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민 / 서울수집 운영자(instagrm@seoul_soozip)
“서울올림픽의 주 무대는 서울 외곽의 신개발지 잠실지역이다. 여기에 잠실종합운동장과 올림픽 공원, 그리고 올림픽 선수촌과 아시아 선수촌이 자리 잡고 있다. 원래 잠실지역은 한강하류의 상습침수지였다. 여기에 1960년 이후 급증하는 주택수요에 맞추어 공유수면 매립이 이루어졌고, 여기에 대단위 토지구획 정리 사업과 아파트 건설로 이룩된 것이 현재의 잠실이다. 이곳에는 올림픽의 서울 유치가 결정되기 이전에 이미 잠실 운동장이 시립운동장으로 자리 잡고 있었고, 또한 현재 올림픽 공원과 선수촌이 들어서는 100만평의 부지가 ‘국립경기장’ 부지로서 도시계획으로 지정되어 있었다. 따라서 이곳이 올림픽 행사의 주무대로 등장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중략).이상 네 가지 사업 이외에도 잠실지역에서는 올림픽과 관련된 여러 일들이 진행 중이다. 송파로 가락농산물 유통센터 남쪽에 올림픽 조직위원회가 행사시 방문객의 숙소로 쓰다 행사 후 주택단지로 전용할 ‘훼밀리타운’을 계획하고 있으며, 또한 서울시에서는 풍납토성과 백제고분군등이 지역 내의 역사유적의 정비 사업을 펴고 있다.” <88올림픽 타운: 잠실지역 올림픽 시설계획의 개관, 강홍빈>
이 글에 의하면 당시 올림픽 개최를 위해 잠실지구가 개발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올림픽이 개최된 1988년, 송파구가 신설되었고, 1년 뒤 1989년에는 행정동인 오륜동이 신설되었다. 오륜동의 오륜은 올림픽 마크 오륜을 의미한다. 행정동뿐만 아니라 학교, 지하철역에도 올림픽과 관련된 명칭이 붙었다. 올림픽이 개최된 지 36년이 지났는데도 곳곳에 흔적이 남아 있어 당시의 영광과 에너지가 전해 오는 것만 같다. 올림픽 개최를 위해 수많은 사람의 시도와 노력이 있었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깊이 알지 못하는 이면도 존재한다. 올림픽 성화 봉송을 위해, 외국인들이 탄 비행기가 지나가는 길목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상계동과 목동에 살던 사람들은 자신들의 의지와 무관하게 강제로 쫓겨났다. 그렇다면, 올림픽과 직접적인 연관성이 있는 올림픽 공원 부지에서는 이런 일이 없었을까? 원래 빈 땅이었는지, 아니면 사람들이 살던 곳이었는지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궁금해졌다. 서울시 송파구 방이동, 오륜동, 문정동은 1963년 서울로 편입되기 이전에는 경기도 광주군 중대면 이었다. 서울만큼 인구밀도가 높진 않았겠지만, 사람이 살고 있지 않았을까? 이 부분은 서울시 송파구 홈페이지에 기재된 설명을 통해 알 수 있었다.
“문정동은 조선시대에는 문 씨들이 문중을 형성하고 거주한 곳으로 주로 문 씨가 많이 살던 제집마을(기와집 마을)과 김씨, 이씨가 많이 살던 큰 마을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동은 1985년 9월 1일자로 방이동에 통합되어 동 명칭은 사라졌으나, 송파구의 옛 지명으로 살펴보면, 이동이란 동명은 두개 마을을 병합하였으므로 이리(二里)라고 칭하던 것이 이동이 된 것이다. 즉, 이곳에는 몽촌, 일동네, 잦나무골, 큰말 외에 신촌, 웃말, 가운데말, 아랫말 등의 자연부락이 있어 한때 1리, 2리로 나누었다가 다시 병합하여 이동이라고 부른 것이다.”
“오륜동은 방이동과 함께 그 역사를 같이 한다. 1985년 9월 1일 강동구 방이동에서 오금동이 분리될 당시 방이동지역과 이동지역에는 올림픽공원과 올림픽선수촌아파트가 건설 중에 있었다. 88서울올림픽을 앞두고 1988년 1월 1일 강동구에서 송파구가 분구되면서 1989년 6월 1일 송파구 방이동에서 오륜동이 분리되었다. 동 명칭은 88서울올림픽을 훌륭히 치뤄낸 올림픽공원과 올림픽선수기자촌아파트가 있는 점에 착안하여 오륜동이라는 이름이 명명되었다.”
<내용출처: 송파구청 홈페이지>
올림픽 영광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곳에서, 정작 이 땅에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었는지, 그들은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묻지 않는다. 시대가 흐르면서 땅의 성격과 형태·경관이 변화하는 과정은 시각적으로 즉각 확인할 수 있지만, 이전에 있던 사람들의 존재와 이야기는 쉽게 알 수 없다. 이미 떠나간 사람들에 관해 물어서 무슨 소용인가 싶겠지만, 떠나지 않았더라면 현재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서로의 시공간이 교차하면서 완성된 결과다. 그들은 모두 어디로 간 것일까? 우연히 누군가 사라진 마을과 사람들에 대해 써 놓은 글을 발견했다. 올림픽 공원 내에 마을과 관련된 비석이 세워져 있다고 했고, 강덕기 전 서울시장 직무대행이 <서울 문학의 집>에서 발간한 책자에 올림픽공원 부지(옛 몽촌마을)에 대해 기고한 글을 발견하여 내용을 그대로 옮겨 둔 것이다. 누군가 옮겨둔 글이지만 사라질 수 밖에 없었던 마을에 대한 내용이 기술되어 있어 긴 글이지만, 출처를 밝히고 공유하고자 한다.
“몽촌토성은 풍납토성과 같이 백제 초기에 궁궐을 지키던 외성이다. 여기저기의 굽이를 돌아 몽촌 마을이 본래 있었던 터전으로 갔다. 200여 가구의 집들은 추억 속으로 사라져갔고, 여기 살고 계시던 인정 넘치고 때 묻지 아니한 순박한 인걸은 간 곳이 없다. 한참을 서서 마을의 생성과 사라진 과거를 되새겨 본다. 마을은 이름과 같이, 청풍김씨의 중시조 되시는 몽촌 김종수(1728-1799)대감이 자리를 잡은 이래 그 후손들이 평온하게 300여 년을 살아오던 유서 깊은 보금자리였다. 그런데 여기에 개발의 물결이 밀어닥치고 또한 우리나라가 국운 상승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해 올림픽을 유치하게 되면서 마을전체가 올림픽경기장으로 탈바꿈되어야 했다. 몽촌 대감이 살고 계시던 집을 비롯한 마을이 송두리째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간 것이다.
몽촌 마을 자리에는 경기장 시설물들이 들어서야 했다. 이 마을을 철거해야만 경기장이 건설될 수가 있었다. 몽촌 대감이 사시던 고택은 13대 후손 되시는 분이 잘 보존하며 살고 있었다. 그러나 이 고택을 헐지 아니하면 마을의 어느 한 집도 철거할 수가 없었다. 심각하게 상의도 하고 고민도 했으나 뾰족한 대책이 없었다. 살고 계시던 분과 전화를 하면, ‘선조님이 주신 집을 내 代에서 헐어야 하는가. 하면서 전화기를 잡고 통곡을 했다. 마음의 안정을 다소 회복하셨는지 그분이 전화 연락을 해왔다. 제가 마을의 젊은 분들과 같이 가겠습니다.” 만나서 상의를 했다.
“우리 마을이 헐리면 마을 주민들을 위하여 해줄 수 있는 일들이 어떤 것인지를 말하여 주십시오.” “우선 몽촌 대감의 산소는 어느 누가 보더라도 정성껏 가꾸었다고 할 수 있도록 보존할 것입니다. 그리고 몽촌 마을의 주민들이 1년에 몇 번을 만나든지 간에 여기서 짓는 회관을 언제라도 제공할 것입니다. 또한 마을 앞에 있던 공지에 큼지막한 자연석의 유허비를 세워서 현재의 주민의 수와 가옥의 동수를 새기는 것은 물론 마을 주민 전체가 국가 발전의 큰 획이 되는 올림픽에 즐거운 마음으로 참여하기 위해 자진해서 살고 계시던 집도 철거하였다는 기록을 반드시 남기도록 하겠습니다.” 이렇게 의견이 서로 통하게 되었다. 그 결과, 올림픽을 치를 수 있는 각종 시설들이 기간 안에 순조롭게 건설될 수가 있었다.
세상만사가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날 유허비를 둘러보는데 조금은 서운한 생각이 들었다. 몽촌마을과 다소 거리가 먼 길가에 그것도 화강석으로 된, 문자 그대로의 비석 모습으로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구청에서 만들어 세웠으나 몽촌 마을 주민들을 설득하고 건립예산배정에 직접 관여했던 내 입장에서는 그 모습이 못내 아쉽기만 하였다. 그나마 몽촌 대감의 산소에서 보이는 곳이기에 적으나마 위안을 삼고 마음을 달래었다. 어떤 연유에서든 300년이 넘은 마을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는 것은 예삿일이 아니다. 문화와 전통이 바로 그 국가나 지역의 생명이며 정신이라고 일컫지 않던가. 선인들의 자취가 남아 있는 곳에 그들을 기리기 위하여 세우는 빗돌인 유허비라도 좀 더 정성을 들여서 세웠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몽촌 마을 주민들의 그 높고 깊은 뜻을 잊지 말자는 다짐과 함꼐 쓸쓸한 심정으로 무거운 발길을 돌렸다.
<몽촌유헌비 유감, 강덕기 <문학의 집, 서울> 2022년 7월호(통권 제249호) 17쪽>
이 내용을 옮겨놓은 블로그,
https://blog.naver.com/jsangbong1/22283827054
이 글을 읽고 나니 직접 확인해 보고 싶은 마음이 들어 올림픽 공원을 찾았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몽촌유허비 위치를 알리는 표지판이 보이지 않았다. 올림픽 공원에 있는 건 분명한데,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었다. 안내소 옆에는 지도가 부착되어 있었는데 경기장, 박물관, 미술관, 미술작품, 몽촌토성과 산책로, 나홀로 나무 등의 위치는 표기되어 있었지만, 몽촌유허비의 위치는 물론이고, 언급조차 되어 있지 않았다.
이곳에 터를 잡고 살아가던 사람들이 고심 끝에 떠나길 결정했는데, 그 시간이 허무하게도 공중으로 흩어져 버린 것 같아 안타까웠다. 이렇게나 넓은 공원에서 몽촌유허비를 찾아 헤맬 생각을 하니 순간적으로 아찔해졌다. 어쩔 수 없이 무작정 걸었는데, 걱정과 달리 운이 좋게도 단번에 몽촌유허비를 찾을 수 있었다. 몽촌유허비 옆에는 몽촌헌성비도 세워져 있었다. 몽촌마을과 올림픽공원과의 관계성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인데 안내 하나 없다는 것에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이들이 만약 터를 내주지 않았더라면 과연, 올림픽 공원이 여기에 생겨날 수 있었을까? 생각에 잠겨 한참을 비석 앞에 서 있었다.
이처럼 사라진 마을과 새로 형성된 마을을 바라볼 때마다 그 어느 것도 중하지 않다고 말할 수 없음에 혼란스러움을 느낀다. 시공간이 다를 뿐 각각의 삶과 터전이 존재했고, 존재한다. 시간이 교차하면서 달라지는 삶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것일까? 교차하는 시간 속 다층의 역사와 시간성을 배제하면 도시의 변화를 이해할 수 없다. 변화 과정에서 발생한 균열이나 드러나지 않은 이면에 관해 관심 가지지 않으면 쉽게 잊힌다. 그냥 지나쳐버리기엔 가볍지 않은 삶과 이야기와 관련된 장소를 오랫동안 기억할 방법은 없을까? 과거로만 머물러 있지 않고 현재에 전달될 순 없을까? 이것은 비단 몽촌 마을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며, 동시대를 살아가는 모두에게 해당한다.
누군가의 시간이 아니라 나의 시간이 될 수도 있다. 물론, 수억만 인구에 해당하는 사람들의 삶을 일일이 살핀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교차하는 시공간은 지속해서 존재한다. 이러한 지점을 예민하게 감각하고, 포착하며 어떠한 방식으로든 담아내, 인지하는 것으로써 도시에서 살아가는 각기 다른 개인의 교차하는 시간과 관계의 흐름을 조금씩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시공간이 교차하는 과정이 어떻게 형성되고, 서로 다른 삶을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일지, 그 요인은 무엇이었을지 끊임없이 묻고 탐구하는 시간은 현재 자신이 발 딛고 살아가는 도시를 재발견하도록 만들어준다. 동시대를 살았지만 각기 다른 삶과 이야기를 쌓아나간 사람들은 현재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그들의 경로를 쫓아 또 다른 삶의 이야기를 마주해 보려 한다.
다양한 사람들의 일상을 하나로 이야기할 수 없듯이 복잡한 사고 과정을
오가는 설계 과정에서도 일상을 하나의 균질한 것으로 압축시키기는 어려울
것 같다. 일상은 현재를 어떻게 인식하느냐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시간에
대한 태도로 봐야한다. 도시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시간성을 배제해서는
안 되며, 개인사와 장소성이 누적된 발자취와 단편들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
도시는 동시대 사람들의 분신이다.
내용출처, <일상의 건축> 정림문화재단 건축신문