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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경민 May 12. 2024

이들은 어떻게 부동산 가족이 되었을까?

1980년, 서울_① 부동산 가족을 쫓아서

* 해당글은 저널서울에 기고된 글입니다. 

 

1980년, 서울_①
부동산 가족을 쫓아서

이경민 / 서울수집 운영자(instagrm@seoul_soozip)1980년, 서울_①부동산 가족을 쫓아서

#아파트, 부동산, 버블

길을 걷다 보면 한 번쯤 아파트 공사 현장을 지나가게 된다. 쿵쾅거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어 건물을 올려다본다. 몇 층인지 세어보다 금세 포기하고야 만다. 어디선가 거센 바람이 몰아친다. 시선은 다시 공사장으로 향한다. 눈을 반쯤 치켜든 채 속으로 중얼거린다. ‘이곳에선 과연, 어떤 사람들이 살아갈까?’ 어린 시절 딱히 놀만한 곳이 마땅치 않았던 동네에 살았던 나는, 친구들 집에 자주 놀러 갔었다. 당시 아파트에 살던 친구들이 많았는데 대체로 부유했다. 집안에 놓여 있는 가구나 물건을 보면서 우리 집과는 다르다고 생각했다. 간식으로 쿠키와 오렌지주스를 먹었고, 넓은 평수에 살면서, 백화점에서 산 물건을 사용했다. 이런 부분들을 대부분 친구 집에서 경험했고, 어린 나이에 ‘중산층’이라는 개념을 정확하게는 몰랐어도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은 인지하고 있었다.

서울수집가가 살던 집 주변은 아파트로 둘러 싸였던 곳이었다. ©서울수집

동네엔 유독 아파트가 많았다. 오래된 저층 아파트부터, 지역을 대표하는 건설사가 지은 아파트, 유명한 건축가가 지은 주상복합아파트 등이 좁은 범위 안에 모여 있었다. 주택에 살고 있었지만 생활 반경 안에는 항상 아파트가 있었다. 학교 등·하굣길에는 아파트 모델하우스가 있었고, 자주 가는 김밥가게, 떡집, 치과도 아파트 상가에 위치했다. 모델하우스에는 실내 놀이터가 있었는데, 시간제한도 없고, 못 들어가게 막는 사람도 없어서 아무런 거리낌 없이 내 집 드나들 듯 놀다가 가곤 했다. 이런 이유로 아파트는 내게 굉장히 익숙한 공간이었고, ‘아파트에 산다.’는 것이 어떤 의미로 해석되는지 알고 있었다. 동시에 단독주택의 단점을 해결해 주는 주거 공간이기도 했다. 우리 가족이 살고 있던 단독주택은 추위에 굉장히 취약했다. 거실과 부엌에 난방시설이 설치되어 있지 않아 겨울만 되면 온 집안이 냉기로 가득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손님을 초대하기도 어려웠고, 어쩌다 사람이 모이게 되면 거실이 아닌 안방에 둘러앉아 시간을 보내곤 했다.


2017년 촬영한 어린시절 친구가 살았던 대구 삼익맨션. ©서울수집

참다못한 부모님은 부엌에 난방시설을 설치했지만, 거실은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들어 포기했다. 결국, 아파트로 이사할 때까지 견뎌보기로 했다. 매년 겨울이 다가올 때마다 ‘올해는 이사를 할 수 있을까?’라고 생각하면서 애써 추위를 견뎠다.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고 했던가. 그토록 바라던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그래서 내겐 아파트가 추위를 더 이상 견디지 않아도 되는 따뜻한 공간으로써의 의미를 가지기도 한다. 아파트와의 인연은 이후로도 계속되었다. 우연한 계기로 서울의 오래된 아파트를 보러 다니기 시작했다. 단지를 형성하며 대규모로 지어진 아파트라기보다는 소규모로 지어진 아파트가 대부분이었다. 1동짜리 나홀로 아파트도 생각 외로 많았다. 그동안 봐왔던 아파트와는 다른 형태와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문득, 왜 이런 차이가 발생한 것인지, 아파트가 생겨난 건 언제부터였을지, 어떠한 이유로 등장하게 된 것인지 궁금해졌다.

아파트 답사사진_서소문아파트(1972년) ©서울수집
아파트답사사진_종암아파트(1958년, 철거됨) ©서울수집
아파트 답사사진_등마루아파트(1971년 ,철거됨) ©서울수집

해방 이후 서울은 산업화·도시화로 인해 몰려든 인구에 비해 주택이 턱없이 부족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1960년대에 영세민과 서민을 대상으로 한 소규모의 아파트가 지어졌다. 이전까지만 해도 한옥이나 2층 주택처럼 단층 건물에서만 거주했었기 때문에 아파트를 바라보는 시선이 그리 곱지 않았다. 하지만, 1970년대 강남 개발 이후 부동산 투기 열풍으로 아파트 붐이 일기 시작한다. 1980년대에는 아파트 공급량에 비해 수요가 증가하면서 아파트 가격이 상승세를 탔고, 경제 호황으로 단기간에 부를 축적한 중산층이 등장한다. 연이어 1990년대에는 중대형 아파트 단지를 짓기 시작하면서 한국 도시의 보편적 주거 공간으로 자리 잡는다. 아파트가 ‘부’의 상징으로도 인식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아파트가 지어진 배경과 흐름을 이해하고 나니 집을 소유하거나 혹은 전세로 살아가려면 얼마가 있어야 하는지 의문이 들었다. 평소 눈여겨보던 한강 인근에 있는 오래된 아파트 전세 및 매매 가격을 알아보았다. 꽤 연식이 있는 아파트임에도 불구하고 ‘억’ 소리가 났다. 평생 만져 보지도 못할 금액이었다. 처음엔 가격이 잘못된 게 아닌가 싶어 다시 확인해 보았지만 맞았다.


부동산 거품 속 세상.

문득, 첫 자취방을 알아보던 때가 생각났다. 월세 시세를 모르는 상황에서 논현동으로 향했다. 가지고 있는 예산에서 맞출 수 있는 가격대는 보증금 500만 원에 월 50만 원이었고, 동생과 함께 거주할 수 있는 집을 찾게 되었다. 부동산 중개업자는 조건에 부합하는 매물을 꽤 열심히 보여 주었다. 하지만, 소개해 준 대부분의 집은 해가 들지 않는 어두컴컴한 곳이거나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일 만큼 보안이 취약한 곳이거나 짐도 제대로 놓지 못할 만큼 작은 곳이었다. 매물을 보면 볼수록 주거환경이나 집 상태에 비해 월세가 턱 없이 높게 책정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여 같은 조건으로 매물을 보게 되었는데, 놀랍게도 훨씬 더 좋은 집을 볼 수 있었다. 같은 조건인데 가격과 집 상태가 극명하게 차이가 났고, 동시에 ‘이게, 그 말로만 듣던 버블(거품)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 부동산 가족의 탄생과 흔적을 쫓다.

영화 버블패밀리 포스터(2017)

여기, 변화 물결에 부를 축적하고 시대의 영광을 누리며 승승장구하다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은 가족을 그린 영화 <버블패밀리>가 있다. <버블패밀리>는 감독의 자전적 가족사를 그린 영화다. 부동산으로 부를 축적하고 중산층으로 부족할 것 없이 살아가던 가족의 일상에 갑작스러운 변화가 찾아온다.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아가게 된 것을 궁금해하던 감독은 부모님에게 여러 차례 이유를 물었지만 설명해 주지 않았다. 답답한 마음을 안고 살아가다 점차 부모님과 사이가 멀어지게 된다. 그러던 중 우연히 길에서 아빠를 마주했고, 급하게 전화를 걸었으나 없는 전화번호였다. 그 순간 감독은 갑자기 아빠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궁금해졌다고 한다. 이후 부모님의 과거를 추적하다 한국의 시대적 상황과 가족이 맞이한 갑작스러운 변화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영화 제목인 ‘버블’은 흔히 알고 있는 것처럼 부동산 투기가 심해지면서 돈의 흐름이 활발해지는 1980년대 대한민국의 주택 공급 정책과 3저(저유가·저금리·저환율) 호황으로 이룬 고도의 경제성장과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올림픽 개최로 인한 도시개발과 맞물려 형성된 부동산 시장과 관련되어 있다.


영화 '버블패밀리'의 배경이 된 올림픽 선수·기자촌 전경. (1988년도 촬영) ©서울역사아카이브
“나는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살고 있다. 이곳은 오늘도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 이 도시의 변화는 우리 가족의 운명을 끊임없이 바꾸어 놓았다."

“강남은 더 이상 우리 가족이 속할 수 없는 곳이다. 하지만 부모님은 강남에 살기를 계속 고집하고 있다.”

“부모님은 모든 것을 잃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부동산에 대한 믿음만은 오래도록 버리지 않았다.”

“부동산에 집착하는 부모님을 이해할 수 없다. 이 모든 것이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부모님은 여전히 과거에 갇혀 있는 것만 같다.”

영화 <버블패밀리>, 자막 내용 중 일부  

낮고 덤덤한 목소리로 들려주는 이야기를 곱씹다 보니 감독의 가족사가 확장된 도시 서울의 공간적 범위를 인식하고 이해할 수 있는 단서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감독의 가족이 머물렀던 올림픽선수기자촌아파트와 올림픽공원은 지역의 성격을 바꿔놓았다. 국제이벤트로 변화된 도시공간을 살피고 새롭게 구축된 도시기반시설과 주거환경을 누린 사람들의 사고방식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살펴볼 수 있는 적절한 예시라고 생각했다.

또한, 부를 쌓았던 경험이 과거로써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연속선상에 존재함으로써 시대가 변해도 바뀌지 않는 부동산에 대한 감각은 무엇으로 설명될 수 있을지도 궁금했다. 이들이 부동산 가족이 되어 경험한 ‘부’는 어느 정도였을까? 현재는 상황이 변했지만, 중산층이 되기를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정보를 따라 움직이는 부모님의 삶을 무엇이라 설명할 수 있을까? 건설업계의 불황 소식이 들려오는 요즘, 부동산이 우리 삶에서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지, 어떠한 기대감을 안겨주고 있기에 ‘영끌’을 하면서도 포기하지 않는 것인가? 과연, 그 안에 내재된 욕망은 무엇인가? 그 기대에 부응하는 결과를 얻게 되는 과정과 시스템은 어떻게 작동하는 것인가? 그 어느 때보다 ‘부동산’을 향한 욕망과 기대감이 강하게 현실을 사로잡고 있는 요즘이다. 이 모든 것들을 한마디로 표현할 수 없기에 복잡하고 심란한 마음이 드는 와중에 만난 부동산 가족. 이들의 흔적을 쫓아본다.

영화 '버블패밀리' 스틸컷.

➊ 올림픽 선수기자촌 아파트

영화 '버블패밀리'의 배경이 된 올림픽 선수·기자촌 조감도 ©서울역사아카이브

부동산 가족이 중산층으로서의 삶을 시작한 올림픽선수기자촌아파트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올림픽에 참가하는 선수·기자들의 숙박시설로 마련된 아파트였다. 하지만 올림픽이 끝난 뒤 일반분양이 진행되어 1989년 1월에 입주가 시작되었다. 참고로 당시 일반분양은 기부금을 많이 낸 순으로 진행했고, 그 결과 중상류 계층이 많이 거주하는 비교적 고가의 아파트단지가 되었다. 부동산 가족이 이러한 절차를 밟고 입주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30평대에서 46평대로, 중산층에서 상류층으로, 감독은 남부러운 것 없는 어린 시절을, 부모님은 성공 가도를 달리는 사업가로서, 육아에만 전념하며 전업주부로써 부유한 삶을 누렸다. 이후 3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고, 부동산 가족의 삶은 완전히 달라졌다. 하지만 여전히 이때를 잊지 못하고 현재를 살아간다. 무엇이 이토록 그들 곁에서 맴도는 것일까?

❶1층 주차장 계단, ❷1층 테라스 개인 정원 ❸개인정원에 있던 장독대 ❹115동 아파트 입구에 깔린 카펫. ©서울수집

부동산 가족의 삶을 상상하며 아파트 단지를 걸었다. 밖에서 건물만 봐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부’의 실체를 전혀 알 수 없기 때문에 구체적인 흔적을 찾을 순 없었다. 다만, 아파트 단지를 관통하며 흐르는 성내천과 의자에 앉아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 자체가 여유로움으로 다가왔다. 아파트 동별 간격이 넓었고, 넓은 만큼 도보 가능한 범위와 여유 공간들이 보였다. 아파트 입구 계단마다 카페트가 깔려 있다는 점과 1층에 구분된 개인 정원이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빈틈으로 정원의 풍경이 보이곤 했는데 장독대가 마구 쌓여 있는 것이 보였다. 어디에서 살든 장독대는 늘 옳다.

제24회 서울올림픽대회 선수∙기자촌 ©서울수집

요즘은 아파트 관리인을 동별로 두지 않고, 비밀번호 장치와 CCTV로 관리하는 아파트가 많은데, 동마다 아파트 관리인이 있다는 것도 눈여겨 볼 부분이었다. 지어진 지 30년이 지난 아파트에선 으레 재건축 이슈가 등장하기 마련인데 올림픽선수기자촌아파트도 공공연히 재건축 이야기가 나온다. 그럼에도 리모델링 공사를 하는지 여기저기서 쿵쾅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➋ 마천동 쌍마빌딩

가족의 흔적을 쫓다_쌍마빌딩. ©서울수집

이름이 특이해서 당연히 1곳 밖에 없을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주소창에 검색해 보니 4곳이나 나왔다. 다행히 책에 설명되어 있는 위치와 가장 유사한, 송파구 건물은 1곳 밖에 없어서 그곳으로 향했다. 송파구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으니 그야말로 머릿속은 백지상태였고, ‘쌍마빌딩’이라는 이름과 주소 하나만으로 찾을 수밖에 없었지만, 큰 도로변에 위치하여 찾기가 쉬웠다. 딱히 특별하거나 특이한 외관을 가진 건물은 아니었지만, 감독의 아버지가 지은 건물 흔적이자 송파구 마천동의 도시개발사를 기억할 수 있는 단서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감독의 회사 이름인 ‘쌍마 픽처스’의 탄생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특별할 것 없이 연식이 오래된 낡은 4층짜리 빌딩이었다. 아빠는 90년대에 이 건물을 지었다고 했다. 빌딩 입구에 붙어 있는 건물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쌍마빌딩’이었다. 나는 아빠에게 왜 건물 이름을 ‘쌍마 빌딩’으로 지었는지 물었다. 아빠는 자신과 내가 마씨니 마씨가 두 명이라 ‘쌍마’라는 뜻으로 이름을 지었다며 멋쩍게 웃었다…….(중략) 그 무렵 나는 영화업으로 개인사업자 등록할 것을 계획하고 있었기에, 집에 오는 길 아빠에게 회사 이름을 ‘쌍마픽처스’로 짓겠다고 선언했다.” p225 <나의 이상하고 평범한 부동산 가족>

➌ 성내동 빌딩

1980년 5월 10일자 경향신문_성내동 일대 11만평 구획정리지구지정.


성내동을 포함한 강동구 일부는 1980년대에 토지구획으로 인해 개발이 진행된 지역이다. 비교적 늦은 시기에 개발이 진행된 것에 비해 변화를 받아들이는 속도는 매우 빠른 것 같다. 성내동은 당시 집장사로 불렀던 건축업자들이 지은 붉은 벽돌 주택이 거의 남아 있지 않고, 대부분 신축되었다. 타일로 지어진 상가주택 또한 구조변경, 신축, 재개발 사업으로 일부만 남아 있다. 부동산 가족이 지은 건물 중 성내동 빌딩은 책에 사진도 실려 있고, 현재 남아 있다고 적혀 있어 직접 확인해 보고 싶었다. 감독과 연락이 닿아 찾아가 보려 했지만, 정확한 주소를 알 수 없어 해당 건물로 추정되는 몇 군데를 추려 다녀왔다.


성내동 빌딩 옛모습. ©마민지 감독

대부분 건물이 신축되어 사진 속 빌딩과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과거 이 일대의 풍경을 상상하며 천천히 걸어보았다. 사진 속 풍경은 막 도로가 정비되고, 건물이 들어서는, 빈 땅에 건물을 짓고 있는 상황이었다. 현재 도로는 말끔히 정리되었고, 도로를 따라 들어선 건물들도 나름 질서 정연하게 채워져 있어 같은 장소가 맞는지 헷갈릴 정도였다.

부동산 가족이 지은 건물로 추정되는 건물. ©서울수집
“지하철5호선 둔촌역에서 내려 성내시장을 지나 성내동 방향으로 10분가량 내려가다 보면 황토색 벽돌의 5층짜리 빌딩이 하나 나왔다. 바로 두 사람이 지은 건물이었다. 엄마는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종종 이야기하곤 했다. 엄마가 혼자 벽돌을 옮기다가 허리를 다쳐 그 뒤로 허리디스크에 평생 시달리게 되었다는 거다.” p227

“도시개발 정책에 따라 건축사업 흐름에도 부침이 있었지만 마침 처음 자리 잡은 동네가 강동구였고, 또 운 좋게 올림픽특수를 맞이하여 부모님의 사업은 상승 가도를 달렸다. 가락지구 일대의 구획정리사업이 대표적인 개발사업이었다. 1980년대 초부터 후반까지 집을 지을 땅은 차고 넘쳤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기점으로 강동구와 송파구가 분리되기 전 이 일대는 신도시 강동구로써 단기간에 성장했다. 1980년 50만 명대이던 강동구의 인구는 1985년에 이르자 88만 명에 다르게 된다.”p128

1988년 올림픽을 계기로 집중적으로 개발된 송파구와 강동구 일대의 천지개벽할 변화를 오롯이 다 지켜보고 그 과정에 놓여 있었던 부동산 가족. 부동산 가족이 거쳐 간 흔적을 쫓으면서 도시변화에 직접적으로 개입하면서 경험한 것들이 현재의 삶에 영향을 받고 있음을 알게 했다. 동네의 풍경이 바뀌는 모습을 직접적으로 목격하고, 그 변화에 기여함을 스스로 발견하고 깨닫는 순간의 희열은 스치듯 지나가는 감정이 아니었을 것이다. 더 나아가 부모의 경험이 자녀에게도 전달되면서 시대가 변해도 비슷한 경험을 하게 되는 전이 경험으로도 이어진다. 특히 감독의 부모님은 다른 지역에서 살다가 서울로 상경했고, 상경한 도시에서 새로운 터전을 만들고, 그 터전에서 자신들이 일궈낸 업적을 경험했다.


올림픽아파트 부채꼴 배치 풍경. ©서울수집


우리 딸 고향. 고향 같다. 여기 오니까. 엄마한테도 제2의 고향이잖아.

제2의 고향이라는 생각이 들 만큼 애정을 가지고 있으며, 그만큼 누린 삶이 있었다. 과거를 쉽게 놓지 못하고, 현재를 살아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지점은 도시가 변화하는 과정에서 영향을 받고 살아가는 개인의 삶에 대해서 결코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국가적인 차원에서 진행한 개발과 계획으로 변화된 도시에서 살아가는 것은 결국, 개별 단위의 개인이기 때문이다. 부동산 가족은 그렇게 탄생했다. 과거 시대 흐름에 영향을 받았고, 현재도 여전히 그 시대의 표상과 생각으로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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