 되기 위한 고군분투 과정에서 우연히 찾은 것이다. 살면서 그저 당연하다고 여겨지던 관계성들이 당연하지 않은 상태로 서로 영향을 주고받고 있음을 인지하게 되었다. 어찌 보면 이 내용을 보고 “어? 나도 그런데?” “내 이야기잖아?”라고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말인 즉 슨 누구에게나 있을법한 경험이라 지극히 사적이면서도 공적인 영역으로부터 영향을 주고받으며 일상에 존재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동네, 상점, 골목 같은 물리적 공간, 나를 중심으로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 도시를 구성하고 있는 조직들이 연관성을 가진 채 동시다발적으로 연결된다. 언제,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그 연결성이 형성되는 것인지는 명확하게 원인과 결과에 따른 적절한 논리로 설명하지는 못한다. 다만, 개인이 경험한 사례를 통해 공통적으로 보이는 지점을 발견했고, 그 과정에서 요소들을 뽑아 그 현상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도시공간⠂장소와 개인의 경험을 기반으로 한 관계성 연구>의 시작은 지인들과의 일상적인 대화에서 시작되었다. 주로 필자가 궁금한 것들을 질문했다. 이 과정에서 개인의 성장과정 중에 경험한 도시공간(혹은 장소)이 그 시점에서 마침표를 찍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현재도 영향을 주고 있다는 점에서 연속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당사자들의 가치관, 성향, 생각, 미래, 직업까지도 결정지을 수 있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었다. 경험이 당사자를 포함한 2세대, 3세대로 이어지는 경우 당사자의 지역 사회와 도시에 대한 관심, 활동으로 확장되며 이야기하는 사람이 된다. 이야기하는 방식과 표출되는 형태는 제 각각이지만 지역사회와 도시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와 인식을 가지고 있다.
누군가가 이식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하는 것이다. 이런 사례를 종종 접하게 되면서 ‘도시의 공간과 장소에서 경험했던 개별적인 요소가 삶에 어떤 방식으로 영향을 미치는가? ‘에 대한 물음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경험을 누구나 가지고 있는 인생의 일부분으로 단순화시킬 수 있는 것인지, 도시와 개인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인지 그들과의 대화를 통해, 그들의 언어와 생각을 통해 읽기를 시도한다. 대중매체에서도 이런 지점들이 발견되곤 하지만 명확히 정의 내리거나 설명하는 적절한 근거를 찾지 못했다.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한 논리적 설명 대신 다소 엉뚱하고 어이없지만 ‘느낌 알자나’를 끌고 와서 의미를 전해보려 한다. 인생에서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언가의 순간들이 있듯이 나는 이 연구가 바로 그런 지점에 속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예술적 리서치는 수치나 정량으로 나타낼 수 없는 경험치인 것 같아요.
-컨템포로컬-
물론, 전문가의 영역에서 설명할 수 있는 적절한 문구, 문장, 설명이 있으면 추가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지 않기로 한다. 이 글을 접하는 각자가 자유롭게 해석하고 받아들이며 개인이 경험하는 것에서 시작한 것이 도시에 대한 생각으로 어떻게 연결고리를 만들고 표현되는 것인지에 대한 ‘다양성’과 미래에 어떤 방식으로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에 대한 '방향성'에 주목하려 한다.
① 분류
1,2,3세대로 이어지는 경험(가족 환경 + 유전적 요소)이 관심사와 직업으로 어떻게 연결되는가?
l 관심사: 근대 건축물, 아파트, 마을, 재개발, 도시, 건축, 보존, 기록, 지역,
l 직업: 지역을 주제로 한 독립기획자, 아키비스트, 기록가, 근대건축연구자, 사진작가, 이주민, 도시 콘텐츠 분야의 디자이너, 예술가
② 키워드
#대대손손 #직업으로의 연결성 #장소관계 #관계도시 #장소경험 #장소기억 #가족력 #주거환경
#이주 #개인과 도시관계성 #연결 #예술과도시
③ 참여자
도시공간, 장소와 개인의 경험을 기반으로 한 관계성을 가진 5인
④ 관계도시
서울, 원주, 인천, 부천, 경주
⑤ 방법
대면 및 서면 인터뷰, 관계도시⠂동네 방문 및 동행답사
⑥ 카테고리
개인사⠂가족사로 비롯된 공간, 도시, 장소 경험
세상 모든 것이 아까운 프로 재미추구러, 덴버 혹은 민자, 혹은 최민희입니다. 재개발과 마을에 관해 이야기하는 활동가이기도 하고, 로컬에서의 삶에 관해 이야기하는 이야기꾼이기도 하고, 음악을 ‘짜잔’ 하고 연주하는 연주가이기도 하고 예쁜 쓰레기를 주우러 다니는 수집가이기도 하고, 페스티벌 현장에서 열심히 뛰는 ENFP의 외형에 ENTP의 마음을 가진, 주변에 남다른 청춘들과 함께 열심히 살고 있는 문화예술인력사무소의 소장입니다. 다음 자기소개 때에는 더 많은 수식어를 붙이게 될 수도 있겠네요. 좀 더 멋지고 정돈된 수식어를 만들어서 돌아오겠습니다.
서울, 원주
① 과거 일상경험이 직업으로 연결
② 오래된 아파트와 재건축 대상지 거주 및 공간운영 경험
③ 뜨는 동네로 생겨나는 변화의 목격자이자 경험하는 당사자
재개발, 마을, 이주, 문화와 활동, 변화, 공간과 장소
Q. ‘마을의 정취’에 대해서 설명해 주셨는데, 그렇게 생각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마을이라고 해서 모든 곳이 같이 나눠 먹고 공유하고 하는 게 아닐 수도 있잖아요. 마을에 사시는 분들은 ‘마을 같다 ‘라는 표현을 안 쓰기도 하고요.
A. 기억 속 어린 시절 동네는 좌우로 옆집이 있는 건물이 위치한, 큰길로 나가기 전 골목 동네였어요. 또래가 많이 살았어요. 제가 살았던 집은 하나의 건물에 주인집이 있고, 여러 세대가 사는 곳이었어요. 6집 정도가 세 들어서 살았던 것 같은데 2집 정도를 제외하고 저와 2~4살 차이 동생들이 살고 있어서 엄마는 본의 아니게
공동육아를 하셨던 것 같아요.
동네 아주머니들과 모여서 지점토로 장식품을 만들었던 엄마의 기억도 있고 함께 피자를 만들어 먹었던 기억도 있어요. 당시 피자는 생소한 음식이어서 엄청나게 큰 전기 프라이팬(전 부치는 용도)에 피자를 만들어서 4~5명 이상 아이와 함께 나눠 먹었던 기억이 나요. 엄마들끼리도 유대가 깊었어요. 옆집 이모는 여전히 자주 만나시고 (제가 아파트로 이사 가던 12살 무렵에 비슷하게 강 건너로 이사를 하였지만 그래도 여전히) 소꿉친구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정도는 알고 있어요.
옆 골목 안쪽에는 또래가 5~6명 정도 살았고, 집 앞에 있던 아파트에는 같은 유치원을 다녔던 친구들이 살고 있고, 집을 기준으로 반경 50m 안쪽 동네에 또래 친구들이 살았던 것 같아요. 모두가 같은 교회, 유치원을 다니는 친구들이어서 서로의 집에 자주 놀러 갔던 경험이 있네요. 초등학교 저학년 때까지 계속 이어졌었어요. 저의 유치원 모임은 엄마들은 여전히 만나고 있어요. (우리는 정작 친하지 않지만) 유치원이나 동네 모임을 통해 엄마도 친구를 만들었던 것 같아요. 결혼하고 서울로 이주하신 것이었으니까요. 12살 때(1990년대 중 후반) 아파트로 이사하고, 인사차 음식을 드리러 갔던 경험이 있어요. 아파트에도 또래가 많이 살고 있어서 어느 집 아이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어느 정도 알았었지만, 골목에 살 때보다 왕래가 확실히 줄기는 했죠.
오가며 인사하고 맛있는 게 생기면 나눠 먹고 했던 경험들 덕분에 아파트 살면서도 이웃집에 잠시 머무는 것은 어려운 일은 아니었어요. 집에 들어가지 못해서 아파트 복도에 앉아 있으면 이웃집에서 들어와서 기다리라고 해주시기도 했어요. 고등학생 때는 앞집 대학생 언니를 과외 선생님으로 초대해서 공부했던 관계가 있었기에 마을이란 개념을 가졌던 것 같아요.
Q. 원인동 투어 진행 후 다시 연락 오거나, 투어 내용에 대한 소감, 피드백을 주거나 생각이 바뀌거나 영향을 받은 사람도 있나요?
A. 현장 반응은 굉장히 좋으나 실제 삶까지 반영되는 경우는 아직 못 들은 것 같아요. 남의 집 프로젝트를 통해서 만났던 분들은 플랫폼이 있기에 후기를 남겨 주긴 했지만, 여전히 체험 혹은 경험해 본다 정도 수준인 것 같아요. 다만, 과정을 통해 비슷한 고민을 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유대하고 제가 사는 동네에 국한된 생각을 하는 게 아닌, 다른 지역은 어떤 고민을 하고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 스스로 생긴 큰 영향인 것 같아요. 제가 가장 큰 영향을 받고 있죠.
Q. 지역에서 지속적으로 활동하게 된 계기가 ‘재개발’이라고 이해하면 될까요?
재개발 이슈도 있지만, ‘마을’ 키워드가 조금 더 컸던 것 같아요. ‘재개발은 마을을 없애고 다른 하나의 마을을 만드는 것이다. 삭막한 마을을 만드는 것이다’에서 시작했던 거예요. 좀 더 원초적인 이야기를 하자면, 차가 많이 다녀서 유동 인구가 있을 줄 알았는데, 아무도 안 돌아다니는 거예요. ‘밥 먹고 살아야 되는데? 장사해야 되는데?’가 있었고, 저희 가게를 종착지로써 홍보하고 싶진 않았어요. 동네에 공원도 있고 이런 것도 있고 저런 것도 있는데, 과정에 우리 가게가 있으니까. ‘우리 가게에서 음료를 사서 마을을 한번 둘러보시면, 어떻습니까?’라는 식으로 마을 홍보를 했던 거예요. 가게가 종착지가 되면 사람들이 딱 여기만 와서 보고 한번 오고 안 와요.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이 더 많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시작했던 거고, 초반에 동네에 정을 좀 많이 느꼈어요. 처음에는 알려야 되니까 바깥에 앉아서 일도 하고, 테라스에서 커피도 마시고 했단 말이에요. 열심히 노력했어요.
어른들이 지나가시면 항상 인사를 했어요. 부모님에게 그렇게 배웠거든요. 어느 날은 할머니가 지나 가시 길래 평소랑 똑같이 인사를 했어요. 수레를 끌고 계셨거든요. 쓱 보시더니, 수레를 열어 떡을 주시는 거예요. ‘이게 무슨 떡이에요? 할머니 저 아세요?’ 물어봤어요. 절 안다고 하시더라고요. 저는 몰랐거든요. ‘그렇구나. 웬 떡이에요?’ 했더니, ‘우리 할아버지 생일 떡’ 이러는 거예요. 남편 생일 떡인 거예요. 저는 아이 백일 떡만 아는데. 떡을 받았는데 느낌이 너무 좋았어요. 인사였을 뿐인데 무언가 돌아오는 그런 느낌이었어요. 그러고 나서는 할머니를 다시 볼 수 없었어요. 가게 개점하고, 초반이었어요. 마치 ‘마을 홍보하지 않을래?’라고 말한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어요.
Q. 자주 지나다니던 할머니는 아니었던 거예요?
A. 일면식이 거의 없는 분이라고 봐야 해요. 지금은 수레밖에 생각이 안 나요. ‘젊은 사람이 여기 들어왔대’라는 소문을 들어서 절 안다고 하셨을 수도 있고 아니면 모르지만, 그냥 안다고 하셨을 수도 있어요.
Q. 왜 남편 생일 떡을 주신 걸까요?
A. 제가 인사를 하니까 하나 주신 거예요. 어렸을 때는 서울도 그런 게 있었거든요. 두 번째 살았던 집이 또래 아이들이 있는 가족들이 세를 들어 사는 주택이었어요. 단독주택인데, 2층에 3집을 세를 줘서 저희도 살고 있었고, 일단 뭘 하면 다 나눠 먹었거든요. 아파트로 이사 오고 난 다음에도 나눠 먹었어요. 고기를 조금 재워서 나누고 하는 것들이 많았어요. 어느 시점 이후에는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이 계속 바뀌니까 피로감을 느끼게 되었던 것 같아요. 이웃이 바뀔 때마다 피로감을 느끼면서 나눠 먹고 하는 행위가 없어지고 결국엔 옆집에 누가 있는지 전혀 모르고 옆집에 계신 분이 노래를 잘 부른다? 정도? 뮤지컬 지망생인가? 그 정도였던 것 같아요. 아파트에 살았어도 친구네 집 들락날락하면서 계속 놀았던 기억들은 있는데, 친구들이 떠나가니까 ‘집에 누가 있어?’ 했을 때 잘 몰라요. 그런 것들이 쌓여서 현재의 상태가 된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요.
Q. 그 부분이 말씀하신 ‘마을’ 키워드와 연결되는 것 같아요.
A. 지역에서 느꼈던 것 중 하나는 지역 사람들은 주변 사람들이 본인한테 관심 두는 걸 불편해해요. 너무 많은 관심을 받고 살아왔던 거예요. 관심 주지 않는 것이 편한 거죠. 적정선을 잘 지키고, 적당히 참견하고 모르는 척 눈감아 주는 것들도 있어야 하는데 변화가 없으니까요. 사소한 것조차 너무 이야깃거리가 되고 그런 것에 피로감을 느끼고 싫은 사람들은 아무 말 안 하고 살아요. 사람 대하는 마음의 태도도 좀 중요한 거 같아요. 성수동에 있을 때 엄마 친구들이 동네 사람들이니까 제 이성 관계에 대한 부분도 지켜보고 있다가 몇 마디 하시는데, 엄마는 가볍게 넘기듯이 대처를 잘해주셨어요. 그래서인지 거부감이 전혀 없었어요. 저도 의연하게 대처했었는데, 그런 마음이 잘 안 돼서 스트레스를 받으시는 분들이 있는 거고.
Q. 부모님도 평범하신 분들은 아니신 것 같아요.
A. 그런 것 같아요. 몰랐는데 보통은 아닌 것 같아요.
Q. 부모님도 손재주가 좋으시다고요.
A. 엄마가 손재주가 좋으시고. 아빠도 좋으신데, 엄마가 뜨개 제품 만드는 거 잘하셨고, 지점토로 만들어서 판매도 하고 그러셨어요.
Q. 그걸 물려받으신 것 같아요.
A. 약간 그런 거 같아요.
Q. 아버님은 동네에 관련된 일 활발히 하시고요.
A. 부모님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어요. 부모님을 안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나이 들면서 제가 행동하는 것들이 다 부모님 영향 아래 있더라고요. 말하는 것, 휘어잡고 몰아치고 밀어붙이는 건 엄마를 닮았고. 잘 참고 고집이 있는 것, 집에 잘 안 있는 것은 아빠를 닮았죠. 굉장히 개인주의적인 집이라서 가족들 생일 때도 모여서 밥 먹기 힘들어요. 다들 이중 약속을 잡아요. 생일 밥을 차려주고, 술 먹으러 간다든가 이런 식으로요. 진짜 생일인데 ‘응 밥 차려 줬잖아.’ 이런 식. 또, 뭔가 해야 할 말은 해야 하고. 이런 부분들이 많이 닮았더라고요. 어릴 때는 엄마가 ‘우리 집에는 예술하는 사람이 없는데 너는 예술한다고 어디서 이런 게 나왔냐?’ 이런 이야기를 하셨는데, 나중에 생각해 보니까 우리 엄마가 손재주가 좋았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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